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스타열전

첼시의 레전드 하셀바잉크 이야기

시북(허지수) 2011. 4. 15. 12:55

 98년 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당시 네덜란드 감독은 호화 엔트리를 발표합니다. 베르캄프, 클루이베르트, 세도르프, 데보어 형제, 필립코쿠, 반데사르, 야프스탐 등... 그야말로 우승후보 였지요. (당시 4강까지 진출) 23명의 멤버 중에는 그 때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선수도 있었습니다. 등번호 21번을 달고 있던 하셀바잉크 였지요. 이후에도 하셀바잉크는 뛰어난 실력에 비해서 운이 없던 선수로 불리기도 합니다. 오늘은 하셀바잉크를 살펴보려 합니다 :)

 프로필

 이름 : Jimmy Floyd Hasselbaink
 생년월일 : 1972년 3월 27일
 신장/체중 : 183cm / 85kg
 포지션 : FW
 국적 : 네덜란드 / 수리남
 국가대표 : 23시합 9득점


 강렬한 슈팅이 매력적인 공격수 - 하셀바잉크 이야기

 하셀바잉크의 축구 인생은 그렇게 순탄하지도 또 멋있지도 않게 시작됩니다. 하셀바잉크는 10대 시절과 20대 초반을 네덜란드의 2부리그에서 무명선수로 보냈고, 90년대 중반 포르투갈로 건너가서 드디어 눈에 띄는 성적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절대 하면 안 되는 것이 쉽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기야 나이가 들어도 쉽게 포기하면 안 되겠지만요 (웃음)

 포르투갈 리그 보아비스타 팀에서 득점왕을 다툴 만큼 눈부신 골결정력을 발휘하였고, 1997년 20골을 올리면서 하셀바잉크의 이름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팀 동료였던 누누 고메스와 하셀바잉크의 투 톱은 포르투갈 리그에서는 가히 탑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덕분에 시즌을 마치고 둘은 나란히 더 이름 높은 팀으로 옮기게 됩니다. 누누 고메스는 벤피카로, 하셀바잉크는 EPL의 리즈로!

 EPL에서 하셀바잉크는 무사히 적응을 마치며, 이후 리즈 유나이티드의 에이스로 많은 골을 올립니다. 데뷔시즌인 98년에 16골, 99년에는 18골을 기록하며 공동득점왕도 차지합니다. 네덜란드 국내 실적이 거의 없었음에도, 하셀바잉크는 능력을 인정받으며 이 무렵 국가대표로도 선출됩니다. 유럽이 주목하는 명공격수 하셀바잉크가 된 것입니다.

 1999년 하셀바잉크의 주가는 계속 올랐고, 라리가의 AT마드리드가 거액을 주고 데려옵니다. 당시 추정으로는 200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AT마드리드도 비에리가 떠난 이후, 주포가 간절히 필요했고요. 하셀바잉크는 라리가에서도 잘 했습니다. 리그전에서 24골이나 폭발시켰고, 팀 득점의 거의 절반을 하셀바잉크가 책임질 만큼, 발군의 존재감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AT마드리드는 강등당하고 맙니다.

 극도의 부진에 빠진 팀이었고, 재정난도 심각한 팀이었음에도, 하셀바잉크는 단연 돋보였고, 서포터들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습니다. 강등을 당했어도, 하셀바잉크는 남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뜻대로만 되는 건 아니었지요. AT마드리드의 선택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셀바잉크를 첼시로 보냈고, 또 훗날 스페인 중원을 책임지던 루벤 바라하를 발렌시아로 보냅니다.

 첼시와의 싱크로율 100%.
 한 마디로 좋았고, 훌륭했습니다. 그야말로 격이 다른 스트라이커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초강력 슈팅은 팬들에게 통쾌감을 주었지요. 스피드도 빠르고, 파워풀한 모습도 겸비하고 있어서, 수 많은 골을 넣습니다. 다이나믹한 플레이로 골, 감각적인 슈팅으로 골, 각이 안 나와도 휘어차며 골, 수비진에 둘러 쌓여도 빈 공간을 노리며 골, 대포 같은 중거리포로 골. 당시 첼시 팬이라면, 그를 안 좋아하는 게 더 이상할 겁니다. 너무 잘했으니까요.

 2000-01시즌 첼시에서 보낸 첫 시즌에 23골을 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합니다. 결정적인 장면마다 팀을 구해내며, 하셀바잉크는 히어로로 떠올랐으며, 2001-02시즌에도 또 다시 23골을 넣으며, 유럽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공격수로 평가받습니다. 당시 구드욘센과 하셀바잉크의 조합, 바로 뒤에는 마법사 졸라가 받쳐주던 그 시절의 첼시도 비록 부자구단은 아니었어도 매력이 넘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2004년 첼시에 아브라모비치 구단주가 오면서 많은 것이 달라지지요. 아니 선수층 자체가 달라지지요 (웃음) 감독도 무리뉴로 바뀝니다. 방출 후보 였던 하셀바잉크와 구드욘센을 버릴 수 없어서 무리뉴는 잡아달라고 강하게 어필합니다. 다행히 구드욘센은 첼시에 남았지만, 하셀바잉크는 벌써 미들즈브러와 계약이 되고 말았습니다. 4시즌 동안 70골을 기록한 간판 스타는 결국 팀을 떠납니다.

 미들즈브러에서 하셀바잉크는 호주의 스타 비두카와 호흡을 맞추며, 변함없는 골 결정력을 보여주었고, 미들즈브러도 뛰어난 성적을 올립니다. 2005년 13골을 올리며, 소속팀은 UEFA컵 출장권을 얻었고, 2006년에는 미들즈브러가 UEFA컵에서 돌풍을 일으킵니다. 패색이 짙던 상황에서도 역전 드라마를 몇 번이나 만들며 계속 이기더니 결승까지 올라가지요 (대단!) 아쉽게 세비야에 패했지만, 미들즈브러의 UEFA컵 준우승은 한 편의 미라클이었지요.

 30대 중반인 하셀바잉크는 2005-06시즌이 끝나고, 팀을 옮겨서 찰튼과 카디프시티에 몸담았다가 2008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합니다. 축구를 시작하고 네덜란드 2부리그에서 4년 동안 5골 밖에 넣지 못한 선수였던 하셀바잉크. 그러나 도전은 멈추지 않았고, 1996년부터 2006년까지 11년 동안, 언제나 두 자리 수 득점을 기록했던 명공격수 하셀바잉크. EPL 득점왕 2회에, 많은 인기를 얻었고, 살인 미소까지 매력적인 남자. 종종 비운의 공격수로도 평가받지만, 충분히 사랑받은 인상적인 공격수였다고 생각합니다.

 비운의 요소는 그가 네덜란드 국적이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선수들이 너무 화려했습니다. 베르캄프, 클루이베르트, 반 니스텔로이, 로이 마카이, 반 호이동크까지... 세계적인 공격수들이 많았지요. 실력은 충분했지만, 선택지가 많았기에 그는 국가대표로 좀처럼 활약하지 못했습니다. 레이카르트 감독 시대와 루이스 반할 감독 시대에는 하셀바잉크의 자리가 별로 없었고, 2002년을 끝으로 결국 국대 23시합 9득점의 평범한 국가대표 커리어를 남깁니다. 이것이 그가 종종 비운의 공격수로 불리는 까닭입니다. 국대 활약이 적다보니 세계적 인지도도 다소 떨어질 수 있고요. 다른 나라들이 주포가 없다고 고민하는 일이 많은데, 그 시대의 네덜란드는 명공격수가 많아서 탈이었지요 (-_-;)

 그래도 한 팀의 전설적 선수로 기억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또한 출발은 미미했으나, 훗날 대성공한 케이스로도 평가받는 선수이기도 하고요. 예상보다 좀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 10분 정도의 긴 영상을 덧붙이며 (웃음) 오늘 이야기를 마칩니다. 독자님들께 언제나 감사드리며,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