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스타열전

오스트리아의 레전드 공격수, 한스 크란클

시북(허지수) 2011. 4. 19. 15:46

 70년대와 80년대 초반을 생각해 본다면 - 잉글랜드에 앞서 살펴본 케빈 키건이 있었고, 대한민국에 차범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에는 한스 크란클 이라는 걸출한 선수가 있었지요. 1979년 라리가 득점왕이자, 오스트리아 국가대표팀을 이끈 전설의 공격수 크란클의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그럼 출발~

 프로필

 이름 : Johann "Hans" Krankl
 생년월일 : 1953년 2월 14일
 신장/체중 : 182cm / 90kg
 포지션 : FW
 국적 : 오스트리아
 국가대표 : 69시합 34득점


 골, 골이에요~ 우리가 마침내 서독을 이겼어요!!! - 78 월드컵 감동실화의 주역 한스 크란클 이야기

 오스트리아 최고의 명문팀인 라피드 빈에서 축구를 시작하는 한스 크란클이지만, 출발은 역시 참 현실적입니다. 한스 크란클은 데뷔 이후 득점이 없었고, 소속팀 라피드 빈은 10대 영건 크란클을 2부리그로 보내서 경험을 쌓게 합니다. 명문팀들이 자주 써먹는 오래되고 확실한 방법이지요 :)

 크란클은 오스트리아 2부리그에서 27골을 넣으며,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보였고, 이후 다시 라피드 빈으로 복귀, 1972년부터 6시즌 동안 라피드 빈의 주포로 자리 잡으면서, 수 많은 득점을 올립니다. 74년 36골, 77년 32골, 78년 41골을 넣었지요. 물론 오스트리아의 축구 레벨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확실한 것은 크란클은 유럽의 명문팀들로부터 관심을 받게 됩니다. 1978년, 잘 알려진 명문 FC바르셀로나가 한스 크란클을 영입합니다.

 이 무렵 매우 의미 있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1978년 월드컵이었지요. 한스 크란클은 대표팀의 주포로 활약하며, 오스트리아를 20년만에 월드컵 무대로 이끕니다. 그런데 조가 좀 어려웠지요. 브라질, 스페인, 스웨덴과 한 조였습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크란클의 오스트리아는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크란클의 후반 결승골에 힘입어 스페인을 2-1로 잡더니, 스웨덴과의 경기에서도 승리를 따냅니다. 결국 조1위는 오스트리아가 먹었고, 스페인과 스웨덴은 동반 탈락하지요. 결승진출팀을 가리는 2라운드가 되자 오스트리아는 아쉽게도 네덜란드와 이태리에게 패하며 우승의 꿈이 물거품 됩니다. 그런데 한 경기가 남았습니다. 70년대 강호 서독과의 경기였지요. 오래 전, 히틀러의 나치 시대 당시 오스트리아는 서독에게 먹히면서 전설의 축구팀이 붕괴된 아픈 역사가 있었습니다. (참고글→http://suparobo.tistory.com/82)

 단단히 독이 오른 오스트리아였기에, 지난 대회 챔피언에 빛나는 서독도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서독이 앞서가는가 하더니, 크란클이 역전골을 넣으며 경기를 뒤집었고, 서독은 잠시 뒤 만회골을 넣으며 2-2 동점을 만듭니다. 그리고 후반 종료 직전, 그림 같은 크란클의 슈팅이 터집니다. (하단 동영상 참고) 서독이 자랑하던 명수호신 제프 마이어도 종료 직전에 이 슈팅을 막지 못합니다. 크란클의 결승골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나라를 되찾은 이후, 처음으로 서독에게 이긴 승리라고 전해집니다. 크란클의 두 골에 힘입어, 3-2 오스트리아 승리, 서독은 2차리그 탈락합니다. 오스트리아는 값지고 짜릿한 역전승리로 인해, 마치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것처럼 환희에 불탔다고 전해지고요. 이 사건은 그 때 경기가 열렸던 지명을 따서, 코르도바의 기적이라고도 불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월드컵 토너먼트에서 일본과 경기해서 역전승리하면, 대회 우승만큼이나 기쁠 것이라 생각됩니다.)

 78년 월드컵, 오스트리아의 국민영웅 한스 크란클! 그는 대무대에서 4골을 넣으며, 세계적 공격수로 인정받습니다. FC바르셀로나가 데려오려고 했던 것도 당연했지요. 1978-79시즌 스페인 라리가가 시작됩니다. 크란클은 뜨거운 기세로 득점을 계속 올립니다. 해트트릭을 4번이나 달성하였으며, 강력하고 정확한 왼발 슈팅과 골문 앞에서의 확실한 득점력을 무기로, 라리가 데뷔시즌에 29득점을 올리며 득점왕을 차지합니다. 우승은 아쉽게 레알이 차지하지만, 크란클은 과연 세계적 선수임을 재차 입증한 셈입니다. 월드컵과 라리가의 대활약 덕분에 1978년 연말에 유럽최우수선수상이 발표되자, 한스 크란클은 81점을 얻으며 2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1위 케빈키건(87점)과는 불과 6점 차이였지요. 유럽에서 손에 꼽히던 공격수 한스 크란클의 활약은 계속되었고, FC바르셀로나는 1979년 UEFA컵 위너스컵을 차지합니다.

 잘 나가던 한스 크란클은 뜻밖의 불운을 만나게 됩니다. 교통사고를 당하며, 몸에 부상을 입은 것이지요. 이후 한참동안 크란클의 컨디션은 돌아오지 못했고, 1981년 결국 오스트리아의 라피드 빈으로 다시 복귀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30대의 크란클이지만, 오스트리아 무대에서는 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1981년 이후 6년 연속 두자리수 득점을 올리며, 다시 한 번 라피드 빈에서 축구 열정을 불태웁니다. 라피드 빈은 82년과 83년에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으며, 80년대 중반 UEFA컵 위너스컵 결승전까지 올라간 경험이 있습니다. 크란클은 오스트리아 올해의 선수상을 5번 획득하였고, 오스트리아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습니다. 1989년 현역 은퇴 이후에는, 지도자 생활을 거쳐서, 현재는 해설자를 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국내에서는 매우 인기가 높고, 가수로도 활약하며 1985년 발표한 곡이 오스트리아 음악랭킹 2위에 오른 일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 오스트리아가 기쁨으로 가득찼던, 그 날 역사적 골장면을 덧붙이면서 오늘의 이야기는 마치겠습니다. 누가 이길 지 알 수 없는 축구라서, 우리는 축구에 열광하고 응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음 한일전은 또 언제 열릴지... 하하, 그럼 독자님들께 감사드리며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