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누가5:1-1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8. 11. 9. 14:06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누가5:1-11)

 

이제는 3월달입니다. 뭐 아직 완연한 봄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지난겨울 혹독한 추위를 생각하면 정말 이제는 견딜만해 졌습니다. 3월을 영어로는 march라고 하는데 이 march의 뜻은 ‘행진’이란 뜻입니다. 왜 행진을 3월의 의미로 사용 했는고 하니 겨울눈이 녹고 이제 전쟁을 위해서 왕의 군대들이 행진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개척교회라면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전도, 그 전도의 계절이 돌아온 것입니다. 대형교회들이야 알아서 사람들이 몰려오겠지만 개척교회는 ‘오십시오 오십시오’해도 잘 안 옵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적다는 것 자체로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규모의 경제가 통하기 때문이지요.
사람보다 돈이 먼저인 세상에서 빈약한 자본과 적은 규모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는 것을 어렵게 합니다. 그래요, 슬프게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입니다. 영적인 단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돈이나 규모가 아니라 외형적 화려함이나 경제적 이득이 아니라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입니다.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영을 살리는 곳입니다.

이곳 안에서 경제적 이득이나
이득을 줄 수 있는 사람과의 인맥 만들기나
화려한 시설에서의 대리만족은 어렵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와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세상에서 힘들고 어려웠던 것들을 내려놓고 새롭게 힘을 얻고 안식과 위로를 받는 곳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 이제 주님은 과연 어떻게 제자를 모았는지 주님의 전도는 어떠했는지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시몬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만드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야고보과 요한은 엉겁결에 주님의 기적을 보고는 놀라서 주님의 제자가 된 것 같습니다. 애초에 우리 주님은 시몬 베드로만 제자로 만들려고 했는데 옆에 있던 야고보와 요한이 같이 제자가 된 것 같이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본문에서는 주님의 제자로 유명한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렇게 장황하게 시몬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제자로 삼은 일을 기록했지만 똑 같은 일을 기록한 마태복음에서는 4:18-20절에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은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엄청납니다. 그냥 그물 던지는 보고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 한마디를 던지니까 즉시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고 일생을 통하여 순교까지 불사하는 제자가 되었다는 말.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이거 실화입니까?

 

게다가 그 다음 마태복음4:21-22을 보면 더 황당합니다. “거기서 더 가시다가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이번에는 아버지와 함께 일하다가 주님의 말을 듣고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하는 황당한 얘기가 적혀 있습니다. 아버지까지 버렸다고요?

 

와, 정말 이 정도 되면 전도도 할만 합니다. 게다가 약간은 이단 냄새도 납니다. 가정도 막 해체시킵니다. 졸지에 아들을 뺏긴 아버지는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지금 일해야 하는데 나이든 아버지는 그물을 깁도록 놔두고 주님을 따라서 가버립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고 해도 그렇지 길가다가 마음에 드는 사람을 보고는 가서 나를 따라라 한마디 하면 즉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제자가 되었다는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여기서 아버지를 버렸다고 하니까 무슨 패륜을 연상할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요즘말로 하면 수산회사의 사장 후계자 자리를 포기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만일 이처럼 전도가 쉽게 된다면 세상에 이처럼 쉬운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잘 압니다. 인간의 말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특히 말로 전도를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너무나 잘 압니다.

 

상대방의 기분도 살펴야 하고 말투와 자세도 주의해야 하고 돈도 많이 써야 합니다. 전도가 그렇습니다. 어떨 때는 더럽고 아니꼬울 때도 있습니다. 종교문제에 있어 특히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합니다. 전도하는 쪽이 철저하게 약자입니다. 이거해주고 저거 해주고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해도 전도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온다고 철석같이 약속해도 잘 안 지킵니다.

 

좀 속된 말로 실컷 얻어 먹고
실컷 받아 먹고
실컷 갑질하고
실컷 우롱하고 안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서 뭔가 다릅니까?

 

말 한마디로 사람들이 막 따라옵니까? 하루에 네명도 제자가 됩니까? 마태가 이렇게 간단하게 주님의 전도과정을 기술했다고 해서 이게 거짓말은 또 아닙니다. 그러나 너무 단순하게 기술한 겁니다. 오늘 본문에는 마태복음에서 그렇게나 간단하게 기술되었던 기사의 뒷면에 너무나 굉장한 일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의 전후를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예수님은 초기 유대사역에서 실패하고 고향 나사렛으로 옮겼다가 그곳에서도 주민들의 반대로 다시 가버나움으로 근거지를 옮겨서 사역을 합니다. 나사렛에서는 주민들이 주님을 절벽에서 밀어뜨려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참람하다는 거지요. 내가 너를 아는데 무슨 하나님의 아들 타령이냐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미 두 번의 실패를 겪은 셈입니다. 유대에서는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나사렛에서는 주민들의 반감 때문에 실패를 겪었습니다.

 

이때 주님이 말씀하셨지요. “선지자가 고향 밖에서는 존경받지 않음이 없나니” 다 그런 겁니다. ‘내가 너를 어릴 때부터 봐 왔는데 무슨 네가 선지자냐 무슨 목사냐’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요. 더구나 유교문화 속에서 서열문화가 판치는 곳에서 존댓말과 반말이 구분된 사회에서 이런 것을 깨는 것은 어렵습니다.

 

유대가 유교사회는 아니라도 서열이 확실하게 있는 곳입니다. 신분제 사회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신분이 낮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슬퍼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고 갚아 주십니다.

제자 마태는 예수님의 유대사역이 아니라 가버나움 사역부터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 갈릴리 호숫가에 서서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아마 갈릴리 호숫가는 경사가 완만한 언덕이었나 봅니다.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기가 쉬운 지형인가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을 앉히고 보니 설교할 자리가 마땅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관중석은 있는데 연단이 없어서 아마 배위에서 말씀을 전하시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배에 올라서 호수 안쪽으로 약간 배를 띄워서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아마 이 부분이 가장 말씀을 전하기가 좋은 장소였던 모양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배위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베드로는 당연히 주님을 배에 태우고 직접 배를 몰고 있습니다. 크게 움직이지는 않고 가만히 물에 배를 세워둬야 할 겁니다. 이렇게 되면 베드로는 주님의 설교말씀을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생깁니다. 여기 보면 2절에 어부들이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오늘 하루의 작업이 끝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물을 씻고 또 찢어진 곳을 살펴서 깁고 그리고 잘되었는지 한번 시험 삼아 던져보고 그리고 이상이 없다면 배를 한쪽에 대어 놓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점입니다. 오늘밤의 고기잡이를 준비하는 겁니다.

 

저녁은 아닙니다. 이들은 지금 야간작업을 하고 아침에 집으로 돌아가려고 준비하는 중입니다.
밤에 고기를 잡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밤을 꼴딱 새웠기 때문에 피곤합니다. 전후 사정을 보면 고기도 별로 잡지 못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심리적으로 더 피곤해 집니다. 이럴 때는 빨리 집에 들어가서 푹 쉬고 오늘 밤에 다시 와서 고기잡이를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 예수라고 하는 요즘 한창 뜨는 랍비가 와서 배를 좀 빌리자고 합니다. 그러니까 배만 빌려서 가는게 아니라 어부가 직접 배를 몰아서 호수에 띄워야 합니다. 그것도 예수의 말씀이 끝날 때까지 몇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긴 시간동안.

 

안 그래도 피곤한데 이런 생떼가 있습니까? 너무 피곤해서 집에 가서 쉬어야 하는데? 거친 어부들의 습성 상 그런 말을 꺼냈다면 맞아 죽지 않아도 크게 봉변을 당할 만합니다. 배에서 쫓아내 버릴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요청을 받은 시몬은 아무런 말이 없이 주님을 배에 태우고 육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님을 모시고 가서 기다려 줍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누구라도 마음대로 억지로 피곤한 어부를 시켜서 배를 태워주게 만든다고요? 이제 모든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고 하는 어부에게 또 일을 시켜요? 더구나 생업인 고기잡이와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고 주님의 말씀에 따릅니다.

 

혹시 베드로와 주님은 이전부터 잘 알고 있던 사이가 아닐까요? 뭔가 베드로가 주님에게 약점이나 미안한 게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베드로가 그렇게 할 리가 없습니다.

 

누가복음4장38절에 보면 예수께서 시몬의 집에 가셔서 열병에 걸려 죽게 된 시몬의 장모를 주님이 치유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기사에 의히면 주님은 시몬의 배에 탔을 때 시몬을 생전 처음 보는 사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주님에게 큰 은혜를 입은 사이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이 전에 이미 시몬 베드로는 최초로 주님의 제자가 된 요한과 안드레 중에서 안드레의 형제로 안드레가 주님을 만나고 메시야를 만났다고 베드로를 전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마 이때 베드로는 주님을 만나고 그와 얘기한 다음에 주님이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메시야 상에 부합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일시적으로 주님을 따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왕국을 회복할 정치적인 메시야인줄 알고 갔더니 이상한 종교적인 이야기만 하고 그래서 실망하고 주님과의 교류를 끊은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베드로의 집으로 직장으로 베드로를 찾아 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뒷사정을 알고 나니까 우리는 베드로가 왜 주님의 무리한 요청에 군말 없이 따랐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보세요, 장모의 열병을 치유했지만 시몬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시몬은 그 기적을 보고서도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끝나고 베드로에게 배를 깊은데로 저어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말씀 때문에 그대로 순종했더니 물고기를 가득 잡았지요. 그래서 친구들에게도 같이 거들어 달라고 해서 배 두척에 가득 잡았던 모양입니다. 이러고 나니까 비로소 시몬이 주님께 꿇어 엎드려 마음으로 감복한 제자가 된 것입니다.

 

여기 두 번째로 주님의 제자가 된 걸로 나오는 세배대의 두 아들이자 베드로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주님의 제자가 된 겁니다. 물론 요한과 안드레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고 세례 요한이 주님을 따르도록 파송한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기적을 맛보고서야 비로소 진정한 메시야로 주님을 영접하게 된 겁니다.

 

7절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하니” 할 때의 동무들이 바로 요한과 야고보입니다. 사실 세배대는 예수님의 이모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의 이종사촌입니다. 그런데도 기적을 맛보기 전에는 진심으로 주를 따르지 않다가 이제 기적을 맛보고서야 비로소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모부인 세배대의 입장에서는 조카인 예수의 기적을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 아들들이 출세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따라가야 된다고 생각해서 흔쾌히 보내 준 겁니다. “너는 여기에서 고기나 잡고 있어서는 안되고 예수를 따라가라”

 

보통의 아버지들은 자식이 출세하기를 위해서 멀리 떠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식의 등을 떠밀어서라도 출세길로 보내고자 합니다. 지금 본문에서 두 번째로 두 사람이 제자가 된 모습은 바로 이와 같다고 하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말씀 한마디로 제자들을 만들어 낸 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말 쉬운 일처럼 여기에 적어 놓았지요? 그러나 그 뒷사정을 알고 나면 우리 주님의 그 간단하게만 보였던 제자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고 그 사이에 어떤 놀라운 역사가 있었고 몇 번이나 권면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야욕 때문에 주님의 제자가 된 이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로 들어도 믿지 않다가 자기가 직접 기적을 체험하고서야 비로소 주님을 믿는 제자들도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들이 다 멋진 제자가 된 게 아닙니다. 믿음의 용사, 사도가 된 게 아닙니다. 이들은 다양한 배경과 생각을 가진 연약한, 아직 완성되지 못한 약점이 엄청나게 많은 인간이었을 뿐이며
그래서 때로 약점을, 인간적인 모습을 너무 적나라하게 노출시키기도 했습니다.

 

이 흠 많은 사람들을 삼년간 데리고 다니시면서 교육하고 보여주고 다듬어서 결국 순교의 제단에 바쳐진 위대한 사도로 만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들이 가진 생각도 각자 다릅니다. 그러나 이들은 대외적으로는 기독교인이며 내부적으로는 신자입니다. 주님의 제자입니다. 정치적인 출세를 위해서 믿었든 아니면 경제적인 이득을 위해 믿었든 아니면 질병의 치유를 목적으로 믿었든 그 모든 사람들을 포용해서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숫자만 많아 지면 부흥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의 신앙의 정도가 강해지고 더 멋지게 변하는 것 역시 부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질과 양이 다 증가해야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는 나오지 않지만 나중에 보면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이자 예수의 이모 살로메는 예수께 나아와서 나중에 왕국을 회복하게 되면 자기의 두 아들을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세워주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오른팔 왼팔이 되는 엄청난 지위를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래요, 사람은 다 자기 나름의 속셈이 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형제의 유익만을 구하는 사람은 성자입니다. 그래서 현실 세상에선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빨리 확장시켜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만 우리가 그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부당한 침해를 당하지 않으며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한사람의 희생으로 돌아가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 그 사회 구성원이 모두 서로 서로 사랑하고 보듬고 부축해서 그렇게 나가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 참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낚아서 어디에 쓸 겁니까? 다스리고 지배해서 자기의 권력욕을 충족시키는데 사용합니까? 현대에선 사람이 표니까 사람을 많이 얻는 쪽이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면 사람을 낚아서 인기를 얻는데 그러니까 명예를 충족시키는데 사용할 겁니까?
그렇지 않다면 사람을 낚아서 자기의 경제적인 이득을 취할 겁니까? 다단계라도 할 겁니까?
아니라면 사람을 낚아서 나의 제자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를 만들고 내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겁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 시킬 겁니까?

 

우리 주님의 제자화는 참으로 어려운 과정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에, 주님이 베푸시는 기적에 열광하고 그에게 모여 들었지만 그가 제자들을 수용할 시설이 없고 족보도 없고 학력도 없어서 그의 제자가 되려 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처음 제자가 친척이 지원해 주는, 파송해 준 두 사람뿐 이었겠습니까?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과 야고보는 주님의 친척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한 겁니다. 주님에게 제자들이 생기고 그의 명성이 퍼져나가서야 비로소 사람들이 그의 제자가 되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도 다양한 생각으로 모여듭니다.

 

가룟 유다 같은 경우에는 주님의 헌금통을 맡고 있으면서 헌금을 착복했고 베드로는 칼을 차고 다니면서 장차 왕이 될 주님을 보호하려 했고 요한과 야고보는 주님의 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앉고자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는 친척이라고 한 자리 주고 누구는 한자리 주지도 않고...이렇게 불평했습니다.

 

숙식을 같이하며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 기적을 보고, 때로 그 기적에 참예했음에도 불구하고 잡히시던 그 날 밤에 삽시간에 뿔뿔이 흩어지는 그런 오합지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사도로 거듭나고 순교의 제물이 되고 기독교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그런 곳입니다. 어떤 배경을 가진 사람이든 어떤 생각을 가졌든 그 모두를 용광로에 넣어 그리스도의 군사로 신앙의 용사로 재탄생시키는 그런 곳입니다.

 

우리 주님은 처음에 정말 답답하고 힘드셨을 것입니다. 온몸을 불살라 시대를 밝히는 횃불이 되려고 해도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친척들조차 형제들조차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배척받고 ... 참 많이 힘드셨을 겁니다.

 

저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참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냥 사람을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잘 낚는 어부가 되고 싶습니다. 사람을 잘 낚는다고 하니까 이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사람을 낚아서 하나님의 나라에 풀어 놓아야 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나요? 우리가 한가지를 실천하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습니다. 뭡니까? 19절에 보면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러니까 먼저 주님을 따라야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는 우리가 힘낸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주님이 만들어 주시는데 그 조건이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 이것을 원문으로 보면 ‘주님의 뒤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뒤에 서서 뭐합니까?
주님의 뒤에 서서 주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주님이 집이 없어 노숙하셨는데 나는 호화로운 저택에서 살며 주님은 두벌옷도 가지지 않고 지팡이와 전대로 가지지 않으셨는데 나는 수백 벌의 옷을 가지고 있고 전대에 돈이 가득하고 지팡이뿐만 아니라 호위병도 있고 ... 이렇게 되면 절대로 우리가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는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다고 하면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그는 사람을 낚아서 재물을 모으고 권세를 얻고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가지고 성공이라고 하나님의 복주심이라고 혹세무민해서 그와 같은 사탄의 자식을 늘여갈 뿐인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우리 주님이 말씀도 좋고 능력도 행하셨지만 초기에
정식 제자가 없었던 것은 그가 목수의 아들이고 그가 나사렛사람이고 그가 재산이 없어서 제대로 된 시설을 구비하지 못해서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눈에 보이는 것을 절대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제일 우선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우리 주님은 그냥 어쩌다 인연이 되어서 만나는 이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호숫가를 거닐다가 우연히 어부들을 보고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게 절대로 아닙니다.

마태가 기술한 방식을 인용한다면 주님은 제자들을 뽑으실 때 그가 제자가 되기에 적합한가를 보시고 뽑으셨습니다.

 

18절에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보시니’가 바로 그런 뜻을 가집니다. 저 사람이 정말 제대로 된 인격자인가 ? 적합한 사람인가를 보신다는 뜻입니다. 오십시오 오십시오 해야 하는 판에 골라서 뽑는다니까 웃깁니까? 그래요, 그러나 절대로 우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의 세밀한 감정과 평가가 있었답니다.

 

우리는 모두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입니다. 평소에 지나가다가, 우연히, 뭐 이런저런 방법으로 우리를 보시고 유심히 보시고 그리고 평가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가운데서 뽑힌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뽑힌 자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그건 그 건물은 교회당이라 예배당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교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에게 직접 찾아 오셔서 재삼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 나의 뒤에 서라고 하십니다. 그 명령에 우리는 어떻게 답할 것입니까? 세상의 미련 때문에 미적대거나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주님 앞에 온전히 무릎 꿇지 못하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아직 꽃샘추위는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봄입니다. 햇볕아래 걸을 때면 등에 땀이 날 정도입니다. 행진할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름 받아서 행진할 때입니다.
저와 함께 그리스도의 군사로 저 천성을 향하여 행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제자로 주님의 뒤를 따르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분연히 일어서서 모든 것을 떨치고 분연히 일어서서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확장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복락을 누릴 것입니다. 이번 한주도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8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


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2018년 3월 이후, 참으로 오랜만에 정관누리교회 설교를 업데이트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요. 제가 잘못한 거죠. 제가 게으른거죠.

저를 위해서 오래도록 기도해주시는 할머님은 현재 95세를 맞이하고 계십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기타 반주와 찬송가 연주를 약속해서, 드디어 실천하게 되었는데...

할머니가 참 기뻐하시는 것을 보면서, 손자로서 무척 기뻤습니다.

최근에는 체력단련을 위하여, 새벽에 일어나 아버지와 함께 가벼운 뒷산을 다니고 있는데...

일찍 일어나기는 좀 힘들긴 합니다만... 여하튼 이것도 무척 행복한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듭니다.

 

우리는 종종 오해를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삶이, 가족 내팽겨치고, 재산 다 바치고...

에이, 그런 건 진짜 사이비, 이단 종교, 사기꾼, 가짜 아닐까요?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됩니다. 목사님과 상담하면 됩니다.

 

십계명에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것들이 나와 있는데요. 특히 그 중에서 사람 관계에 있어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냥 이렇게 써 있습니다. 궁금하시면 (이단말고!) 가까운 교회에 가셔서 성경책 맨 뒷장 보시면 될꺼에요.

 

제 영어성경에는 이렇게 써 있네요.

Honor your father and your mother,

so that you may live long in the land the Lord your God is giving you.

영어는 동사가 먼저 나올 수 있으니까... 에... 제가 영어 무식자인데... 에.... 목사님 전화찬스 써보니까.

부모님을 공경하라, 부모님께 영광을 돌려라, 뭐, 그런 말이라고 합니다.

 

햇살이 무척 따뜻한 가을날이네요. 건강하시고, 산책도 하시고, 힘내어 행복하시길 저는 응원합니다.

2018. 11. 09. 시북의 코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