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참제자의 길을 가라(마태10:5-15)/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5. 19. 04:52

 

원제 - 참제자의 길을 가라, 부제 - 네가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를 내가 쓰고 있었다 (마태10:5-15)

 

제가 서울에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포장이사인데 제가 최종적으로 트럭의 조수석에 타고 내려오는데 그 기사가 저에게 뭐하시는 분이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목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이분이 “그러면 돈잘버시겠네요? 팁좀 두둑히 주십시오”라고 하는게 아닙니까?

 

저도 순간 당황했습니다. 여기서 그 당시 저의 사례금 액수를 밝히는 것은 그렇고, 너무 너무 적게 받아서 매달 생활비 걱정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 돈 잘 벌겠다고 반응하는 그들을 보고 황당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그렇습디다. 일부 교회 목사들이 도를 넘는 사치를 부리고 교인들 앞에서 군림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게 일반인들에게 잘못 비춰져서 모든 목사들이 다 그렇게 호화롭게 사는 줄로 알고 난리를 치다니 참,

 

분명한 것은 일부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그런 목사들이 있다는 사실이고 이들은 우리 주 예수의 발자취를 전혀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목회자가 굳이 찢어지게 가난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항상 청렴하고 검소해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고요?

 

우리 주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제자이며 우리의 참 스승이신 주께서 우리에게 자기의 삶을 보고 따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그런 사실들을 관념적으로는 이해해도 실제적으로는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거대하고 화려한 예배당과 장엄한 분위기와 비싼 인테리어 그리고 고가의 설비에 정신을 빼앗깁니다. 붉은 카펫을 밟고 대리석 위를 걸을 때 마치 더 우월한 성도가 된 듯이 느끼지 않나요? 만일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을 했다면 그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런 것은 우리 주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요한이 주님을 한번 만나서 이야기 해보려고 그를 따라가려고 하자 주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지요. 그런 주님의 제자들은 지금 거대한 바벨탑을 쌓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빚을 지고서라도 거대한 탑을 쌓고 군림하려는 자세는 그들이 그런 것을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러면 교인들이 몰려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해보니까 되더라’는 경험칙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일들이 자꾸 벌어지는 것은 목사의 잘못이기도 하고 교인들의 잘못이기도 합니다. 뭐 좋습니다. 세상 풍조가 그렇고 그 세상풍조에 교회가 물들어서 그렇다고 합시다. 그래요,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제자도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제자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아닙니다. 절대로.

 

가장 가난하고 낮은 곳으로 오셨던 주님은 지금 가장 높은 곳으로 도약하는 뭇 교회들의 스승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닮지 않은 스승과 제자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발자취를 따를 것을 거부한 오늘날의 교회들은 자기가 진정한 스승 예수의 참 제자라고 강변합니다.

 

아니 어쩌면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강한 확신범들은 비정상적인 상황을 정상으로 믿고 그것을 지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요? 이것 역시 우리나라 교회들이 가지는 모순일 것입니다. 주님이 명령하신 진정한 교회의 모습과는 한참 먼 모습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몇가지를 주셨습니다. 먼저 주님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만일 이런 것들을 받지 못한 사람은 제자가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권능을 행치 못해도 우리는 분명히 주님의 제자입니다. 다만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이런 권능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참 제자가 맞다면 우리 주께서 우리를 제자로 인정하신다면 주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능을 오늘 우리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일입니다. 기독교는 뭐니 뭐니 해도 체험의 종교입니다. 참 제자도를 걷는 우리들은 주님이 제자에게 주신 권능을 틀림없이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이렇게 권능을 주신 주님은 다음으로 제자들에게 요구하십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자기의 말을 제자들이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먼저 주님이 주신 두가지 권능에서 뭐가 더 앞에 있습니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병고치는 것 보다 앞에 나와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다 약간 살을 붙이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먼저 우리의 정신과 문화가 풍조가 정화되고 바르게 되어져야 할 것을 주문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탄의 법아래서 사탄의 조종을 받으며 세상과 더불어 흥청망청하는 세상 풍조로부터 벗어나서 참 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을 주문하신 것으로 봅니다. 모든 것에 사탄의 교묘한 술수가 들어 있습니다. 그는 결코 우리들을 그냥 순순히 놓아 주려 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주님의 제자들은 그 사슬을 끊어내어야 합니다. 그러기위해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연후에 그 권능을 가진 제자들에게 참 제자도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두가지 권능을 주시고는 내보내셨습니다. 내보냈다는 말은 단순히 멀리 보냈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임무를 주어 대리로 파송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요, 주님이 주신 권능은 그 임무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뭡니까? 이 세상을 사탄의지배에서 해방시키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주님께서 건설하셨으니까 우리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고 잘 보존해서 영광스런 주님의 재림까지 지속시키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길을 가는 것이 바로 제자도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참 스승이신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의 교회가 될 것을 명하셨나요? 어떤 모습의 제자가 될 것을 명하셨습니까?

 

1.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먼저 우리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여기 이 문장을 원문을 참조해서 다시 번역한다면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다음에 반드시라는 말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이 말로 보면 주님의 사역의 일차대상은 이스라엘입니다.

 

제가 조금 조심스럽게 이 말을 우리에게도 적용해 보면 ‘해외선교보다 먼저 국내선교, 그리고 이름이 나는 곳보다 이름 없이 낮은 곳부터 먼저’ 이렇게 정의를 해 봅니다.

 

사실 한때 우리나라에 단기선교 붐이 불었습니다. 그래서 각 교회에서는 주로 방학을 이용해서 단기선교를 가는게 대 유행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단기 선교에 교회의 재정이 대대적으로 투자되었습니다.

 

갔다 온 이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이들이 단기 선교를 가서 큰 성과를 거둔 것은 없지만 선교팀원들이 선교를 준비하면서 또 그곳에 가서 신앙적으로 더 성숙하고 열이 붙어서 참 좋은 일꾼들로 많이 키워졌고 또 신앙생활이 더 윤택해 지고 여러 가지로 좋은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좋습니다. 이 정도면 재정을 대대적으로 투자해서 충분히 단기 선교를 갈만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맹목적인 해외선교 위주의 신앙생활에 탐닉하게 되거나 선교를 하지 않는 교회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극단주의에 빠지거나 기존의 교회들과 마찰을 빚는 일들도 생겨났습니다.

 

뭐 사소한 부작용일 수도 있고 오히려 그게 더 큰 활력을 가져오는 동력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언제부턴가 우리 교회들이 여름에 반드시 하던 여름 농활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옛날에는 대학에서만 농활을 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농활을 가서 시골 교회들에서 여름성경학교도 하고 농민들의 일손도 돕고 했는데 그리고 이것이 상당히 오랜기간 동안 한국교회의 전통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이런 전통들이 사라졌습니다.

 

한 때 농어촌 교회를 못자리 교회라고 하면서 도시 교회들이 계속해서 지원해야 한다는 말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이런 말은 찾아 보기가 어려워 졌습니다. 지금와서는 농활이라고 하면 오히려 좀 이상한 일로 여겨질 만큼 생소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좀 우스개 소리로 빨갱이 사상교육정도로 여기는 지도 모릅니다. 뭐 그럴리는 없다고 보고 혹여라도 농촌이라서 논일 밭일이 너무 힘들어서 또는 외국이 아니라서 인기가 없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솔직히 외국에 가는 사람을 모집하는데는 지원자들이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 국내에 봉사가는 일에는 매우 매우 소극적입니다. 그래서 하나 둘씩 이런 활동들이 폐지되었습니다. 물론 교회는 봉사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펴고 그리스도의 명령을 좇는 곳이지 단순히 어디를 돕고 하는 봉사단체하고는 다릅니다. 제가 봉사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 왜 국내선교는 등한시 하면서 해외선교에 우리가 여력을 쏟아 붓는냐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지금 매우 쇠퇴해있습니다. 전통을 자랑하던 지역의 중대형교회들은 물론 중소형교회들까지 구성원들 자체가 노쇠했습니다. 젊은이들의 유입이 거의 없습니다. 주일학교가 어른의 반토막도 안되는 것이 당연하다시피 여겨집니다. 그런데 불과 삼십년전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교회의 주일학교는 터져나갈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몇몇 초대형교회들로의 수평이동 말고는 거의 성장하는 일이 없습니다. 물론 교인들은 매해 감소합니다.

 

솔직히 지금 우리나라의 교회들은 해외선교에 집중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해외선교기여율이 전세계 1위인데 우리가 이걸 단순하게 복으로만 받아 들이지 말고 뭔가 비정상이다 이렇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왜냐면 해외선교를 지원할 수 있는 국내교회의 여력이 줄어지는 상황에서 해외선교기여율만 높아 진다면 당연히 국내선교에 등한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신구교를 합하여 복음화율이 30%가 안됩니다. 물론 최근 종교인구 자체가 감소해서 개신교가 최대 종파가 된 걸로 나오지만 아직까지 불교나 천주교도 굉장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신론자들이 과반을 넘어 서 있는 실정입니다.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절반이 넘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실정에도 국내를 외면하고 국외만 나가려고 하는 것은 뭔가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적어도 해외선교의 반만이라도 국내선교를 지원해야 하고 해외선교와 국내선교에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2.천국이 가까이 왔다하고
이스라엘집의 어린양에게로 가서 무슨말을 해야 하느냐면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을 하라는 겁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원래 하늘에 있지만 이제 이 땅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뭐로 다스리는고 하니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법률이 되는 겁니다. 그 공의롭고 자비로운 통치가 이 땅에서도 시작된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복된 소식이고 그래서 복음이고 그래서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바로 복의 통로가 되는 겁니다. 이 복된 소식을 널리 전하라는 겁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더 이상의 억울한 일도 없고 죄악과 압제로 고통받을 필요도 없으며 자기의 손으로 일한 결과를 정당하게 자기가 차지하고 누리는 그런 사회, 조금 모자라고 조금 약해도 함께 보담고 가는 사회, 나만 앞서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주위도 돌아보고 함께 더불어 나가는 사회, 악을 멀리하고 선을 권장하며 착한 이들이 걱정없이 살 수 있는 그런 복된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법이 중심이 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도합니다. 이 물질이 사용되는 곳마다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확장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바로 그 이야기를 하라고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지도 않고 그 명령대로 살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 명목상의 교인들, 신자도 성도도 아니고 단지 교인인 사람들을 교회에만 어떻게든 끌어 모아서 앉혀놓는다고 해서 주님의 명령을 준행한 것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걸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라고 감히 부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어중이떠중이들을 많이 모아 놓으면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이고, 아무개가 예수 믿는다니 참 기가찬다” 이렇게 되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되겠습니까?

 

3.병든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와, 우리 주님의 명령을 사람들이 왜 따르지 않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자를 살리며 나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겁니다.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만 우리가 과연 병든 자를 고칠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뭐 그럴 수 있다 칩시다. 그러나 죽은 자를 살리라는 일을 우리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요? 귀신도 우리가 쫓아 낼 수 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든 자도 고칠 수 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러나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글쎄요. 어렵지 않을까요? 주님이 말씀이니까 당연히 가능해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은 단순히 입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서 나아가 실천하는 것입니다. 봉사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확장하는데 기여하기 위해 주님의 명령을 좇기 위해 그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명령하신 일을 병원이 의사가 약사가 한다고요? 그러나 그들이 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특히나 중풍이나 치매나 암이나 이런거 슈퍼박테리아에 감염되어서 면역체계가 파괴된 이런거 솔직히 손쓸 수 없지요.

 

병명도 모르는데 자꾸 아프고 말라가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질병도 많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가 필요 없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그 옛날 주님의 시대나 지금이나 똑같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님은 천국을 확장하는 방편으로 천국의 확장을 전하는 한편에서 또한 병자를 고치며 죽은자를 살리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기를 원하셨고 직접 그 일을 하셨습니다.

 

더욱이 병을 치유함으로써 하나님을 멸시하고 인간의지혜가 자고해 지는 그런 것보다 병을 치유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더 빛나고 높임을 받는 그런일이 필요하지 않나요?

오늘날 교회가 점점 쇠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이 더 이상 역사하지 않는 교회가 되어서가 아닐까요? 왜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나요? 그것은 우리들의 심령이 너무 교만해 져서 아쉽고 답답한게 없어서 성령의 역사를 덜 사모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 주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심을 나타내 보여 주소서!

우리 주님의 명령은 계속됩니다.

 

4.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가지지 말라
본문에는 여기에 동도 가지지 말라고 합니다. 금이나 은이나 동도 가지지 말라. 와,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면 우리가 주님의 일꾼이고 그렇다면 주인 되신 주님이 우리의 쓸 것을 다 준비하는 것이 맞기 때문이랍니다. 우리 목회자는 돈을 쌓아 놓고 부유한 가운데서 사역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나의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먼저 아시고 우리가 걱정하며 애타하기 전에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놀라운 역사를 주님의 역사책에 쓰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전대에 금이나 은을 갖지 못했다고 낙망하고 답답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망할 필요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이제까지 역사하셨던 그 주님이 지금도 당연히 역사하실 것입니다. 앞으로도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감히 상상도 못했던 역사를 우리를 위하여 만들고 계실겁니다.

 

저는 그런 전능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저는 그 스승의 명령대로 따르렵니다. 인간적인 고려, 인간적인 방법,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색한 경우를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우리를 더 굳세게 하고 그 놀라운 역사로 말미암아 자기의 나라를 확장하게 하십니다.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가지지 않고 두벌 옷도 신발도 없고 지팡이도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어디서나 안전하며 승리하며 공급받을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지쳐서 너무 힘들어서 암담해 보여서 낙담하고 그냥 포기하고 싶습니까?

 

오 천만에요, 절대로 그래서는 안됩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제자가 되어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만들기를 원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결코 그 제자된 우리를 그냥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나의 필요와 나의 소원을 아시고 들어 주시며 감히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역사를 이루고 계시며 그 역사서가 지금 쓰여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했던 아득한 시절부터 아득한 언젠가의 헌신때부터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놀라운 기적을 만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뒤를 따릅니다. 아무런 걱정도 고려도 없이 그냥 주님의 명령을 따릅니다. 결과는 우리 주님이 책임지실 겁니다.

 

5.떠나기 까지 거기서 머물라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디에 가면 내가 이미 말해두었으므로 그 예비된 집에서 머물러라. 그가 너에게 필요한 것들을 모두 공급하고 너를 책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너무 너무 우리를 뻔뻔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머물 그 사람, 우리의 필요를 공급할 그 사람에게 주님은 자기를 대신하여 평안을 빌라고 하십니다. 이 평안은 솰롬이란 말입니다. 절대적인 평안, 여기에는 단순히 마음이 평안한 상태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육체적인 것도 경제적인 것도 자녀의 문제도 모든 것이 다 평안한 절대적인 평안을 말하는 겁니다.

 

그걸 우리보고 대신 빌어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사람이 합당한 이라면 그에게 평안이 간답니다. 왜냐면 우리가 임의로 평안을 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빌라고 하셨기에, 하나님이 그 집을 그 사람을 평안을 받을 이로 선택하셨기에 그 평안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혹여 그가 우리를 대접하기를 거부하면 그 빈 평안이 우리에게로 온답니다. 그러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나저러나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속에 있는 이들은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명심합시다. 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라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인도하는 대로 갈 때에만 유효한 것입니다. 내가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지 않고 주님이 가라고 하는 대로 가지 않고서는 왜 나에게 평안을 주지 않는지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대로 가기만 하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어김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6.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의 일을 대리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너무 너무 감사하면 평안을 빌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대신해서 그 사람의 행한대로 갚아 주신답니다. 엄청난 특권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 뒤에 나를 보내신 그 강력한 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우리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슈퍼파워 국가의 대사가 걱정합니까? 소소한 체면이나 눈치나 보면서 두려워하며 옹졸한 모습을 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초강대국을 대표하는 자이므로 항상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쳐 흐릅니다. 그리고 그 사람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대표하고 있는, 대리하고 있는 거대한 왕의 권세 때문에 그를 어려워하며 두려워하며 고마워하며 존중하고 대접하는 것입니다.

 

단 한가지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내가 지금 우리 주님이 명령하신 대로 가고 있는가? 내가 지금 주님의 편에 서 있는가 입니다. 만일 내가 주님의 길을 따르는 참 제자로 살고 있다면 나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를 받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스개 소리좀 할까요? 하나님이 왜 보이지 않습니까? 그는 영이라서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조금 더 확장해서 생각해 봅시다. 좀 쉽게 말한다면 그가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에 이 우주도 그에게는 겨우 발등상의 자그마한 점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가 감히 그 거대한 모습, 전체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어때요? 좀 그럴듯합니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개미들이 자기를 죽이는 사람을 보고 하늘에서 붉은 공이 내려와서 죽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더 똑똑한 개미가 아는 척을 합니다. 그것은 공이 아니라 손가락들이다. 손가락이 길쭉길쭉하기는 하지만 개미가 놀라서 위를 쳐다보면 둥근 손가락의 끝만을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개미들은 그 손가락들을 전체적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손가락들은 손에 달려있고 손은 팔에 붙어 있으며 팔은 몸체에 그리고 나아가서 사람이라는 거대한 신체의 일부이지만 개미의 적은 눈으로 그것을 다 볼 수가 없어서 공이라고 부릅니다. 아주 똑똑한 개미는 그것을 손가락들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때때로 아주 적은 하나님의 손길의 파편을 느낍니다. 그것을 체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느낀 그것보다 너무나 크시고 너무나 강력하셔서 또 너무나 위대하셔서 우리가 다 측량할 수 없습니다. 괜히 머리 굴려 가면서 하나님과 경쟁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괜히 피보는 것 같고 손해가 나는 것 같고 말이 안되는 것 같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나와는 도저히 비교불가라고 생각하고 주님의 명령대로 따르면 됩니다.

 

그렇게 참 제자의 길대로 참 스승이신 주님의 자취를 따르다보면 우리도 모르게 놀라운 은혜에 잠길 것이며 놀라운 복의 가운데 있게 될 것이며 참 평안을 절실하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솔직히 요즘 우리는 하루 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지 않습니까? 미세먼지에 화학첨가물에 뭐에 뭐에 스트레스에 이게 전부 일급 발암물질이랍니다. 지진에 해일에 이건 뭐 점점 더 이상해 집니다. 물도 공기도 이제는 우리편이 아닙니다. 말만하면 불황이다 구조조정이다 실업이다 뭐다 너무 끔찍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명령대로 가기만 하면 그런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 절대적인 평안을 누릴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나의 지혜가 정말 창조주 하나님을 능가한다고 믿습니까? 내가 우리 인간이 그와 비견되는 또 다른 신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됩니다.

 

참 스승이신 주님의 명령대로 그의 교훈과 훈계를 따르면서 그가 앞서간 발자취를 따라가면 놀라운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일에 동참하는 자에게도 하나님의 평안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놀라운 기적과 능력까지도 주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그리고 그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로써 결코 눈에 보이는 것에 주눅 들어서 우리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맙시다.

나는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교훈을 그대로 따를 것입니다. 오늘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평안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소원합니다.
우리 주님의 평안이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아멘. 주여 평안을 허락하소서.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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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삶은 짧고 유한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그래서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경험이 있었다면, 그 찰나의 삶 조차 아름답고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른바 소명, 사명, 같이 더 높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뜻밖에도 더 행복하고, 더 열심히 살아간다고 합니다.

 

알려진 벽돌공의 비유가 있습니다. 조금 편역하자면 - 1. 나는 하루 벌어 먹고 사는 벽돌공입니다. 2. 나는 때때로 교회를 짓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3. 나는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사람이라 행복합니다. 1,2,3은 모두 같은 일을 하지만 사고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저 역시 1에 가까운 사람이며, 천직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남겨놓는 글들이 십년을 갈 수도 있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거나, 힘이 될 수 있음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글을 잘 쓰고 싶어, 열심히 영화 보고, 열심히 책을 펼치곤 해봅니다. 새삼 놀랍게도 천직은 하루 아침에 계시처럼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계속되는 경험 속에서 서서히 내게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내게 맞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되어져 가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길을 걷고 있으며, 주께서 우리를 결코 외면하거나 버리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용감하고, 정의롭게, 그리고 이웃과 함께 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나의 내면의 선한 양심을 쫓아서, 멋진 일들을 해나간다면, 주께서 보시며 흐뭇해 하실 것이라 저는 작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2017. 05.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