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이사야1:2-9)

 

이제 추석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제가 너무 추석이 다가왔다는 것을 강조하니까 이상합니까? 그래요, 추석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정말 추석이 가까워져서 이번주에 추석입니다. 이정도면 정말 가깝지요?

추석이 영원히 우리네 명절로 휴식일로 지속되려고 하면 지금 이대로는 안되기 때문에 제가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추석은 설보다 더 좋은 명절입니다. 날씨도 따뜻하고 추수의 계절, 수확의 계절에 맞는 명절이라서 모든게 더 풍성합니다. 그러니까 추석은 우리의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는 모여서 결실에 기뻐하고 햇빛과 물로 곡식을 키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래서 역법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든 설날보다 더 기쁜날입니다.

저는 오늘 추석을 맞이하여 이사야서의 말씀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이사야서는 한마디로 앞으로 있을 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한 경고이자 준비를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뒷부분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포로에서의 해방과 회복을 말합니다. 절망 중에서도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중간부분에서는 그냥 담담하게 하나님이 하신 역사적인 거대한 능력의 발휘에 대해서 기술합니다. 물론 이렇게 강한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힘을 내라는 말일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이사야서를 보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었지만 하나님을 배반하고 국민들의 도덕적인 타락이 심각하다는 면에서는 상당히 우리와 비슷합니다. 세계에서 몇 번째로 큰 교회들이 몇 개가 있다는 둥의 말은 많이 합니다. 세계에서 선교를 제일 많이 한다는 식의 말은 합니다만 우리네 도덕수준이 사실 심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큰 교회들의 행태는 절대로 모범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들과 목사들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타락상과 영적인 피폐함이 만만치 않습니다.

물론 우리나라는 지금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도덕수준이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보다 낫지 못함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민족에 실망하시고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선지자 노릇을 못하게 하시고 영광의 잔을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게로 옮기실 지도 모릅니다.

 

우리네가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을 할 자격이 없어진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하나님의 소명이 없어진다면 우리는 존재 이유가 없어지고 그렇다면 끔찍한 불행을 초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아직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본서의 저자인 히스기야는 남 유다의 왕족입니다. 그래서 백성들과 씨름한 거리의 선지자라기보다는 궁정 선지자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유다의 제10대 왕인 웃시야 시대부터 해서 본문에 나오는 히스기야의 아들인 므낫세의 통치시대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니까 무려 60여년간 선지자로 활동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는 히스기야까지만 나오고 므낫세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가 고의로 므낫세를 누락했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와 달리 사악한 배덕자였기 때문에 이사야가 일부러 이름을 누락했다는 거지요. ‘이사야의 승천’이라는 외경이 있는데 여기에 보면 이사야가 므낫세에게 톱으로 켜짐을 당하여 비참하게 죽었답니다.

 

위대한 선지자의 말로치고는 너무 비참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가 더 위대한 선지자인 것이지요.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 바른말만을 했기 때문입니다. 왕의 입맛에 맞는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른 예언을 했기에 톱으로 켜짐을 당해서 죽게 되는 겁니다.

예언의 내용도 굉장히 스케일이 큽니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에 관한 예언에서부터 온 세상의 멸망과 만민의 구원같은 초국가적인 예언까지 그 범위가 거의 세계적입니다.

 

여기 보면 1절에 맨 끝에 ‘계시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의 ‘계시’는 누구에게나 내려오는 계시를 말하는게 아니라 선지자에게만 보여주는 계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가 스스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이 단어를 근거로 그가 선지자라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일부 고문헌학자들, 저는 성경을 믿지 않는 이들을 신학자가 아니라 고문헌학자라고 부릅니다. 우리로 치면 한문 연구가 정도. 이들은 이사야의 예언이 너무 정확하게 이루어진 점을 들어 이사야가 아니라 후세의 누군가가 자기가 직접 겪은 일을 기술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면 이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믿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인간이 그렇게 정확하게 미래를 예언할 수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도 믿지 않습니다. 그냥 생계를 위해서 자기가 지겹도록 배운 헬라어 히브리어 지식을 이용한 고문헌 학자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제가 항상 궁금한 것이 왜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역사를 믿지 않는 이들이 스스로 목사입네 신학자입네 하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거든 제발 목사 타이틀을 떼고 활동하면 좋겠는데 그러지 않으니 참 기가 찹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이사야의 예언이 그만큼 정확하게 이루어 졌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고레스’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맞추었기 때문에 이들이 더 이사야의 예언을 예언이 아니라 역사 서술로 보는 것이지요.

 

자,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처음부터 심상치가 않습니다. 2절에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 하였도다”

 

하늘과 땅이 들으라고 하는 대목이 너무 식상합니까? 거창하게 하늘과 땅까지 들먹이는 것이 좀 웃깁니까? 여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하늘과 땅을 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예언하면서 증인으로 삼을 두명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사람들이 고소를 할 때 두 사람의 증인이 필요하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증인으로 설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건  제 생각인데 당시 이사야의 예언을 들을 사람이 없었다는 거지요.
아무도 유다가 악해서 멸망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들을 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겁니다. 스스로를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믿는 이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지는 생각지 않고 자기네가 잘못하고 악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심판을 받아서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들어 넘기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하늘과 땅을 사람대신에 증인으로 요청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어찌보면 참 비참한 일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백성들에게 선지자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은 왜 유다가 멸망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잘했다. 괜찮다, 복준다 소리만 듣기를 원합니다. 자기에게 복을 내려주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지 이건 하지 말고 저건 하고 왜 이런 식으로 사느냐 제발 좀 바르게 살아라 같은 잔소리는 듣기 싫다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무조건적으로 복만 주시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복주시려고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우리의 주재자이시며 온 인류에게 경배 받으시기를 즐겨하시는 아버지십니다. 자녀가 잘못했는데도 전혀 상관하지 않고 복만 내려 주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얼마나 들을 사람이 없었으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증인으로 설 사람이 없었으면 그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초청했을까요?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 닫았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고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고...’ 하는 이야기는 듣기 싫어합니다. 무조건 복 준다는 소리만 듣고 싶어 합니다.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그분의 ‘불꽃같은 눈동자’는 우리를 쉬지 않고 지키시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시며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는 회개하게 하시는 용도로 기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선 단독자’로 그가 항상 나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이사야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그를 거역하는 것에 대한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3절에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와 나귀보다 못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우리식으로는 개돼지 보다 못하다는 말을 씁니다. 음, 그런데 요즘은 개권이 향상되어가지고 함부로 이런 말을 쓰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잘 보시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란 말에서 강조하는 것은 ‘소와 나귀에게 먹이를 주는 이’입니다. 자기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목숨을 연명할 수 있도록 하는 이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그런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살 곳을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시며 인도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북한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나리니 뭐니 하면서 떠들고 있지만 전쟁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고 역시 우리의 목숨도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외부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괜히 언론에서 다루는 것 뿐이지 우리네 관심은 전혀 그런 것에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먹고 살까? 에만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시고 우리네 삶을 유지하게 하시는 이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무관심하고 그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인간은 쾌락에 탐닉하며 자고하며 교만하고 더 큰 쾌락을 위해서 더 큰 부와 권세를 위해서 정작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에게 엎드려서 절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멸망하기 전의 유대를 보고 탄식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를 보시고도 역시 이처럼 탄식하실 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이유는 여기 있네요. 이스라엘을 나의 백성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동안 지키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셨는데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가 살만해 졌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됨을 거부하고 우상을 섬기며 음란하고 사악해 졌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이 탄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결국 멸망하고 70년의 포로기를 거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보릿고개에 전쟁의 화마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외세에 의해서 나라가 분단되고 서로 싸우고 이랬던게 엊그제같은데 이제 좀 살만해졌다고 벌써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습니다. ‘그건 당신이 한 게 아니라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그런 거요’ 이렇게 나옵니다.
아니면 우리 조상님이 보우하사 아니면 뭐시기 뭐시기의 보호로 이렇게 주장하며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우상을 섬기며 스스로 높아져서 목이 뻗뻗해 졌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어려울 때 가난할 때 찾던 그 하나님을 더 이상 찾지 않습니다. 물론 문제는 있습니다. 목사와 교회가 제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교인들에 대해서 뭔가 바른 소리, 영적인 권위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제가 좀 과격한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요?
조선이 오랜 신분제의 압박에서 겨우 해방되고 서구기술을 받아 들여서 서북지방이 산업화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양반의 등쌀에서 해방되어 좀 살만해 지려고 하자 사람들이 제일먼저 한 것이 양반을 사칭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조선말 즉 왜정시대가 시작될 때에 호구조사를 한 것을 보면 양반은 전체의 1.5%가 안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어떤 지역에서는 전체의 70%가 양반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서울에서는 ‘이 양반이’ 라는 말이 사람들을 지칭하는 보통 명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거기 가는 양반’ 이라고 뒤에서 부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쳐다 볼 정도로 양반이 보편화가 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다 가짜 양반이라는 거지요. 군역이나 각종 세금을 면제받으려고 양반을 사칭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법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자 그동안 평민이나 노비였던 이들이 모두 양반을 사칭한 겁니다. 양반을 사칭하기 가장 쉬운 것이 제사를 지내는 겁니다. 양반의 징표야 향안이니 하는 것 외에는 족보와 제사가 있었는데 족보는 깊숙이 숨겨두었다고 치고 제사는 남에게 과시할 수 있고 족보위조나 구입보다는 싸게 먹히기 때문에 더 성행한 겁니다.

 

원래 제사는 양반의 전유물이었으므로 그리고 유교에서 권장되는 것이었으므로 너도나도 제사를 지내면서 자기들이 양반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 가짜 양반이 흘러 넘치게 된 배경입니다.

원래 가례를 보면 제사를 지낼 때 사당에서 조상의 신위를 꺼집어 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평민들의 집에 사당이 있기나 합니까?

 

또 제사에는 차를 바칩니다. 마찬가지로 먹고 살기도 힘든 이들이 그 비싼 차를 제사에 내어 놓기는 어렵습니다. 또 제사를 지내는 이는 신분에 맞추어 비단옷을 입어야 합니다. 당연히 평민이 무슨 비단옷입니까? 삼베옷이나 베옷도 과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제사는 평민들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들만의 리그인 것이지요. 그러니 그동안 평민들이 얼마나 제사를 지내고 싶었겠습니까? 양반인양 하고 싶어서.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이 제사를 양반을 사칭하기위해 지낸다고 할 때 제사가 지내는데에 돈이 많이 드는 의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좀 살만해 지니까 사람들이 그 돈을 정작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에 사용했다는 겁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노부모에 대한 봉양을 포기합니다. 치매가 걸린 분은 사실 개인이 돌보기 힘듭니다. 그래서 국가가 책임지겠다고 그렇게 하고 있지만 멀쩡하신 부모님을 자꾸 이상한데 모실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게 당연한 듯이 말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게 정상적인 일이 결코 아닙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낳으시고 키우실 때 말년에 자기를 어디 보낼 그런 자식을 기대하신게 아닙니다. 자기는 비록 못 입고 못 먹고 못써도 자식들은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키웠습니다. 다른집 자식들에게 기 안죽이려고 최선을 다해서 좋은 것으로 주시고 보호하고 공부시켰는데 정작 자식은 자기가 잘나서 자기 혼자 다 큰 것처럼 생각하고 부모를 이상한 곳에 보내버립니다.

 

뭐 친구도 많고 체계적인 의료서비스에 영양도 챙기고 어쩌고 하면서... 정작 노부모에게 필요한 것은 가족의 정입니다. 사랑이예요. 그런데 모시기 싫으니까 자꾸 들여다보고 전화하고 챙기기 싫으니까 이상한 말로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게 현대판 고려장입니다.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를 세습시키고 교인들의 뜻이라고 우기는 거나 부모를 그런 곳에 보내고 부모에게 더 좋다고 우기는 거나 똑 같습니다. 정의는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 주위부터 먼저 정의가 임하도록 하면 됩니다. 자기 스스로 불의를 저지르지 않으면 저절로 모여서 정의가 세워 집니다.

 

우리 하나님이 신분제의 사슬에서 벗겨주시고 산업화를 시켜서 뭔가 좀 살만해 지니까 제일 먼저 생각한게 제사라면 그 나라가 온전하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제사법으로 가장 많이 참조되는 ‘증보사례편람’이란 책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사례편람’을 덧붙이고 보수한 책입니다. 관례 혼례 제례 상례의 사례. 이 책은 황필수(黃泌秀)라는 사람이 이재(李縡)의 『사례편람』을 증보한 예서(禮書)인데 이게 지송욱에 의해서 1900년에 간행되었습니다.

 

그럼 사례편람은 언제 간행되었느냐면 이재가 살아 있을 때가 아니라 그의 자손이 1844년에 처음으로 간행합니다. 그걸 지송욱이 1900년에 수정하고 보완해서 간행한 것입니다. 1894년 갑오경장에 의해 양반상민의 구분이 사라지고도 한참 후에 갑자기 가례에 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또 인쇄기술이 보급되었기 때문에 이 책이 간행된 겁니다. 왜 가례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늘어났을까요?

 

왜기는 왭니까? 양반이 되고 싶어서요. 법제상으로 이미 사라진 양반이 되고 싶어서 제사를 지내려고 보니까 제사를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내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제사에 관한 책이 필요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1900년 조선이 망하기 직전에 이 책이 간행된 것입니다.

 

아마 이 즈음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확 늘었을 것입니다. 결과는 조선의 멸망이고 수많은 백성들의 고통이고 집안의 멸문이지요. 몇몇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나라전체가 아주 크나큰 고통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조상의 은덕으로 후손이 복을 받으려고 한 제사’를 전국적으로 폭발적으로 드리기 시작하자마자 나라가 망한 것을 우리는 공교롭다고만 생각할 수 있을까요? 단지 우연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오백년이나 이어진 나라가 단번에 그렇게 망하기가 어렵습니다. 과연 여기에 영적인 의미가 없겠습니까?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평양대부흥운동이 벌어진 것과 같이 생각해 보면 뭔가 여기에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섭섭하신 겁니다. ‘너희들이 진정으로 부모를 몰라보는구나!’ ‘누가 참 부모인지 모르고 사탄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너희들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아마 우리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한번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그래요,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려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추상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갈피를 잡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17절에 더 구체적으로 실천방안이 나와 있습니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어떻습니까?
우리 스스로 우리가 깨끗해지려면 첫 번째로 선행을 배워야 합니다. 선행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배우라고 합니다. 사실 배우는 거야 지금도 배우기는 많이 배웁니다.

 

교회에서도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우리는 이렇게 배우기는 합니다. 심지어 오락을 주로 하는 대중매체에서도 착하게 살아라고 하지 악하게 네 마음대로 살아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항상 착하게 살아라 착한 일을 해라 이렇게 배우기는 하는데 뭘 더 배웁니까? 선행을 행해야지.

 

여기서 ‘배우라’는 말은 반복해서 행동하여 그걸 습관화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는 것을 반복 숙달해서 우리 몸이 착한 일에 적응이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선행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계속해서 함으로 우리 몸에 습관이 될 때까지 선행을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가끔가다 좋은 일을 하나 하고 나면 마음이 뿌듯하고 기쁘고 그렇습니다. 내 마음이 정결케 된 듯이 느낍니다. 그런데 그걸 반복 숙달되도록 해서 그게 나의 습관이 될 정도로 계속하라는 말입니다. 반복 숙달을 학습, 우리 몸이 학습해서 몸에 익어서 습관이 될 정도로 하라는 말입니다.

 

왜냐면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악한 일은 그냥 두어도 잘하지만 선행은 억지로 자기를 절제하고 훈련하지 않으면 참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제 말에 반대하시는 분은 정말 인간세상에서 보기 드물게 잘 살고 계시는 겁니다. 축하를 드립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평안함 속에 거할 것이기 때문에 축하를 드립니다.

 

몇몇 희귀한 경우를 빼고 대부분의 인간이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말입니다.

선행은 무엇이든 좋은 상태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잘못된 것도 바르게, 경제적으로 약한 것도 튼튼하게, 억울한 것도 바로잡아 정당하게 만드는 것을 선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선행이 우리가 이제껏 생각했던 거지에게 돈 한푼 주는 정도가 아니라 이 세상의 잘못된 것을 적극적으로 바로잡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정의를 구하며’
정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정의는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법에 저촉되지 않는 바른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그래요 정의는 아주 쉬운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정의를 구한답시고 거창하게 온 세상을 구하거나 이 나라를 바로잡는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부터 내 주위부터 법에 저촉되지 않는 바른 삶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그래요 이 마지막이 우리가 이제껏 생각했던 의미의 정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학대받는 자는 누가 도와 주지 않으면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한 정의감이 없다면 어려운 일입니다.

 

혹시라도 저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다가 나도 찍혀서 같이 핍박을 받게 되지나 않을까하여 몸을 사립니다. 이게 인지상정이지요. 그러나 우리 성경은 이러한 학대 받는 자가 도움이 필요하고 우리 성도들은 학대받는 자를 도와야 됨을 말합니다.

 

‘신원하다’는 말은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다는 말입니다. 고아와 과부는 가난한 자의 대명사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의 호소에 귀기울이라는 뜻도 됩니다. 사실 요즘 재판결과가 제 멋대로이고 때로는 정의에 어긋나는 판결이 많음을 알 고 있습니다. 제 생각인데 아마 돈이 많아서 좋은 변호사를 쓴게 아닌가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는 제대로 된 변호사를 고용하지 못해서 불리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사야 당시에도 고아와 과부의 호소에는 재판장들이 귀 기울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국가권력이 이렇게 부자편을 들기 시작하면 그 나라는 하나님의 눈밖에 나게 됩니다. 그래서 채찍으로 두드려 맞게 됩니다. 그리고 그 채찍질을 인간이 견디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했는데 히스기야 때에 바벨론은 히스기야에게 예물을 바치며 그와 군사동맹을 체결해서 함께 앗수르에게 맞서자고 요청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강대해지고 앗수르가 멸망하자 오히려 유다를 침공해서 잡아 먹어버린 겁니다. 인간의 강함으로부터 우리를 보존해 주실 분은 하나님외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서기위해서는 17절에 나와 있는 실천방안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물론 보다 더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바로 서야 합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위정자들 세력자들 거대 종교권력들은 반드시 이를 경청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교회와 목사들이 먼저 이 말을 따라야 합니다. 왜냐면 교회는 이 나라의 마지막 보루이자 희망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상권력이나 단체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단체이지만 하나님의 교회만큼은 우리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단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공의를 이 땅에 실현시키는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의 교회 아무개 목사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임재를 실천해야 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노력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나부터 내 주변부터 우리 교회부터 그렇게 하다보면 결국은 우리가 승리하게 될 것이며 우리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 하나님의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요즘 보면 교회가 목사가 세상에 내세울 자랑거리가 참 적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그 자랑거리가 한번 되어 봅시다. 그렇게 한번 살아 봅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길을 좇아봅시다. 그리고 우리만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이 사회와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합시다.

 

우리는 지금 십일간의 긴 연휴 중에 있습니다. 하늘은 맑고 높으며 기후는 온화합니다. 하늘의 뭉개구름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뻥 뚫린 듯도 하고 아련한 추억에 잠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자연은 푸릅니다.

고요한 가운데 가족들과 정을 나누고 하나님이 주신 이 귀한 휴식을 잘 누리시기를 바라고 우리들이 보다 성숙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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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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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찬양을 들으면서 이 설교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정리라고 해봤자, 가독성을 약간 높이기 위해서 문단 띄우기 정도 입니다. 찬양 속에서는 ONE WAY JESUS 라는 표지판이 보입니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적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발견해 내기만 하면, 삶은 훨씬 더 높은 경지로 다닐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토요일에 홀로 책을 읽다가 이 문장을 발견해 내어 옮겨 적어봅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인내뿐"

 

평소 만보를 걷는데, 이 날만큼은 더욱 힘내어 이만보까지 걸어봤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분명 있지 않을까요. 자기합리화는 그만두고, 스스로의 삶을 깨끗하게 하고자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 앞으로 적극적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속상한 일이 왜 없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알 수 있었는데 그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자신보다 더 큰 사명에 충실하게 살아갔다는 점에서, 아! 이렇게 살아갈 수도 있구나를 숙연하게 또 한 번 알게 됩니다. 너무 나에 대해서만 깊이 빠져들어 자책하고 있지 마세요.

 

눈을 들어 이웃과 함께, 관계와 함께 살아가세요. 강상중 선생님의 이 글을 덧붙입니다.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은 자신의 세계만으로는 결코 완성되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다." 나만을 위한 삶을 극복해 봅시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 2017. 10. 시북

 

by 시북 2017.10.1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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