정관누리교회

질투가 부른 참극(창세기4:1-15)/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3. 7. 03:16

 

질투가 부른 참극 (창세기4:1-15)

 

오늘 우리는 가인과 아벨에 관한 고사를 되돌아 보려고 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비극은 질투가 낳은 참사임과 동시에 인류 최초의 살인입니다. 이때부터 인류는 살인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도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바로 아담과 하와의 자식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류를 만드시고 그 다음대에 벌써 살인이 벌어진 것입니다. 물론 이 당시 사람들의 수명은 거의 천년에 육박하기 때문에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코 창조이후 오랜 세월이 흐른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살인의 원인은 질투입니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질투해서 그를 죽인 것입니다. 질투는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 바탕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잘되면 질투하기 보다는 축하하고 같이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미운 사람이 잘되면 시기하고 분노하고 그리고는 상대를 질투해서 넘어뜨리려고 꾀하게 됩니다.

 

그리고 질투는 경쟁으로부터 나옵니다. 나는 가지지 못한 것을 저 사람이 가지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게 희소해서 그런 겁니다. 사람들이 가질 수 있고 그리고 남아서 처치 곤란일 만큼 된다면 아무도 그 물건을 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질투하지 않을 겁니다. 가령 지금은 희소가치 때문에 난리인 다이아몬드가 길가의 돌멩이처럼 많다면 아무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

 

가령 이런걸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은 감투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 감투 때문에 동호회로 모인 곳에서도 은근히 알력이 있습니다. 동호회에 무슨 권력이니 세도가 있습니까? 그냥 취미가 같은 사람들이 짬나는 대로 모여서 즐기는 사설 임의단체입니다. 그럼에도 여기의 회장같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평소에 밥도 사고 찬조금도 내고 궂은일도 도맡아 하고 그래서 회장이 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행정단위의 가장 최소단위인 ‘반’을 한번 봅시다. 보통은 ‘통’이 있고 그 밑에 ‘반’이 있습니다. 통장은 뭐라도 좀 주고 또 권한도 어느 정도 있기에 곳에 따라서는 통장을 하려고 경쟁하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반장은 아무것도 주지도 않고 권한도 없고 일만 많기에 하려고 하는 이가 없습니다.

 

뭐 어떤 반에서는 한달에 오만원을 준다고 하는데 글쎄요 하는 일은 오십만원 어치로 귀찮습니다. 그래서 서로 안하려고 하고 어쩔 수 없이 순전히 봉사하는 마음으로 희생정신으로 반장을 맡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장이 안 되었다고 해서 질투하고 분노하는 경우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자리를 한번 봅시다. 이거 하려고 수십년 친구들 사이에서도 외면하고 경쟁하고 비난하고 짓밟으려고 합니다. 왜냐면 이게 워낙 좋은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사이에서 질투로 참극이 벌어 졌는데 이걸 가만 보면 좀 이해가 어렵기도 합니다. 그렇게 질투할거리가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왜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 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이면에 좀 더 복합적인 원인이 있지 않을까요?
여하튼 살인은 인류역사와 거의 같이 시작되었고 아마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지 않을까하는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에덴에서 추방당하고 난 다음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다음에 또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번에는 이름을 아벨이라고 지었습니다. 여기 본문에는 이 두 사람의 이름만 나오지만 나중이지만 셋도 있고 아마 그 밖에도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많이 낳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이들도 서로 짝을 지어서 또 자녀들을 많이 출산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손자손녀들도 역시 서로 짝을 지어서 자녀들을 만들었겠지요. 가인이라는 이름은 ‘얻은 자’, 또는 ‘후사’라는 말입니다. 아벨은 ‘허무’ ‘증발’이란 뜻입니다. 해가 뜨면 증발해 버리는 이슬같은 존재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문자 그래도 아벨은 허무하게 목숨을 잃습니다. 그래서 이름은 잘 지어야 하겠습니다.

 

여하튼 아담과 하와의 자식은 가인과 아벨과 셋만 있는게 아닙니다. 여기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이들이 있고 가인과 아벨과 셋의 자식들 그리고 그 후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이 이야기할 때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 할 수 있다’고 걱정하는 것이 결코 모순이 아닙니다.

 

또 여기에 여자들의 이름은 아예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자들이 있어야 자녀가 나온다는 것이고 이들의 후손들의 이름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보통 족장이나 씨족장 가장들의 이름으로 보면 됩니다. 여하튼 중요인물이거나 한집단의 우두머리들이 나온 겁니다. 나머지는 ‘기타등등’이지요.

 

이런 식으로 해서 인류가 제법 많아 진 겁니다. 이때의 사람들은 수명이 거의 천년에 육박했고 생식능력이 있는 기간은 수백년이 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청나게 많은 후손들이 생산되는 겁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여건상 근친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에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고 한 구절은 전혀 모순이 아닙니다. 사람이 천년동안 자녀를 낳고 그 후손들도 낳고 그 후손들도 낳고 그 후손들도 낳고 하면 어느 정도로 많아 질까요?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아 집니다.


천년이면 간단하게 말해서 고려가 서고 망하고 다시 조선이 서고 망하고 까지의 기간입니다. 그러니 엄청난 기간인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한오백년 살고 싶다고 했지만 여긴 천년입니다. 하나님이 애초에 이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기에 그리고 당시에 피임이나 이런 도구도 없었기에 자녀들이 막 생겨나는 그런 시절입니다. 더구나 선악과를 따먹고 제일먼저 생긴 변화가 벌거벗은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보면 아마 성적으로 각성한 상태였을 겁니다.

 

생육과 번성의 뜻은 물고기가 알을 낳아서 이게 새끼로 부화되어서 바글바글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아이들 중에서 이 두사람 가인과 아벨의 이름만 나온 이유는 이 두 사람이 아마 서로 경쟁하는 씨족 또는 부족의 족장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먼저 가인은 형인데 농사하는 자이고 동생 아벨은 양치는 자입니다. 농사하는 자라는 말은 원어적으로는 ‘땅을 다스리는 자’라는 말이 됩니다. 한쪽은 정착해서 농사를 짓고 한쪽은 떠돌면서 가축을 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선입견은 아벨이 선인이고 가인이 악인입니다. 성경의 문구로 보면 가인이 악인인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하나님의 ‘땅을 경작하고 땅에서 난 것을 먹게 하신’ 그 명령에 가장 부합되는 직업을 가졌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요, 적어도 가인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농사를 짓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출을 먹도록 하셨습니다. 오히려 아벨이 하나님의 뜻과는 조금 어긋나는 직업을 가진 것입니다. 당시에는 아직 육축의 고기를 식용으로 사용할 수 없던 시절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야 비로소 육식이 허용됩니다.

 

그러니 아마 아벨은 짐승의 털이나 젖을 이용하는 정도의 목적으로 유목을 했을 겁니다. 당연히 가인보다는 훨씬 살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물물교환을 해야만 생필품을 구하는 의존적인 관계였습니다. 사람이 짐승의 털로된 옷만 가지고 살 수도 없고 우유만 마실 수도 없고 곡식이 필요합니다. 반면 농부들은 양털이나 짐승의 가죽 그리고 젖이 필요하겠지요. 서로의 산물을 물물교환으로 바꾸어서 살아 나가는 그런 관계입니다.

 

농민과 유목민.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직업이 나뉩니다. 아무래도 정착민들이 문명을 건설할 확률이 유목민들보다 높습니다. 또 땅의 소유와 집단적인 농수로건설이나 이런 일들 때문에 조직화가 잘되어있고 지배와 다스림을 받는 그런 관계에 대해서도 익숙합니다.

 

반면에 유목민들은 땅을 소유한다는 개념이 없고 한곳에 몰려 살지 않기에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한곳에 몰려 살면 풀이 부족해서 가축들을 배불리 먹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적은 가족단위로 흩어져서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당연하게 누가 간섭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래서 조직을 만들고 문명을 만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가인이 자기를 위해 성을 건설하게 되는 모양입니다. ‘성’이란 말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 이미 상당한 문명이 건설되었고 또 계급사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그들 사이에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인간 지배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후에는 계속해서 하나님과 동거하는 형태가 아니라 시일을 정해놓고 특정한 날에 하나님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때만 하나님을 만나는 구조로 바뀐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 날은 농민부족들과 유목 부족들 간에 누가 누가 잘했나를 판단하는 아주 중요한 날이었고 그 심판관이 하나님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얼굴을 든다’는 표현이 ‘하나님 앞에서 용납됨으로 존귀해 진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들과 속성상 거룩한 하나님과는 함께 거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마 하나님을 만나는 제사가 더 중요시 된 모양입니다. 항상 함께 할 때에야 하나님에게 이것저것을 이야기할 기회가 많지만 이제는 그런 기회가 아주 희귀해 졌기에 하나님을 만나는 제사가 아주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3,4,5 절에 보면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여기 본문에는 왜 하나님이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농사 짓는 농부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벨은 양을 드렸지만 그건 그가 양치는 이였기 때문이지 아벨이 만일 농부였다면 그도 역시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제사를 지냈겠지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제사는 소나 양이나 비둘기 같은 것을 불에 태워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법은 후세에 생긴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그런 법은 있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지요?

 

더구나 하나님은 3:18절에 보면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양을 치는 것이 아니라 양을 먹는 것이 아니라 땅을 갈아서 밭의 채소를 먹도록 한 겁니다. 그러니 가인은 그 명령에 완벽하게 맞는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곡식으로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다고 해서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일까요?

 

사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짐작할 수는 있는데 여기 보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았다는 말 앞에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인 자체가 하나님께 뭔가 좋지 못하게 비춰진 것입니다. 게다가 제물을 받지 않은 사건 이후에 보면 7절에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있느니라 ”고 말씀하셨지요.

 

이 사람의 평소 성품과 행실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입니다. 평소에 선을 행하지 않고 죄를 많이 저질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죄인도 회개하면 당연히 받으시겠지만 죄인이 회개하지 않고 드리는 죄의 결과물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 받지 아나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제물이 가납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눈먼자로 여기고 무능한 이로 여긴다는 말과 같습니다.

 

제물은 원래 정성입니다. 액수의 다소가 아니라 그가 그 제물에 얼마나 정성을 쏟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고 그것이 의로운 재물인지 아니면 죄악의 재물인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아벨은 양의 첫새끼들 여러 마리를 드렸습니다. 그 중에서도 기름진 가장 좋은 부분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것은 아벨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정성스럽고 경외함으로 드렸다는 것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도둑질하고 사기치고 강도질한 것으로 하나님에게 드리면 결코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정당하게 벌어들인 재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우리 하나님이 좋아하신다는 겁니다. 남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남의 것을 빼앗아서 건축헌금을 하면 우리 하나님이 좋아하실까요? 그걸 자랑스러워하실까요?

 

아니요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다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탄식하실 것입니다. 그럴바에는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지 말고 헌금을 하지 마세요. 그게 더 낫습니다. 당연히 그 제물은 드려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걸로 드렸다고 화를 당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자기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받자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란 말은 언제고 기회만 되면 죽여 버리고 싶다는 표시입니다. 성경에 보면 주로 이런 표현이 나오고 뒤에 행동으로 옮겨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러한 표정을 지은 가인은 하나님에게 책망을 받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질투는 변하지 않았고 결국 기회를 노리다가 아벨을 죽이게 됩니다.

 

8절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 가인은 그럴듯한 말로 아벨을 꾀어내어서 단 두사람만 있는 상황을 만들었고 그는 ‘기회는 이때다’라는 심정으로 아벨을 때려 죽였습니다. 아마 쳐 죽였다고 한 것을 보면 돌로 찍어서 죽이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둔기를 가지고 쳤던지.

 

어떤 말로 가인이 아벨을 꾀었을까요? 본문에는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원문의 쓰임새로 봐 ‘말하고’는 가인이 자기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에게 이렇게 하게 하라고 나에게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너에게 전해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가인은 자기의 목적인 아벨 살해를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슬픈 본성은 욱하는 심정으로 그냥 머리가 어떻게 되어서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꽃같은 눈으로 인생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잊어 버린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을 받고 자기의 제물을 받지 않았다는데서 시작된 질투와 시기는 마침내 거짓말로 아벨을 꾀어내어 들판에서 아벨을 쳐죽이는 걸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이게 시일을 두고 일어난 게 아닙니다. 쉼없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마 시일이 좀 있고 가인도 화가 가라앉았다면 그 정도로 막나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질투에 눈이 먼 가인은 순간적인 충동으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겁니다.

 

8절에 가인이 쳐죽였다고 하지요? 이 말은 원래 ‘그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를 죽였다’란 말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벨을 들판으로 나오라고 꾀어내고는 혼자 있을 때 몰래 주위에서 매복해 있다가 불시에 쳐죽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벨은 제대로 반항해 보지도 못하고 맞아 죽은 겁니다.

 

여기서 성경이 계속해서 아벨이 ‘그의 동생’이란 점을 병기한 것은 이 살인이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음을 보여 줄려고 한 것입니다. 남도 아니고 동생을 기껏 제사의 제물을 가납 받지 못한 문제로 질투 때문에 죽이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잘 보십시다. 아담도 그렇고 가인도 그렇고 죄성이 몸에 밴 인간들의 반응은 한결 같습니다. 그들이 범죄하고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바로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행방을 묻자 그는 뻔뻔스럽게도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합니다. 아담이 범죄한 다음에도 역시 하나님은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그래요, 죄지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님은 묻습니다.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너는 지금 나의 길에 서 있느냐? 아니면 사탄의 길로 행하고 있느냐? 그래요,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지요?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은 하나님의 성도가 서 있어야 할 곳인가요?

 

하나님이 몰라서 물은게 아닙니다. 최후로 회개할 기회, 즉 자복할 기회를 준 겁니다. 그래야 정상 참작이 될터이니까요. 그러나 가인은 이미 죄성에 뿌리까지 젖어 버렸기에 오리발을 내밉니다. 게다가 가증하게스리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로 빠져 나가려고 합니다. 이게 정말 헛웃음이 나오는 유치한 짓거리입니다.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거짓말 하지마, 네가 죽였지’ 이렇게 하시지 않고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아벨이 죽어 땅에 묻히자 땅에서부터 그의 핏소리가 하나님께 호소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하면 그 억울하게 죽은 자의 핏값이 땅에서부터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늘의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죽이기까지 하지 않아도 억울한 자의 울부짖음이 하늘보좌에 상달되어서 우리의 불의를 공격하는 빌미가 됩니다. 그러므로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지 맙시다. 그렇게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우리는 행복하게 서로를 아껴주며 잘 살 수 있습니다. 엄청난 재물을 나 혼자 가지려고 남을 밟고 억압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짓으로 남을 중상모략하고 자라나는 새싹을 짓밟으면 결국 남에게 우리도 짓밟히게 됩니다. 그러니 서로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껴줍시다. 힘써 그렇게 행한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우리는 왕왕 우리의 사랑이 뭔가 큰 결실을 맺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모든 사랑의 행위가 결실하여 우리를 영화롭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라는 것에서 위안을 얻고 나는 그 사랑을 베푼 대상자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또 다른 사랑을 받는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면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바리새인도 한다고 했지요?

 

내가 대접한 자에게서 사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너무 근시안적인 행동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미성숙한 신앙입니다. 이 세상의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모든 것을 가지시고 또 그것을 주실 수도 있는 분과 내가 함께라면 그가 나에게 반드시 주실 것임을 믿고 그의 섭리를 믿고 나가는 겁니다. 내가 힘써 그를 믿지 못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코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의 벌을 내립니다. 먼저 11절에 “땅이 그 입을 벌려 네손에서 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항상 이렇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어서 땀 흘려 수고하고 그리고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벌을 받았다면 가인은 이제 완전히 땅이 효력을 내지 않아서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저주를 내립니다. 농부에게 땅이 효력을 내지 못한다는 말은 치명적입니다. 게다가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말은 그가 이리저리로 옮겨다니게된다는 말입니다.

자, 그런데 가인의 반응은 좀 의외입니다. 울거나 후회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보통의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마치 협상을 하는 듯 합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자기의 죄값이 너무 무겁답니다. 자기가 지은 죄는 생각지도 않고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벌이 너무 무겁다는 소리만 하고 있습니다. 이게 악인이지요. 악인은 결코 정의니 정당한 보응이니와 같은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자신만 생각합니다.

 

가인이 하는 말은 유리하게 되면 사람들을 만나게 될텐데 그들이 나를 죽이면 어떻게 하느냐는 겁니다. 아벨의 자녀들이나 아벨을 좋아한 형제들이 충분히 자기에게 보복할 수 있습니다. 유목민들이 자기에게 보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어떻게 피하며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할 때 내가 무슨 수로 그들을 막을 것인가에 대한 염려를 하나님에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의 벌이 너무 과하다고 하는 겁니다. 즉시 자기를 죽이지 않고 추방으로 끝이 나는 것만도 과분한 은혜인데도 가인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말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원래 형제도 몰라보고 질투 때문에 형제를 죽이는 비천한 자는 당연히 그런 식의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더 따끔하게 혼을 내고 정신머리를 고쳐주든가 아니면 더 엄한 벌을 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가인에 대한 보호는 끊어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보호하는 표를 가인에게 주면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고 합니다.

 

제가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제사의 제물을 하나님이 받지 않았다고 동생을 질투해서 동생을 몰래 죽이고 하나님에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이 후안무치한 자에게 하나님은 너무 큰 자비를 베풀고 있습니다.

 

‘네가 도망가다가 사람을 만나서 맞아 죽어도 그게 너의 죄때문이니 당연하다’ 이렇게 하지 않고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고 하면서 가인을 보호하는 표를 준다는 것은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솔직히 이해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너무나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신 공의와는 멀 때가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차별이 너무 심합니다. 누구는 다른 사람을 죽여서 사형을 시켰다면 누구는 동생은 죽였음에도 겨우 추방에 그치고 게다가 그를 보호하는 표까지 주고. 너무 한 것 같습니다.

저도 정말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보고 또 보며 생각을 하다가 마침내 한가지 가능성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오늘 설교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가인이 하나님의 보호로 죽음을 면한 이유.

이것을 생각해 보기 전에 우리는 이 일의 발단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데 그 제물을 하나님이 받지 않았다고 해서 제물을 드린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질투하고 그리고 죽인다는 것은 조금 과합니다. 물론 홀로 경쟁에서 뒤쳐졌다는 생각도 들고 ‘제까짓게 뭔데’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게 동생을 죽일 이유가 될까요? 저는 동기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가인은 평소에 아벨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제물의 가납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성경에는 사실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외경에는 여기에 대해서 매우 큰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바로 여자에 얽힌 문제입니다. 원래 가인과 아벨은 둘 다 각각 쌍둥이로 태어났고 그 쌍둥이들은 모두 여자였답니다. 아마 가인이 훨씬 더 잘생긴 모양입니다. 아벨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가인의 쌍둥이 여동생이 아벨의 쌍둥이 여동생보다 더 아름다웠고 가인은 그 아름다운 자기의 여동생을 그러니까 쌍둥이 여동생을 사모했답니다.

 

그런데 아담이 될 수 있으면 근친혼의 상태를 멀리 만들고자 각자의 쌍둥이 여동생과 결혼시키지 않고 가인은 아벨의 쌍둥이와 결혼을 시키고 가인이 사모했던 가인의 쌍둥이를 아벨에게 주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여자를 빼앗긴 가인이 아벨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고 그게 제사 문제로 터져나온 것이라는 겁니다. 뭐 여자, 사랑에 관한 문제라면 충분히 살인이 일어날 만합니다. 물론 외경이니까 정확하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럼 왜 가인은 죽음을 면했지요? 그것도 하나님이 아벨의 피값을 운운했지만 죽이지도 않고 추방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가인을 보호한다는 표까지 주었다는 것은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자, 우리가 아주 근본적으로 생각을 해 봅시다. 질투는 왜 합니까? 사랑받는 이로부터 선택받지 못했기 때문에 질투가 나는 겁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질투가 나는 겁니다. 만일 가인이 하나님에 대한 제사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제물을 받고 아니고에 별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가인이 그렇게나 하나님이 자기의 제물을 받는 것에 중점을 두는 이유는 자기가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하나님에게 제물이 가납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는 있었다는 말입니다. 왜 중요한지, 진짜로 하나님을 사랑했는지는 몰라도 가인에게 하나님에게 드리는 제사가 아니 하나님이 자기의 제물을 받아 주시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살인도 불사할 만큼 큰 의미가 부여된 것입니다.
솔직히 오늘의 우리는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릴 때, 바꾸어 말해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이 이 예배를 정말 받아 주시는가에 대해 가인정도의 중요성을 부여하지도 못합니다.

 

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가인은 지금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여호와의 낯을 뵙지 못하는 것이 더 안타깝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가인에게 하나님은 애증의 대상입니다. 사랑받고 싶고 그러나 사랑받지 못한 자의 한이 여기에 표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의 흉악무도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그나마 보호의 표를 주시고 그가 먼 훗날 죗값을 다 치르고 다시 돌아오기를 그리고 회개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이 죽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사랑의 표출방법이 잘못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제사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칭찬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면 하나님에게 뭔가 사랑을 받고 싶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제물을 받는지 여부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가인이 하나님의 보호로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때요? 가인도 역시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을 사랑한 만큼 사랑받고 싶어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아시는 하나님은 가인을 보호하기 위해 표를 주었다는 거지요.

 

물론 가인이 지은 죄가 있으므로 가인에게 죄벌을 내렸습니다. 추방이지요. 토지의 몰수에 앞으로는 농사를 지어도 땅이 너를 거부할 것이라는 경제적인 벌도 함께 내린 겁니다. 이제 가인은 하나님의 품안이 아니라 세상으로 야생의 세계로 추방된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죽이려 할 수 있다고 걱정하는 것이지요. 어쩌면 가인은 힘이 별로 세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무력이 형편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멀끔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그것뿐 그렇게 힘이 세거나 무력이 있거나 세력이 큰이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농부보다 유목민들이 더 호전적이고 힘이 셉니다. 옛날 우리네 역사를 보면 북쪽의 돌궐이나 말갈이나 거란족이나 몽고족들이 남쪽의 한족들보다 훨씬 호전적이고 힘이 셉니다. 아벨도 마찬가지로 방심했기 때문에 가인에게 맞아 죽었지 그렇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대결했다면 가인에게 죽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유목민들의 특성상 유리하는 습성이 있는데 그러면 가인이 도피 중에 만나는 이들은 대부분 아벨계의 족속들일 것입니다.

 

사랑이 없었다면 배신감도 없었을 것입니다. 가인은 자기가 아담의 장자고 그래서 장자승계의 원칙상 다음대의 족장이 자기고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더 사랑할 걸로 생각한 것입니다. 인간이 지상에 퍼지면서 그들은 너무 오래 살기 때문에 스스로 독립적인 가계를 이루었고 그래서 그 모든 가족들을 다스리는 족장의 자리는 상당히 중요했을 것입니다. 사랑에 관한 원한, 권력에 관한 원한 이런 것들에 더하여 하나님을 사랑한 자가 받은 배신감이 가인으로 하여금 치명적인 범죄를 저지르게 만든 겁니다.

 

여기서 하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모든게 만사 오케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보호를 주시지만 그가 죄를 저지른다면 벌도 주십니다. 다만 버리시지 않습니다. 가인도 비록 여호와의 앞을 떠났지만 그래도 멀리 간 것이 아니라 에덴의 동편 놋땅에 거주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에덴의 동편, 바로 에덴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 곳입니다. 그 인근에 살았다는 것은 언젠가는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후로 가인의 행보를 보면 그는 성을 쌓았고 그의 후손들은 문명을 일으켰고 하나님을 거역했으며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적어도 가인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도 가인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인정을 하신 모양입니다. 그러나 가인이 죄를 저지르는 것에는 엄격하셨고 싫어하셨겠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속에 있는 성도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성도로서의 제대로 된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없이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이 정말 곤란하게 여기시고 적절한 징벌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정당한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나만 배타적으로 사랑받으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 모두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나만 배타적으로 독점하려고하면 항상 문제가 생깁니다. 금은보화도 나만 가지려고 하는 것이나 권력을 나만 가지려고 하는데서 문제가 생기듯이 사랑을 공유해야 합니다.

 

나의 아버지도 되지만 우리의 아버지도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만 잘살려고 나에게만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잘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의가 아닙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신 주님의 기도문이 바로 그 말입니다. 함께 더불어 잘 사는 것을 하나님이 더 좋아하십니다. 왜나면 그들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애증의 태도를 가진 가인의 후예들은 오늘 대부분의 인간들 같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홀로 문명을 이루었지만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문명이 가지는 허점 때문에 각종 문제들도 함께 자라서 마침내 오늘날의 복잡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네 사회를 가만히 보면 편리하고 좋아진 것은, 진보한 것은 분명히 맞는데 그러나 우리에게는 걱정이 더 많아 졌습니다. 발달된 문명은 각종 암과 중풍과 치매라는 질병을 더 많이 가져왔고 이러한 것들은 인류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되었습니다.

 

경쟁과 스트레스는 우리를 너무 힘들게 합니다. 자살자가 속출하고 미세먼지에 대기오염에 오염된 물에 황사에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들이 마구 생겨납니다. 웬만한 먹거리와 자재들은 거의 대부분 발암인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솔직히 요즘 같아서는 암에 걸리지 않고 중풍이나 치매에 걸리지 않고 늙을 수 있는 것도 큰 복입니다. 엄청나게 어려운 확률로 달성할 수 있는 성공같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가 온다고 합니다. 엄청 편하게 될 것 같습니다. 위험한 일 힘든일 더러운 일에 사용하면 인류는 해방입니까? 천만에요. 대량 실업으로 인한 빈곤이라는 문제가 우리에게 닥칠 걸로 예상되어 집니다. 그래서 상담사가 자꾸 자꾸 많아 집니다. 정신과가 점점 많아 집니다. 더 더 복잡하고 더 더 정비되는 제도에 더해서 범죄도 이를 악용하는 일도 더 더 많아 집니다. 이것의 끝은 어디일까요?

 

그런가하면 인간의 쾌락추구는 점점 기이한 모양으로 발달하고 우리는 이러한 변태적인 것에 점점 익숙하게 됩니다. 이제 하다 하다 비정상과 변태와 죄악된 상태의 일을 윤리적이고 합법적이며 정상적인 것이라고 인정하라는 죄인들의 공격이 드세집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백주대낮에 요상한 복장으로 게이들의 축제가 벌어지고 게이들간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데모가 벌어지고 심지어는 게이가, 남색이 잘못된 것이라는 성경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데 벌을 주겠다는 차별금지법이 시도되고... 한마디로 세상은 손댈 수 없을 만큼 망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두렵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채찍을 들어서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휘두르게 된다면 그 누가 하나님의 분노에서 벗어나게 될까요?

 

언론의 논조나 대중들의 댓글들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과 교회와 목사에게 무슨 철천지 원한을 가진 듯이 기독교의 박멸을 사명으로 여기는 듯한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건 정말이지 가인의 후손들이 그 조상 가인이 가졌던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에게 관심을 받으려고 하는 그런 정도의 상태도 못되는 그런 저열한 상태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더 두렵습니다. 이 나라가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여기까지 보존되었는데 하나님의 분노를 사 하나님이 쫓아내신다면 얼마나 큰 고통과 어려움이 몰려올지 가늠하기가 어려워서 두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 가인의 후예들이 다시금 여호와의 앞으로 돌아오도록 기도하고 전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시는 행위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진리인지 그들에게 가르치고 말하고 그리고 직접 실천하며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요 그렇게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 일입니다. 하나님에게 내어놓은 우리의 결과물을 가지고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구호가 아니라 실천으로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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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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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삶의 윤리와 도덕성을 강조하는 기독교가 인터넷상에서 우스꽝스럽게 되어버렸습니다. 신문에 "독"과 관련한 기사가 나갔습니다. 웬걸, 댓글에는 "개독"이 제일 위험한 독이라는 댓글이 베스트랍니다. 이제 인간은 어느덧 윤리의식을 잃었고, 성을 자본으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하며, 물신주의, 쾌락주의가 만연합니다. 들키지만 않으면 되지! 같은 생각,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보다 앞서 가려는 생각, 우리는 토끼와 거북이 경주에서 재빠른 토끼이길 원합니다. 더 빨리, 더 많이 에 오염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사회에서 별 볼일 없는 (저보수의)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음을 프로필에서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오늘 하루에만 그것도 3번 씩이나, 지금 얼마나 벌고 있냐고 질문을 하며 부러움의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아저씨는 자신은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는데 계산해보니 시급 7천원 밖에 안 된다면서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 술로 밤을 보낸다고 합니다. 저는 가게에서 할 일을 다 한 후, 느긋하게 틈틈이 독서로 소일하는 모습 때문에 그런 여유가 부러웠나 봅니다.

 

(기독교인은 아니셨지만) 저는 신영복 선생님을 대단히 좋아하는데, 그 분이 70%의 힘으로 일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주장한 대목을 생각하곤 합니다. 이 주장을 이해하는데는 시행착오를 비롯해 많은 세월이 걸렸는데, 사람이 겸손으로 자기 그릇에 맞게 살아갈 때 즐거울 수 있다고 지금은 약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아는 구절도 있지요. 하늘의 나는 새도 (누가 먹이지 않아도) 저렇게 살아가는데, 사람이 노력만 한다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테지요. 그래서 나의 비정규직 11년사를 좀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홍 목사님은 늘 제게 멋진 것들을 선물해 주셨답니다. 고급 다이어리, 고급 펜, 지갑에 중고 노트북까지. 그 다이어리를 펼치면 이런 말들이 적혀 있답니다. "바로 지금이 내 인생 최고의 날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사람의 한계는 이럴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름답고 좋은 날에, 매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음을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사랑이 되기를, 그것이 기도가 되기를, 아낌 없이 인생을 사랑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순례길을 즐겁게 걸어갈 수 있기를. / 2017. 03.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