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것을 깨닫느냐 (사도행전8:26-40)

 

오늘 설교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다루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합시다. 두 번째는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이라고 합시다. 올바른 만남. 어찌보면 전혀 상관없는 주제인 이 두가지가 오늘 설교의 주제가 됩니다.

 

한때 성경공부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흥회도 보통은 부흥사경회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사경회란 말은 성경을 공부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부흥과 성경공부가 합쳐져 있는 이 단어는 요즘은 찾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요즘도 몇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데 부흥이 된다니까 정말 신기한 일이기는 합니다. 한때 성경통독 수련회가 인기를 끈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좀 시들합니다. 이게 참 유행을 많이 타나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나 열정적으로 행해지던 성경공부는 요즘은 좀 추세가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성경공부를 조금은 꺼리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이단들이 성경공부를 빙자해서 이단사상을 전파하는 바람에 기존 교회에서 교회가 아닌 곳에서 하는 성경공부를 꺼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경본문을 교묘하게 끼워 맞추어서 사람들을 잘못된 곳으로 이끌고 결국은 이단사상을 합리화합니다.

 

이단들은 주로 열성 신자를 노립니다.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이롱 신자’들에 대해선 이단들도 답이 없는 모양입니다. 성경에 대한 궁금증도 없고 신앙생활에 대한 열성도 없고 그래서 매사에 시큰둥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성경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뭔가 의문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기존 신자들에 비해서 더 열심히 주님을 믿으려고 하고 그래서 주의 뜻을 더 정확하게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이런 사람들 중에서 각박한 현실을 이겨내고자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찾으려고 발버둥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는 그들의 신앙열정이 이단들에게 좋은 먹이가 되는 셈입니다.

사실 성경은 혼자서 끼워 맞추면 정말 곤란한 책입니다. 아직까지 성경의 번역이 완전하지 못해서 그리고 번역본으로 읽을 때 오해할 수 있는 표현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도 우리네 성경은 조금씩 바뀝니다. 전반적으로는 더 정확해 졌습니다. 번역이 요즘 우리들이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바뀐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성경번역이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오해하기 쉬운 문장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서 길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함정을 내포하게 되는 겁니다. 혹시 싶어서 말씀드립니다. 킹 제임스 역본은 한 사람이 만든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이 현대에 만든 표준원문성경보다 떨어질 확률이 높습니다. 더 방대하고 정확한 지식이 사용된 표준원문이 훨씬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문적으로 성경원어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 한글본 만을 가지고 성령의 감동으로 풀이를 하는 알레고리적 해석, 일명 영해는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물론 성경은 자체로 우리가 읽어서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되었고 성경의 본문을 상고하면 우리에게 큰 은혜와 지식과 깨달음을 주기도 하지만 이걸 자구 하나하나에 잘못된 견해를 투영시켜서 이단 사상을 합리화하는데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성경전체를 두고 한절씩을 빼내서 자기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식의 해석은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성경이 우리를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말을 합리화하는데 성경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서 ‘홀리 바이블’같은 사이트를 찾아서 여기에다 사랑이라는 주제어를 넣어서 검색기능을 클릭하면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본문은 다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성경전체의 뜻이 왜곡되기가 매우 쉽습니다. 즉 문맥속에서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개별적인 구절만을 합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을 오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서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점이 있는데 바로 교리라는게 결코 인간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만들어 낸게 아니란 겁니다. 그들이 교리를 만들 땐 성경구절을 가지고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래서 교리가 일면 불완전하고 모순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성경에서 하지 않은 인간적인 소리를 하는건 아닙니다.

 

가령 삼위일체나 하나님의 전적 주권이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뒷받침하는 많은 성경구절이 있었기에 이런 교리가 나온 거지 뒷받침하는 구절이 없는데 인간적인 생각으로 내가 그걸 좋아하니까 그런 교리를 만들겠다고 시작된 건 없습니다.

 

옛날 기독교의 초창기 때 예수님과 하나님이 동일 본질이냐 유사본질이냐를 가지고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로마 제국 내에 있는 모든 귀족들과 성직자들과 신학교수들이 모여서 토론을 했는데 그 결과 동일본질이 정통으로 인정을 받았고 유사본질은 이단으로 판정을 받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유사본질을 옹호하는 교파는 로마의 영토를 벗어나서 네스토리우스파가 되어서 중동과 당나라와 신라의 경주 남산에까지 퍼지게 되었지요.

 

경주 남산에 보면 머리가 없는 부처상이 있는데 이는 불교의 부처가 아니라 기독교의 ‘분처’입니다. 돌로 된 좌상의 아래에 ‘刀馬分處像’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을 비교적 최근에야 발견을 하게 된 겁니다. 그 전에는 ‘부처 중에서 도마라고 하는 이도 있는갑다!’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간 것인데 그러나 얼굴 생김이 좀 이상해서 아마 얼굴은 없에 버린 모양이지요.

 

예,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사도인 도마를 ‘분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상이 아니라 그의 제자이므로 분처가 된 것이지요.

 

네스토리우스파는 당시에 당나라에서는 경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호메트의 경우에 예수님이 인간이라고 하는 이의 전도를 받아 들여 예수님을 단순히 위대한 선지자로만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복음서를 믿습니다.

 

심지어 솔로몬이나 엘리야도 믿습니다. 욥 역시 아라비아 반도의 동남부 오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 누구에게서 전도 받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더구나 제일 처음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가 잘못된 신앙을 받아들인다면 후세에 와서 얼마나 그 폐해가 막심하겠습니까?

 

처음의 미세한 차이가 점점 심해져서 나중에 그 차이는 실로 말할 수 없을 만큼 커집니다. 그게 바로 ‘이단’인 것입니다. 끝이 달라진다!

 

우리가 성경본문을 아무리 읽어봐도 예수님의 얼굴에 대해서는 적어 놓지 않았습니다. 그가 코가 크고 눈이 검고 머리가 길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이런 저런 속설들이 전설처럼 떠돌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이나 십자가에 달린 모습에 대한 그림들을 봅니다. 대부분은 잘생긴 백인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얼굴이 백인일리는 없지요.

 

그는 이스라엘 땅에 유대인으로 나셨기에 보통의 셈족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자기네와 견주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초기에는 주님의 얼굴은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양반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오른손에는 성경을 왼손에는 장죽, 긴 담뱃대를 들고 계신 모습이 완성된 겁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우리네 조상들은 상상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에 대한 확고한 설명이 없기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저는 평신도끼리의 성경공부를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호히려 이런 열심있는 아름다운 모습은 권장되어야 합니다. 다만 평신도들끼리 성경을 공부하고 논란이 있거나 의문점이 있으면 목사에게 질문하면 됩니다. 진리의 문제는 다수결이 정답이 아닙니다. 자기들끼리 공부하다가 다수가 지지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려버린다면 곤란합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끼리끼리 모여서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모습은 실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런 성경공부 모임이 성령의 대폭발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 예가 많이 있습니다.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서로 교제하고 이런 소모임들이 나라와 민족을 바꾸고 구원한 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혹여 성경을 혼자서 무리하게 풀이하다가 잘못되거나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 수도 있다는 점도 있음을 명심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한국의 많은 사교집단이 여기에서 출발했습니다. 옛날 한국의 이단들이 계룡산에서 출발했다면 계룡산을 정화한 다음부터는 성경공부로부터 시작합니다. 이단들도 성경공부가 좋다는 것을 아는 모양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본문에는 빌립과 이디오피아 내시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디오피아 내시가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자’라는 것은 나오지만 정작 그 내시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내시의 이름이지 이디오피아 여왕의 이름은 아닌데 말이지요. 그래서 그냥 이름 없는 이디오피아 내시가 된 겁니다. 물론 이디오피아 교회에서는 그 내시의 이름이 전해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성경본문에는 그 내시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합니다. 주의 사자는 주의 천사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내려간다’는 말은 이중적인 뜻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같은 높은 곳에서 해안가로 내려간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도상의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가사’는 요즘의 ‘가자’입니다. 가자지구,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이곳은 블레셋의 도시로 국제적인 무역로가 있는 곳이고 현대에는 팔레스타인의 주요 세력권입니다.

 

빌립에게 성령께서 명하기를 ‘일어나서 남쪽으로...광야길로’ 가라고 하십니다. 일어나라는 말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빌립이 지금 잠을 자고 있다거나 누워있을 것으로 여길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빌립이 꿈에 성령의 계시를 받았을 것으로 가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어나다’는 말은 ‘준비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지금 성령님은 자는 빌립을 깨워서 남쪽길로 가는 여행준비를 시킨겁니다. 왜냐면 거기서 누구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는 만남이란 주제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통하여 하실 큰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빌립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성령께서 자기를 보내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냥 무조건적인 순종만 있습니다. 왜냐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의 지혜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결코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남쪽이란 말은 정말 문자 그대로 남쪽이란 뜻도 있지만 또 다른 뜻으로는 ‘한낮’이란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지금 굉장히 이상한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낮에 사막에, 여기 광야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가 아는 사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하라의 모래사막이 아니라 풀이 덤성 덤성 나고 관목이 약간씩 있는 그런 사막. 대부분의 사막이 이런 모습이랍니다.

 

그리고 ‘가사로 내려가는 길’은 황폐한 버려진 길입니다. 아마 이쪽으로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모양입니다. 로마군대는 블레셋의 이름난 도시인 가사를 황폐화시키고 해안가에 새로운 신도시 가사를 만들었는데 여하튼 지금 성령께서 인도하는 곳은 ‘구 황폐화된 가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황폐하게 버려져 있는 잘 가지 않는 가사 길’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인적이 없는 곳입니다.

 

여러분 한낮에 광야에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한낮에는 사막을 여행하는 이들도 모두 휴식을 취합니다. 너무 너무 덥기 때문에 한낮에 사막을 건너는 일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광야길이라고 하면 뭔가 낭만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본문의 광야는 그냥 사막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전도를 하려고 하면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목회지에 대한 사전 조사가 필요합니다. 뭔가 사람이 좀 많이 다니고 될 만한 곳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데 광야는 여기에 전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생각은 인간을 뛰어넘습니다. 너무나 당연한가요?

 

성령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명령하실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고생하며 이룬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몸만 가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을 명하실 때도 있지만 그는 항상 옳고 우리가 가진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그러나 명령을 그것도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받을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아무런 이의 없이 불만과 불평 없이 순종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궁시렁거리면서 ‘이건 아니야’ 라면서 미적거립니까?

 

따지고 보면 빌립은 충분히 불만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사마리아의 한 성에서 복음전도에 성공했습니다. 심지어 그 성의 시몬이란 유명한 박수무당까지도 빌립과 복음에 경탄하고 순종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 성에서 빌립이 가장 큰 영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까지 오른겁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교회를 세웠다는 겁니다. 그런 상태가 될 때까지 빌립은 정말 어려움을 많이 겪었을 것입니다. 그렇게나 고생만 하고 천신만고 끝에 이룬 선교지를 버리고 다시 광야로 가라는 성령의 말씀이 좀은 서운할 수도 있습니다. 고생만 하다가 조금 편안하게 쉬고 수고의 댓가를 누리고 하는 것이 그렇게나 보기 싫었을까요?

 

빌립은 정말 주님의 명령대로 두벌 옷도 전대도 없이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가는 자입니다. 이디오피아가 복음화되는 데에는 빌립의 이런 굉장한 헌신이 있는 겁니다. 빌립은 성령의 인도로 아무런 불평도 없이 사마리아에서의 기득권을 깨끗하게 포기하고 불모지인 황야로 떠난 겁니다. 그것도 무려 70km나 떨어진 곳입니다.

 

역사는 성령께서 하시지만 그 일을 위하여 사용되는 도구는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빌립같이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열정적이며 헌신적인 사람입니다. 그런 헌신된 자를 통하여 주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의 사자의 명령대로 빌립이 일어나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왔는데 가서 보니 이디오피아의 내시가 수레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27절에 ‘가서 보니’라고 되어 있는데 ‘보니’라는 말에는 감탄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지금 내시의 수레가 있고 내시가 글을 읽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곳에 가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가? 이렇게 하고 왔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이디오피아 내시가 수레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적어도 누군가가 있기는 합니다. 이제 저 사람과 만남을 통해 성령께서 하실 거대한 사역이 있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만남’입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만남,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 하나님의 사람과 사명과의 만남.

 

이런 식이지요. 이사야서, 아마 양피지로 된 두루마리겠지요? 그래서 ‘보니’라는 감탄사가 쓰여진 것입니다. 아마 본문에는 ‘보라’ 이렇겠지요. 놀람과 경탄의 감탄사로 쓰이는 보라!
이 내시는 이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권세있는 내시로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자기 나라로 가는 길입니다.

 

원래 이디오피아의 왕은 태양신의 아들로 간주되었지만 그냥 상징적인 존재이지 실제로 통치는 하지 않습니다. 이 당시에 이디오피아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고 태양신을 믿었습니다. 지금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오벨리스크 있쟎아요. 그게 원래 이디오피아에 있던 건데 훔쳐서 그곳에 세워놓은 거랍니다. 아마 태양신숭배와 연관이 있을 걸로 여겨집니다.

 

왕 대신에 실제로 통치를 하는 자는 왕의 어머니입니다. 이 왕의 어머니를 ‘간다게’라고 하는데 본문에 나온 이디오피아 여왕 간다게가 바로 그겁니다. 그러니까 간다게가 아무개의 이름이 아니라 왕의 엄마를 일컫는 호칭입니다. 그러므로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이 내시는 엄청난 권세를 가진 사람입니다. 조선식으로 하면 ‘대비전의 권세 있는 내시’인 것이지요.

 

우리가 내시라고 할 때 생각하는 성적인 문제는 제외하고 봅시다. 내시가 정말 이디오피아 인 이라면 그는 이방인들 중에서는 제일 첫 번째로 복음을 받아 들인 자가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는 제일 첫 번째 이방인 신자는 고넬료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이 내시가 이방인이 아니라 당시 이디오피아에 많이 살고 있었던 유대인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디오피아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고 몇십년 전에 이디오피아에 대기근이 닥쳐서 사람들이 굶어 죽어나갈 때 이스라엘에서 ‘검은 유대인’인 이디오파아의 유대인들을 대대적으로 본국으로 송환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이 내시 역시 혈통상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문학작품 중에 솔로몬의 동굴도 있지 않습니까? 아마 솔로몬시대에 광산이나 목재의 개발을 위해서 이스라엘사람들이 많이 이주를 하지 않았을까요?

 

이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디오피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6.25전쟁 때에 우리나라에 군대를 파병한 이디오피아의 하인리히 셀라시에 황제가 우리나라에 와서 말하기를 자기는 솔로몬과 시바의 후손이랍니다. 그러니 이 나라의 신앙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디오피아 교회에는 십계명을 간직한 곳도 있다고 합니다. 원래 이디오피아는 예멘과 연합왕국을 이룬적이 있었는데 시바의 여왕이 이 나라를 다스렸는데 그녀가 솔로몬과의 사이에 아이를 낳아서 그 후손이 하인리히 황제라고 했습니다. 예멘과 이디오피아는 홍해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지만 좁은 해협을 건너서 한때는 이디오피아가 예멘을 지배했고 한 때는 예멘이 이디오피아를 지배했고 그랬답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지금은 공산주의 혁명과 오랜 가뭄과 내전으로 피폐해 졌지만 예전에는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문명국이자 유일하게 유럽의 제국주의 세력과 싸워서 이긴 나라입니다. 왈왈 전투에서 이디오피아를 식민화하려고 쳐들어온 이태리 군대를 격파해서 독립을 유지한 그런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의 권세있는 내시가 지금 수레에 앉아서 이사야서를 보고 있습니다. 정지해 있는 마차가 아니라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내시는 큰 소리로 이사야서를 읽고 있습니다. 그는 히브리어 성경이 아니라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인 70인역을 읽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빌립더러 이 수레에 가까이 가게 하셨습니다. 아마 이 내시의 수레에는 내시만 있었다고 하기는 어렵겠지요? 먼 거리를 오가는 권세있는 내시가 수행원이나 경호병없이 단독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들의 신앙으로 본다면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온건데 혼자서 다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광야길에서 갑자기 웬 사람이 수레로 달려오면 경비병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수상한 사람이라고 보고 무력을 행사하거나 잘못되면 크게 다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한 빌립은 머뭇거리지 않고 수레로 달려간 겁니다. 달려 가지 않을 수 없는게 지금도 계속해서 수레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달려간다는 말에서 우리는 성령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신앙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하튼 빌립이 성령의 인도로 수레에 달려서 가까이 다가갔는데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묻습니다.

“읽는 것을 깨닫느냐?”
이 질문은 순수하게 아는지 모르는지를 물어보는게 아닙니다. 틀림없이 읽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를 것이라는 의심을 가지고 묻는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내시가 빌립의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이 말속에도 여러 가지 함축적인 뜻이 있습니다. 당연히 알지 못하지만 내가 알 수만 있다면 알고 싶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물론 빌립도 그럴 것 같아서 물어 본 것입니다.

 

이 내시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디오피아의 권세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겸손한 자세로 가르침을 청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성경을 단순히 읽는다고 해서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걸 알게하는 것을 성령의 조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인간들 사이에서 아무리 큰 자이고 성공한 자라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미천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결코 척을 하거나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 앞에서 교만할 필요가 뭐 있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아는 척, 있는 척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아버지 앞에 나가서 겸손하게 나의 부족함과 소원을 아뢰면 됩니다.

 

우리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가까이 해왔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묵상하고 때로는 통독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원해왔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혼자서 성경을 보고 깨닫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단순히 성경 이야기만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들이 은유와 비유로 많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로는 알레고리적인 해설을 했고 때로는 비유의 뜻을 깨닫기위해 노력했으며 우리말 역본을 넘어서 성경원문의 뜻과 더 가까워지고자 성경언어를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성경은 우리에게 신비한 책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허락한 만큼만 우리에게 자기를 드러내십니다. 그것만 알아도 신앙생활하는데 충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를 파헤치고 능력의 근원을 깨닫기 위해 더 더 깊숙이 들어가서 궁극적인 진리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마치 이 내시처럼 지금 내 눈으로 말씀을 읽고 있지만 진정한 깨달음과는 거리가 있는 이가 궁구한 것과 같습니다.

 

나를 지도해 주는 이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가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해 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목사가 참 성도를 기다리고 찾느라 눈이 빠지도록 수고한다면 성도 역시 참 목자를 찾으려고 헤매고 있습니다. 이 둘이 잘 만나야 신앙생활이 즐겁고 유익할 것입니다. 만남, 제대로 된 만남이 중요하네요.

 

지금은 교사라고 하면 목사하고는 다른 개념이지만 옛날 목사는 교사였고 교사는 목사가 아니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둘이 같은 개념 즉 성직자란 뜻으로 쓰인 겁니다.

좋은 목사, 좋은 교사를 만나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희망사항이지만 그러나 현실은 참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목사에게 상처입고 실망하고 또는 다른 동료 교인들에게 실망하고 상처입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의 소망이 하나 있다면 예전에 하나님을 믿다가 실망하고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이들, 잃어버린 양들을 다시 찾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새신자를 잘 키우는 것하고 잃어버린 양을 다시 찾는 것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기위해서 먼저 잘 믿는 신앙좋은 일꾼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한때 1200만에 달했던 기독교인은 지금 겨우 800만을 조금 넘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잃어버린 양을 다시 찾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요즘 그것을 놓고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시는 빌립을 수레로 청해서 자기가 읽고 있었던 이사야서의 구절에 대해서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내시는 이사야53:8 말씀을 읽고 있는데 이사야가 말한 ‘그’가 도대체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어린양이 나오는 부분, 요즘 우리야 이 구절에 나오는 그를 잘 압니다.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에 대해서 들어보지도 못한 이디오피아 내시로서는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빌립에게 도데체 이 사람이 누구를 말하는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빌립은 대답하기를 여기서 말한 이는 예수라고 말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지금 이디오피아 사람들은 태양신교나 유대교를 믿는게 아니라 기독교를 믿습니다. 바로 이 내시가 전도되어서 맺은 열매인 것입니다.

 

빌립은 최초로 뽑힌 예루살렘 교회의 7집사입니다. 물론 성경은 그를 일러 ‘집사’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접대’를 맡을 일곱명을 뽑았다고만 적혀 있습니다. 이들의 임무는 원래 봉사와 구제였습니다. 빌립은 그 일곱명 중에서 두 번째로 이름이 올라 있는데 첫 번째로 올라온 스데반이 순교했기 때문에 빌립이 첫 번째가 되어버렸네요. 그는 8장에 보면 사마리아의 한 성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고 이제 이디오피아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았던 것입니다. 이디오피아에 복음을 전했다고 해서 그가 이디오피아에 간 건 아닙니다.

 

한 사람 내시에게 그것도 이스라엘 땅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씨가 오랜 세월동안 숙성되고 싹을 튀우고 열매를 맺어 이디오피아라는 한 나라를 복음화하는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광야로 가서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났는데 하필이면 그가 예수님을 언급한 이사야서의 구절을 읽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내시에게 그가 이사야에서 예언한 그가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내시는 기쁘게 가던 길을 갔고 빌립은 성령에 이끌리어 내시를 홀연히 떠났고 나중에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렀답니다.

 

권세있는 내시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빌립이 마음만 먹었다면 그는 이디오피아의 내시로부터 좀 더 융숭한 대접을 기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역시 성령께서는 그가 편안하게 여가를 즐기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그를 또 다른 사역의 장으로 이끄신 것입니다. 사막가운데서 홀연히 나타난 빌립과 동행하면서 성경구절에 대한 해석을 듣고 그리고 깨닫고 그리고 믿고 그리고 세례를 받은 후에 다시 성령이 홀연히 빌립을 이끌어 가셨다는 겁니다.

 

여전히 내시는 기쁨에 차서 자기의 길을 계속해서 갑니다. 갑자가 곁에 있던 사람이 사라지면 뭔가 이상하고 허전할만 한데도 복음을 받아들인 기쁨이 너무 커서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는 거지요. 원래 영웅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집니까?

 

이렇게 보니 마치 꿈같습니다. 사막가운데 한낮에 벌어진 꿈. 그러나 이 전도로 말미암아 이디오피아는 기독교 국가가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지금도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하게 하시면 아무리 눌변이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충분히 하나님의 도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단 씨를 뿌리는 것에 그치고 나머지는 하나님 아버지께 맡겨 두면 됩니다.

저도 전도를 나갈 때는 항상 이렇게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꼭 적합한 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전도를 받아들여서 우리교회의 새로운 멤버로 충성할 그런 자를 순적하게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사실 수많은 이들이 복음을 전하고 또 전도지를 받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 가운데 ‘믿을 이’를 만나는 것은 어렵습니다. 통계상으로는 이십년 전 통계입니다. 지금은 아마 더 열악해졌지 싶습니다만 전도지 만장을 뿌리면 한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인답니다.

 

그래서 솔직히 자본주의식으로 생각하면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것 보다는 전도지 만드는 돈으로 한 가정을 집중적으로 전도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입니다. 보통 한 가정에 네명이라고 하면 전도지를 뿌린다면 적어도 4만장을 뿌려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당연하게도 맨투맨 전도가 훨씬 더 효율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보편적인 방법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길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눕니다. 관계전도도 하고 보편적으로 거리 전도도 하고 문서 선교도 하고 ... 이 방법도 선하고 저 방법도 선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면 우리가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역사하시고 이루십니다.

 

사실상 기독교의 기본 사역의 개념상 교회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선포가 아니라 가르침입니다. 우리 주님이 세우신 교회의 기본 사역이 그렇습니다.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고’ 여기서 ‘고치고’는 결국 ‘섬기고’의 다른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 잘 알지 못하는 이에게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그리고는 이들을 성령의 감동과 감화를 받도록 말씀을 선포합니다. 말씀이 선포되어질 때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일어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교인들을 섬기고 지역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 주어진 기본 사역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본 사역은 여건상 또는 성향상 왜곡되어지고 본말이 전도되어 버렸습니다.

 

옛날 종교개혁자들이 교회와 전통의 권위를 없에고 대신에 만든게 바로 말씀의 권위입니다. 오늘날 카톨릭에서 교황이 앉아 있는 자리는 원래 말씀이 앉아야하는 자리입니다. 인간 누구누구를 숭배하고 존숭하는 그런 종교는 이단이 아니라 아예 다른 이교입니다. 다른 종교입니다. 지금 이단이라고 주장되어지는 많은 집단들은 제가 볼 때는 이단이 아니라 사교집단입니다. 그러니까 실제적으로 교주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니 좀더 정확히는 예수님을 교주로 모십니다. 그래서 대한 예수교인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말씀드리면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지만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고 신약은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세부적으로야 이런 저런 것들이 있을 수 있지만 큰 틀은 이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시고 너무 일찍 죄성에 물들어서 타락한 인간들을 위해서 예수의 십자가 보혈을 고안하신 겁니다. 스스로 거짓을 말할 수 없는 분인 하나님은 자기가 세운 원칙, 죄를 지은즉 사망이라는 원칙을 어기지 않고도 인류를 멸망에서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후세에나 알 수 있는 거지 당대의 사람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이디오피아는 유대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시가 빌립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아무리 이사야서를 읽어도 그가 말하는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와같은 극적인 성령의 역사, 극적인 만남을 꿈꿉니다. 그가 우리를 이끄시고 인도하시면 놀라운 일이 생길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인지 아니면 내 멋대로 가는 길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습니다. 다만 내 스스로 성령의 인도 따라 가기를 원하며 내가 가는 길에 성령의 보호와 인도가 있기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나와 그의 만남이 성령께서 만드신 역사적인 만남이고 서로에게 인생의 대전환이 되는 기념비적인 만남이기를 꿈꿉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런 만남을 하고 싶지요? 그렇다면 기도할 일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기도 보면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보니 텅빈 광야에서 내시의 수레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 내시는 이사야53장의 말씀을 읽고 있는 중입니다. 더구나 그는 그 내용을 알고자 하나 아무도 그를 가르치는 사람이 없으므로 답답해 하던 중입니다. 만일 내시를 만난자가 빌립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기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랍비였다면 이사야서의 그를 가리키는 인물이 예수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건을 말한다고 잘못 전했을 것이고 내시의 삶에서 그 만남은 그저 그런 만남으로 끝이 날 겁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혹시라도 의문점이 있다면 바로 바로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성경에 대해서 질문받기를 좋아합니다. 전화로 묻기가 그러면 교회에 왔을 때 물어도 되고 메일로 또는 블로그의 댓글로 물어보면 됩니다. 제가 모든 것을 다 아는게 아니니까 저도 답변을 준비할 시간도 필요하고.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큰 역사를 이룰 때도 있고 큰 악을 초래할 수도 있고 재앙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제대로 된 만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것이 제대로 된 만남이 될지 어긋난 만남이 될지 재앙을 초래할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도 그럴듯하고 저 말도 그럴듯해서 도대체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도 없고 없던 미래를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압니다. 모든 일에 모든 만남에 성령의 인도를 제일 우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도를 아니 하시면 어쩌지요? 뭘 어쩝니까? 그가 인도하실 때까지 모든 일을 미루고 기도할 일입니다. 그래도 안된다면 더 기도할 일입니다. 만일 기도를 열심히 성심으로 했다면 모두 잊고 푹 자 보세요. 우리 하나님이 빌립에게처럼 꿈속에서 나타날 수도 있는 일이지요. 나머지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우리 할 일만 하면 됩니다. 아니라도 우리의 눈에 안보이고 귀에 안 들려도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는 중 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영적인 관심을 하나님에게로 향해야 합니다. 부동산 투기꾼이 어디에 가야 돈이 될 건지를 자나 깨나 살피고 염두에 두지만 우리는 영적인 일에 우선을 두고 자나 깨나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저절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빈들에서 홀로 공고해 하던 내시에게 빌립이 나타난 것 같이 하나님의 인도가 나타날 것입니다.

 

제대로 된 만남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제대로 된 깨달음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제대로 된 사역에 쓰임받기를 위해서도 기도할 일입니다.

결론은 기도합시다. 기도만이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그래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령께서 이어주는 만남을 하게 되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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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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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 설교를 올리며 저는 이 대목이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멋진 길인지, 아니면 내 멋대로 가는 길인지에 대해서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에요. 바랄 수 있는 것은, 나의 가는 길에 성령님의 보호와 인도가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와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저는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라는 찬양이 생각났습니다. 일어나 달려가는 삶, 일어나 노래하는 삶, 저는 늘 잠들어 있는 걸 좋아하는 나이롱 신자지만, 우리가 주님을 사모하며, 기도하는 삶을 추구한다면, 분명히 그 답은 우리가 찾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나의 삶을 어떻게 사용하실지는 우리가 함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을 열심히 맞이해야 합니다. 때로는 어려운 길, 힘든 길을 걷게 될지라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 2017. 08. 시북

 

by 시북 2017.08.27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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