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04년2월1일/왼손잡이 사사 에훗(청년설교5)/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4. 15. 21:26

- 2004년 창신교회 청년부에 계실 때의, 홍종일 목사님 설교문.

사사기를 볼때에 우리는 항상 인간의 완악함과 어리석음이 정말 끝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에 맞고서도 일신이 편안해지고 살만해지자 하나님의 징계를 금방
잊어버리고는 다시금 죄악된 길로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참 우리네 성도들의 삶과
너무 일치하는 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셔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그들이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기만 하면 다시금 사사를 세우셔서 구원하시는 놀라운 역사
즉 범죄와 징계, 회개와 용서의 순환의 역사가 펼쳐지는 곳이 바로 사사기입니다.
오늘 저는 그 수많은 사사들 가운데서도 왼손잡이 사사 에훗에 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역사는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다시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하튼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왼손잡이 사사 에훗을 보내주셨습니다


1.왼손잡이 사사
그럼 우선 이 왼손잡이라는 말부터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본문의 왼손잡이로 표현된 부분은 히브리어로는 이쉬 잇테르 야드 예미노라고 합니다.
즉 이 말은 오른손이 장애를 가진 남자 라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베냐민지파에는 왼손잡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특히 베냐민지파의 왼손잡이 물매꾼들은 아주 유명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에훗도 단순한 왼손잡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70인경에는 오른손 왼손을
다같이 잘쓰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우리 성경에도 왼손잡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왼손잡이라고 표현한다면 성경의 원문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감동이 약해지는 단점이 있고
원문을 우리가 자의적으로 해석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즉 양손을 다 잘 쓰거나 아니면 왼손을 더 잘 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오른손에 장애가 있어서
왼손을 쓰게 되었다고 히브리성경원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젊은 숫소 에글론
에훗이 상대해야하는 모압왕의 이름은 에글론입니다. 그런데 이 에글론이란 이름은 모압왕을 아주 잘나타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17절에 에글론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에글론은 심히 비둔한 자이었더라”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에글론이란 이름의 뜻은 젊은 황소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비둔한 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본문의 비둔한 자라 라는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할때는
비둔이란 말은 살이 너무 쪄서 몸놀림도 느리고 자기몸을 제대로 못가누는, 그래서 자빠져도 혼자서는 일어서기 어려운 아주 볼품없는 상태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한자루 비수로도 암살하기 쉬운 그런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는 에글론입니다. 즉 뚱뚱하고 자기몸도 못가누는 힘이 쇠하고 병든 소가 아니라
젊고 힘센 소 바로 에글론이라는 것입니다.
이 비둔한 이란 말의 원래뜻은 퉁퉁한, 살찐이란 뜻으로 심히라는 단어와 합쳐서 마치 자기몸도
못가누는 그런 상태를 연상시키지만 본문에서 그를 에글론이라고 칭했던 것으로 보아 너무 살이쪄서 자기몸도 못 움직이는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의 이름이 에글론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체구가 장대하고 거대한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3.약함도 쓰일때가 있다
에훗은 공물을 가지고 가면서 한 규빗 남짓한 검을 오른편 다리에 숨겨서 가지고 갔습니다.
아마 에훗이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모압왕의 군사들은 에훗을 별로 의심하거나 경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몸수색을 철저히 당하지 않고 검을 숨겨가지고 왕에게 공물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혼자서 모압왕 에글론을 만날 수 있게되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쯤되면 우리는 한가지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뭔고하니 바로 검고 사납게 생긴 집채만한
젊은 황소가 날카로운 뿔을 흔들면서 코에서는 콧김을 내뿜고 투레질을 하는 곳에서 겨우
한자남짓한 비수 한자루를 든 오른손 장애인이 그 황소를 대적하기위해 서 있는 그런 그림 말입니다.

3:20절에 “에훗이 왕의 앞으로 나아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보통은 왕이 좌우의 신하들을 물리치고 혼자서 적국의 사신을 만난다는게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왕이 곧 국가 그 자체로 인식되던 그 때에 왕의 신변보호란 것은 바로 나라의 흥망과도
직결되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압왕은 자기의 용맹과 에훗의 장애만을 생각하고는 어떤 돌발적인 사태가 발생해도
내가 제까짓것 쯤이야 하는 자만심을 가졌기에 에훗을 혼자서 만나게되었을 것입니다.

4.겁먹은 젊은숫소
그리고 에훗이 은밀한 일을 고하려 모압왕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모압왕이 일어설때 가지고 갔던
비수로 에글론을 찔러버렸는데 3:22절에 “칼이 날을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뒤까지나갔고”라는
표현으로 보면 그가 얼마나 쎄게 찔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에훗이 혼신의 힘을 다해 대적 에글론을 찔렀던 모습을 상상 할 수 있습니다.
몸집이 거대하고 힘이 넘치는 무시무시한 젊은 수소, 그리고 그 수소와 맞서는 보잘 것 없는 장애인,
그손에 들린 한자루 작은 비수
이쯤되면 누구나 싸움의 결과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뭐 볼 것도 없이 힘센 젊은 황소,
바로 에글론의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18년간이나 그를 섬겨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결과는 너무나 의외라서 오히려 싱겁기 까지 합니다.
에훗의 작은 비수에 왕은 즉사했을뿐만 아니라 창피한 모습까지 보이게됩니다.

3:22에서 히브리원문에는 있지만 뜻이 모호해서 번역하지 않는 부분이있는데
바로 “그리고 오물이 나왔더라”라는 표현입니다. 벌게이트역이나 아람어 탈굼역,
대부분의 영어성경에서도 이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4절 하반절에 보면 “왕이 필연 다락방에서 발을 가리우신다 하고”라고 해서
신하들이 왕이 발을 가리우신다고 생각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서 발을 가리운다는 표현은 사울왕이 다윗을 추적할 때 굴에서 용변을 볼때
사용되었던 표현이기도 한데 주로 용변을 본다는 히브리의 관용적 표현입니다

여러분, 단지 문이 안으로 잠겨있고 소식이 없다고 해서 왕이 용변을 본다고 신하들이 생각할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랬다면 그 신하들은 왕을 가까이서 호위할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일국의 임금의 호위가 그렇게 허술했을리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왼손잡이 장애인을 택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있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에훗이 떠나고 난 뒤에도 왕이 오래 나오지 않자 왕이 용변을 본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한글성경에는 빠져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에 나와 있는 바처럼 칼로 찔렸을때
피뿐만 아니라 뒤로 오물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오물이 나와서 냄새가 바깥에까지 났기 때문에 신하들은 임금님이 용변을 본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칼에 죽거나 창에 맞아죽는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오물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교수형을 당한 죄수들은 대게가 오물을 싼다고 합니다. 즉 극심한 공포감에의해서
오물을 싸게 되는 겁니다.

5.이제 결단하라
그렇습니다.
젊고 힘센 황소처럼 보였던 거대한 악의 화신 에글론은 실제로는 오른손에 장애가 있었던
에훗의 적은 칼에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고 하는 겁니다.
통쾌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하고 허무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사탄의 세력은 마치 거대한 몸뚱이와 괴력을 자랑하는 야수성을 가진 에글론과 같습니다.
여기게 맞서야하는 성도들은 정말 초라하여 가진 무기도 변변챦아보이고
오른손마저 제대로 사용할 수 없어 왼손을 사용하는 그런 불리한 입장입니다.

애초에 상대가 안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18년이 아니라 천년만년 그를 섬기며 사는게
그래도 그에게 반항하다가 죽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단 한번의 칼질에 그렇게 무시무시해 보이던 에글론의 세력은
정말 거짓말처럼 꺾였을뿐만 아니라 극심한 공포로
오물까지 싸는 참담한 결과를 나타내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제 결단해야 될 때입니다.
거대하게 우리를 침노해오는 세파에 그냥 주저앉고 마귀에게 복종하며
그저 그렇게 한목숨을 이어갈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비록 한자남짓한 비수한자루처럼 보이지만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이것과 맞서 싸울것인가 하는 결단의 때 말입니다.

우리가 만일 보이는 적의 외양에 지레 겁을 집어먹고 마귀에게 복종한다면
영원히 우리는 노예의 삶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우리가 보기에는 우습고 미약해 보이지만
일단 그 말씀대로 싸워나간다면 우리에게는 에글론을 물리치고
80년간의 평화를 얻은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오른손의 장애를 극복하고
거대한 체구와 괴력을 가진 에글론을 이긴 에훗처럼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되며
죄의 사슬에서 해방된 천국시민으로서의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것입니다

이제 싸울것인가 그냥 그대로 굴종의 삶을 살것인가하는 결단의 때가 여러분들앞에 놓여있습니다.

- 홍종일 목사 (現 정관영암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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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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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개인적인 이야기이며, 아래부터는 시북군의 이야기 입니다.)

 우리는 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생각컨대 두려움이나 불안감, 그리고 공포심 같은 것들은 "현실"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자세 때문에 발생한다. 거대하고 넘지 못할 것만 같은 벽, 현실의 매서운 풍파 속에서 자신을 한심하고 초라하다고 자책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냥 벽일 뿐이다, 그것은 그냥 현실일 뿐이다. 결코 거대하지 않으며, 결코 매섭기만 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명심하라, 현실을 직시하라. 실은 아무것도 아닌데 두려움에 떨지 마라. 실은 아무것도 아닌데 포기하지 마라. 당신이 약하다고? 너무 나약하고 쓸모없다고? 결코 그렇지 않다. 현실에 뛰어들어서 당당하게 맞서라.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당신이며, 바로 우리인 것이다. 자신에 대해서 믿음을 가져라. 할 수 있다고 믿고, 실천하고 행동하라. 그것이 노예의 삶을 해방시켜, 참된 주인의 삶을 살게 해 줄 것이다.

 실패했다고? 그래서 난 살 가치가 없다고? 실연당해서 비참해 죽을 것만 같다고? 웃기지 마시라. 단지 한 번 넘어졌을 뿐이다. 열심히 달리다가 넘어져 보았는가? 상처나고 피가 나오는 것을 본 적 있는가? 그 때만 잠시 아프고 그것으로 그 과거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단지 과거일 뿐이다. 그 자리에는 다시 새 살이 나기 시작한다. 실패는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결코, 절대로, 당신의 꿈을 비전을 포기하지 마라. 당신은 더 멋있어 질 것이다.

 인생은 전쟁이다. 하루 하루가 자신과의 싸움이며,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의 싸움이다. 승리하라. 할 수 없다는 헛소리, 안 될 거라는 헛소리와 싸워 이겨라. 현실을 직시하라. 노력하면 당신은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 마음먹기 나름이다. 저 왼손잡이 사사 에훗 처럼, 당신도 비전을 품고, 목표를 가지고, 다시 한 번 지금부터 실행하라. 언제까지 그저 그렇게 살 것인가? 지금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서자. 사실 별 거 아니다. 진실만 직시하라.

by 시북 (2008년 1월의 글)

 시간이 흘러, 2010년 8월. 생각해보면 왜 하필 장애인이자 약한 사람 에훗을 썼을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그가 약점이 있기 때문에,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윗과 골리앗을 연상시키는 이 극적 반전을 통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약한 사람을 사랑하시며, 그를 통해서 일을 해나가신다는 사실일까.
 에훗은 전혀 두려워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에훗은 오랜시간 장애인으로 고통 받았기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이 안 되는 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지가 멀쩡하면서도, 아무것도 못 할 바에야,
 손 하나가 없더라도, 제대로 일을 해내는 에훗의 모습에서,
 때때로 고통을 통해서, 명확한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문득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