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곧 닭이 울더라(개정판,마태26:69-)/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4. 24. 04:25

 

곧 닭이 울더라(개정판) (마태26:69-)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의 아침에 새로운 소망을 보고 기뻐합니다.
고난주간도 지났고 이제는 정말 주님의 부활을 기뻐할 차례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고난주간이니 부활절이니 하고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데 사실은 정말 맥빠지게도 기독교인의 65%가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답니다.

 

이거 정말 충격적이기도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산다는걸 믿는건 정말 어렵습니다. 물론 우리 주님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으로 계실 때 십자가를 지셨고 그리고 돌아 가셨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사신 때는 분명 사람으로 계실 때 였습니다. 성육신하신 주님은 분명 인간이셨고 또 죽으셨고 다시 사셨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죽었다 살아난다는 것을 평범한 인간들이 믿기는 어렵습니다. 더욱이 인간인 우리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즉 신이기 때문에 부활이 가능하지 육신을 가진 인간인 우리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가능하겠냐고 생각합니다. 신의 가장 큰 특징이 죽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신을 ‘이모탈’(죽지 않는) 이라고 표현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사람은 한번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보통 이런 말 많이 씁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는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공평하답니다.
맞는 말 같은데 그럼 부활절은 뭡니까? 영원히 살 것을 믿는 부활신앙은 도대체 뭡니까? 한번 죽어서 끝이 아니면 화장은 도저히 못합니다. 무덤에 매장도 못합니다. 나중에 다시 살아나면 어떻게 할겁니까? 사람들은 한번 죽음으로 모든게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화장도 하고 매장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정말 죽음으로 우리네의 삶은 끝입니까? 그럼 도데체 죽음이란 뭡니까? 도대체 죽음이 무엇이기에 생각하고 분노하고 사랑하고 감동하며 웃고 울던 모습이 그렇게나 차갑게 굳어 버리지요?

 

부활절은 사실은 주님이 사망권세를 이겼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즉 사탄의 권세가 깨어졌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사망권세가 깨어진 것을 만천하에 공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최대의 적인 죽음의 정복은 정녕 놀라운 사건입니다.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 회의하는 사람들도 영혼이 영원히 산다는 것에는 어느 정도 수긍합니다. 왜냐면 영의 세계는 신비라는 포장지 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걸 과학적으로 규명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혹여라도 그런 시도를 하는 분이 있다면 단순한 호기심이나 흥미유발의 차원에서지 진지한 일생을 건 학문적 과제로 삼지는 않습니다. 그들도 영의 세계가 규명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오늘 우리는 부활절을 기념합니다. 부활절에 주는 부활신앙을 소망합니다. 영혼이 사는 것뿐만 아니라 육신이 다시 사는 것도 우리는 믿습니다. 한번 죽음으로 모든게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죽음에는 예외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번의 기회를 가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두 번 죽은 사람이지요.
성경에도 보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드릴 말씀은 부활의 예를 들고 우리도 다시 살거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부활절을 조명하기를 원합니다. 고난주간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부활의 기쁨은 다른 이들이 맞는 부활절보다 그 기쁨이 배가 될 것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 찬란하듯이 고난이 컸기에 기쁨도 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주님이 잡히시던 날 밤의 일입니다.

주님을 따르던 제자 중에 수제자라고하면 단연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우직한 의리의 사나이 같습니다. 겉모습은 우락부락하게 생겼지만 아마 속은 의리와 정으로 똘똘 뭉친 그런 사람같습니다. 물론 이건 순전히 우리 생각입니다. 베드로가 우락부락하게 생겼는지는 솔직히 저는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할 때도 베드로는 우직함과 신실함의 표본입니다. 게다가 주를 위한 열심이 아주 뛰어난 사람입니다. 주를 지키기 위해 검을 빼어 주님을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베어난 사람. 성전의 종들과 군병들이 예수를 잡으러 올 때 칼을 들고 주님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도망가거나 포기하지 않고 수많은 군대앞에서 칼을 들고 주를 지키고자 한 것만으로도 그는 보통 제자가 아닙니다. 의리와 충성의 표본이이며 성도들의 귀감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가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해 도망가다 주를 만나고 ‘쿼바디스 도미네’라고 외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는 결국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이것만 보면 그는 신앙의 영웅입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에게도 뼈아픈, 숨기고픈 수치스러운 과거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압니다. 그는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닭 울기 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아가 저주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매년 부활절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합니다. 우리가 부활절 달걀을 나누는 데에는 로잘린 부인에 관한 이야기가 있지만 그 시원을 따지면 베드로의 회개를 촉구한 그 닭울음소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베드로는 여러 가지 좋은 면이 많이 있지만 때로는 다소 성급하고 그리고 연약하며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등장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그의 모습이 영 시원치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설교본문을 가지고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우리는 베드로같이 주님을 배반하고 저주하고 부인하는 자가 되지말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건 전혀 잘못된 일이며 베드로에게 너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씌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과한게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곳이 어딥니까? ‘바깥뜰’입니다. 대제사장의 집 바깥뜰일 걸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누구의 집인지는 모릅니다. 안나스의 집인지 가야바의 집인지. 한 사람은 전직 대제사장이고 한 사람은 현직 대 제사장인데 누구의 집인지는 성경에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 두사람은 장인과 사위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게 중요한게 아니므로 넘어가고 우리는 주님이 심문 받고 있는 집의 바깥뜰이라고 생각합시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심문장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바깥뜰에서 동태를 살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한 여종이 자기를 고발하는 말을 듣고는 모든 사람 앞에서 주님을 부인합니다.

 

자, 그는 적어도 주님의 상황이 궁금하고 걱정도 되고 해서 심문받는 곳까지 따라간 것입니다. 만일 예수의 당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면 같이 체포되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사람 같으면 아예 그 집근처에는 얼씬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베드로는 그곳까지 따라간 것입니다.

 

그 역시 예수의 당이라고 같이 체포될게 두려워서 멀리 멀리 도망가고 싶었을 것입니다만 차마 주님을 외면할 수 없어서 그곳까지 따라간 겁니다. 일말의 양심은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전혀 양심이 없는 이들보다는 분명히 더 나은 사람입니다.

 

멀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지 않았기에 그는 주님을 부인하게 된 겁니다. 만일 그가 더 비겁해서 더 배은망덕해서 멀리 멀리 도망갔다면 그 날 밤에 주님이 잡혀계신 대제사장의 집에 가지 않았다면 닭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는 그런 일은 아예 일어나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적당히 비겁했고 적당히 의리있었고 적당히 정이 많았기에 그런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된 것입니다.

 

비록 이게 그의 약점이 되었지만 우리는 충분히 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의 제목은 베드로를 위한 변명이 더 어울립니다.
베드로를 위한 변명.

 

베드로는 주님이 잡혀가시자 멀찍이서 주님을 뒤따릅니다. 이만큼 가까이 까지 온 제자는 베드로와 다른 한 제자 뿐입니다. 그 다른 한 제자는 대제사장과 알고 있기에 심문장으로 따라 들어갔고 베드로는 심문장에 들어갈 신분이 못되어서 아니면 처지가 여의치 못해서 바깥뜰에 머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그는 체포의 위협을 무릅쓰고 심문장 바깥의 뜰에까지 들어가서 불을 쬐는 무리들 가운데에 섞여서 불을 쬐고 있습니다. 팔레스틴은 사막기후라 밤에 제법 춥습니다.

 

그러다가 한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는 사람들에게 소리쳐 베드로 역시 예수의 당이라고 고발합니다. 이 여종은 나이어린 계집종으로서 대제사장의 집 문을 지키던 여종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여종은 대제사장을 따라서 심문장으로 함께 들어갔던 사람인 다른 한 제자가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도록 부탁한 사람인 것으로 보입니다. 어린 계집종이라고 합니다. 옛 성경에는 비자. 그러다가 베드로를 알아본 여종이 베드로의 신분을 폭로한 것입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이 여종은 예수의 무리를 적발하는게 큰 공을 세우는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이 여종은 이전에 베드로가 주님과 더불어 있는 것을 몇차례 본 모양입니다.
여기서 있었다는 말은 한번 정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게 아니라 여러 차례 쭉 계속해서 함께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추종자, 나사렛 당 이라는 말이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가만있는데 여종이, 나이어린 계집종이 베드로의 신분을 폭로하는걸 보면 기분이 묘합니다. 없는 처지에 없는 사람끼리 서로 돕고 위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 났는데요, 마치 내가 이번에 큰 공을 세웠다는 듯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려고 큰 소리로 떠듭니다.

 

아니면 주인의 영향을 받아서 , 또 나이어린 계집종이므로 무식해서 아무것도 몰라서 진심으로 예수님을 적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당여를 체포해서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뜻하지 않게 나이 어린 여종에게 정체를 들켜버립니다.

 

이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베드로는 자기의 정체가 탄로 나자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외칩니다.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다.

 

이 말은 예수님을 알고 있다 모른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경상도 말로 “니 무슨 소리 하노?”

뭔 말인지 모르겠다.

 

직접적인 부인이 아니라 두루 뭉실하게, 완곡하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모른다는 말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입으로 직접적으로 예수를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직접적인 부인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급히 바깥뜰을 벗어나려고 앞문으로 걸어 갑니다. 정황상 베드로는 이때 집의 대문을 나서서 밖으로 나가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 안쪽으로 더 들어가려고 한 것 같습니다. 주님이 심문을 받는 곳으로 들어간 겁니다. 다른 제자가 심문장이 있는 곳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했기에 그쪽으로 가려고 했던겁니다.

 

이 사람 베드로는 적어도 졸장부는 아닙니다. 주님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려고 주님이 심문받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려 한 겁니다. 신분이 들킬 위험을 무릅쓰고 오히려 집안으로 더 들어간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를 위해서 변명할 수 있습니다. 배신자하고는 전혀 다른 행태를 보입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를 가로막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71절에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이집의 종들은 정말 집요합니다. 나사렛 당을 잡아서 모두 씨를 말리려고 눈에 불을 킨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그만큼 유명하기도 한 모양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모른척 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면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일파로 몰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집안에서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일단 한번 여종의 의문이 제기되자 여러 사람들이 연달아서 여기저기서 베드로의 정체에 대한 의문을 폭로하기 시작한 듯 보입니다. 그만큼 베드로의 얼굴도 많이 알려진 것입니다. 베드로 에게는 지금 일생일대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작은 계집종의 말뿐이라면 모른척하거나 네가 뭘 잘 모른다는 식으로 얼버무릴 수 있겠는데 이제는 그 안뜰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정체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72절에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을 맹세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그를 부인합니다. 첫 번째의 애매모호한, 두루 뭉실한 부인이 아니라 보다 직접적으로 부인한 것입니다. 그것도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했습니다. 사정이 급하거든요.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을 절대 알지 못한다는 것을 맹세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 맹세는 하나님께 하는 맹세입니다. 하나님께 맹세코 나는 예수를 모른다. 웃깁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는 지금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겁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그곳에 있는 모두가 ‘예수가 혹세무민하며 신성모독의 범죄를 저지른 쳐 죽일 사람’이라고 이를 가는데 베드로는 거기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사람들 사이에서 주님의 동태에 귀 기울인 겁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의 의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주님의 편인지 주님의 반대편인지를 분명히 해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중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부인하게 된 겁니다.

 

가련하지요. 그렇게라도 해서 이 위기를 벗어나려고 하는 베드로의 노력이 눈물겹지 않습니까?

이게 보통 인간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만 특별히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 가운데서도 얼마던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회색지대에서 어중간하게서 있는 것을 좋아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편인지 아니면 예수의 편인지를 명확히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편이 아닌 이들에게는 온갖 저주와 악의를 가지고 덤빕니다. 베드로는 그래도 예수님이 심문받는 장소까지 따라와서 안의 동태가 궁금해서 체포될 위기를 무릅쓰고서라도 예수님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우리들이라면 아마 택도 없을 겁니다. 아예 모른척 하려고 혼자서만 살려고 천리만리 될 수 있으면 예루살렘성을 벗어나서 더 멀리 가고자 할겁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주님을 잡으려고 몰려왔을 때 검으로 예수님을 보호하겠다고 예수님을 잡으러온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일대 백의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지키려고 칼을 빼서 휘두르는건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비록 주님의 꾸중으로 검을 거두었지만
그래서 놀라고 당황해서 예수님이 잡히시는 것을 보고
동료인 가룟 유다의 배신을 보고 함께 있던 다른 제자들은 흩어져 도망갔지만 베드로는 그래도 따라 간겁니다. 멀찍이서.

 

우리는 어때요?
평소에는 우리가 일이 잘될 때에는 ‘주님 너무 감사합니다. 당신의 은혜로 우리가 이렇게 행복합니다’면서 울고 불고 난리를 치다가고 막상 일이 안되고 어려움이 닥치고 핍박이 닥치면,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불리한 일이 생기면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안면을 몰수하지는 않습니까? 베드로처럼 멀찍이 서라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반대방향으로 정신없이 도망하지는 않습니까?

 

한때 기독교도였다가 배교한 자들이 기독교를 욕하고 공격하는데 가장 앞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보다 목사 장로 권사의 가족들이 더 기독교를 핍박하며 공격하고 욕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들이 기독교회를 제법 알거든요. 그래서 더 기독교인들의 비리와 약점을 잘 파고들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베드로만 일방적으로 욕을 하는 것은 베드로에게 뭔가 좀 억울한 것 같습니다.
차라리 멀리 도망가서 예수님 주위에 없었더라면 여종에게 들켜서 거짓 맹세를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예 그럴 기회가 없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맹세를 하고 있는 베드로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큰일 났다는 생각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불안과 공포가 그를 옥죄며 괴롭혔을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이 자리를 모면하고자 거짓맹세까지 하게 된 겁니다.

 

이정도로 노력했다면 베드로의 시도가 성공하고 위기를 벗어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됩니다.

 

73절에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이 사람은 베드로가 검으로 귀를 쳐서 떨어지게 한 ‘말고’의 친척이랍니다. 아마 예수님을 잡을 때에 같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더 베드로에게 원한이 맺혀 있겠지요? 물론 예수님이 말고의 귀를 도로 붙여 주신 것은 맞지만 어쨌든 베드로는 귀를 잘랐지요. 사람들은 이때 베드로를 똑똑히 기억하게 된 겁니다.

우리 성경 본문에서 ‘조금 후’라는 말은 ‘한시간 후’입니다.

 

두 번째로 맹세까지 하며 부인하고서 베드로에 대한 의혹이 해소된 듯했지만 베드로에게는 더 큰 시련이 닥칩니다. 이제는 한사람이 아니라 여러명이 동시에 베드로에게 의문을 표시합니다.

 

여기서 잠깐, 베드로가 세 번째로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 전에 무려 한 시간씩이나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 시간동안 도망을 가도 충분합니다. 그렇게나 위급한 상황을 겪고도 그는, 그 베드로는 예수님을 버리고 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보고 시비를 거는 이가 없겠지 생각하며 주님의 재판결과가 궁금하고 사랑하는 선생님의 안위가 걱정되어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만 특별히 더 세게 비난받아야 합니까?

이기적인 인간, 자기의 몸은 끔찍이도 여기는 인간으로서 그 정도면 할 만큼 한 겁니다. 그런데도 시간여유가 있을 때 도망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베드로가 더 비난 받아야 합니까?

 

베드로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증거로 든 것은 베드로의 말투입니다.
“네 말소리가”라는 말은 원문상으로는 “네 말투 조차도”라는 말입니다. 다른 증거도 많이 있지만 그러니까 ‘내가 저 사람이 나사렛 예수와 같이 다니는 것을 여러번 봤다’는 그런 것하고 또 ‘그 말투도 네가 예수의 무리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아마 갈릴리 방언이나 갈릴리인들 특유의 억양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가령 72절에 베드로가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라고 할 때 유대인들은 사람을 ‘이쉬’라고 발음하는데 갈릴리인들은 ‘이트’라고 발음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그 말이 올무가 된 겁니다. 예수님도 갈릴리인고 그의 제자들이 대부분 갈릴리인이므로 이것은 상당한 증거가 됩니다.
오늘밤 베드로에게는 위기가 중첩됩니다.

 

너무 너무 다급해진 베드로는 결국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고 맙니다. 그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이전에 그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는데 이제 너무 다급해 지니까 그는 자신이 주님의 무리가 아니라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 저주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저주한 대상은 주님은 아닙니다. 이 사람은 그래도 양심이 있습니다. 차마 주님을 저주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럼 어떤 저주를 했느냐?

 

그가 저주한 것은 이렇습니다. ‘만일 내 말이 거짓이라면 내손에 장을 지진다.’ 그런 말이지요. ‘만일 내 말이 거짓이라면 천벌을 받아 죽어도 좋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말이 참이라는 것을 보인 것입니다.
이 정도면 베드로는 양심가입니까? 그래도 인간쓰레기는 아니지요?

 

인간들은 어떻습니까? 자기가 살려고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를 저주하는 일을 보통으로 합니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았다면
차라리 그 장소에 가지 않았다면
시간여유가 있을 때 그 자리에서 도망갔더라면
베드로는 자신을 저주하는 상태에까지는 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지만

 

베드로의 어슬픈 인정? 정의감? 의리? 때문에 그는 자신을 향하여 저주하게끔 되었던 것입니다. 그냥 주님을 부인했고 그래도 안되니까 자신을 저주까지 하는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에 대하여 의혹을 제기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네가 예수를 모른다면, 그와 관련이 없다면 그러면 그를 저주해라, 그러면 믿겠다.
그런데 차마 주님을 저주하지 못한 베드로는 자신을 저주한 것입니다.

 

옛날 공산권에서 기독교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십자가를 땅에 눕혀 두고 그곳에 침을 뱉고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도록 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또 성경책을 찢어서 불태우도록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말로 하지 말고 네가 행동으로 예수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라.

 

너의 행동으로 예수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것을 보여라. 그러면 네가 예수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믿어 주께. 그때 수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해서 자기 목숨을 살렸습니다. 인간은 그렇게나 나약한 존재입니다. 엄청난 위협앞에 목숨이 위태로울때는 목숨을 내걸면서 신앙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런 믿음의 용사가 있다면 성경에 나왔겠지요.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만일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어떨 것 같습니까?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거야.’
하하, 좋습니다. 그렇게 반드시 하시기를 바랍니다. 너무 너무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 육신을 가진 연약한 인간들은 거대한 폭력과 공포 앞에서 버티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베드로도 역시 그런 인간의 , 평범한 인간 군상의 한명이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특별히 더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를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를 위해서 변명을 합니다.

 

그 저주와 부인의 말이 끝나자 말자 닭이 울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절하면 달걀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생각이 난 겁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 날 밤이 되기 전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굉장히 충성스러운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 다음에 주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에이, 설마. 내가 그럴 일은 결코 없다’고 생각했는데 닭울음소리를 듣고서야 이게 생각이 난 겁니다.
그렇게나 호언장담한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그는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며 맹세한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얼마나 기가 찼겠습니까?

 

한국 속담에 작심삼일은 들어봤어도 하루도 안되서 변한다는건 정말 너무 심합니다.
아, 나는 결국 연약한 인간이구나!

 

주님을 끝까지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한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그를 부인했구나! 사람은 막상 일이 닥치기 전에는 모르는 겁니다. 일이 닥치고 나서야 비로소 호언장담은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별 수가 없습니다. 우리네 삶은 항상 그렇습니다. 도저히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도 모르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겁니다. 나를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는 거지요.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했답니다.

 

여기서 ‘심히’라는 말은 ‘쓰라리게, 비통하게’라는 말로써 베드로가 엄청나게 애통해하며 회개하는 심정으로 자기의 행동을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일생동안 그날의 행동을 후회하며 주님을 따르다가 순교한 것이지요.

 

순교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충분히 로마에서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도망에 거의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지금의 이 말이 생각난 것입니다.
주께서 로마에서 급히 피신하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네가 그때도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더니만 이제도 나를 버리고, 나를 따르는 양떼를 버리고 또 도망가는구나’

 

그러자 베드로는 살길을 버리고 다시 불타는 로마로 되돌아 갔고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게 된 겁니다. 베드로에게는 주께서 잡히시던 밤의 부인과 맹세, 그리고 저주가 씻을 수 없는 상처로, 회한으로 남아 있었던 거지요.
이런 생각이 든 것이지요.

 

‘내가 다시 도망갈 수는 없어.
여기서 내가 도망가는 것은
양떼를 버리고 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는 것은
결국 주를 또 한번 모른다고 부인하는 것이며 주를 버리는 것이야’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고 싶습니까?
그의 고난에도 동참해야 합니다.
부활의 열매를 따먹고 싶습니까?
고난의 열매도 맛보아야 합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기쁘고 즐거운 일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믿지 않고 심지어 성도들조차도 2/3가 안믿는다는 그 부활절이지만 우리 주님의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며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영생에 대한 희망을 주며 천국소망을 가지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 다시금 부흥하고 부활하여 새롭고도 신선하게 그리고 원기왕성하게 모든 일들이 잘 풀려지는 역사가 성령의 은총속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성도들의 가정에 드리웠던 먹구름이 개이고 광명의 빛이 충만하게 비취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행복한 신앙생활 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을 기쁜 부활절입니다. 기뻐하며 즐거워합시다. 이 기쁨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줍시다.

 

절망가운데 있는 이에게 희망의 빛이 비취고
암에 걸린 이가 나음을 입으며
낙심하여 멀리 떠났던 이가 돌아오며
미워하던 이들이 서로 화해하고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가 있게되고

 

힘이 없는 이에게 새로운 힘이 솟아나며
지혜가 없는 이에게 지혜가 충만하게 되며
부활의 기쁨에 더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부활절날 새롭게 변하여 주님과 승리의 기쁜 행진을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아멘.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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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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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부활이 없었다면 참 허무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부활절은 성탄절 만큼이나 중요한 기념일이라 생각하고요. 인간을 대신해 십자가 고난을 당하고, 또 부활을 한다는 개념이, 일반적으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이런 것을 비판한 영화들도 있었습니다. 만약이지만, 예수님이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면, 오늘날 빨간 단두대 들이 첨탑 꼭대기에 걸려 있을테냐 라고 말이에요. 그런 만큼 기독교인은 정말 독특하고 신비한 것을 믿고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니요.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다는 것은 신의 저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득권은 위협적인 예수를 십자가로 죽임으로써 어차피 저주 받은 인생일 뿐이었다고 격하 시키고 싶었을 테지요. 이런 착착 진행되어가는 절망의 과정을 베드로는 일부러 가까이에서 보려고 했다는 점에서 큰 용기가 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삶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되었던 삶의 아픔으로 인해서,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님을 전파하는 소명을 다하는 순교의 삶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더 큰 꿈, 복음으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꿈을 향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아픈 기억들은 언제나 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를 성숙으로 이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오늘날은 예수님을 부인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초상화를 밟고 지나갈 일도 당연히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새인가 합리주의, 과학, 논리 등에 사로 잡혀서, 부활이나 이적 등을 말도 안 된다고 부인하기는 참 쉬워졌습니다. 어느새 우리는 저마다 다들 똑똑해졌다고 착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놀라운 경험들을 생각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는 것을 믿으며,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제일 중요함을 애써 또 생각해 냅니다. 읽고 있는 책에서 역사는 마니아들이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말을 조금 변용한다면, 예수마니아, 성품이 훌륭한 예수쟁이들이 되어서, 선한 세상을 향해 대담하고, 멋지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2017. 부활절을 기념하며.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