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 혼인잔치의 기적 (요한2:1-)

 

우리들은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이 시대가 과학만능시대라는 말입니다. 신화니 전설이니 하는 말보다 과학적이라는 말이 더 신뢰를 줍니다. 우리는 이게 ‘성경적’이라고 하는 말보다는 이게 ‘과학적’이라는 말에 더 쉽게 설득당하고 납득당합니다.

 

과학이라는 단어 앞에 우리는 얼마든지 무장해제가 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과학은 금세기에 성경을 능가하는 만능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무슨 일에든 ‘과학적’이라는 말만 붙이면 전혀 문제가 없이 먹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잠깐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 당시에 과학적이라고 했던 많은 주장들이 사람들의 연구가 깊어질수록, 또는 우연히 세월이 지나서 인간의 지식이 깊어져서 여하튼 후세에 전혀 잘못된 오류임이 밝혀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세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전혀 변함이 없지만 오류가 없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반 기독교세력들이 성경의 오류를 발견해서 이것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려 노력하지만 여전히 성경은 인류의 보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신성불가침의 영역은 아직도 여전히 굳건히 우리의 신앙 원천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부끄러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랑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뭐니 뭐니 하면서 말도 많지만 아직도 교회는, 아직도 하나님은 우리 곁에 있습니다. 지금도 창문밖에 적어도 두 개의 교회가 보입니다.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 더 많겠습니다만.

 

그럼 이런 이유가 뭘까요? 무엇이 이렇게나 오래토록 기독교 신앙과 성경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도록 한 것일까요? 저는 그것을 바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음에도 믿도록 하는 우리네 믿음,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의 전부입니다.

 

우리네 신앙생활에서 눈에 보이는 기적들을 우리는 자주 체험합니다. 그러나 그 기적을 일어나도록 하는 것에는 우리네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얼마든지 기적을 베푸실 수 있지만 그것을 믿는 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믿고 의심하지 않아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가나의 혼인잔치에 대한 기사를 발견합니다. 저는 이전에 한번 가나의 혼인잔치에 대해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번에는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본문을 분석하려고 합니다. 바로 믿음이라는 관점으로. 그래서 신학적이거나 시시콜콜한 사실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먼저 1절을 보면 ‘사흘째 되던 날’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를 한번 보세요. 43절, 35절, 29절을 보면 모두 ‘이튿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흘째 되던 날’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날은 예수님과 빌립이 대화를 나누던 그날로부터 사흘째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앞 기사에 붙여서 날짜를 제시하면서 예수님의 초기 사역에 관한 기사를 기술합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사도 요한이 이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바로 예수님이 결코 허구의 존재가 아니며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50년 정도가 지난 시점으로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수의 기적을 예로 들면서 그가 실제의 인물이 아니라 가상 속의 허구적 인물이라고 하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요한은 이러한 풍조에 대해서 “아니라 내가 그를 보고 만나고 함께 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오랜 기억을 더듬어 세 복음서에 적혀 있지 않았던 기사들을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날짜를 기록한 것입니다.

 

마태는 날짜순이 아니라 주제별로 예수의 기사를 엮어서 적었기에 요한은 시간순으로 기록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튿날이니 사흘째 되는 날이니 하는 식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모든 사도들이 다 순교하고 난 다음 요한 사도는 홀로 남은 사도로서 예수님의 실재하심을 기록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서 이 복음서를 자세하게 아주 자세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날짜를 기록한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요한복음1:19-51절 사이에 걸린 날수는 겨우 일주일 즉 7일입니다. 요한은 특이하게도 예수의 사역 중에서 가장 초기의 7일간 일어난 일을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면서 그 마지막 날의 특이한 기적으로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여하튼 예수께서 빌립과 대화를 나누고 사흘째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잔치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에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지리상으로 보면 갈릴리 가나는 나사렛에서 멀지 않은 십여리 떨어진 곳으로 북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당연히 뱃세다에서는 호수 반대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때 이미 주님은 사역의 근거지를 유대에서 갈릴리로 옮기신 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빌립을 만났을 때 그때 이미 갈릴리로 옮기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었는데 그 이틀 사이에 이사를 한 것입니다. 당연히 주님은 고향 나사렛으로 귀환하셨을 것이고 어머니와 친척의 혼인잔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요한은 본서에서 예수의 하나님 되신 표적 7가지를 기록하는데 이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표적이 그 첫 번째 표적입니다.

 

먼저 첫 번째 기적을 베푸신 장소가 바로 혼인 잔치라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는데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결혼입니다. 남녀가 서로 하나가 되는 이 자리는 우리 하나님이 복 주신 복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그냥 결혼이란 속박 없이 잠시 잠깐 동침하고 애를 낳아서 키울 수도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되면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치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하게 되어 자라나는 아이나 결혼의 상대방, 특히 약자인 여자들의 삶이 매우 불안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혼을 금지하신 이유도 상대적인 약자인 여자를 보호하려는 것임을 본다면 결혼제도를 폐지하려는 시도는 인류문명의 전승을 파괴하려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러니까 ‘비혼’이라는 말은 사실은 여자들이 아니라 남자들을 위한 헛소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가장 먼저 만드신 제도가 바로 결혼제도입니다. 그러니까 남녀가 중심이 된 가정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만드신 첫 번째 제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성하고 영광된 결혼이 계속해서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비혼이니 졸혼이니 하고 택도 아닌 소리를 하는 이들이 많아 졌는데 사정상 결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미혼이란 글을 지지합니다. 아직 결혼 상태는 아니지만 언젠가는 가정을 가질 것을 기대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하나님이 주신 가정이란 제도, 결혼이란 제도가 무너지면 인간은 두세대가 지나기 전에 멸망할 것이고 그러면 남는 것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생존투쟁, 야만의 폭력적인 생존투쟁만이 남을 것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최후의 안식처요 보호막인 가정이 무너지면 인간은 어디에도 의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생존이라는 명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어 문화적 재창조니 영혼의 안식이니 하는 말이 사치스럽게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면 예수뿐만 아니라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답니다. 그러니까 남의 잔치가 아니라 예수의 가까운 친척의 잔치라는 말입니다. 웬만하면 제자들은 초청하지 않는데 예수뿐만 아니라 그 제자들도 함께 초청했다면 그리고 마리아가 음식 만드는 데 깊숙이 관여했다면 뭔가 아주 가까운 친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 남의 잔치가 아니라 당사자라고 할 수 있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뭐 연회 도중에 술이 떨어질 수도 있지 그게 대단한 큰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면 안마시면 되지 그게 뭐 대수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다행인데 현실을 그렇지 못합니다.

 

사실 유대에서 포도주는 술이라기보다는 음료수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게다가 이 포도주는 물이 귀한 유대의 특성상 물 대신의 역할도 담당합니다. 그러므로 포도주가 잔치 도중에 떨어졌다는 것은 잔치의 주최자나 음식 담당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곤란한 문제입니다. 왜냐면 마리아는 이 잔치의 부족한 부분을 기꺼이 채워주려는 마음이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에게 포도주의 일을 상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의 결혼식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약식 결혼식과는 차원이 다른 축제였습니다. 먼저 유대인들의 결혼식은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됩니다. 그리고 이 축제 동안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대문을 닫고 안에서 노는 겁니다.

 

가난과 중노동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유대인들에게 풍족하고 맛있는 음식과 음악 그리고 춤 게다가 새롭게 시작하는 신랑과 신부의 즐거움에 참여한다는 기쁨은 유대인들에게는 일상생활에서 맛보는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니 일주일의 잔치기간중에 기쁨의 원천인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이었을까요?

 

여기 보면 이 잔치에 예수와 그 제자들도 초대를 받았다고 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이 드높아서 사람들이 그를 초대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때는 아직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 전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초대받았다면 그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잔칫집과 친척관계에 있었고 요한과 야고보 역시 친척이었으니 당연히 초대를 받았을 것입니다. 뿐입니까? 나다나엘은 동네 사람으로 초대를 받은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벌써부터 지역사회에 명망이 높아서 초대받은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아직은 본격적으로 기적을 행하고 다닐 때가 아니었고 갈릴리 사역의 초기였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은 유대에서 갈릴리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가나의 혼인자리에 참여하는 것으로 갈릴리 지역사회에 데뷔한 것으로 보아도 됩니다. 그러니까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 그의 첫 번 기적인 셈입니다.

 

자, 오늘 여러 가지를 살펴보지는 않겠지만 한가지 요점이 있습니다. 뭐냐면 전전날 주님이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겁니다. 뭐냐면 1:50에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기만 하면 이보다 더 큰 기적을 볼 것입니다. 우리는 작년 민준이에게 기적을 베푸신 그 놀라우신 역사를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뿐만 아니라 더 큰 기적도 볼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기만 한다면. 우리에게는 더 큰 기적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한마음으로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놀라우신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그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기뻐 들어 주시는지를 똑똑히 보게 될 것입니다.

 

자, 기적을 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전적인 순종이 필요합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그런데 ‘가만있으라’고 시키는 것을 제외하고 뭔가를 시킬 때 그 일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기적을 바라는데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 앉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물론 하인들의 믿음이 좋아서 가만 있은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의 당부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집이 그렇게 큰 부잣집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인도 있었겠지만 그들만으로서는 잔치 준비에 만전을 기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에서 쓰여진 하인이란 말은원문으로는 협조자 정도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잔치를 도우러 온 동네 사람들이나 친척들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순종한다는 것을 기대하기가 어렵기도 합니다. 이들을 설득하여 순종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것도 큰일이었을 겁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사람들이 합리적이지 않거나 덜 효율적인 명령에 잘 순종하지 않고 자기네가 생각했을 때 더 나은 방안을 모색하려 합니다. 그런데 여기 잔치 자리에 있는 협조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과정은 모르겠지만 순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두세통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있었는데 예수께서 그곳에 물을 채우라 하시니 그들이 아귀까지 채웠답니다. 적극적인 행동이 요구되어지는 것을 하느냐 아니하느냐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가만있는 것은 귀찮지도 않고 그냥 가만있으면 되니까 지루한 건 있어도 순종이라고 특별히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기적은 더 큰 법입니다.

 

물을 채우는 것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아닙니다. 이건 정말 상당히 수고스러운 일입니다. 이 통들은 현대식으로 말하면 항아리 하나에 약 물100리터가 들어가는 큰 통입니다. 이 통들은 유대인의 정결례를 행하기 위해 놓아둔 겁니다.

 

그러니까 바깥에 나갔다 들어오면서 혹여 부정한 것이 있을까 하여 정결하도록 씻는 겁니다. 종교적인 이유입니다. 그런데 물을 600리터나 길어와야 합니다. 요즘처럼 수도꼭지에서 바로 물이 쏟아지는 환경이 아닙니다. 유대는 사막지대므로 물이 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을에서 물이 나는 곳은 아주 멀기도 하고 우물도 매우 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단순한 말에도 순종하는 것은 제법 큰일이고 귀찮은 일입니다. 게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순종한 겁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말하지요.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그래요, 바로 이겁니다. 우리가 기적을 참여하고 그 기적을 맛보는 데 필요한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사리에 맞지도 않는 것 같은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 주님의 명령이라면 순종하는 겁니다. 왜냐면 주님이 나보다 더 지혜롭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잘 쓰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적은 머리로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말라. 그래요 우리는 제한할 수 있지만 이해되지도 않지만 할말은 많지만 입을 다물고 믿어야 합니다. 불평을 제기하고 의심하기 전에 일단 먼저 믿을 일입니다.

 

포도주가 없어서 쩔쩔매고 있는데 뜬금없이 물을 채우라고 하는 명령은 정말 황당합니다. 설마 물을 그대로 포도주로 속이고 떠다 주란 말입니까? 이미 어느 정도 술이 되어서 사리 분별을 못 하니까 물을 떠다 주고 포도주인척한다면 넘어갈 것 같습니까?

 

유대의 랍비들도 얼마나 포도주를 좋아했는지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도 없다고 했답니다. 잔치 자린데 포도주가 빠지면 흥이 죽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포도주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는 겁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능력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당시에는 예수를 구세주나 메시아로까지 믿지는 않았겠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 정도로는 생각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도주 문제를 훌륭하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고 아무리 이상한 명령을 해도 아무리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일을 시켜도 순종하라고 신신당부하는 겁니다.

 

포도주에 무슨 가루를 타서 또는 이전의 남은 포도주와 혼합하여 희석된 포도주를 가져가는 것이 아닙니다. 순수히 물만 담긴 통에 가득찬 물을 그대로 아무런 가공도 거치지 않고 떠다 주는 겁니다. 이대로 행하기는 정말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하인들은 그대로 했답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물은 떠 와도 설마 뭔가 조처를 하겠지 싶었는데 무슨 포도가루나 뭔가를 넣어서 포도주 비슷한걸 만들 줄 알았는데 아무런 조치도 없이 번연히 물을 떠 와서 그대로 가져다주는 겁니다. 그게 바로 믿음이요 순종인 겁니다. 그러자 연회장에서 잔치 자리에서 사람들이 마실 땐 그것이 물이 아니라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됐네!

 

믿음은 종종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믿도록 요구합니다. 아직 아무것도 없지만 이미 그렇게 되어 지리라고 믿을 것을 요구합니다. 포두주가 떨어졌으면 다른 집에 가서 빌려 올 수도 있습니다. 이집에 없으면 저집으로 빌리러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걸 하지 않고 예수에게 부탁한 겁니다.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포도주 문제를 들고 온 겁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은 그 믿음은 보답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문제는 훌륭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한다면
그가 시키시는 일에 순종한다면
나의 판단과 내가 보는 것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우선시한다면 나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일을 할 것이요 세상을 뛰어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은 우리 주님에게 나아오기만 하면 우리 주님이 손대시기만 하면 그 속에서 새롭게 재창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당이라도 우리 주님이 그 속에 들어가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가 되고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새롭고도 놀라운 기적이 필요합니까?

 

기도하고 순종할 일입니다. 그가 시키는 것을 그대로 할 일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너무 많아서 대부분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명령 앞에서 우리의 적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버립시다. 안된다 그럴리 없다는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생각들을 버립시다.그리고 그의 말에 겸손히 순종합시다.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우리 주님의 놀라운 기적에 참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 주님이야 말로 복의 근원이요 복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을 만드셨고
그는 마찬가지로 그 세상을 움직이시며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습니다 내 주여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주여 저에게 말씀하시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그리고 이행하겠나이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8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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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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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무척 엄격하고, 힘들고, 매우 번거로우며... 등... 정해진 절차가 있지요.

순종은 시키는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몸을 아끼며, 나의 시간을 귀중히 여기어, 그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달란트가 있다면, 그것이 비록 작은 일일지 모르나, 주님께 헌신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 알 수 없구나, 그 분의 지혜는 도무지 헤아릴 길이 없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쩌면 시편 8편의 말씀처럼, 고작 필멸의 피조물인 인간이 무엇이길래... 주께서는

우리 같은 죄인을 돌아보시며, 일으키시며, 바른 길로 인도해주시며, 돌봐주시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바른 삶을 살아가며, 세상을 바꿔나갈 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맞서서 당당하고, 담대히 맞서 싸워나갈 수 있는 그리스도의 용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 I will strengthen you and help you (이사야 41장) 라고 말씀하시니까요.

 

그 분은 우리를 튼튼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약할 때, 그 분은 강함이 되어주십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며,

우리가 다시 일어서기를, 우리 자신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아끼시며 지켜보고 계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 봅시다. 주님은 우리를 결코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주님을 의지하여, 구주예수 의지하여,

아름다운 실천을 용기내어 할 수 있는 우리의 일생이 되기를 저는 기도합니다. - 2018. 11. 시북.

by 시북 2018.11.15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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