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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의 전설을 이끌다 : 페렌크 푸스카스

시북(허지수) 2008. 2. 13.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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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enc Puskas


 바로 얼마전, 레알마드리드의 신화를 열어갔던 디 스테파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와 같은 팀에서 활동했으며, 헝가리의 가장 위대한 선수이기도 한 푸스카스. 유럽을 대표하는 전설적 선수였던 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프로필

 이름 : Ferenc PUSKÁS (영어식으로 읽으면 - 페렌크 푸스카스 혹은 페렌츠 푸스카스)
 - 원음으로 읽으면 페렌츠 뿌시까시가 가장 가깝다고 한다. (http://blog.daum.net/puskas/6834132 참고)
 생년월일 : 1927년 4월 2일 (작고 : 2006년 11월 17일)
 신장/체중 : 172cm / 75kg
 포지션 : FW
 국적 : 헝가리, 스페인
 대표통산 : 84시합 83득점
 리그통산 : 537시합 511득점 (챔피언스리그 : 39시합 35득점)

 푸스카스, 무적의 팀 이야기

 헝가리 대표팀은 1950년대 초 그야말로 최강의 팀이었다. 1950년부터 1954년 스위스월드컵 결승전까지 4년 동안 헝가리 국가대표팀은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Magical Magyars" (혹은 Golden Team), 매직 마자르 라고 불렸던 이 놀라운 헝가리 팀의 주장이 바로 작은 대포, 왼발의 마술사로 불리는 페렌크 푸스카스였다.

 4년동안 28경기를 가졌는데, 24승 4무를 기록하였다. 평균득점이 무려 4.5골에 이르는 무시무시한 공격력을 가진 최강의 팀이었다. 참고로 한국도 첫 출전한 스위스월드컵에서, 헝가리 팀에게 0-9 로 대패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푸스카스는 이 경기에서 두 골을 넣었다. (월드컵 한국 최초의 실점이 바로 푸스카스에 의한 실점) 당시 국가대표 골키퍼 고 홍덕영 선수는 푸스카스의 슛을 두고 얼마나 슛이 강하던지 "나보다도 키가 작았었는데 왼발슈팅이 골대에 맞으면 딩 하는 소리가 한참 울렸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1952년 올림픽에서는 강호 이탈리아 등과의 경기에서 4연승으로 우승. 당시 4경기에 무려 18득점 1실점이라는 압도적인 실력을 발휘하며 금메달을 획득한다. 또한 이 무적의 팀은 1953년 11월, 런던 웸블리에서 잉글랜드 대표를 6-3 으로 대파한다. 이것은 축구종가 잉글랜드가 (아일랜드와 영국지역 외의) 다른 국가에게 홈에서 처음으로 패한 충격적인 세기의 시합이었다. 복수를 벼르던 잉글랜드는 1954년 5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로 향하는데, 헝가리에게 1-7 로 압도적으로 당하고 만다. 이것은 잉글랜드가 약해서 그랬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 헝가리는 당대 초일류의 강팀이었기 때문에 그러했을 뿐이다.

 푸스카스의 스타일은 어떠했을까? 그는 테크니션에 가깝다 하겠다. 특히 테크닉 하면서도 파워풀한 그의 슛은 압도적이라고 표현될 만큼 강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킥페인트와 기교적인 슛도 훌륭했으며, 스피드 역시 뛰어난 명공격수였다. 그는 육군 장교이기도 하였기에, 질주하는 소령 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헝가리 국가대표로 84시합에 출장해 무려 83골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다. 이것인 헝가리 역대최다기록이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A매치 최다 골 기록이었다. (현재는 이란의 알리 다에이 선수가 109골을 기록한 것이 최다이다. 그렇지만 푸스카스는 불과 29살까지만 대표생활을 했다는 것을 감안할 때, 푸스카스의 기록은 정말 대단한 기록이라 볼 수 있다.)

 문제는 바로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무적의 헝가리 팀을 이끌던 푸스카스는, 토너먼트에 앞서서 행해지는 리그전인 서독전에서 고의적인 파울에 의해서 부상당하고 만다. 이 부상만 아니었으면, 헝가리의 불패신화도 더욱 이어졌을 것이며 월드컵 우승트로피도 헝가리의 것이 되었을 터인데... 여하튼 팀의 기둥을 잃은 헝가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호 브라질과 우루과이를 연파하면서 결승전까지 진출한다.

 푸스카스는 부상에도 출전을 감행한다. 바야흐로 서독과의 월드컵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주심은 영국인 주심이었는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잉글랜드 대표팀은 헝가리와 친선경기에서 두 번이나 대패한 경험이 있었다) 판정을 서독에게 유리하게 하고 만다. 결과는 2-3 으로 무적의 팀 헝가리의 패배. 이로서 4년간의 불패신화는 그 정점에서 아쉽게 끝내야만 했다. (경기 끝나기 직전 푸스카스가 동점골을 넣었는데, 오프사이드 판정이 났다고 한다.) 브라질과의 빗속 난투전, 우루과이와의 빗속 연장전 등의 고된 토너먼트를 해왔던 헝가리팀. 게다가 푸스카스의 부상. 이러한 정황들로 인해서 이 최강의 전설적인 팀은 끝내 패하고 만다.

 물론 그 이후에도 이 무적의 팀은 2년동안 21승 5무 2패를 기록하면서, 유럽최강으로 군림해왔지만... 1956년에는 헝가리 혁명이 발생한다. 그 영향으로 헝가리 국내리그는 중지되었고, 푸스카스는 스페인으로 망명하게 된다. 헝가리 정부는 압력을 넣어서 2년 동안 푸스카스의 공식경기 출장을 금지해버린다. 이것이 헝가리 대표로서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헝가리 팀의 주요 멤버들도 외국에 망명하면서, 사실상 이 무적의 팀은 해체되고 말았다. 1930년대의 나치 독일에 강제 합병된 강호 중에 강호였던 불운한 오스트리아 대표팀이 연상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1958년, 처분이 풀리자 30대가 된 푸스카스는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한다. 그리고 디 스테파노 등과 함께 레알 마드리드 제 1 의 황금기를 이룩해 낸다. 후에 스페인 국적을 취득해 스페인 대표로서 경기를 뛴 적도 있다. 여하튼 푸스카스가 뛰던 시절의 이 최강 레알 마드리드 팀은 국내리그 5회 우승을 한 것을 비롯해서, 더욱이 챔피언스리그를 5연패하는 놀라운 역사를 남긴다. 푸스카스는 스페인 리그 득점왕에도 4차례나 오른다. 특히 1959-60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무려 4골을 터트리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결승전 최다골로 남겨져 있다. (아마도 깨지기는 불가능 할 것이라 생각된다.) 또 한 명의 레전드 디 스테파노가 3골을 터트린 이 날 결승전, 7골을 몰아친 레알 마드리드는 프랑크푸르트를 대파하면서 유럽정상에 우뚝 선다.

 39세에 현역에서 은퇴한 푸스카스는 지도자로서도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그리스의 명문 Panathinaikos (파나티나이코스) 팀의 감독으로서 팀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까지 이끌었으나, 아쉽게도 당대 최강의 팀이었던 요한 크루이프의 아약스에게 0-2 로 패했던 기록도 있다. 여러 나라의 국가대표팀을 이끌었으며, 마치 축구를 위해서 태어난 남자라고 불러도 과언은 아니다. 말년에는 알츠하이머 병으로 6년간 고생을 하였으며, 폐렴으로 부다페스트에서 79살의 나이로 생을 달리한다.

 에피소드도 있다. 냉전시대가 종결된 이후, 푸스카스는 고향 헝가리를 방문하였다. 나라를 버린 사람으로서 돌을 맞을 각오로 방문하였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국민적 영웅의 귀환을 축하하는 열광적인 환영이었다고 한다. 2001년에는 헝가리 국립 경기장이 "페렌크 푸스카스 스타디움"으로 이름이 바뀌기까지 했다. 그는 헝가리가 배출한 불멸의 슈퍼스타로 이제는 대우받고 있다.

 마치며 - 그의 컴필레이션 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영상을 덧붙이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비록 거의 흑백이긴 합니다만, 푸스카스를 기억하시는 분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푸스카스와 관련해서는 이 글도 추천해 드립니다. → http://blog.daum.net/puskas/6834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