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와 수넴여인 (열왕기하4:8-17)

 

우리나라의 교회를 보면 명목상의 신자들은 많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그 중에서도 얼마 안됩니다. 그런데 그 성도들 중에서도 거의 대부분은 여자들입니다. 게다가 실제로 신앙이 좋은 성도들의 대다수가 여자들입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어머니들입니다. 정말 희한한 일입니다.

 

남자 성직자에 남자 장로에 가장의 축복권을 인정하며 심지어 여자들은 숫자에 포함시키지도 않았던 그런 종교에서 여자 성도들이 주를 이루는 종교라니 정말 이상합니다. 그래서 이 나라 기독교의 발전이 여 성도들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가정에 시집가서 온갖 핍박을 이겨내고 그 가정을 온전히 믿게 만든 여인들의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는 놀라운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아내는 남편을 구원으로 이끌었고 시부모를 개종시켰으며 자녀를 신앙으로 교육해서 오늘날 이 땅의 기독교도가 이렇게나 많아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 성도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들의 헌신과 눈물과 기도를 결코 모른다 하지 않으실 걸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 옛날 남북조시대의 이스라엘에서도 역시 여인들의 신앙과 헌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나오는 수넴 여인 역시 신앙의 모범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앞에서 엘리야에게 숙식을 제공한 사르밧 과부가 가난한 자였다면 오늘 수넴여인은 부유한 자입니다.

 

본문에 보면 8절에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에 귀한 여인이 그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하였으므로 엘리사가 그 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수넴은 다른말로 ‘술람미’라고도 합니다. 아가서에 나오는 술람미 여인. 그리고 ‘귀한 여인’이란 말에서 우리는 이 여자가 신분이 높고 돈이 많은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간권’이란 말은 처음 들어 보시죠? 강권이아니라 간권입니다. 그러니까 간청하여 권한다는 말이지요. 아마 이 여인은 엘리사에게 매우 간절하게 자기 집에서 음식을 먹고 쉬어 가도록 요청한 모양입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관습은 이미 아브라함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이런 관습은 셈족의 전통이랍니다.

 

“항상 우리를 지나가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본문의 뉘앙스는 엘리사를 대접하는 와중에 그와 교제하면서 엘리사를 잘 알게 된 여인이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이며 능력이 탁월한 진실된 종이라는 것을 경험상 알게 되었다는 뜻이 있습니다. 여하튼 이게 인연이 되어서 엘리사가 수넴을 지날 때마다 그 집에 들러서 음식을 먹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에서는 이미 하나님을 진실되게 섬기는 이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여호와 신앙이 퇴색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정말 희귀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본문에 따르면 수넴을 자주 방문했는데 왜 방문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학자들에 따라서 수넴이 종교적 성지였다거나 아니면 선지학교가 있었다거나 아니면 다볼산이나 이스르엘 골짜기에 볼일이 있어서 가다가 들렀다는 설이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엘리사가 여인의 대접을 받기위해 일부러 수넴을 자주 방문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한 술 더 뜹니다. 9절에 보면 “그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만들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두사이다 그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에 머물리이다”
담 위에 만든다는 말은 다락방이란 말입니다. 뭐 ‘작은방’이란 말은 있지만 당시 이스라엘의 풍속으로는 다락방이 그 집에서 가장 좋은 방입니다. 그리고 담위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담이 있는 다락방을 만들자란 말입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문루를 말하는데 이건 주인집과는 출입구가 달라서 얼마든지 수시로 출입이 가능한 그런 방을 말합니다. 그리고 실내의 장식과 가구들도 선지자에게 알맞게 만듭니다. 아마 이 여인은 엘리사가 여기서 기도하고 묵상하며 연구할 수 있도록 계획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여기서 잠만 자는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일종의 숙식이 가능한 집무실로 봐도 됩니다. 여하튼 이 여인의 정성과 마음씀씀이가 보통이 넘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에서는 지면과 떨어져서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더 좋은 방입니다. 왜냐면 이스라엘집의 일층은 보통 짐승들을 먹이는 축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주님이 마굿간에서 나신 이유도 바로 그겁니다. 이층부터는 모두 찼기 때문에 일층에 있는 여관의 마굿간에서 거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상과 떨어질수록 짐승냄세가 안나고 그리고 높을수록 바람이 잘 통해서 시원하고 경치도 즐길 수 있기 때문에 다락방이 가장 좋은 방입니다. 여름철 짐승냄세는 정말 견디기 어려운 고역입니다.

 

역대의 왕들도 주로 다락방에서 기거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의 말에서 그냥 엘리사에게 자그마한 옥탑방을 내어 준다는 말이 아니라 가장 좋은 방을 만들어 주자는 말입니다. 물론 선지자와 사환만이 거하게 되므로 거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작은방’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도 있는 방을 내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없던 방을 선지자를 위하여 만들어 준다는 말입니다. 이건 정말 굉장한 정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자기네와 마주치지 않게 따로 출입구를 만들어서 선지자가 부담없이 지낼 수 있게 하겠다는 생각은 정말이지 굉장한 배려입니다. 이런 정성을 들였기에 엘리사가 ‘거기에 이르러 그 방에 들어가 누웠다’는 겁니다. 아마 엘리사는 이 여인의 환대에 매우 만족했고 그리고 그 방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원문에는 그런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이런 대접을 받은 엘리사는 무언가 수넴 여인에게 베풀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집의 여주인을 불러서 무슨 소원이 없는지 묻습니다. 부르기는 했는데 직접 마주하지는 않았고 그 사이를 게하시가 중개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마 엘리사는 여주인을 배려하여 자기에게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게하시를 중간에 개입시킨듯합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랴 왕에게나 사령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 엘리사가 자기의 인맥이나 빽을 자랑하려고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을 해결할 수단이 되어 준다는 것은 굉장한 혜택입니다. 더구나 이 집은 부유하기 때문에 뭔가 물질적인 복은 필요치 않을 것 같았습니다.

 

오히려 부유한 이 집은 그 부로 말미암아 왕이나 군사령관에게 뭔가 부당한 착취나 요구를 당할 수가 있습니다. 세금을 더 내라거나 군대의 주둔비를 더 내라거나 그런식의 괴롭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억울한 일이 있는지 아니면 뭔가 송사가 있는지 그걸 물어 본 것입니다. 아무래도 국가의 중대사에 관여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 여인의 일을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 이 집의 여주인의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그녀는 많이 베풀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 이 한마디로 엘리사의 제의를 완곡하게 거부합니다. 이 말은 나는 내 백성가운데 거해서 그들로부터 보호받고 있으므로 그리고 씨족들이 해결할 수 있으므로 왕이나 군대 사령관에게 청원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역시 마을은 씨족들의 공동체입니다. 즉 동족촌입니다. 그래서 그들로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여인은 지극히 자족하며 평안한 삶을 살고 있고 전혀 어떤 욕심도 없습니다. 선지자를 위하여 좋은 방을 만들어 주고 그를 지극히 접대 했음에도 어떠한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아무 소원도 들어 줄 수 없게된 엘리사는 여주인이 물러가고 난 다음 게하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여주인을 위하여 엘리사는 뭐든지 은혜에 보답하고 싶어서 무슨 소원을 들어 줘야 할지를 오히려 게하시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와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헌신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무언가 하나님이 너의 소원을 말해보라고 하실 때 얼씨구나 좋다하고 재깍 소원을 말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에 따라 주시도록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면 더 큰 것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당장 생각해 낼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것 그리고 반드시 필요하게 될 것으로 주실 것이기에 선물에 대한 선택권을 아버지에게 드리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과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내가 어떤 선물을 받을 수 있을지 기쁜 마음으로 기대하면 됩니다.

 

엘리사의 물음에 게하시는 여자에게 아들이 있다면 좋겠다는 대답을 합니다.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

 

당시에 불임은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벌을 받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없는 여인은 매해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이 관례였답니다. 또한 영원히 불임으로 판명되면 남편은 당당하게 다른 여인에게 장가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모두가 가야 하는 것은 아니고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여인을 아내로 더 맞이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래서 당시에 아들이 없다는 것은 매우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웃기지요. 아들을 엘리사가 마음대로 줄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에게 기도할 뿐입니다. ‘이 여인에게 아들을 주세요’하고 엘리사가 요구하면 그렇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들어 주실까요?

그런데도 16절에 엘리사는 여인을 다시 불러서 “한해가 지나 이때쯤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고 말합니다. 굉장한 자신감입니다.

 

‘내가 기도하기만 하면 우리 하나님은 다 들어 주실 것이야’ 엘리사의 이런 자신감은 하나님과의 영통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선지자로 이 세상에서 다닐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권세를 그가 나에게 주셨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에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엘리사는 스승이 능력을 행하는 것도 목격했고 스스로도 능력을 행한 경험이 많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산 갈멜에서 사는 자입니다.

 

물론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엘리사가 마음대로 이 여인에게 아들을 약속한 것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 여인에게 아들을 약속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뭐 이런 절차가 먼저 있었고 본문에서는 이게 생략되었을 뿐입니다.

이 말에 여인은 황당해 하고 아니라고 사양하고 부인합니다.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속인다’는 말은 듣기 좋은 말로 위로한다는 뜻입니다.

 

아마 너무 좋은 말이라서 오히려 이 여인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아마 이 여인은 자식을 간절히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생길 가망성이 없기 때문에 감히 그것을 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게하시가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이지요. 과연 한해가 가고 엘리사가 말했을 때쯤에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아이는 하나님이 주신 아이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아무런 탈이 없이 자란게 아닙니다. 이 아이가 어릴 때 추수하는 아버지에게 갔다가 일사병에 걸려 어머니에게 보내졌지만 낮까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죽었답니다. 수넴지역은 옥수수 재배로 유명했고 그래서 여기서의 추수는 옥수수 추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옥수수는 여름철에 추수하므로 이 아이의 병명은 일사병일 확률이 높습니다.

 

아이가 머리가 아프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즉각 그늘로 데리고 가서 물을 주고 머리를 축이고 했다면 괜찮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추수에 바쁜 나머지 아이에 대한 즉각적인 처치를 하지 못하고 다만 어머니에게 데리고 가라고만 하고 맙니다. 아마 아버지는 아이의 상태를 잘 몰랐나 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이가 죽을 수도 있습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없었다면 몰라도 있다가 죽는다면 그 부모가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이 엄마는 아이가 죽었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슬프한 것이 아니라 그 아이를 엘리사를 위하여 만든 다락방에 그대로 두고는 급하게 나귀를 타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가 있는 갈멜산으로 달려 갑니다. 왜냐면 엘리사라면 죽은 아이도 살릴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휴대폰이있지 않습니다. 레이더가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 여인은 엘리사가 어디 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엘리사는 어디 한곳에 집을 짓고 정주해 있는 이가 아니고 이곳 저곳을 순회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일년에 몇차례씩 위치를 바꿔야 합니다. 선지 학교도 몇곳이나 있고 갈멜산에 왕궁에 정말 바쁘게 사는 사람이 엘리사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이 여인은 엘리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엘리사가 지금 갈멜산에 있는 것을 알았다는 것은 아마 엘리사가 미리 이 여인에게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사와 여인이 평소에도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여인이 엘리사를 칭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 ‘내주’이런 말을 보면 이 여인은 아이가 죽고 난 다음에도 엘리사에 대한 공경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하나님이 아이를 다시 살릴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시신을 다락방에 두었는데 그냥 방안에 둔게 아니라 엘리사의 침상에 뉘여놓고 왔습니다. 침상에 뉘인 것은 이 여인이 엘리야의 고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엘리야의 침상에 뉘어서 살려낸 이야기를 듣고 이 여인도 그렇게 한 겁니다.

 

그리고는 종에게 나귀의 고삐를 잡게 하고는 자신은 나귀에 타고 60리 산길을 간 겁니다. 한편 엘리사는 산위에서 멀리서 여인이 나귀를 타고 오는 것을 보고 사환에게 평안하냐고 물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 번의 솰롬을 말합니다.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사환이 그 여인에게 가서 평안하냐고 묻자 평안하다고 대답합니다. 이 여인은 게하시에게만 평안을 말한게 아닙니다. 23절에 왜 초하루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닌데 엘리사에게 가느냐는 남편의 물음에 평안을 말했습니다.

이 여인이 지금 평안한 상태입니까? 솰롬의 상태하고 가장 거리가 먼 이 여인이 솰롬을 말한 이유는 내 하나님께서 나에게 평안의 상태를 허락하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게하시에게 솰롬이라고 말고는 엘리사에게 가서 그의 발을 안습니다. 얼마나 다급하고 간절하면 그 먼거리를 달려와서 선지자의 발을 안았겠습니까? 아무리 솰롬이라고 입으로 말해도 그 마음은 애가 탔을 것이며 행동에는 간절함이 묻어 납니다. 늘그막에 얻은 이 아이의 생명을 살리기위한 기회를 결코 놓지 않겠다는 간절함이 묻어 납니다. 그래서 엘리사의 발을 꽉 안아 버린 겁니다.

 

사환이 여인을 물리치려고 하자 엘리사는 그대로 두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때문인지 하나님이 자기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아마 이 여인에게 큰 괴로움이 있는 모양이라고 짐작만 할 뿐입니다.

이 여인은 말합니다 제가 구하지도 않은 아들을 주시고는 이제 그 아들을 다시 데려가는 슬픔을 준다는 식으로 투정을 합니다. “내가 내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지이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처음부터 아이가 없었다면 이런 슬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여인은 아이를 얻었다가 잃게 되었으므로 더 슬프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완곡하게 불평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처음 엘리사는 자기가 직접 가는 것이 아니라 게하시를 보내서 자기의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인에게도 돌아가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혹시 싶어서 말씀드리지만 지팡이를 얼굴에 놓는다고 해서 아이가 살아난다는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지팡이를 죽은이의 얼굴에 놓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시면 어떠한 행동에도 죽은이가 다시 사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만 이는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자신의 능력을 대리하게 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뿐입니다. 지팡이와 상관없이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스스로 판단하셔서 역사하십니다.

 

게하시를 따라가라고 하는 엘리사의 말에 이 여인이 그걸 허락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이 여인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어떻게 하던지 엘리사를 데리고 가고자 하는 여인의 심정이 느껴집니다. 게하시로서는 좀 섭섭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여인은 엘리사가 가야 자기 아이가 다시 살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엘리사는 여인을 따라 갑니다.

 

본문에 보면 게하시가 엘리사의 말대로 지팡이를 가지고 먼저 가서 아이의 얼굴에 놓았지만 아이에게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소용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뒤따라오는 엘리사에게 이런 사실을 말합니다. 아마 여인이 게하시가 지팡이를 놓는 것에 대해서 전혀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기적이란 것은 우리네 믿음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있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여인에게는 지팡이를 얼굴에 놓는 행위가 어떠한 효력도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게하시는 아이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께서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릴때와 같은 표현입니다. 그래요, 죽음이란 그 거대한 의미가 신앙의 사람에게는 한갓 자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겁니다. 그리고 자는 사람이 다시 깨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듯이 다시 살릴 수 있다는 굳센 믿음이 뒷받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는 게하시의 이와 같은 대답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아이가 누워있는 자기의 방으로 올라가보니 아이가 죽어서 누워 있습니다. 살았는데 심각한 상태가 아니라 이미 목숨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사람들을 물리고 아이와 단 둘이 된 엘리사가 아이의 몸에 자기가 엎드려서 입과 입, 눈과 눈, 그리고 손과 손을 겹치자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해 졌답니다.

 

이걸로 끝낸게 아니라 엘리사가 다락에서 내려와서 집안에서 이리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위에 올라가서 엎드렸는데 비로소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하고 눈을 떴답니다. 아마 한번의 기도로 끝난게 아니라 계속해서 기도하고 그리고 살아나는 것을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단번에 기도한번에 능력을 일으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주님이 아니고 신이 아니고 인간의 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힘으로 아이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그리고 나는 그 하나님의 힘을 대행하는 도구로 사용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이런 정성스런 기도 끝에 아이는 다시 살아났고 그냥 살아난 것도 아니라 확실히 살아났고 그리고는 엘리사가 여인에게 아이를 데리고 가라고 합니다.

 

참 제가 혹시 싶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런 행위를 하기 전에 엘리사가 먼저 여호와께 기도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능력의 사람이라도 기도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왜냐면 자기가 자기의 능력으로 아이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아이를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가라고 했을 때 엘리사는 얼마나 뿌듯했을까요? 자기가 공연히 아들을 준다고 했다가 이 아이가 중간에 죽는 바람에 큰 슬픔을 안겨줄 뻔했는데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그래서 아이의 엄마에게 살아 있는 아들을 돌려 줄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여인은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갔답니다. 우리는 이 아이를 살린 엘리사의 방법에 뭔가 특별한 신비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 바로 요체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신통하다고 해도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시면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입과 입 눈과 눈 손과 손이 겹친다고 해서 아무나 막 다시 살아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데에는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중이 중요한 것이지요. 아무리 장엄하고 거대한 의식을 행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능력도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어떤 모습을 하던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제가 이 본문을 읽으면 이 여인의 아이를 살리고자 하는 간절함이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엘리사에게 가면 반드시 내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 간절함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기적을 바랄 때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뭐 해주실려면 해주시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는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적’이란건 그 자체로 자연법칙을 거스리고 아주 일어나기 희박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기적을 바라는 이가 어찌 평범한 믿음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자식을 다시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그 간절함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헌신이 있어야 하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해야 비로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마 남자들은 이걸 잘 못할지도 모릅니다. 남자들은 대체적으로 포기가 빠르고 무뚝뚝하고 그렇지만 엄마는 다릅니다. 여인은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있듯이 엄마의 사랑은 하나님을 감동시켜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아이가 죽은 것을 남편에게도 알리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초하루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닌데 왜 그에게 나가느냐고 묻지요. 이 여인이 말하지 않은 것은 어차피 엘리사 선지가가 오면 해결될 문제인데 미리 알려서 남편에게 절망을 안겨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 편리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입니다. 또 다르게 보면 정말 확고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기적은 주로 이럴 때 일어납니다. 믿음이 확고할 때 그래서 어떤 것으로도 그 믿음을 꺾을 수 없을 때 믿음이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네 찬송가에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바로 그겁니다.

 

그래요, 우리의 믿음이 확고하다면 그 믿음이 세상의 모든 불리한 여건들을 이깁니다. 그 믿음이 사탄의 방해를 이깁니다. 그 조건이 우리를 이기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이런 믿음의 기적적인 기사를 접합니다. 그러나 그건 성경이고 우리는 현실이라고 포기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이 성경본문을 통하여 장차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임할 것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능치 못할 일이 없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제 믿읍시다. 그래요, 저도 믿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우리의 믿음이 현실의 모든 벽을 넘어 이기는 놀라운 역사가 오늘 일어날 것을 저는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그런 믿음을 가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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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기적.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다 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근래에 카카오톡 자기소개를 조금 바꾸었습니다. 예전에는 "(지나가 버린 일들은) 다 잊어버려~" 가 참 좋았습니다. 괴로운 경험들도, 행복한 추억들도 정리되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또 이것저것 읽어내려가는 도중에 고난이 주는 유익에 대해서 생각헤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늘 의문이었습니다. 고난, 어려움, 그런 것이 뭐가 삶에 도움이 된다고 그래? 오히려 부정적인 마음만 안겨주고, 삶을 계속 괴롭히는게 아닌가, 여겼던 것입니다.

 

그랬던 제가 삶은 고난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그 고통을 헤쳐나가며 즐거움을 누려갈 수 있다고 어렴풋이 알게 된 것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생활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고요. 또한, 영적인 즐거움을 맛보게 하며, 마침내 영원한 환희로 사람을 초대한다는 겁니다. 분명 본문의 수넴여인도 그 과정을 밟았을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때론 흔들리고, 때론 절망 속에 휩싸이더라도, 주님께서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만큼은 반드시 붙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2017. 08. 시북

 

by 시북 2017.08.05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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