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재물이 화를 부른다 (창세기13:1-13)

 

불의한 재물이 화를 부른다는 말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서 비웃음을 받을 확률이 높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생각은 그냥 돈은 어떻게 하던지 많으면 좋다는 거지요. 왜냐면 돈이 우리의 인생을 잘 살기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생의 목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돈돈 거리면서 돈에 목말라합니다. 물론 돈이란게 상당히 매력적인 아이템인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돈을 만드신 이유는 사람의 삶을 보다 편하게 하려고 하신 때문입니다.

 

어떤이는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돈을 만드시지 않았다. 인간이 돈을 만들었고 그때부터 사람들에게는 불행이 시작되었다’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말장난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불의한 재물이 화를 불러 일으켜서 롯과 그 일족들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하고 아브라함과의 사이가 나빠지게 하고 심지어 아브라함집안의 불화를 가져온 일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시끄럽다. 나는 불의한 재물이라도 많이만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실 분이 대부분이겠지만 이 설교를 듣고 난 다음 우리 하나님의 섭리의 한 면을 살피면 생각이 좀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1.불의한 재물/아내를 팔아

본문 1절에 보면 아브람이 그의 아내와 조카 롯과 함께 네게브 사막으로 올라간 기사가 나옵니다. 애굽에서 나온겁니다. 말이 나온거지 실제로는 추방당한 거로 보면 됩니다.

 

여기 나온 ‘네게브’를 이전 성경에서는 원뜻에 따라 ‘남방’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네게브는 이스라엘 국토의 최남단으로 사막지대입니다. 네게브 사막. 여기서 아브람과 롯은 목축을 했습니다. 그들은 원래 네게브에서 살다가 애굽으로 들어간 겁니다.

 

그런데 2절에 보세요.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갑자기 이 말이 왜 나왔을까요? 그것은 아브람이 애굽에서 모종의 일로 한몫을 잡아서 큰 부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애굽에 들어가서 생긴 일에는 뭐가 있습니까?

 

사래를 누이로 속여서 애굽의 바로의 궁에 넣었다가 도로 데리고 나온 일이 있지요. 이때 바로는 아브람과 혼인 동맹을 추구하면서 사래를 자기의 아내로 데리고 가는 대신에 애굽 여인 하갈과 엄청난 가축과 금은을 준 겁니다. 그리고 사래를 도로 찾고 난 다음에도 이 재물과 하갈은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걸 그냥 가지고 애굽에서 나온 겁니다. 뭐 바로에게 사기를 치고 재물까지 갖고 야반도주하다시피 나온건 아니고 아마 바로가 위로와 사죄의 예물로 그대로 준 모양입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아브람에게 잘 보일려고 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네 신에게 나를 벌주지 못하게 좀 잘 말해도’

 

사실 바로의 입장에서 이 일은 재앙입니다. 엉뚱하게 죄를 뒤집어 썼을 뿐만 아니라 재물도 뺏긴 치욕적인 일입니다. 바로는 당시의 관례대로 이방민족을 자기의 백성으로 받아 들이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결혼동맹을 맺은 것 뿌입니다. 족장의 누이를 아내로 맞고 자기의 궁녀를 아브람에게 주고 또 결혼 예물을 거하게 주어서 히브리족들은 자기의 백성으로 확고하게 만들려고 한 것 뿐입니다. 통치자의 도리로 한 겁니다.

 

결코 바로가 사래의 미모에 혹해서 색욕 때문에 사래를 취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거짓말 때문에 바로는 하나님의 큰 벌을 받고 사래를 돌려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 주었던 여자와 재물도 그대로 주게 된 것입니다. 애굽의 왕은 체면을 크게 손상시켰을뿐만 아니라 손해도 막심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아브람을 보호하셨는지 모욕을 당한 애굽의 바로가 아브람의 일족을 진멸하지 않고 사래를 죽이지 않고 자기가 주었던 결혼예물도 빼앗지 않고 단지 애굽에서 추방만 시킨 것을 보면 하나님의 특별한 가호가 여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보통의 바로들은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아예 그 부족 전체를 진멸합니다. 적어도 진멸하려고 군대를 보내서 쓸어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브람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거짓으로 바로를 우롱했고 아내를 팔아서 치부했습니다. 아브람이 자기의 목숨을 살리겠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정당화시켜려 해도 아내를 팔아서 치부한 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결코 옳지 못한 일입니다.

그래서 2절에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 바로 불의한 재물인 것입니다.

 

2.전에 장막쳤던 곳에 이르러
아브람과 그 일족은 애굽으로 내려가기 전에 그들이 장막을 쳤던 곳에 이르러 다시 장막을 치고 그곳에서 거주합니다. 예전에 아브람과 일족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곳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전보다 목초지가 줄었는지 아니면 이들의 양떼가 너무 많아 졌는지 풀이 모자랍니다. 물도 모자랍니다.
그래서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싸웠다고 합니다. 6절에 보면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원래 이 땅에는 아브람의 일족뿐만 아니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아브람과 롯의 가축이 얼마 없었기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는 곳에서 양을 쳤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브람과 롯의 일족들도 양떼가 많아 졌습니다. 네게브는 사막입니다. 더구나 대기근을 만나서 이 일대의 목초지가 확 줄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물도 풀도 모두 부족하게 된 것입니다.

 

애초에 아브람이나 롯이나 그 지역의 원주민인 가나안 인이나 브리스 사람들과 다툴 입장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추방당할 테니까요. 그래서 만만한게 가족들끼리 서로의 것들을 빼앗는 겁니다. 원주민들과 싸우기보다는 형제와 싸우는게 그래도 뭔가 쪽수가 맞아서 싸워볼 만 하게 여겨진 겁니다. 더구나 같은 곳에서 살고 같은 생활주기를 가지고 있으니, 항상 같이 있고 그러다 보니 서로 싸우는 겁니다.

 

3.서로 싸우게 하지 말자
이렇게 상황이 심각해 지자 아브람이 롯을 불러 서로 싸우게 하지 말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서로 갈라서자고 말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 이런식으로 말하면서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줍니다.

 

보통 한 공동체가 서로 싸우게 되면 화기를 더 상해서 회복불가능한 상태가 되기 전에 먼저 발전적으로 헤어지는게 좋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죽어도 내것을 빼앗길 수 없다고 서로 싸우게 되면 결국 히브리인들은 이방인의 앞에서 서로 상잔해서 죽는 길 밖에 없습니다. 보세요. 신앙을 위해서 수천리 밖에서 강을 건너고 사막을 건너 와서는 애굽에서 천신만고 끝에 이제 좀 살만해 지니까 서로 싸우게 된다면 얼마나 웃긴 일이 되겠습니까?

 

한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 이방인들이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재물이 늘어나자 이들 사이에 불만과 분열의 기운이 싹트게 된 것입니다.

 

제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만일 공동체가 분열하게 된다면 감정의 골이 깊어 지기 전에 먼저 발전적으로 해체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물론 이들이 해체할만큼 큰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에 갈등도 생기는 거지 겨우 밥만 먹고 살고 다른것에는 정신을 쏟을 겨를이 없다면 결코 발전적 해체니 뭐니 하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헤어지게 되었을 때는 강자가 먼저 약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뭐 어차피 둘이 비슷비슷하다고 해도 그래도 엄밀히 따지면 무게 추가 기우는 쪽이 있을 겁니다. 그런 쪽에서 먼저 상대에게 관용을 베푸는 겁니다. 만일 강한 쪽에서 관용을 베풀지 않고 상대에게 가혹하게 대한다면 공동체의 파국은 심각해 지게 되고 어쩌면 직접적인 투쟁의 상태에까지 들어가게 되어 양 공동체 자체를 파멸시킬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4.재물로 인하여 다투면 재물로 인해 무너지고
사실 아브람의 말은 별 가치가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겠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는 말은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따지고보면 자기 발로 자기 마음대로 가서 정착하는 겁니다. 그리고 요단강의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 아브람이나 롯의 땅은 아닙니다. 그들은 이 가나안에서 이방인일 뿐이고 유목민들에게 땅의 소유개념이란 건 없습니다. 그냥 물을 마시게 하고 넉넉한 풀을 뜯게 하면 그걸로 족한 겁니다. 그리고 농사가 아니라 유목이니까 이쪽 저쪽으로 옮겨다니는 것은 이들에게는 일상적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차피 내것은 없다. 그리고 가지고 가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이것을 정해진 시간동안 사용할 뿐이다. 그러면 잘 사용하자. 예,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네 삶이 조금은 더 여유로와 질 겁니다. 재물을 가지고 서로 극하게 부딪치고 싸우고 앙앙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이것 때문에 목숨까지도 위협하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평안이 깨어질 정도로 깊이 재물에 연연해서도 안됩니다. 인간을 이롭게 하려고 만들어진 재물이 인간을 옥죈다는 것은 우리 하나님의 의도에는 전혀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의도에 벗어난 것에는 시간을 두고 정도로 돌아오기를 원하시고 그래도 정도로 돌아오지 않으면 강제로 바르게 잡으려 하십니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아직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전이기 때문에 요단의 동편이 더 좋은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런만큼 요단의 동편에는 도시 국가들의 세력이 확고합니다. 요단의 서쪽에도 당연히 목초지가 풍족하고 나무가 많았겠지만 더 서쪽으로 가게되면 그때부터는 산지가 됩니다. 그러니까 동편은 들판이 제법 넓고 서편은 들판이 좁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아브람과 롯의 양이 얼마나 있어야 그 비옥한 요단의 초지가 부족하게 될까요?

 

물론 요단 동편의 비옥한 평지에 비하면 좀 없어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땅이 비옥하지 않으면 사는 사람도 적어지고 경쟁도 느슨해 집니다. 텃세가 약해진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처음 네게브사막에 살았던 이유가 원주민이 적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막지역이니까 척박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잘 살지 않기 때문에 이방인인 히브리족들이 살 수 있도록 놔 둔 겁니다. 대부분의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 말로라도 먼저 선심을 쓰는 겁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말이나 따나 부드럽게 하고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면 더 큰 갈등을 충분히 피할 수 있습니다. 너무 적은 것에 연연해서 아웅다웅하다보면 정작 큰 것을 잃게 됩니다.

 

5.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여러분 잘 보시면 아브람은 가나안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돔에 이르기 전에 먼저 롯이 옮긴 곳은 ‘도시들’입니다. 그러니까 여러 도시라는 말이 아니라 도시에 면해 있는 들판으로 옮겼다는 말입니다.

 

성읍도시 앞의 들판에서 양을 치게 되면 양털이나 고기같은 것을 가지고 곡식이나 베 그리고 식기 양념같은 생필품과 바꾸는 것이 매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까 롯은 이제 소돔도시 국가 연합의 성읍들 안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삶과 접하고 그리고 결국에는 소돔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롯은 자기와 두딸만 데리고 빈손으로 소돔을 탈출합니다. 그가 아브람의 목자들과 다투었다고 하는 그 많은 목자들 자기의 부족민들은 아무도 같이 탈출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신앙공동체가 나뉘어서 정말 한쪽은 전혀 못쓰게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으로 세상으로 나아가다가 결국 세상과 완전히 동화되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게 교회의 세속화가 위험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이 세상의 문화와 편리 그리고 향락을 동경하다보면 결국은 신앙의 정체성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야 이런저런 거리낌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바로 살려고 노력하게도 되고 때로 자기를 반성하는 시간도 가지는 것이지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면 그 세상문화에 흠뻑 젖어 있는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돔의 판사가 되어 그들을 바르게 인도해야 하고 그들의 풍속을 제도해야 할 롯은 자기도 모르게 천사들을 윤간하려고 하는 이들로부터 천사를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자기의 딸을 윤간당하도록 내어 주려고 하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제안을 하고 있쟎습니까?

 

남색이나 윤간이나 하나님의 증오하시는 행위임은 같습니다. 그런데도 롯에게는 전혀 다르게 생각되어진 모양입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하면 안된다’고 타이르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마자 바로 꼬리를 내리는 비겁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까?

 

이처럼 세상과 성도가 짝하게 되면 이들의 종국이 그렇게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는 세상과 구별되이 하나님의 거룩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처음 도시의 들판으로 갔을 때부터 롯에게는 거대한 유혹의 장이 열린겁니다.

 

조금씩 조금씩 소돔으로 가까이 가다가 결국에는 소돔안으로 들어가서 유목민의 족장 지위도 버리고 같이 간 목자들과 히브리인들의 정체성도 잃어버리게 하고는 혼자 고군분투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소돔사람들의 의식수준처럼 도덕적 타락에 젖어 들다가 하나님의 자비로 겨우 한몸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지경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재물 때문에 싸운이들은 결국 눈에 보이는 재물 때문에 더 큰 불행을 겪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아브라함 역시 이 애굽행으로 인한 재물 때문에 불행을 겪게 됩니다. 애굽 여인 하갈이 애굽의 바로가 사래를 데려가는 대신으로 아브람에게 준 여인인데 이 여인으로 인하여 이스마엘이 탄생하게 되고 그리고는 계속해서 큰 부인과 두 번째 부인이 서로 싸우고 학대받고 집에서 자식을 내어 쫓고 하는 비극이 벌어지는 겁니다. 불의한 재물로 부자는 되었지만 결국 이 재물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함으로 아브라함이나 롯에게 불행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불의한 재물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6.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이건 불의한 청지기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귄 청지기를 보고 칭찬하신 겁니다. 따지고 보면 재물자체야 가치 중립적입니다. 불의한 재물 의로운 재물이 없고 그 재물이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의와 불의가 갈리는 겁니다. 비록 불의한 재물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이 재물을 의롭게 사용하면 되는 겁니다.

 

불의한 재물이 집안을 망칠때까지 두고 보지 말고 이 재물을 흩어서 이웃을 구제하고 의로운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재물을 흩어 사용하는 동안에 그 추진비조로 자신도 좀 쓰고 그러면 이 재물은 비록 불의한 재물이었다가도 의롭게 쓰임받아서 이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위한 든든한 보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말씀하신 세가지 복의 조건이 뭡니까?
부모에게 효도하라
이웃을 구제하라
십일조를 바쳐라

 

이 세가지를 하면 결국 그 재물은 여분으로 좋은 일을 더 하게 만드는 의로운 것이 될 것입니다. 물론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재물을 쌓았다면 그건 돌려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흐르게 하고 그걸 가지고 아무리 좋은 일에 쓴다고 해도 그 죄가 사해질 수는 없습니다. 다만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 구조상 불의한 재물이 많이 쌓이면 직접적으로 편취한 재물이 이자에 수익을 더해서 큰 부를 이루게 하므로 그 여분의 물질을 가지고 좋은 일에 사용하고 편취한 것은 원 주인에게 사과하며 돌려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제 생각이지만 그렇게 해도 결국은 많은 것이 남아서 그가 부유하게 사는데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우리가 지금 재물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재물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 사용되어서 내 자녀와 내 집안이 그리고 우리 공동체가 잘 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솔직히 천하의 누구도 자녀농사에 대해서 큰소리 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자녀를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의로운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고 불의한 재물이 우리와 자녀를 망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이 재물로 어떤 좋은 일을 해서 우리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할까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롯은 소돔을 탈출하고 나중에  인근의 산에 숨어서 소돔들판으로 쏟아지는 불비와 불타오르는 연기를 보고 그렇게나 아등바등하며 모았던 재물이 정말 부질없음을 느꼈을 겁니다. 그럴줄 알았으면 좀 더 너그럽게 했을걸, 그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주위 사람들에게 신경을 썼을걸 이러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눈에 가치있는 것은 사실 인간의 눈에 가치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아예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하나님의 눈에는 더 가치있습니다. 어차피 인간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재주는 없으므로 우리가 생각하고 의식적으로 주의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지금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살피신다는 것을 명심하고 하나님 앞에 부끄럼없이 떳떳한 삶을 사는 우리 성도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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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저는 재물을 잘 쓰기가 제법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돈은 벌기가 쉽지 않으며, 쓸 때는 순식간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요즘에는 길티 플레져 라고 해서, 죄의식이 조금 느껴지더라도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소비를 하는 풍조가 있다고 하네요. 이것 자체는 마음의 여유를 키워주니까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도를 넘는 행위 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책에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수도가 6개면, 각자의 몫 수도꼭지 6개면 충분할텐데, 굳이 300개가 넘는 물건들이 생산되고 있다고 해요. 그만큼 우리는 일단 많이 가져야 안심하는 사회, 그래서 지나치게 삶의 만족 기준을 높게 잡아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을 도울 여유는 없다고, 챙기고 돌아볼 여유는 없다며, 쓸데없이(?) 냉정해 지기 쉽지요.

 

자신을 위해서 재물을 사용할 것인가, 타인을 위해서 재물을 사용할 것인가, 쉽지 않은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둘 다를 만족시키는 선택을 향한다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무겁게 생각할 필요는 없고, 설교에 나와있는 이웃구제 및 십일조로 시작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왜 이게 중요하냐고요? 그렇게 실천하며 살면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 2017. 06. 시북

 

by 시북 2017.06.01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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