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열왕기하6:8-23)

 

오늘은 6.25입니다. 지금부터 67년 전 북한군의 침공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벌어졌고 그 때문에 정말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미처 준비되지 못했던 남한 군대는 북한군의 탱크에 온몸으로 맞섰지요. 문자 그대로 몸으로 맞섰습니다.

 

민족의 분단이 비극의 시작이기는 하지만 이 전쟁은 한반도에 지독한 가난과 증오를 불러 왔습니다.
중공군의 참전에도 한반도의 남쪽이라도 지켜낸다고 우리의 선배들 조상들이 참 많이 힘들었지요. 우리 자체의 힘만으로는 부족해서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주러 왔고 그들이 흘린 피로 오늘날의 우리가 있는 겁니다.

 

67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까마득하기는 하지만 아직도 그 때의 노병들이나 유가족들이 생존해 있습니다. 까마득하게 오래전이기는 하지만 아직 잊히기는 너무 이른 날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마치 구한말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지나와 미국 그리고 일본이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노리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중공군이 북한 유사시에 진입한답시고 진공훈련을 했다는 이야기나 상륙훈련을 했다는 이야기가 예사로 들리지 않습니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사드배치지역에도 낙하해서 쳐들어오려는 의도를 숨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나라를 무시하는 행동으로 결국은 저들의 손해입니다. 왜냐면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지나에게 호감을 느끼거나 두려움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적대감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독도에 대한 야욕을 보다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고 미국은 돈벌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시절에 공부했던 역사책에는 조선이라는 고기를 낚시로 잡기위해 청과 일본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영국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삽화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다른 나라 신문의 삽화에 나타난 우리나라의 현실이 참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아마 당시에 조선에 살고 있던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런 위기를 까맣게 모르고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자기네가 낚싯대로 낚으려는 물고기로 풍자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지요.

 

제가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주변 열강들이 한반도를 놓고 각종 음모와 책략을 펼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병사의 수와 무기의 질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병사 수와 무기의 질이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국방력을 6위에서 10위 사이로 봅니다. 그러니 그렇게 약한건 아닙니다. 그러면 왜 걱정하느냐 하면 바로 우리의 정신상태 때문입니다.

 

도덕적인 타락과 이기심이 위험한 상태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타락과 이기심이 이전에는 주로 남들에게 행해졌다면 이제는 가족 사이에서도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해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출산률 저하와 대량의 미혼 그리고 이혼 이제 가족간의 거시기....끔찍한 일이라서 생략합시다. 원래 이 한반도를 하나님이 보호하시는데 더 이상 한반도를 보호할 가치가 없도록 사람들이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언론에 보도되는 끔찍한 행태는 도저히 여기서 말로 옮길 수가 없습니다. 죽고 죽이는 비극이 판을 칩니다. 뿐만 아닙니다.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사이에 전운이 감돕니다. 한 나라 국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도록 적대적입니다. 사사건건 부딪힙니다.  관용이니 사랑이니 이런게 전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경쟁과 투쟁만이 있습니다.

 

그래서 과연 이 나라가 하나님이 보실 때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나은 점이 있을까 우려스럽습니다. 성적으로 타락한 나라에 동성애 합법화를 위한 집요한 세력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군대내에서도 동성애를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헛소리를 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정말 황당합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 나라에 환멸을 느끼도록 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를 사탄의 지배하에 넘겨 주려는 것 같습니다.

 

내가 투자한 가게가 장사가 안될까봐 원전을 계속지어야 한다고 하는 극도의 이기심도 팽배합니다. 너희들이야 죽든 말든 나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 지금 내가 배가 고픈데 후손이고 뭐고 없다는 생각, 폐연료봉이 자연상태의 우라늄처럼 안전해 지려고 하면 무려 30만년이 흘러야 한답니다. 플루토늄을 제외해도 무려 300년이 흘러야 안전해 진다고 합니다.

 

지금 고리원전 1호기가 폐쇄되었습니다. 너무 감사한 일이고 다행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폐쇄가 된게 아닙니다. 미봉책일 뿐입니다. 발전은 중단되었지만 아직도 연료봉이 90도 이상으로 타고 있는 겁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아직 원전 해체 기술이 없습니다. 작년인가 집에 원전해체센터 유치를 위한 서명지를 가지고 와서 서명을 받아간 적이 있는데 아직 여기에 원전해체센터가 서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한 것 같은데 좋은건 몽땅 다른 곳으로 가고 여긴 안 좋은 것만 있습니다.

 

그리고 고리2,3,4호기가 멀쩡하게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옆에는 월성 1,2호기도 있고요 뭐 더있을 겁니다. 우리 정관이 사실은 그 곳에서 약10Km떨어진 곳인데 저는 기분이 찝찝해서 그 중에서 가장 멀리 15Km 지점에 삽니다. 솔직히 오십보 백보의 차이지만 그래도 원전10Km안에 살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곳 안에 살면 위험지역에 산다고 아파트 관리비를 대준다는데...

 

‘조물주위에 건물주’라는 참람한 말도 그럴듯하게 들리는 현실입니다. 임대료를 마구잡이로 올립니다. 법의 보호는 너무 멀고 자본의 횡포는 극심합니다. 이거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보시기에 선한 나라가 맞습니까?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그게 걱정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이 나라를 보호하실까?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 세계에서 제일 인구가 많은 나라, 세계에서 세 번째로 부유한 나라, 세계에서 제일 땅이 큰 나라. 우리나라를 둘러싼 이웃들의 면면입니다. 굉장하지요? 여기에서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확보하려면 우리의 안전을 지키고 나라가 계속해서 이어지려면 우리는 다른거 없습니다. 도덕성을 회복하고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법으로 우리를 규율해야 합니다. 이 한반도에 하나님의 공의가 우뚝 서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실 것입니다.

 

교회는 세계적입니다. 분명히 기독교는 세계종교입니다. 그러나 목사와 성도에게도 조국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나라를 걱정하고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그러니까 원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귀고 난 다음 북쪽 이스라엘에 엘리사라고 하는 선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엘리야의 후계자로 신통력이 굉장한 선지자입니다. 이 사람 때문에 아람나라에서 이스라엘을 공략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이 엘리사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절의 이스라엘은 극심한 대기근과 외적의 침입으로 백성들의 삶이 매우 힘들었던 그런 시절입니다.

 

사막언저리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물이 아주 제한적입니다. 우리나라도 요즘 기근 때문에 난리지만 그래도 가끔 비도 내리고 하천에 물은 흐릅니다. 심지어 강에는 썩어서 먹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물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엔 그런게 없습니다. 엘리사의 이스라엘은 아람의 침략에도 대기근에도 권력자와 부자들의 횡포에도 맞서야 하는 엄청나게 고단한 시절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은 허울만 남았습니다.

 

아람은 이스라엘에 비해서는 매우 큰 나라입니다. 한때 통일 이스라엘의 다윗왕이 아람을 정복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 남북으로 분단된 후의 북쪽 이스라엘에게 아람은 가장 큰 대적일 뿐입니다. 아람은 지금의 시리아입니다. 근데 이 아람은 단순한 적이 아니라 자신들을 항상 위협하는 무서운 적입니다. 이때의 아람은 이스라엘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아람의 침입을 방비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가장 큰 목표였을 정도입니다.

 

근데 아람왕도 역시 이스라엘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왜냐면 자기들이 왕궁에서 이스라엘에 쳐들어갈 모의를 하고 군대를 보내면 정말 기가 차게도 그 인근에 매복해 있다가 아람군대를 무찌르기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너무 자기들의 공격로를 잘 아니까 아람왕은 왕궁 내에 배신자,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내통한 자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자기가 신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있다고 여긴 겁니다.

 

그런데 정작 배신자가 누군지 모르니까 더 괴롭습니다. 배신자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작전계획을 내는게 무의미합니다. 어차피 적에게 정보가 누설 될테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작전을 세우지 않을 수도 없는게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갈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람왕이 괴로운 겁니다.

11절에 보면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아람왕은 신복들도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한 신하가 말합니다.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엘리사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신통력이 너무나 뛰어나서 아람 왕이 침실에서 한 은밀한 일도 알고 그 말을 이스라엘에 알려서 그런거랍니다. 요즘 말로 하면 투시의 은사가 있는 거지요. 아니 이걸 뭐라고 합니까? 예언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뭐 하여튼 그렇습니다.

 

여기 본문에 이스라엘 왕과 아람왕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세푸스는 이스라엘의 왕을 ‘여호람’으로 아람왕의 이름을 ‘벤하닷’으로 상정합니다. 그런데 여호람은 매우 악한 왕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악한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를 위해서 엘리사에게 아람왕의 군대를 막을 방책을 주신 겁니다. 하나님이 권세가들이 위정자들이 재벌들이 이뻐서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하게 하신게 아닙니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들, 성도들의 평안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게 하신 겁니다.

 

자, 원인이 밝혀졌으니까 이제 이 원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아람왕은 엘리사가 지금 어디에 거주하는 지를 살피고 그가 살고 있는 도단 성으로 엘리사를 잡기위해 군대를 파견합니다. 도단은 사마리아 동북방20Km지점에 있습니다. 그리고 혹여 엘리사가 알까 싶어서 밤에 군사와 말과 병거를 보내어 성을 포위합니다. 그러니까 보병과 기병과 전차대를 보냈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을 잡기 위해서 너무 과한 군대를 보낸 겁니다.

 

왜냐면 엘리사의 신통력에 겁을 먹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엘리사가 아람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아람의 입장에서 엘리사를 잡는 것이 이스라엘을 정복하는 단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한 군대를 파견한 겁니다.

 

열 경비원이 한명의 도둑을 못막는다는 말처럼 밤에 몰래 은밀히 성을 포위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미리 알았다고 해도 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차피 성은 작고 도단성에 아람군대를 막을 군대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별 수 없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아람군대는 몰래 밤에 은밀하게 성을 포위합니다. 아마 그들은 이번 작전에 사활을 걸었나 봅니다.

 

그런데 아람왕의 처사는 좀 웃깁니다. 그는 엘리사가 얼마나 신통력이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나아만의 나병도 낫게 했고 자기네의 기습도 낱낱이 파헤친 능력있는 선지자인데도 그래 그 많은 군대가 포위하는 것을 모르리라 생각하고 밤에 몰래 도단성을 포위하게 했다는 것이 웃깁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했습니다. 엘리사가 무서워서 그의 능력이 무서워서 어마어마한 군대를 파견했으면서도 선지자에게 들키지 않고 밤에 몰래 포위할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들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맛보았으면서도 한편으로 여전히 자기의 경험과 지식이 하나님을 넘어설 것처럼 여깁니다. 내가 가만히 있고 모든걸 하나님에게만 맡겨두면 안심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모든 일에 자기가 먼저 나서고 하나님보고는 그 일을 돕거나 보조하는 역할만을 하게 하거나 자기가 지정하는 일만을 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미덥지 못합니까? 우리의 지혜가 하나님보다 뛰어납니까? 어쩌니 저쩌니 하지 말고 모든걸 하나님에게 맡기세요.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이렇게 될 겁니다. 그가 하십니다.

 

한 사람의 선지자가 국방에 기여하는 비중이 이렇게나 큽니다. 사실이지 엘리사가 죽을 때 이스라엘의 왕은 엘리사를 향하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엘리사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람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했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죽고 나면 누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한탄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를 향하여서도 사람들이 이렇게 부르도록 할 수 있을까요?

 

엘리사와 같은 능력을 요즘에 행한다면 아마 굉장할겁니다. 어쩌면 천하가 들썩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즘 이런 능력자를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돈에 취하고 명예에 취하고 권세에 취해서 초심을 잃어버린 추한 모습으로는 성령의 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를 삼가고 절제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는 자가 드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진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은 성령의 시대이고 성령께서 임하셔서 이 땅에 능력을 물붓듯이 부어주셨기에 선지자가 아니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행할 수 있는 이는 더 많아 졌습니다. 성령이여 오늘 우리에게 임하시옵소서.

 

자, 15절에 보면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아마 엘리사의 사환은 새벽에 성문위에 올랐거나 아니면 높은 곳에서 성을 포위한 아람군대를 본 모양입니다. 여기서 ‘아아’라고 한 말은 불신과 경악 그리고 공포의 외침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절대적인 공포 앞에서 엘리사의 사환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엘리사를 찾으며 한탄하고 있습니다. “내 주여 우리가 어찌 하리이까”

 

자, 그런데 우리는 난국에 선지자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한 모범답안을 보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이 상황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엘리사 역시 사람인고로 이 상황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경동하고 놀란다면 그를 의지하는 사환은 어떨까요? 게다가 엘리사는 진실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믿고 있기에 놀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안심시킵니다. 사실 지도자는 위기의 순간에 그 스스로 경동할 것이 아니라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하고 남들이 놀랄 때, 정신없이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 침착하게 저들을 안돈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이렇게 합니다. 말을 한 다음에 행동으로 옮깁니다.

17절에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여러분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이 위험한 시대에도 현세에서도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가 우리를 둘러싸고 보호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네 영안이 뜨여지지 않아서 그걸 보지 못하고 육의 눈으로 보이는 적들의 강성함과 사탄의 권세에 놀라서 절망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방이 포위된 것 같고 솟아날 구멍이 도저히 보이지 않는 그런 위급한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 같아서 ‘아아, 내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라고 해야 될 때에 우리가 정작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 먼저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가능이 더 커 보이면  보일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감기에 걸렸다고 이거 낫게 해 달라고 울며불며 기도하는 사람은 생각하기 어렵지요? 그러나 암이라고 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성도들이 기도할 겁니다. 울며 불며 죽기 싫다고 살려 달라고 기도할겁니다. 마찬가지로 어려울수록 더 기도할 일입니다. 왜냐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사방에 적군이 가득한데 한군데만 비어 있습니다. 하늘이지요. 그래요,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할 일입니다. 우리의 희망이며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할 일입니다. 엘리사의 기도가 끝나자 과연 하나님이 영안을 뜨게 해 주셔서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러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아람군대가 상대가 안됩니다.

 

아마 그 사환은 이 광경을 보고는 더 이상 떨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 무엇도 감히 우리를 위험하게 할 수 없도록 철통같이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결코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이 상황을 해결할 수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현상에 몰두해서 믿음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지금도 우리를 지키시며 보호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영안을 뜨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환의 눈을 뜨게 해서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게 한 엘리사가 다음으로 한 일은 적의 눈을 어둡게 한 일입니다. 그런데 눈이 어두워진다고 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맹인이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혹시 들어보셨지요? ‘눈뜬 장님’이라고. 바로 그렇게 된 겁니다. 아람군대가 눈은 뜨고 있지만 제대로 사물을 인지하고 파악하지는 못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19절에 “이는 그 길이 아니요 그 성읍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원래 도단에서 사마리아까지의 길은 매우 험한 산길입니다. 그것도 한쪽면이 벼랑으로 된 길입니다. 앞을 못 보는 이들은 결코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엘리사의 인도로 그 길을 무사히 지난 것을 보면 그들이 육적으로 앞을 못 본게 아니라 눈을 뜨고서도 그들이 보는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맹목적인 상태로 빠졌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웬 노인의 말에 귀 기울이고 맹목적으로 험한 산길을 따라갈 리가 없지요. 생각해 보세요. 적지에서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의 말을 철썩같이 믿는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런데도 믿고 따르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아람군대는 엘리사의 인도로 사마리아 성으로 가서 이스라엘 군대의 포위 속에서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왕은 포위한 아람군대를 쳐서 다 죽이려고 했지만 엘리사의 만류로 죽이지 않고 떡과 물을 먹인 후에 저들을 돌려보냅니다. 왕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 같은데 23절에 보면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는 말로 본문이 끝이 납니다.

 

물론 뒤에 아람군대가 다시 쳐들어 온건 사실입니다. 24절에 보면 “이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의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이런 기사가 나오니까 은혜를 베푼 약발이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만 어쨌든 당분간이나마 저들이 다시 쳐들어오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참, 본문의 기사배열은 시간순은 아닙니다. 그러나 연대를 추론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뭐 적들이 다시 재침을 안한 것은 은혜에 감격해서가 아니라 엘리사의 능력에 공포를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쨌든 엘리사가 이스라엘에 있었기 때문에 아람왕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유린하지 못한 겁니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의 존재가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버리시지 못하는게 우리 성도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저 사악한 것들을 보면 확 멸망시켜버려야 하지만 나의 자녀들을 보면 내가 더 참아야지!‘이러시지 않을까요?

과연 우리 성도들의 존재가 그런 존재입니까? 하나님아 아끼고 사랑하셔서 우리의 존재 때문에 이 한반도를 지켜주시는 그런 존재입니까?

 

요즘 큰, 아주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법의 정죄를 받아서 처벌받는 기사가 많이 나옵니다. 게다가 교인들의 비행이 자주 기사에 나옵니다. 게다가 큰 교회는 아닌데도 초대형 사기를 친 목사도 있고...여하튼 우리가 하나님의 성도로서 이 땅의 평화를 유지시킬만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군대도 중요하고 경제력도 중요하고 외교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선한 자들, 존속시킬 가치가 있는 자들이 될 것이 더 중요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음란하고 약한 자를 착취하며 불법이 판을 치는 곳을 우리 하나님은 결코 지켜주시지 않습니다.

 

옛날에 저는 우리나라가 그래도 중국이나 일본보다는 더 나은 도덕성을 가진 나라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점점 자라면서 결코 우리가 저들보다 나은 점이 없다는 것을 자각합니다. 제가 이럴진대 우리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나라의 편을 들어 줄 것이란 착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눈에 우리가 어떻게 비췰지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겸비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우뚝 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고 하면 하나님의 공의의 빛에 비추어서 전혀 부끄럼이 없는 삶을 견지해야 합니다. 우리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그래서 한반도의 도덕성을 한차원 끌어 올려야 합니다.

 

그게 바로 가장 큰 국방이고 호국입니다. 그 옛날 엘리사의 권능이 부럽습니다. 한없이 부럽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령의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든다면 하나님을 흡족하시게 할 수 있다면 그 옛날 위대한 선지자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점입니다.

 

우리 개인도 할 수 있고 이 나라 전체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다시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겸비한 자세를 유지하고 항상 나를 돌아 보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한없이 고귀하고 착해질 수도 있지만 한없이 악하고 추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영적인 파수꾼이 되어야 하며
우리는 이 시대의 영적인 선지자가 되어야 하며
우리는 이 시대의 열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대의 병거와 방패가 되어야 합니다. 이 나라와 하나님의 성도를 지키는.

그때 6.25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죽고 고통을 받았습니까?

 

이제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때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끔찍하고 비참해 질 것입니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우리 성도들이 중심이 되어서 우리가 앞장서서 이 나라의 도덕성을 회복하고 이 나라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순교자적 자세로 이 땅의 거민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겸비하며 선한 자세를 견지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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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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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독서를 하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견하였습니다. 어느 신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건강하다는 것은,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뜻한다는 거에요. 더 쉽게 풀어쓴다면,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살아갈 때를 이야기 하는 게 아닐까요?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해오신 고모님은 카카오톡 메시지를 짧게 하나님 앞에서 라고 써놓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힘들어도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아름다운 삶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6월 설교를 (논다고) 밀리고, 밀려서 이제 올리게 되었네요. 사과부터 해야 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성실하게 맡은 바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그럼 다음에 또 뵈어요. / 2017. 07. 시북

 

by 시북 2017.07.2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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