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와 쇠도끼 (열왕기하6:1-7)

 

성경에서 들려주는 재미있는 위인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모세에서 다윗에서 다니엘과 요나와 신약의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12제자와 기타 등등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분명 성경이 위인전은 아닌데 신앙용사들 누구하나 위인전의 주인공보다 못한 이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선지자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천하를 횡행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에게는 권세고 돈이고 아무것도 없지만 오로지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세상을 정복합니다. 거칠 것도 없고 발목을 잡는 것도 없고 그 어떤 것도 이들의 행보를 막을 수 없습니다. 왕도 소자도 선지자의 앞에서는 모두 평등합니다. 그들 모두 하나님의 자녀요 선지자에게는 돌보아야할 양떼일 따름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내가 왕입네 하고 큰소리치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적을 꿈꿉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사는 다양한 기적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도 되었다가 또 본문에서처럼 소시민들의 애환을 해결해 주는 동네 선지자도 되었다가 합니다. 규모면에서는 나라를 지키는 것과 잃어버린 도끼날을 찾아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다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하셨어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 겁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사의 이적기사가 개인과 나라를 넘나 들면서 일어나는 것은 이스라엘의 보호자가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의도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무지해서 이방신을 좇고 하나님을 버리고 그 여파로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 때에도 자기의 대리자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한 하나님이 여전히 너희를 자녀로 삼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한 것입니다.

 

본 기사의 앞에는 나아만, 아람 나라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걸린 나병을 고치는 기사가 나옵니다. 이 기사의 뒤에는 아람나아와 이스라엘의 군대가 서로 치고 받는 와중에 도단성을 포위한 아람군대를 눈을 어둡게 한 뒤에 사마리아로 끌고가서 그들을 풀어준 내용이 나옵니다.

 

본문의 기사하고는 규모가 너무 차이가 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커다란 기적 사이에 이 기사가 위치하는 것은 하나님은 크건 작건 상관하지 않고 나라의 운명이든 개인의 운명이든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나의 삶은 어쩌면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나 또는 나라의 흥망성쇠같은 측면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게 보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나라나 역사보다 나 자신이 더 중요하겠지요? 우리 하나님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뿐만 아니라 나라의 흥망성쇠뿐만 아니라 미약한 한 사람 개인의 행복과 불행에도 관여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이 기적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합니다. 옛날 우리나라 전래 동화에 나오는 금도끼와 은도끼 이야기와 많이 비슷하지요?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다른 점이 많지만 전체적으로는 비슷합니다. 산신령은 나오지 않는데 도끼를 떠오르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니까 뭔가 규모가 차이가 나서 그렇지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음, 산신령이 물에서 나오면 산신령이라고 할 수 없는데 그럼 뭐라고 해야 됩니까? 수신령? 못신령? 연못에서 나오니까.

 

본문의 생도는 쇠도끼를 돌려 받고 금도끼와 은도끼를 덤으로 얻은 것은 아니지만 뭔가 금도끼와 은도끼가 생각하는 친숙함은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친숙함과는 반대로 도끼를 요단강에 빠뜨린 이 사람에게 이 이일은 아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 당시 선지생도들은 정말 가난했던 모양입니다. 보리떡 이십개하고 채소 한자루를 가지고 식사시간에 전교생이 나누어 먹는 모습이 나오는데 황당할 정도입니다.

 

게다가 빚쟁이에게 고초를 당하는 죽은 선지 생도의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기사 역시 당시 가난한 선지생도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본문에 나오는 ‘선지생도’들은 실제로 원문의 의미로는 ‘선지자의 아들들’이란 말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유다에서 선지학교에 관한 기사는 건국전에 사무엘 당시에 나오고 통일왕국이 분열된 뒤에 엘리야와 엘리사 시절의 이스라엘에만 나옵니다.

 

사실 이들이 선지자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들의 삶이 지극히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도들끼리 한형제처럼 그리고 선지자와 생도들이 부자관계처럼 강력하게 뭉치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을 만큼 힘든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이스라엘에서 이교의 바알과 아세라 신앙이 극성하던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사람들과 왕실의 관심에서 멀어져 빈손빨고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사명감 하나로 활동할 수 밖에 없었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콩한쪽도 나눠먹는 그런 혈연적인 관계처럼 된 겁니다.

 

세상에 많은 이들이 여러가지 일들을 겪습니다. 인간은 너무나 무지하고 근시안적이므로 한치 앞을 알 수 없습니다. 저 너머에 무엇이 오고 있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우리 앞에 나타나는 선택의 순간마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후회하지 않을지 어떤 선택이 우리에게 승리의 웃음을 줄지 모릅니다. 그냥 우리의 적은 경험과 지식으로 선택해 나갑니다. 그래서 잘된 것도 있고 못된 것도 있고 아쉬움도 있으며 후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살면 잘 살 것처럼 생각하고 다시 한 번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요, 다시 한 번 살 수만 있다면 이전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고 이전처럼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고 정말 멋지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은 세상의 그 누구에게도 두 번의 삶을 허락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이에게 한 번의 삶은 참으로 공평합니다.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그냥 마구 걸어 나가다 보면 결국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반칙으로 여길 수 있는 놀라운 특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 성령의 능력을 기도로 요청하고 기도로 간구하고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기도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주의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셔서, 좋은 목사를 만나고, 좋은 교회를 만나고,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좋은 상사를 만나고, 좋은 친구를 만나고, 좋은 이웃을 만나고, 좋은 동료를 만나고 그렇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다가 잘못된 것들을 만난다거나 역경에 처하면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도록 ‘우리에게 다시금 기회를 주십시오’ 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만능입니다. 믿음은 이 모든 것들을 이깁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 기도는 반칙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은 반칙입니다.

 

그러나 이건 분명합니다. 이 기도의 능력은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신 엄청난 특권이자 특혜입니다. 이건 반칙이되 반칙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특혜를 베풀었다고 해서 이걸 가지고 외인이 시비를 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부러울 뿐입니다. 천사도 흠모할 만한 특혜입니다.
이걸 우리가 잘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믿는 것이 즐겁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다 지고 간다고 하면 예수 믿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지옥처럼 여겨질 겁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헌금, 가망성이 보이지 않는 무한대의 헌신, 그리고 그런 것들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더 지치고 힘들며 불만이 쌓이고 마침내는 그곳에서 탈출하려고 합니다. 번아웃이라고 합니까? 한번 쓰러지면 다시 추스르고 일어서기가 어렵습니다. 그냥 앉은자리에서 영영 쉬고 싶습니다.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고 그냥 훌훌 다 팽개치고 세상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를 중심으로 짜여져 있던 조직이나 관계가 파괴됩니다.

 

하나님이 그를 향하여 복 주시려고 쌓고 계시던 모든 상점, 포인트들이 허사가 됩니다. 그래서 기적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길에서 긴긴 그리고 고된 인생길에서 때로 오아시스를 만나 육체도 마음도 쉬고 새로운 힘을 얻도록 하는 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여기서 기적의 크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는 천하를 떨어 울리는 일이 일어나고 나에게는 겨우 아주 미약한 몇가지 징조만 보여졌다 해도 기적에 있어 크고 작고는 없습니다. 모든 기적은 우리의 믿음이 가져온 보답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주신 상급입니다. 우리네 지친 몸과 마음에 활력을 주고 이를 바라보던 사람들에게 표징을 줌으로써 더 열심히 주를 믿게 할 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 엘리사의 기적이 소개됩니다. 아주 간단한 기적입니다. 물에 빠진 도끼 금도끼도 아니고 은도끼도 아니고 구리도끼도 아닌 쇠도끼를 찾는 기적입니다. 이 다음 장에는 아람군대를 사롭잡고 하늘의 불 말과 불 병거를 보는 기적이 소개되지만 이 쇠도끼사건도 엄연히 하나님이 주신 기적이며 이것으로도 수많은 이들이 위안을 얻습니다.

 

선지학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요청합니다.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주하는 이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가져다가 그 곳에 우리가 거주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말이 고어체이기는 하지만 집이 좁으니 요단강가에 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집을 넓히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선지학교의 학생들이고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상 이들에 대한 지원은 거의 없었을 것이며 그래서 선지학교의 교장인 엘리사가 동분서주하며 물자를 조달하고 이들을 가르치고 그러고 있습니다.

 

선지학교는 한군데가 아니고 여러군데였을 것이며 엘리사는 일년을 주기로 순회하면서 이들을 가르칩니다. 성경학자들은 당시 선지학교가 길갈과 벧엘 그리고 여리고에 있었을 걸로 추정하는데 본문의 배경이 된 곳은 여리고로 봅니다. 다른 두 곳은 요단과는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에 요단가에 있는 여리고로 비정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에게 경도되었고 왕들은 하나님에 대한 제의를 멀리 했으므로 지원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 앞장에 보면 바알 살리사에서 한 사람이 와서 보리떡 이십개와 채소 한자루를 가져온게 보입니다. 이런 식으로 숨은 독지가들이 조금씩 보태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학생들이 학교와 기숙사를 크게 짓자고 하는 겁니다. 엘리사가 이들의 요청을 허락했고 이들은 일을 하러 갑니다.

 

우리는 이 기사에서 당시 선지학교의 재정상황이 극도로 열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아프리카 정도에서 자기들 손으로 벽돌을 이겨서 학교를 지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우리나라의 형편을 보면 웬만해서는 직접 학교를 짓지 않습니다. 재주도 없을뿐더러 그렇게까지 재정이 열악하지도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직접 재목을 베러 간 것을 보면 이들의 열악한 상황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명이 엘리사도 동행하기를 청했고 엘리사가 기꺼이 여기에 응해서 같이 갔습니다. 물론 엘리사 보고 같이 일하자고 한 건 아닙니다. 이때 이미 엘리사도 나이가 제법 많이 들었기 때문에 청년들처럼 원기왕성하게 일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났습니다.

 

그런데 왜 엘리사보고 함께 가자고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를 추정하기를 학교와 기숙사를 짓기 위한 재목을 베는데 있어 엘리사의 축복기도를 받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선지학교답게 모든 일에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치는 겁니다. 물론 교장선생님의 기도가 필요하겠지요?

 

열심히 학생들이 나무를 베고 있습니다. 여기서 ‘베더니’란 말은 원문 상으로는 ‘먹어 치우다’란 뜻도 있습니다. 즉 뭔가 배고픈 이들이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 치우는 것처럼 열심히 나무를 베었다는 말입니다. 학생들이 자기네 학교를 손수 짓는 그 열심히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들은 열악한 환경가운데서도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자기네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기쁜마음으로 다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이 도와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쇠도끼를 물에 빠뜨리고 말았답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무리하게 힘을 가하다가 도끼날이 자루에서 빠져 튕하고 튕겨서 물속으로 빠진 겁니다. 요단강 물속으로 풍덩하고 사라진 겁니다.
이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아아, 내 주여 이는 빌려온 것이니이다”

 

나무를 베어서 집을 지으려고 하는 이들은 너무나 가난해서 쇠도끼를 빌려왔고 이제 그것을 물에 빠뜨려 버렸습니다. 당연히 이 사람은 물어줄 돈이 없습니다. 쇠도끼 하나에 얼마하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옛날 쇠가 귀하던 시절 쇠도끼는 결코 아무렇게나 장만할 수 있는 흔한 물건이 아닙니다. 귀하디 귀한 물건입니다. 그래서 빌려왔습니다. 그런데 이걸 잃어버렸습니다.

 

아아, 라고 한 신음 속에 이 사람의 간절함과 암담함이 들어 있습니다. 왜냐면 이 도끼가 비싸기도 하지만 빌려 주기를 꺼리는 이에게서 구걸하다시피 간청해서 빌려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려온’ 이란 말 속에 ‘간청해서, 구걸해서 빌려오다’란 말이 있는데 여기에는 도끼주인이 빌려 주기를 꺼렸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에게 하소연하면 뭔가 일통이 터집니까? 엘리사가 잃어버린 도끼를 찾아 줄 수 있습니까?

 

설마 물속에 들어가서 찾아 달라고 도끼를 잃어버린 것을 말한 것은 아니겠지요? 아니면 내가 학교의 공무로 일하다가 도끼를 잃어버렸으므로 공금에서 도끼 비용을 물어 달라고 요청한 것일까요?

 

엘리사의 반응이 굉장히 이상합니다. 먼저 어디에 빠졌는지를 물어보고 그 장소를 가르키니까 그곳에 나뭇가지 하나를 베어서 던집니다. 그러니까 쇠도끼가 자루에 끼워진 채로 물에 떠 올랐답니다. 아마 도끼가 자루채로 물에 빠진 것이 아니라 나무를 찍어대던 중에 도끼날이 자루에서 빠져서 강물에 풍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자루가 될 만한 나무를 던지지 쇠도끼가 자루에 끼워져서 떠올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거운 쇠 도끼날이 떠오른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애초에 나무자루가 도끼날을 끼우게 된 것은 과학적으로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엘리사가 왜 나뭇가지를 던졌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정확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던져 넣은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이 아니라 주변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을 사용해서 기적을 일으키는 유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기적쯤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끼날 자체는 쇠기 때문에 물에 결코 뜨지 않지만 나무자루는 혹시라도 뜰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지요? 그리고 나무의 부력이 도끼날의 무게보다 더하다면 뜰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럼 어떻게 해서 도끼날이 자루에 끼워졌지요? 하하, 글쎄요. 그래서 우리는 이를 보고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보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하는 이들에게 결코 박하지 않음을 증명한 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도끼가 떠오르자 엘리사가 도끼를 물에 빠뜨린 사람에게 그것을 집게 하고 결국 도끼를 도로 찾게 됩니다. 아마 이 기적을 체험한 생도나 그것을 목도한 생도들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더 열심히 일했을 것이고 앞으로 이들의 앞에 혹여 닥칠지도 모르는 고난에도 이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하지 않고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정신적 지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내가 요단강 가에서 경험한 그 하나님은 결코 지금도 나를 모른다 하실 리가 없어!“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이 분명 놀라운 기적이기는 하지만 매우 매우 신기한 기적이기는 하지만 죽은 아이를 살리거나 사마리아 성의 굶주림을 해결하거나 아람 군대를 사로잡거나 나아만의 나병을 고친 것에 비하면 정말 새발의 피에 불과할 정도의 적은 기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선지학교의 생도에게는 자기가 잃어버린 그래서 물어 주어야 하지만 가난 때문에 물어 줄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일어난 기적이 더 보람있고 의미있게 다가올 것입니다. 왜냐면 자기에게 일어난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에 확신을 더하고 성도를 굳게 세우고 그리고 교회의 건덕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개인의 영달과 명예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의 능력 많음을 자랑하기 위한 용도도 아닙니다.

 

그래서 기적으로 해서 이름을 날리고 그것을 가지고 돈과 명예와 권세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정말 기적의 목적에 어긋나는 매우 좋지 못한 행동입니다. 한 때 기적의 사도로 유명한 목사들이 말면에 법의 심판을 받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은 다 초심을 잃어버려서입니다. 그에게 이전에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은 그것을 가지고 치부하고 권세의 탑을 쌓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무너뜨리시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 예컨대 나라의 흥망성쇠나 거대한 역사적 흐름뿐만 아니라 내 개인적인 사소한 일까지도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의존하고 인도와 보호를 요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세상엔 일이 많고 우리 본연의 힘은 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수 있고 믿음으로 이길 수 있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네 나그넬 길, 신앙생활이 힘이 들어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좌절하거나 배교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굳게 믿기는 사실 어렵습니다. 때로는 흔들리기도 하고 좌절하고 원망하고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난다면 내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다면 우리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만일 기적을 체험하고도 흔들리거나 배교한 이들은 어떻습니까? 그 옛날 소돔과 고모라의 거민들보다 더 혹독하게 취급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더 낫다고 할 정도로 채찍을 맞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가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 그것만을 기억한다면 아버지를 배신하고 세상으로 떠나서 폐가망신하거나 징계의 채찍에 맞을 일도 없고 오히려 내 앞에 장애가 있을 때에라도 분명 헤쳐나갈 길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비롭고 사랑이 많으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를 결코 그냥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세상에 힘들과 지친 이들, 세상살이에 두려워서 암담해서 하나님에게로 온 이들에게 우리 아버지는 위로와 안식을 주시며 또한 헤쳐나갈 방법을 깨닫게 하시고 인도하셔서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거칠고 힘들어도 하나님의 날개 아래 있는 우리에게 그 세상의 풍파는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우리네에게 결코 해를 끼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믿습니까? 믿습니까? 내 아버지의 능력을 믿습니까? 그 믿음대로 될 지어다. 아멘.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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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잘 기억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어려운 일을 겪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됩니다. 힘든 하루를 설령 맞이하더라도, 이것이 내 인생의 전부, 나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프로이드 같은 사람은 인간은 원래 불행한 존재라고 언급했는데, 누구에게나 짊어지고 가야할 어려움은 있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려움에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힘내어 살아가는 것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나만 극단적으로 불행한 것 같아 라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가끔 EBS에서 영화를 보려고 하다보면 공익광고가 나오곤 합니다. 한부모 가정이 나올 때도 있고, 조부 가정이 나올 때도 있고, 다문화 가정이 나올 때도 있습니다. 왜 나만 이런 걸까, 라고 한탄하고 있어봐야 그 불행은 나를 누르기만 할 뿐이지요. 저도 어머님이 정신 장애로 수 년째 고생길을 걷고 있지만, 이것이 극단적 불행의 이정표는 아닐 것이라 믿습니다. 괴로움 속에서도 할 수 있는 일들을, 그렇게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지금 익히고 배워나갈 수 있다면,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감사할 수 있을 테고요. 항상 기뻐하긴 힘들어졌지만, 그럼에도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길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새벽 3시, 밥벌이 끝에, 잠이 오지 않아 심란해도, 이렇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아픈 현실 속에서 그럼에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감사기도를 올릴 수 있는 이 밤이 그래도 행복합니다. / 2017. 08. 시북

 

by 시북 2017.08.0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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