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엠마오로 가는 길(누가복음24:13-35)/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4. 28. 05:45

 

엠마오로 가는 길 (누가복음24:13-35)

 

지난주는 부활절이었습니다. 달걀을 삶아서 포장하고 그리고 나누는 행사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저희들이 전도지를 나누어 줄때는 보이지 않던 폭발적인 반응을 보고 내년에는 더 많은 달걀을 삶아서 나누자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하지요. 매년 조금씩 더 발전하는 부활절이 되면 좋겠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어떤 통계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65%가 부활을 믿지 않는답니다. 글쎄요, 그 정도로 부활이 인기가 없습니까? 하기야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믿기 어렵습니다. ‘예수믿는다고 해서 굳이 부활까지 믿어야되나?’

 

그런데 안타깝게도 부활은 기독교를 기독교로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려고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고 인간이 낙원에 있었던 그 상태를 주를 믿으므로 회복시키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교회는 좀 다른 모양입니다. 부활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냥 기복주의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복도 주실 수 있고 명예와 권력과 기쁨과 즐거움 뭐든 자기가 주고 싶어 하는 것은 다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거받으려고 주를 믿는 이들에게는 좀 서운하게 생각하십니다. 그것보다는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고 피흘려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려 내 죄를 사해 주신 그 은혜에 감격해서 주를 믿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그렇게 주님을 감동시키게 되면 나머지는 말을 안해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을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건 하나님 아버지와 공동으로 실행한 프로젝트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성령 하나님도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단순히 복받기위해 믿는 것 보다 그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해서 믿는다면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려는 것은 아니고 그냥 사는 동안에 몸건강하고 돈많이 벌고 출세하고 좋은 사람 만나서 사랑하고 이렇게 이 세상에서 복을 받으려고 예수믿는데요. 이렇게 말하면 하하, 우리 주님이 알아서 하시겠지요. 우리는 주님의 능력을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단 우리는 부활에 대해서 더 나가봅시다.

 

아무리 부활절이 기독교에서 중하고 최고의 신비라고 해서 무턱대로 믿어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뭔가 구체적인 증거가 있어야 우리들이 부활절을 믿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물론 저보고 부활을 믿어라 이렇게 하면 저는 당연히 믿겠지만 다른 많은 분들은 안믿을 겁니다. 아니면 믿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주님의 부활에 대한 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부활을 증거하기위해 여러 가지 목격담과 메시지를 준비했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부활을 쉽사리 믿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활을 목격한 많은 증인들의 기록을 수록해 두었습니다. 이런 많은 증언을 수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부활을 목격했다고 하는데 그 생생한 증언이 여기 있는데 그래도 안 믿을래?’

 

참고로 주님의 제자들은 그 부활을 증거하기위해 자기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요한 한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순교했습니다. 물론 배신자 가룟인 유다는 제외해야 하겠지요? 요한은 대신에 밧모섬에 귀양을 가서 중노동을 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결코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고 마침내 순교한 겁니다. 거짓을 위해서 죽음까지 불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
부활절의 뒷얘기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후에 즉시 승천하신게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과 신도들에게 알리셨고 끝에는 오백명의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은 증인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전의 이야기를 오늘 우리는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기 부활의 뒷이야기,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목격한 부활절 후일담이 여기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고 합니다.

“그들 중에 둘”이라는 것은 제자들 중에 두명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누가를 제외하면 마가복음에만 아주 짧게 나와 있을 뿐입니다.
사실 주님의 무덤을 보러간 여인들이 주님의 부활을 증언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주님의 다시 사심을 믿지 못했습니다. 당연하지요. 사망권세를 이긴 그 장엄한 역사는 인류사에서 아주 드문 것이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믿기가 사실 어렵습니다. 내가 보았거나 내가 직접 죽었다가 살아나기 전에는 사실 믿기가 어렵습니다.

 

여기 ‘서로 이야기하더라’는 말은 서로 일상적인 일을 이야기하거나 아니면 길가면서 도란도란 세상사는 이야기를 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논의하고 토론하고 심지어 논쟁까지도 했다는 말입니다.  길가던 두사람이 서로 노변정담을 나눈게 아니라 격렬한 논쟁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논쟁은 언제 합니까?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을 때 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생각이 일치한다면 토론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건 맞장구라고 하지요.

 

실제 이 두 제자의 엠마오로 가는 길은 상당히 분위기가 무겁습니다. 왜 무거운가하면 주님이 부활하셨는가 아닌가를 두고 서로 의견이 엇갈렸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다 주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주님이 부활했다는 소식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믿는 이도 있고 믿지 않는 이도 있었는데 이 둘이 서로 입장을 달리해서 논쟁했다는 겁니다.

 

이를 미루어 사람들은 심지어 주님의 제자들조차도 주님이 다시 사신 것을 믿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믿기가 어렵습니다. 참고로 이 두 제자는 12제자 중에 들어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주님을 열렬히 따랐던 제자들입니다.

 

지금 두 제자가 가는 목적지인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약 1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엠마오가 정확하게 지금의 어디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여하튼 예루살렘과 매우 가깝고 하루만에 갔다 올 수 있는 거리였다고 합니다.

 

이 엠마오로 주님의 제자들 중에서 두 사람이 길을 갑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되어진 일’을 서로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만나서 이제까지 함께 했던 일들, 주님의 죽음 이런 것을 이야기 한 듯합니다.

 

왜 주님은 혁명이나 민중 봉기를 일으키지 않고 죽음을 순순히 받아 들였는지에 대한 토론도 있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사람과 아직도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람사이의 논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왜 엠마오로 가고 있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마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길을 가는 도중에 언제부터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주님이 이들과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보다 자세히는 이들 가까이로 주님이 오셨고 같이 동행하게 되었다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로 까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 길 을가는 여행객들이 서로 뭉쳐서 길을 가는 것은 절대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치안이 확보되지 않고 강도니 맹수들이 들끓는 세상에서 서로 뭉쳐서 다니면 의지도 되고 든든합니다. 그래서 같이 길을 가는 겁니다.

 

엠마로로 가는 두 제자들은 지금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눈이 가리워져’ 주님이신 줄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알지 못하고 모든게 끝났다고 생각하며 큰 슬픔에 잠긴채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주님이신 줄을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마치 우리들 같지 않습니까? 주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에도 ‘주님 당신은 지금 어디계십니까’하며 그를 찾고 있는 우리들 같지 않습니까?
‘얘야, 나는 지금 너의 옆에 있어. 우리 함께 길을 가고 있쟎아.’ 우리 주님은 안타까워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간구가 부르짖음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주님이 우리와함께 하고 계심을 거듭거듭 알려 주는데에도 우리는 여전히 눈뜬 맹인처럼 주님을 보지 못하고 멀리 계신 주님만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나의 바로 곁에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위급한 순간에, 주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 순간에 우리 주님은 보이시지 않습니다. 그런데요, 주님은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모든 삶에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낙망치 말 것입니다.

 

참고로 엠마오 도상의 주님은 영으로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함께 걷고 계신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가 주님이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의 모습이 변해서?

 

글쎄요 그럴 수도 있기는 합니다만 많이 변한 것은 아닐겁니다. 본바탕이 어딜 가는게 아니니까.
그럼 왜 알아 보지 못했을까요?
이 제자들은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에 여기에서 자기들과 함께 이야기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마 ‘돌아가신 우리 주님과 참 많이도 닯았네. ’아니면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인데?’
그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아니라면 주님은 이때 깊숙이 내려오는 모자를 뒤집어쓰는 복장인 중세 수도승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못알아 보았다...하하, 이건 제 생각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이들이 주님을 알아 보지 못한 이유를 ‘눈이 가리워져서’라고 합니다. 그래요 영안이 뜨이지 않아서 우리는 지금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와 이야기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는 지금도 우리의 곁에 계시다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이시며 이 세상의 모든 곳에 동시에 거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지구가 둥근데 한국하고 아르헨티나하고 정반대인데 여기에서 계시면 그곳에서는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지구보다 어마어마하게 크신 분으로 그분의 눈에 우리 지구는, 은하계는, 온 우주는 그분의 손바닥 위에 있는 야구공만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해가 될 겁니다.

 

보다 정확하게 ‘눈이 가리워져’라는 말을 원문으로 분석해 보면 ‘그들의 눈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게 계속 억제되었다’라는 말인데 여기에서 눈을 억제한 분은 하나님이라는 암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제자들의 눈을 가리워서 그가 예수이신 줄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영안이 어두워서 알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몸이 이상해서 그들이 주님을 못 알아본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영적 상태가 이상이 있어서 못 알아 본 것입니다. 이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났다고 생각한 상태에서 주님과 자신들이 이야기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소개됩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그러자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답니다. 그리고는 두 사람 중에서 글로바라 하는 사람이 말합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우리 식으로 말하면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람치고 그 일을 모르는 사람은 너뿐이다’

 

글로바가 누군지를 연구한 사람들은 글로바가 마리아의 남편이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잘 모르지만  당시 누가복음을 보는 사람들은 글로바가 누군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 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이 글로바인데 다른 한사람의 이름은 왜 나오지 않았을까요?

 

학자들은 이들이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것은 근거로 가족일거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아내나 아니면 아들이라는 거지요. 그 중에서도 아내랍니다. 아들이었다면 이름이 나왔을 거라는 것입니다. 여성 성도들은 너무 기분나빠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글로바란 이름의 뜻도 ‘유명한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고 가는 식구니까 ‘유명한 아내’일 확률이 큰 겁니다. 말장난 같지요?

 

예, 말장난이 맞고요. 어쨌든 이 제자들은 주님을 평소에 따라다니며 숙식을 함께한 12제자는 아니었지만 주님을 열심히 따랐던 제자들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당시에 이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이들은 지금 예수님을 유월절 축제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기간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을 왜 당신만 모르느냐하면서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엄청나게 유명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안 그래도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성이 터져나가라 모인 사람들 앞에서 당시 민란의 주동자였던 바라바와 개혁적 종교인의 이미지를 가진 예수님에 대한 심판은 안 유명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승리의 개선식을 한 분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습니다.

 

왕으로 들어가셨다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 기득권자들의 음모로 십자가에 달리신 비운의 영웅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지금의 서울이나 부산처럼 엄청나게 넓고 큰 도시가 아닙니다. 작은 동산위에서 한눈에 다 보일 정도로 아주 작은 성벽도시입니다. 그래서 글로바가 그렇게 이야기 한 것입니다. 왜 당신만 그 유명한 일을 모르느냐?

 

우리 주님의 대화법을 보세요.
무슨 일이뇨?
여기에는 단답형으로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부 이야기해야 합니다. 아마 예수님은 제자의 하소연을 다 들어 주기위해 그런 질문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제자는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하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말로서 당시 유대인들은 성이 없었기에 주로 이런 식으로 불렀습니다. 유명한 사람이 가족 중에 있다면 누구의 아들, 누구의 형제, 아니면 출신 지역명을 부르는 겁니다. 아마 나사렛 예수도 몇 명이 있지 않았을 까요?

 

예수님이 유명했기에 이후에 야고보에게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 이런 식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때 제자 글로버는 이렇게 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지금 엠마로로 가는 두 사람은 주님을 열렬히 따랐던 제자였지만 주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가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이었는데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일반인들이 예수에 대해 가진 관념하고 똑 같았다는 말입니다.

 

그에게는 아직 예수님이 메시야,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왜냐면 어떠한 역사도 일으키지 않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참 글로버가 말한 ‘능하신’ 이란 말은 ‘능력 있는’ 이란 뜻입니다.

 

계속해서 글로바는 말하기를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실제로 사형을 시킨 사람은 로마 총독인 빌라도입니다. 그러나 빌라도에게 사형판결을 가하도록 종용한 사람은 대제사장들과 유대의 관리들인 것이 사실입니다.

 

처음 예수님이 잡혀간 대제사장의 집에서 열린 것은 사형을 논할 수 없는 산헤드린 공회였습니다. 여기서 하는 일은 그냥 유대의 풍속에 관한 일과 종교에 관한 일이지 사람을 죽이는 권한은 없습니다. 왜냐면 유대는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고 산헤드린 공회는 식민지 찬조기관이지 국회가 아니었기에 사형을 시킬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형을 시켜야 된다고 생각해서 빌라도에게 사형을 시켜달라고 고소한 것입니다. 사형을 시킬 수 없는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갔기에 베드로가 그 집의 뜰에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유대의 종교나 풍속을 위배한 죄로 채찍을 몇 대 맞고 풀려나는 것이 당연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부분보다
‘우리 , 우리 대제사장들’ 이라고 하는 부분에 주목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여전히 유대교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님을 죽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우리 대제사장’으로 부른 것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이 로마인이라고만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형을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 바로 ‘우리 대제사장과 지도자들’이란 사실은 일부러 얼버무립니다.

 

제자들에게 주님은 종교 개혁자이자 젊고 개혁적인 랍비였지만 아직 새로운 종교를 개창할 그런 사람은 아니었고 더더구나 하나님이 보내신, 이스라엘민족을 구원할 메시야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자기들을 해방시키고 새로운 다윗왕국을 건설한 전설에서 말하는 그분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아니면 메시야라고 믿고 따랐다가 그가 죽고 나자 이제 실망해서 다시 선지자로 격하되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제자들이 생각하기로는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 대속을 하는 그리스도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 제자들의 인식은 여기까지였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조금 이상해지기 시작합니다. 이 제자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기를 바랐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메시야 이기를 바랐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들이 말하는 메시야는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정치적인 메시야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종교지도자가 아니라 혁명가, 새로운 세상의 왕이 되기를 바랐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러번 사람들과 제자들이 예수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를 원하는 장면을 기억합니다. 베드로도 요한도 야고보도 마찬가지였고 아마 유다 역시 주님이 왕이 될 생각이 없는게 확실해 지니까 배신을 한게 아닐까요? 여하튼 이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자, 이제 점점 이야기가 부활 쪽으로 접어 듭니다.
먼저 제자들은 말하기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라고 말합니다. 이제부터 주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먼저 사흘이란 말은 여전히 주님은 사흘째 죽어 있다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사흘 동안 시체에 영혼이 머물다가 사흘이 지나야 비로소 저세상으로 간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사흘 안에는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 겁니까?

 

사흘째란 말은 사흘이 지나가고 있다는 말이므로 이제 조금 있으면 진짜로 예수님이 죽을 터인데도 아직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마 이 제자들은 주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하면서 예수의 부활 의혹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 제자들이 비록 주님의 부활을 믿고 있지는 않지만 주님이 부활했다고 하는 주장은 들었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택도 아닌 소리 하지마라’ 이렇게 말하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새벽에 주님의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못보고 대신에 천사들이 예수가 다시 사셨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이야기해서 깜짝 놀라게 했다는 말을 합니다.
물론 그 말을 이들은 믿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상하다’ 이렇게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의 말을 듣고 남자들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갔는데 예수의 시체를 보지 못했다는 말을 합니다.

 

여기까지가 이 제자들의 말입니다. 이들은 비록 주님을 따르던 제자이기는 했지만
주님과 함께 유월절 영광의 행진에 동참하기는 했지만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닌 종교적인 신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민족의 독립과 나라의 설립 이런것에 관심이 있어서 그를 따른거지 뭐 하나님의 아들이고 영생하고 이런거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이상하다. 이런 뜬소문이 있다 정도의 소감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이들은 그분이 진정으로 ‘정치적인 메시야’였으면 좋겠다 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21절에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는 말에서 ‘바랐다’는 말은 ‘정말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랐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음으로 모든게 끝났고 우리는 지금 절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아무리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해도 그걸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무덤에 시체가 없는 것은 이상하기는 하다, 그리고 여자들이 천사들을 만나서 그가 살아났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여자들의 말을 듣고 남자들이 가서 봤는데 역시 무덤이 비어있었다고 하더라. 이 정도입니다.

 

누가 시체를 훔쳐 갔는지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고 다시 살아났다는 생각은 아예 없고 다만 이스라엘의 해방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다는 생각만으로 낙심하고 그래서 그가 슬픈 빛을 띤 것입니다. 더 이상 해방에 대한 꿈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당시에 주님을 정치적인 혁명가, 메시야와 비슷한 사람으로 믿고 따랐던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가끔가다 베드로만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 그 베드로 조차도 혁명적인 정치적 메시야로서의 주님을 꿈꾸었던 것이지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 죄를 대속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던 겁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대속의 피가 전혀 필요가 없게 느껴진 것입니다.

 

“안 그래도 천국가게 되어있는 선민인데 뭘 대신해서 피를 흘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선민입니다. 죄인이고 어쩌고 게다가 대속하기위해서 무죄한 피를 흘려서 죄를 씻는다는 생각자체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그가 부활하신 것을 확실히 보고서야 그의 증인이 되어서 이 땅의 것에서 하늘의 것을 소망하게끔 되었던 것입니다. 이 땅에서만 아웅다웅할게 아니라 저 세상도 바라보아야 하는구나!

 

로마의 압제와 박해를 이겨내고 그를 위해서 순교까지도 불사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박해를 이겨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주님이 말씀하기를 시작합니다.
첫마디부터가 과격하고 책망하는 말입니다. 게다가 깊은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미련하고’ 앞에 ‘오!’라는 감탄사가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듣고는 탄식부터 한 것입니다. 이래서는 십자가를 진 사건이 별 의미가 없어질 수 있습니다.

 

‘미련하고’ 라는 말은 ‘정신없는 자들’ 또는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인데도 두 제자는 그걸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시며 탄식한 것입니다.
‘더디 믿는’ 이란 말은 ‘행동이 느린’을 말합니다. 즉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신속하게 그걸 믿지 못함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소문이 있더라
신기한 일이다. 참 요상하다!
이 정도지 그걸 믿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들인 것입니다.
26절에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지금 하신 말씀은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의 딜레마입니다. 고난과 영광.
영광과 고난이 아닙니다. 고난 없는 영광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광의 규모를 조금 줄이고 고난의 깊이도 좀 감해주면 안될까요?
이게 우리 기독교인들의 딜레마입니다. 영광은 좋은데 고난은 싫어요. 그런데 어떻게 좀 안될까요?
하하, 우리 주님에게 한번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불가능하지 싶습니다만.

 

그래놓고는 본격적으로 구약성경에서 메시야에 대하여 기록된 구절을 쭉 드시면서 설명을 시작합니다. 이런 영적으로 무지한 자가 자신의 제자인 것이 너무 한심스럽기 때문일까요?
이렇게 열심히 설명하는 가운데 제자들의 목적지가 가까워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여행을 마치고 집에서 쉬게 될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길을 더 갈 것처럼 합니다. 그러면 이제는 헤어져야 합니다.
그런데요 신기하게도 두 제자들이 주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합니다. 본문에는 강권했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미련하고 더디 믿는 한심한 이들’이라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그것도 대놓고 한숨을 쉬면서 말한 것이 상당히 기분 나쁠만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증명하기 위해 주님이 성경말씀을 제대로 풀이한 것을 듣고는 주님의 말씀을 더 듣고 싶어서 그를 자기 집으로 강권하여 초대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상당한 인격자들입니다. 자기들을 비난하는데 기분 좋을 리가 없을 터인데도 더 배우려고 주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는데 그냥 의례적으로 한번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 강권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강권하면서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성경을 풀어서 가르치는 이가 예수 신줄 알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날이 이미 저물어서 더 이상 가기가 곤란할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강권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즐겨하는 좋은 미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참 예수쟁이의 모습이지요.
그래서 주님도 못이긴 채 제자들과 함께 유숙하러 가신 겁니다.

 

글로바의 집이었을까요? 어떤 이는 여관이나 민박집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밝히지 않습니다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식사를 함께 하시면서 주님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 주십니다.

 

축사라고 해서 혹시라도 기념식 축사를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이건 하늘을 향하여 축복기도를 했다는 말입니다. 보다 정확히는 식사기도라는 말이지요. 그러고는 떡을 떼어 주셨습니다. 여기서 떡을 떼어 주다는 말은 한번만 떡을 떼어 주고 같이 먹었다는 말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떡을 떼어 주면서 ‘더 먹어라 더 먹어라 뭐가 또 필요하냐’ 하는 정도로 이해하시면 좋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주님은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셨습니다. 이때 비로소 제자들의 눈이 밝아집니다.
영안이 비로소 뜨인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떡을 떼어 주시는 분이 주님이신 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요 그들이 주님이신 줄 알게 되자 이미 주님은 사라져 버리셨답니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란 말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에게도 이런 광경은 매우 익숙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식사 때마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여라도 우리 성도들 중에서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 보지 못한게 이해가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 보지 못한 것이 전혀 이상할게 없습니다.

 

가령 이제까지 까무잡잡했던 사람이 갑자기 아주 희어진다면 분명히 같은 사람임에도 알아보는 것에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같은 얼굴인데 얼굴에 광채가 나고 기미와 잡티가 없어지고 피부톤이 밝아지고 이런 식으로 변하면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는지 긴가 민가 할 수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이 이전의 모습과 똑 같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이제까지 식탁에 앉아계시던 주님이 갑자기 사라져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본문을 보더라도 주님의 몸은 이제 완전한 인간일 때의 모습에서 신격에 더 가까워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일부 신학자들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육체라고 표현했네요. 그리고 이 제자들은 12제자처럼 주님과 숙식을 함께하며 따랐던 사람이 아니라 그보다는 멀리서 필요할 때에만 주님을 따라다니던 보다 넓은 의미의 제자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자, 이제 남겨진 제자들은 서로에게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다시 상황을 간추려 보면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성경말씀을 배울 때 마음이 뜨거워졌고 주께서 축사하시고 떼어 주신 떡을 먹으면서 눈이 밝아졌습니다.

 

말씀과 기도?
이 두가지는 우리의 영성을 더욱 깊게 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두제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그들은 그 놀라운 감격을 두 사람만 가질게 아니라 다른 제자들과도 공유하기를 원했습니다. 너무 감격했기에 즉시 일어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다른 제자들을 만난것입니다. 비록 11제자들은 주님이 잡히시던 날밤에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모두 제 살길을 찾아서 흩어졌지만 거짓말처럼 다시 모여서 함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부활의 주님을 만난 감격을 우리만 간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고 이야기하려고 돌아 갔더니 이미 다른 제자들은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 그들만 주님을 만난게 아닙니다. 이미 주님을 만나본 제자가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래요. 그 체험은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나혼자만 간직하려고 하면 주님의 신비를 체험한 자로서 그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엠마오 도상에서 돌아온 제자들 역시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겪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바로 이겁니다.
우리가 이미 모든게 끝났다고 생각하고 낙망하며 왔던 곳으로 돌아갈 때
‘주님 당신은 지금 어디계십니까?
내가 지금 당신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한데 응답지 아니하십니까?’라고 외칠 때
우리 주님이 사실은 이미 나와 동행하고 있었다는 사실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과 대화하고 있었지만
나의 영안이 어두워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이미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주님,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으며 담대히 그리고 즐겁게 앞으로 나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혹여라도 삶이 너무나 힘들어서 한탄하고 계십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피곤하여 도저히 어찌할 수 없습니까?
밤이 맞도록 수고하고 힘썼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어서 그냥 포기하고 싶습니까?
‘주님도 나를 돌아 보시지 않아’라고 낙담되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미 주님은 나와 함께 계십니다.
나의 영안이 어두워서 보지 못했을 뿐 그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에게 힘과 지혜를 주시며 나와 함께 길을 가십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영안이 뜨여져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보이지 않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자가 복되도다’ 라고 하신 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믿으십시오.
나의 인생길에서
이미 모든게 끝났다고 내가 그렇게 강력하게 원했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고 실망만 안겨주었다고 낙담하고 쓸쓸히 돌아갈 때

 

나의 주님께서는 나를 그때도 버리지 않으시고 함께 동행하시며 인도하시고 나를 깨우치기 위해 말씀으로 떡으로 가르치시고 먹이신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고 기쁨과 담대함으로 주어진 길을 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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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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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 설교를 읽고 나면, 저는 눈길에 난 발자국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길을 가게 되면, 주님도 동행하시기 때문에, 발자국이 예쁘게도 4개씩 찍혀 있었다는 거에요. 그런데 몹시 힘든 순간이 되었고, 삶을 버티기 괴로운 순간이 되었는데, 아무리 주님을 불러도 응답은 없는 것 같고, 괴로운 마음 뿐이었어요.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당시를 되짚어보니까, 역시 발자국이 2개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어딜가고, 내 발자국만 찍혀 있단 말인가! 항상 곁에 계시다더니 나참! 하지만 정설은 조금 달랐습니다. 그 어려운 시절에는 내가 너를 업고서 너를 보호하고서 험한 길을 갔었단다, 그 발자국 2개는 내가 업힌 흔적이었다는 겁니다. 물론, 비유적인 이야기겠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며, 어려움 가운데서도 건지고, 정신을 맑게 차리게 해주신다는 생각을 합니다.

 

때때로 내가 잘못된 생각에 사로 잡혀서, 어찌할 바 모를 때, 우리를 인도하시고, 삶을 견뎌나가게끔 힘을 준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곁에서 오! 하고 탄식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너무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그런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고난의 순간을 더욱 힘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평 대신에 감사를 할 수 있게 되면, 주님의 동행하심을 체험으로 알게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화이팅! / 2017. 0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