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다니엘과 세친구 뜻을 세우다(다니엘1:1-2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3. 25. 05:30

 

다니엘과 세친구 뜻을 세우다 (다니엘1:1-21)

 

요즘은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 행하면서 성도로서 바르게 살기가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세상과 기독교인간에 갈등이 있어온지가 한참 되지만 요즘에는 이런 경향이 더 심해 졌습니다. 왜냐면 이제 공공연하게 기독교를 욕해도 되는 분위기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기독교하고 전혀 상관없는 기사에도 교회와 목사와 성도를 욕하는 댓글들이 달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댓글이 높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마치 세상은 암묵적으로 이 땅에서 기독교를 박멸하는데 동의한 것처럼 보일지경입니다.

그러나 그 세상이 결코 바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네들의 삶은 솔직히 그들이 욕하는 기독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온갖 음란과 불의가 판을 치고 자라는 아이들도 점점 폭력적으로 변합니다. 나라전체가 이 민족 전체가 불의와 죄악에 푹 절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문화 때문입니다. 세상의 문화는 경쟁과 효율성을 중시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외면합니다. 가령 그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로 판단하지 인간이라는 그 하나로 그가 가치있다고 하는 생각을 가진 이는 거의 없습니다.

 

물론 기독교가 아니라 세상의 일부에서도 인간을 인간자체로 소중한 존재로 보려는 노력이 있지만 미미한 몸부림에 그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인문학의 위기라고 말들 하지요? 돈안되는 걸 안하기 때문이지요. 이제 모든이들은 너도 나도 현실적인 물질적인 이득을 주지 않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잘나지 못한이는 세상에서 도태되고 짓밟히며 무시당합니다. 그래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허세를 부리거나 사기를 쳐서 남을 등치려 하거나 심지어 불법으로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목적이나 동기보다 결과를 더 중시합니다. 그런 분위기속에서 양심과 영혼의 순결을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은 살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사람들은 점점 경쟁에 지쳐가지만 옆도 돌아 보고 뒤도 돌아보는 더불어 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진정한 가치를 붙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개인을 뒤처지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남돌아 보지 말고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말고 양심이나 하나님의 규례는 외면하고 사탄의 방법대로 약삭빠르게 교활하게 악랄하게 굴어야 함에도 그게 잘 안됩니다.

 

가령 이런걸 한번 생각해 봅시다. 왕따가 있습니다. 누구라도 같이 말을 걸어주고 같이 놀아주고 상대해 준다면 이런 이가 한 두명정도만 더 있다면 그는 왕따에서 벗어 날 것이고 그 세명으로 이루어진 집단도 왕따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삼총사니까 든든합니다.

 

그러나 더불어 함께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한 사람 한 사람 돌아 가면서 왕따가 되고 집단 괴롭힘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서로 왕따가 되지 않으려고 현재의 왕따를 외면하고 괴롭히는데 앞장서고 이러다 보니 서로 다름을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혼자서 아니오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서로 서로 눈치를 보면 남을 짓밟고 그 위에 서려고만 합니다. 가장 약한 한 사람, 가장 다른 한 사람을 정해서 사정없이 괴롭힘으로 집단적인 소속감을 가지려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사니까. 그래야 내가 타겟이 안되니까. 이런 무한 경쟁의 구도 속에서는 이전투구의 세상에서는 결코 진정한 평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가치에 휘둘리지 않을 굳고 높은 신앙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고 하는 고전적인 가치는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경쟁이 판을 치고 경쟁의 끝은 결국 지옥입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이 남아서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까지 이 세상이 살만하고,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좇는다면 언젠가는 이 땅이 지상천국이 될 걸로 믿고 마지막때에 우리의 공과를 심판하실 하나님의 강림을 앙망하며 현세의 고난을 참고 더불어 함께함과 사랑의 가치를 믿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이 우리에게 소중한 신념임을 믿습니다.

 

뿐입니까?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사탄이 주는 유혹에 굴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높은 권세와 부귀와 향락으로 유혹합니다. 죽어서 천국간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잘살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그 전에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누리기 위해 그리스도의 법이 아니라 사탄의 법, 세상의 문화와 가치에 순복할 것을 요구합니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해 볼까요?
술도 마시고 모르는 여자와 성적 엔죠이도 하고 거짓말도 적당히 하고 나쁜짓하는 친구들하고 적당히 맞춰주고 그렇게 하면 세상 살기가 너무 편해집니다. 때로는 남의 것도 탐을 내고 빼앗기도 하고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고 좋은 자리에 있을 때 적당히 챙기고 이렇게 살아야 되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법이 내 마음속에서 내가 바르지 못한 일을 할 때는 이걸 막습니다. 양심이 자꾸 우리를 고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남들처럼 막 살지 못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마음이 착하다는 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나를 이용하려고 할 때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고 그래서 내 것도 빼앗기고 이걸 나는 양보라고 생각하는데 정작 그들은 자기들이 잘나서 그런 줄 알고, 운이 좋아서 그런 줄 알고  호구 잡았다고 생각하지요. 그렇게 주고도 무시당하는 일을 겪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법이 내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알면서도 당해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를 짓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막 살려고 해도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영악하게 교활하게 살려고 해도 안됩니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우리로 하여금 착하고 바르게 살게 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방해와 핍박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법대로 살려는 우리에게 과연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다니엘과 세친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이게 바벨론식 이름인데 유대식으로는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식으로는 ‘벨드사살’입니다. ‘벨이여 그를 지키소서’라는 뜻이지요.

 

여하튼 이 다니엘과 이 세친구는 주전 605년에 제1차 바벨론의 침략 때 유대에서 느부갓네살 왕에게 전쟁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입니다. 유대의 여호야김 왕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왕과 포로들과 성전그릇 얼마를 빼앗아 갔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에 무릎 꿇은 것도 성전의 기명 얼마를 뺏긴 것도 모두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의 결과입니다.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타락한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채찍입니다. 더 늦기 전에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결국 그들은 20여년 후 바벨론에  망합니다. 그러니까 성경본문의 때에는 아직 유다가 존속하고 있는 겁니다.

 

느부갓네살은 유다의 귀족자제들을 뽑아서 환관장에게 맡기면서 교육을 시키라고 합니다.
뽑혀서, 그러니까 포로로 잡혀서 온 아이들 중에 다니엘과 세친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아마 용모도 괜찮고 피부도 좋고 또 귀족의 핏줄이라서 특별히 왕의 앞에 세우기 위해 교육을 받게 됩니다. 왕의 앞에 선다는 말은 뒤에 말씀드리겠지만 사실 별로 좋은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4절에 보면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답니다.

 

이거 제가 봐도 너무 완벽해서 인간이 과연 이런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가 의문인 그런 사람입니다. 몸에 장애나 흠이 없고 잘생기고 게다가 똑똑하기까지 하고 정신도 맑아서 지혜로운 이런 사람! 여하튼 이런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와서 교육을 시켜서 왕의 앞에 서게 한답니다. 유다에서 온 소년들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와 민족들에서 잡혀온 소년들이 함께 교육을 받습니다.

 

전쟁에 패한 포로는 일반적으로 포로로 끌려가면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노예가 되고 심지어는 심한 매질과 굶주림 그리고 처벌로 죽어 나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전쟁포로가 죽는다고 해서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전쟁포로의 신세는 비참한데 옛날 인권이라고는 아예 없던 시절에 전쟁포로의 운명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이들의 신세는 너무나 잘풀린 겁니까? 혈통이 좋고 잘생기고 총명해서 특별히 좋은 처우를 받으니까 다행입니까? 망하기 전에 왕족이니 귀족이니 하면서 대우받았는데 망하고서도 왕족이니 귀족이니의 혈통이라고 대우받는 것이 너무 부당해 보입니다. 그래요 부당한 것 같습니다.

 

5절에 보면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이들은 포로로 잡혀 가서도 특별한 대우를 받습니다. 왕의 음식을 먹는 특혜를 받았습니다. 보통의 포로들이 광산에 끌려가서 매질을 당하여 하루 종일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처지에서 그들은 왕궁의 부속 교육기관에서 왕의 진미를 먹으며 특혜를 받습니다. 이들은 육체적인 노동이 아니라 갈대아의 고급학문을 배웁니다. 이만하면 포로도 할만합니까? 아마 14세에서 17세까지 우리의 중고등학생또래들이 교육을 받는 겁니다.

 

자, 그런데 너무 호강에 받쳐서 그랬을까요? 다니엘은 이상한 결심을 합니다. 정말 희한한 인물입니다. 세상 사람들로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결심을 합니다.

8절에 보면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러니까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안 먹고 안 마실 것을 다짐했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 정말 제정신입니까? 아니 술은 그렇다 쳐도 왕의 음식까지 안됩니까? 왕의 진미를 먹게 되면 포로로 끌려온 동포들에게 너무 죄송해서 안 먹으려는 걸까요? 포로의 신분으로 좋은 음식을 먹는게 그렇게나 죄스러울 것까지야 있습니까? 글쎄요. 없습니다. 맛나고 좋은 것을 먹으면 좋은 거지 뭘 그런 것을 가지고 자기를 더럽힌다고 그럽니까?

 

지금처럼 먹을 것이 풍부하고 다이어트가 유행하는 그런 시절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 죽은 것이 보통인 세상입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처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지고 그렇게나 유난을 떨 필요가 있습니까?
사람의 입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더 나쁘지 들어가는 것이 뭐 그렇게 나쁠까요?

 

그런데 당시에는 왕의 진미는 주로 육류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고기는 모두 우상의 제물입니다. 즉 모든 고기를 요리하기 전에 먼저 우상의 제물로 바치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 제물을 내려서 요리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왕의 진미를 먹는다는 것은 곧 우상의 제물을 먹는 다는 말이고 이것은 곧 우상숭배에 동참한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바벨론에서 할 일이 없어서 그들에게 고기를 제공하는게 아닙니다.

 

물론 요즘이야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사음식을 먹어도 전혀 거리낄게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것을 우리가 속되다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먹는다면 하나님의 큰 일을 감당하는 좋은 영양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약시절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율법에서 엄연히 금지하고 있는 조항입니다.

 

이미 나라는 멸망 중에 있고 여호와의 백성들은 변절하여 바벨론의 신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지만 다니엘과 세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는 끝까지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려고 작정한 것입니다. 이들의 이름에는 모두 하나님과 여호와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아마  이들의 부모님이 일생을 자식들이 하나님 안에서 살기를 바라서 이렇게 지었을 것입니다.

 

이 네 소년은 사람들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고 하나님의 법을 아무도 지키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끝까지 하나님의 법을 지키겠다고 작정했다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자를 복주십니다. 자신에게 불리하고 힘들지라도 끝까지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시세대국에 어두운 자는 문장이 천하를 떨어 울려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니라 고종이 발표한 교육입국조서에 나온 말입니다. 과거가 폐지되고 신학문을 익혀서 부국강병에 이바지하라는 말 가운데서 나온겁니다. 그래요, 시세대국을 알아야 준걸입니다. 적당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고 그에 맞추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시대에 뒤처지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적당히 적당히 세상과 짝하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나에게 손해가 나는 것은 적당히 피하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에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들이 밀고 그렇게 살아야 잘사는 겁니까?

 

옛날에는 왕자리에 나아갈 때에도 세 번을 고사를 했습니다. 어차피 왕이 될 거지만 그래도 체면상 세 번정도는 양보를 하는 겁니다. 요즘 그랬다가는 왕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 갑니다. 지금 보면 서로 대통령 할려고 난립니다. 어제의 동지도 오랜 친구도 한순간에 안면을 몰 수 합니다.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각종 이권과 손익을 따져서 대통령에 출마한다고 날마다 출마선언을 합니다. 이제 양보니 체면이니는 정말 찾아 보기 어려운 덕목이 되었습니다. 양보니 체면을 많이 따지면 오히려 호구가 됩니다. 때로는 호갱?

 

그런데 다니엘과 세친구는 지금 전혀 엉뚱한 결심을 한 겁니다.  이미 포로로 잡혀와서 적국의 왕궁에 왔는데 남의 나라에서 이제부터 살아야 하는데 아직도 고국생각에 옛 신앙을 고수하려는 답답이들은 정말 답이 없습니다. 더구나 약소국 유다가 아니라 당시 일대를 제패한 바벨론의 왕궁에서 옛 고향을 그리워하고 옛 신을 고수하려는 이들은 분명 희한한 자들입니다.

 

자, 다니엘과 세친구는 자기들의 결심을 지키기 위해 먼저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가서 자기들이 매일 먹는 식사에서 고기와 포도주를 제하여 줄 것을 청합니다. 자기들은 채소만 먹겠다는 겁니다. 채소만 먹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게 아니라 우상의 제물이나 율법에 어긋난 음식을 제하자 남은게 채소밖에 없어서 그런겁니다. 절대로 이들이 채식주의자라서 그렇게 말한게 아닙니다.

 

아마 이 당시에 포로 소년들은 강제로 고기하고 포도주를 먹어야만 했고 이걸 환관장 이하 감시자들이 엄격하게 감독을 했나 봅니다. 그러니까 군대처럼 엄격한 식사관리를 통해서 가장 좋은 육체적인 상태를 만들려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종교적인 신념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바벨론의 신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는 것은 당시 인간들의 관념으로는 바벨론의 신들을 인정하고 그의 영향력하에 있음을 감사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이런 이유 때문에 누구는 없어서 못먹는 귀한 고기와 포도주를 먹지 않으려고 하는 이 소년들은 누가 봐도 희한한 사람들입니다. 너무 너무 이상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적응이 안됩니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채소와 물만 먹겠다는 이들의 말을 들은 환관장은 이들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의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같은 또래의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가 보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되면 너희 때문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롭게 되리라”이렇게 만 말합니다.

 

군대에 갔다 오신 분은 잘 알겠지만 단체생활에서 강제로 배식하는데 나는 이렇게 이렇게 따로 메뉴를 정해서 먹겠다고 하면 허용해 줍니까? 택도 없습니다. 나는 이건 안먹기 때문에 남깁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기합에 얼차려에 연대 책임으로 연병장 돌기와 내무반 분위기 싸해지고...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게 될 겁니다.

 

그래서 절대로 다르게 먹을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분위기상 그런 말조차 꺼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거절하는 이유를 말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냥 “안돼” 한마디면 끝입니다. 그런데 이 환관장이 그렇게 말한 데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역사가 있습니다.

 

9절에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그러니까 일반적이지 않은 환관장의 대답은 사실은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고압적으로 환관장이 대할 수도 있고 아니면 왕에게 알려서 문제를 크게 만들어서 네소년을 죽일 수도, 처벌할 수도 있을터인데도 환관장은 오히려 다른 문제를 걱정합니다. 환관장의 답변 속에서 뭔가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한 네 소년은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한가지 제의를 합니다.

 

“청하오니 당신 종들을 열흘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
열흘 동안 채소와 물만 먹는 우리와 고기하고 포도주에 채소까지 먹는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우리가 더 얼굴이 좋다면 우리들이 앞으로도 채소와 물만 먹을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는 말입니다.

 

환관장의 생각에 아무래도 고기와 포도주에 채소까지 곁들여 먹는 것이 채소하고 물만 먹는 이들보다 영양이 많아져서 얼굴이 좋을 걸로 생각했기에 이 제안에 응한 겁니다. 골치 아픈 꼬마들의 유치한 내기에 응할 생각이 없다고 무시하고 자기마음대로 해도 아무 말도 못할터인데도 환관장은 네 유대소년들의 청을 들어 주고 기꺼이 이들을 시험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역사하셨다는 표시입니다. ‘내가 이들의 청을 들어볼까?’ 이런 생각이 들게 하셨다는 거지요.

 

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열흘 후에 물과 채소만 먹은 네 유대소년과 고기에 포도주까지 먹은 나머지 소년들을 비교해 보았는데 놀랍게도 물과 채소만 먹은 네명의 유대 소년들이 더 얼굴이 좋아 졌습니다. 몸도 더 좋아 졌겠지요?

 

여러분, 제가 참고로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육식과 채식을 섞어서 먹는 것보다 채식이 더 좋다 이런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누가 황제 다이어트라고 육식만 한 일도 있는데 그것보다 채식이 더 좋다 이런 말도 아닙니다. 다만 제 생각에는 나름대로 각각 음식을 골고루 먹는 게 좋을 겁니다.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대로 살기위해 희생한 소년들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걸, 그러니까 자기를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더럽히지 않으려고 채소만 먹었는데도 얼굴이 상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보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상은 뒤에 나옵니다.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하나님의 보상 첫 번째는 이겁니다. 학문적으로 뛰어나게 되고 총명하게 되고 또 환상과 꿈까지 해몽하는 능력이 생겼다는 겁니다. 아마 맑고 깨끗하게 하나님만을 바라며 사는 다니엘에게 하나님은 더 놀라운 역사를 하신 것 같습니다.

 

똑똑해 지고 끝일까요?

하나님의 보상은 계속해서 진행 중입니다. 삼년의 기한이 차서 왕의 앞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보이는 바로 그 자리를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가 없으므로 그들을 왕 앞에 서게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어떻습니까?
그렇게 교육받은 모든 이들이 왕앞에 서는 건 아닌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좀 똑똑하고 뛰어나야 되니까 자체적으로 교육을 마칠때에 선발한 모양입니다. 여기에서 뽑혀서 왕앞에서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목숨을 내놓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한 그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를 허락하신 겁니다.

 

그런데 여기 직접적인 기술은 없지만 성경본문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나오는 결론이 있습니다. 처음 느부갓네살이 유대의 네 소년을 왕궁에서 교육시킨 것은 그들을 왕의 앞에 모셔서는 신하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왕의 신하가 되기 위해서 조선에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과거에 급제를 해야만 했는데 이게 결코 쉽지가 않았습니다. 보통의 과거는 3년에 한번 칩니다. 게다가 단번에 붙고 떨어지는 그런 시험이 아니라 지방에서 초시를 치고 그 다음에 모여서 생원 진사시를 치고 여기에 합격하면 정식 과거에 응할 자격을 줍니다.

 

평생을 과거만 쳐도 불합격해서 묘비명에 벼슬이름이 없이 그냥 학생 아무개라고 쓰는 이가 대부분입니다. 그만큼 벼슬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싸운 적국의 포로를 잡아와서 삼년간 잘먹이고 교육시켜서 벼슬까지 준다는게 일반적으로 말이 됩니까?

 

유다를 잘 다스리기위해서 유다의 소년들을 잡아서 교육시키고 그래서 친 바벨론 세력을 만든다? 천만에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당시에 무슨 인권이니 경영이니 하는 개념이 있겠습니까? 그냥 무력으로 정복한 나라의 백성들을 다 죽이지 않고 노예로라도 살려주면 다행인 시절에 이런 일을 함으로써 귀찮음을 자초할 필요가 없습니다. 게다가 당시는 기원후도 아니라 아주 고대 즉 주전6세기입니다. 통치술이란게 있지도 않았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자국민들도 하기 어려운 벼슬을 포로들에게 준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왕의 앞에서 서게 된다’는 말은 결국 환관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교육을 맡긴 겁니다. 아스부나스라는 말이 사람이름이 아니라 환관장을 일컫는 벼슬 이름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여하튼 그들은 남성을 제거하고 내시가 될 운명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내시가 아니라 다른 벼슬을 준 겁니다. 특히 다니엘은 꿈과 계시에 능했으므로 박사로 출세하게 된 것이고 다른 친구들 역시 지혜자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가장 먼저 하나님을 위하여 결심하고 행동에 나섰기에 하나님은 그에게 더 역사하신 겁니다. 이것이 그를 바벨론과 페르샤의 총리대신으로 만들어준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가 박사의 자리에 있었기에 꿈을 해몽할 기회도 얻었고 그가 박사의 자리에 있었기에 벽에 쓰인 글씨를 해몽할 기회를 잡은 겁니다.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고 세상이 주는 이권과 쾌락에 취해서 그냥 그대로 딸려 갔다면 그는 삼년 후에 환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주어진 운명에 굴하지 않고 당장의 눈앞의 안락과 쾌락에 만족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를 자기의 목숨보다 더 중하게 여겼기에 하나님은 감히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왕의 명령이 내리매 지혜자들은 죽게 되었고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죽이려고 찾았더라”는 말씀을 유추해 보면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궁밖에서 천문을 살피며 길흉화복을 점치는 박사, 지혜자가 된 것 같습니다. 내시가 될 뻔한 운명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당장 눈앞의 목숨,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고 우상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살았다면 절대로 잡혀간 나라의 총리대신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멸망하고 새로운 나라 페르샤에서 총리대신이 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며 고기와 포도주라는 안락한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결심한 친구들에게 하나님은 우리들이 감히 상상하는 것 보다 더 놀라운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의 지혜와 놀라운 혜안 그리고 눈부신 출세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환경이나 분위기에 좌절하거나 억울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면서 스스로를 비관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게 하시는 놀라운 전능자이십니다.

 

우리에게 진흙탕같은 현실을 탈출할 사다리가 없습니까? 탈출구가 보이지 않습니까? 하늘의 동아줄인 하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만이 우리를 이기게 하시고 여기에서 탈출케 하시고 인간이 모든 사람들이 불가하다 불가하다 하는 바로 그 상황에서도 가능케 하실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버려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십니다. 먼저 우리는 그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그의 명령을 지켜 행하면 됩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담아 그 법이 명하는 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그 나머지는 우리 아버지께서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한 뜻을 세우고 세상이 주는 가치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양심과 신념에 따라 나아간다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군병이 되어서 세상과 싸워 승리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그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는 주의 성도들에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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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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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일마치고 아무~ 생각없이 TV시청을 한 시간 가량 하게 되었습니다. 인기 여배우의 혼자 사는 삶이 중계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저랑 이름도 거의 비슷합니다. 하하.) 40대가 되고 나서 무척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분이 사십춘기라는 말이 요즘 있다고 이야기 해줍니다. 산다는 것은 4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떨리고 불안하고 힘든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10단계의 성공적인 삶을 꿈꾸지만, 정작 현실은 1단계, 2단계일 때가 있습니다. 그 때의 좌절감, 상실감, 허무감. 그래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뭐 하나 잘난 것도 없으면서 - 이렇게 분석적으로 쓰는 저라고 뭐 다를 꺼 있을까요? 저 역시 똑같이 한없이 못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자책도 많이 하고, 자학도 하고. 눈 떠서 일하러 가는 시간이 괴로웠고, 정작 생각 없이 일하면서 현실을 잊고, 양껏 예능 TV 보면서 낄낄 거리고, 시간 낭비하고...

 

하지만 방황 하며 배운 진실 하나는 언제나 강조하고 싶습니다. 절대로 자신에게 나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주어진 일을 즐겁게 하려고, 기회를 감사하게 생각하고, 또 도전하기를 멈춰서도 안 됩니다.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면서 삽니다. 때로는 늦게 영화 보고, 새벽 4시, 새벽 5시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습니다. 편안한 영역에서 벗어날 때, 진짜 삶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전형적인 자기계발서의 말이지만, 인간은 컴포트 존 (안락한 지대) 에서 벗어나야만 진짜 실력도 향상되어 나간다고 합니다. 어려운 길을 걷는 것은 우리를 멋지게 만들어 준답니다.

 

아무튼, 그래서 그 배우는 늦은 나이에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용기에 박수칠 만 합니다. 저도 40대에는 내가 하고 싶었던 그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를 바라봅니다. 뭐, 별 거 없습니다. 독서, 영화, 그리고 인생을 사랑하기.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으며 감사한 삶을 살고 있기. 돌아보면 매번 실수하고, 실패만 겪은 것 같았지만, 조금씩 극복해가며 단단해져 가는 자신을 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힘든 현실에서도 우리는 올바르게 살기로 결단할 수 있다는 진실을 꼭 붙들겠습니다. / 2017. 03.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