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스타열전

90년대 브라질 비운의 10번, 하이 (Rai)

시북(허지수) 2010. 10. 12. 22:10

 예전에 써놓았던, 브라질 레전드 축구선수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다가 "막내동생도 축구선수로 훌륭한 활약을 펼쳤다"라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냥 훌륭한 선수라고 표기되기에는 좀 그렇지요.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막내동생인 "하이" 역시 브라질 국가대표로 뛰었으며, 등번호 10번을 달았던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한 번 살펴볼까 합니다.

 프로필

 이름 : Raí Souza Vieira de Oliveira (하이 또는 라이로 표기)
 생년월일 : 1965년 5월 15일
 신장/체중 : 188cm / 89kg
 포지션 : MF
 국적 : 브라질
 국가대표 : 51시합 16득점


 소크라테스의 동생, 그러나 비운의 에이스가 되었던 - 하이 이야기

 요즘 한국어 위키피디아는 정말 대단합니다. 많은 분들의 열정으로, 참으로 방대한 축구선수의 데이터 베이스를 정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위키피디아에서 많은 정보를 얻습니다. 하이라는 선수도 Raí 라고 표기되는데, 포르투갈어 이기 때문에, 읽으면 "하이"가 되는거고요, 저도 하마트면 "라이"라고 소개할 뻔 했습니다 :) 늘 수고해주시는 위키피디아 관계자 분들께는 정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자 본격적 이야기로 출발.

 하이는 친형 소크라테스처럼 축구선수의 길을 선택하지만,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명선수 소크라테스의 동생 정도로 주목을 받을 뿐, 크게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지요. 말하자면 잠재력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확 폭발하지 않는 케이스. 기대의 유망주 정도로 봐야 겠지요. 1987년에 국가대표로 발탁되었고, 같은 해에 브라질 명문팀 상파울루FC에도 입단하게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하이는 기대만큼 해주지 못하고, 대표팀에서도 좀처럼 주전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1990년은 하이가 드디어 축구에 눈을 뜨기 시작한 운명의 해가 됩니다. 상파울루 팀에 명장 텔레 산타나 감독이 취임해 왔고, 하이는 명장의 총애 아래, 상파울루팀의 에이스로 성장해 나갑니다. 등번호 10번은 하이의 몫이었고, 상파울로는 세계적인 강호로 이름을 날리지요.

 플레이메이커로 이름을 날리던 하이는 덩치도 좋고, 거기다가 섬세한 테크니션으로 불립니다. 유연한 킥을 자랑하는 하이는 골 결정력이 좋았으며, 부드럽게 찔러주는 패스도 일품이었습니다. 하이가 이끌어 가던 상파울루팀은 1991년 브라질 전국선수권 우승, 1992년 남미의 챔스격인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우승을 차지합니다. 당시에는 도요타컵이라고 해서 유럽챔피언과 맞붙는 경기가 있었는데, 92년 당대 최고의 팀 중 하나인 FC바르셀로나와 경기를 해서도, 캡틴 하이는 홀로 두 골을 넣으며 상파울루를 승리로 이끕니다.

 사람들은 지코 이후, 10번을 계승할 만한 남자가 나타났다며, 기대가 모아졌으며, 이제 브라질 10번은 하이가 책임질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이는 무서운 활약을 이어가면서 1992년 남미최우수선수로도 선정됩니다. 대표팀에서도 이제 10번을 맡게 되었으며, 많은 주목을 받습니다. 여기까지는 참 좋은 시절이었지요. 하이는 이후의 부진으로 그의 영광들이 참혹히(?) 묻혀버리고 맙니다 (...)

 1993년 많은 기대속에 유럽진출! 프랑스의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합니다. 그러나 하이는 적응에 문제를 일으키고 맙니다. 그는 기대만큼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부진한 모습의 하이 때문에 브라질 대표팀도 머리가 복잡해 집니다. 1993년에는 월드컵 본선출장을 위해서, 남미 예선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는데, 명장 페레이라 감독은 하이를 계속해서 10번 플레이메이커로 기용하면서, 부활을 기대해 봅니다. 그러나 부진은 계속되고 브라질은 여론마저 달아오르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10번 논쟁. 브라질은 호마리우가 대표팀에서 활약을 펼쳐준 덕분에 간신히 남미예선을 돌파할 수 있었지요. 하이는 욕도 엄청 먹었습니다.

 페레이라 감독은 그래도 끝까지 1994년 월드컵 첫 경기부터 "하이"에게 주장과 플레이메이커를 맡깁니다. 물론 하이는 PK를 넣으며 득점을 했지만, 그는 부진한 모습이 되고 맙니다. 결국 토너먼트부터는 하이는 벤치에 앉았고, 캡틴은 투장 둥가가 맡게 됩니다. 브라질은 기세를 올리면서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지만, 하이로서는 참으로 굴욕적인 1993~94년까지의 모습입니다. 그는 월드컵을 우승한 영광의 팀 속에서도 마냥 자랑스럽지 못했습니다. 하이에게 걸려 있던 많은 기대와 눈길들은 오히려 많은 비난(!)으로 돌아오곤 했지요.

 그 굴욕 이후, 공교롭게도 하이는 파리 생제르맹에서 다시 한 번 부활한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팀의 중심선수로 거듭나게 됩니다. 정작 중요할 때는 그 재능이 침묵한 게 참으로 안타까웠지요. 호쾌함과 섬세함을 겸비한 하이는 팀을 잘 지휘하면서, 많은 골을 올립니다. 레전드 조지 웨아 등이 공격수로 뛰고 있던 파리 생제르맹은 챔피언스리그 4강, 리그 2위라는 훌륭한 성적을 올렸고, 이듬해에는 이적해 온 유리 조르카에프 등과 함께 UEFA컵 위너스컵을 획득하게 됩니다. 자랑스러운 파리 생제르맹의 첫 국제무대 트로피입니다. 중심선수는 역시 하이였지요. 다시 한 번 유럽에서 뛰던 브라질 선수 중에서, 맹활약 하는 선수로 인지되기 시작하지만, 안타깝게 그에게 대표팀의 자리는 재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브라질 10번의 자리는 히바우두의 몫이 되고 맙니다. 하이에게는 94년의 기회를 부진으로 날렸던 것이 꽤나 치명적이었지요. 끝내 1998년 월드컵은 뛰지 못했고, 98년에 대표팀에서 물러납니다.

 1998년 이후 하이는 파리 생제르맹을 떠나서, 고향 브라질로 돌아와서 상파울루에서 선수생활 마지막을 보내며 2000년 현역에서 은퇴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많은 선수들이 큰 기대를 받으며 대무대에 서지만, 반드시 화려한 조명만 받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비판 속에서 고개를 떨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이는 완전히 좌절하지 않고, 후에 파리 생제르맹에서 부활하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역할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에 의미를 둘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면서 하이의 플레이 영상을 덧붙입니다. 정리하자면, 90년대 초반 브라질 비운의 에이스 였다고 볼 수 있겠지요. 유려한 발재간과 예술적인 프리킥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중요한 순간에서의 기복은 너무 아쉬움이 컸습니다. 멋진 실력이 대무대에서 발휘되지 못했던 슬픔이란, 그 아픔은 본인만이 알겠지요.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애독해 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