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5월6일/실패하는 사람들의 습관(사사기16:1-20)/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5. 10. 20:36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5월 6일 주일 예배

실패하는 사람들의 습관 (사사기16:1-20)

오늘은 신년이나 음력으로 구정이 아닙니다. 심지어 새로운 학기를 시작하는 9월달도 아닙니다. 단지 5월 첫 주일 따름입니다. 물론 5월달은 가정의 달이고 그래서 인지 어린이나, 어버이날, 스승의 날, 청소년의 날 같은 가정과 관련된 날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삶을 사는 중에 쉬어가는 여유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코비라는 사람이 지은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이 한때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에게만 습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는 사람에게도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구체적인 습관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런 습관을 가진 사람들의 행태를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단호하지 못하다는 것, 독하지 않다는 것이 실패자들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특히 육체의 욕망을 끊는데 있어서 단호하지 못합니다. 독하게 마음먹고 자기를 실패로 이끄는 습관으로부터 벗어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합니다.

머리 속으로는 분명히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실천에 옮기지 못하거나 일단 실천에 옮겼다가도 오래도록 실행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을 실패로 이끄는 중요한 습관인 것입니다. 뭐 이게 좀 더 심해지면 우리는 이를 습관이라고 부르지 않고 중독이라고 부르지요. 이쯤 되면 말로 해결할 시기가 지났습니다. 물리적인 조치가 취해져야만 합니다. 왜냐면 실제로 뇌에서 호르몬 물질이 분비되거든요. 우리가 잘아는 아드레날린 같은 것도 여기에 속합니다. 그리고 중독은 독서나 등산이나 마라톤 같은 것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은 여기서 나쁜 습관, 나아가 중독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성령을 거스리고 육체의 소욕을 좇는’ 그런 행위 말입니다.
술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초등 3학년 때 제사가... 술을 금하게 된 전통은... (에피소드 중략)
담배이야기- 시골교회 회계집사가 부흥회 도중 교회 화장실에서 담배피다 화장실이 펑... (에피소드 중략)
늦잠이야기- 잠 24:33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그럼 이제 여자 이야기를 한번 해봅시다
남자가 여자에게 끌리는 것이 잘못입니까?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청춘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며 자녀를 낳은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입니다. 결혼적령기의 남녀가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여자를 좋아한다면…
이 정도면 이건 습관이 아니라 중독입니다. 그런데 중독은 보통 습관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습관은 좋고 중독은 나쁜것도 아닙니다. 좋은 것도 사실상 중독과 같은 뇌반응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람 중에 삼손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비극적인 영웅입니다. 좋아요, 영웅이라는 말도 빼고 그냥 비극적인 용사라고 합시다.
하나님이 괴력을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셨지만 여자 때문에 결국은 두눈을 뽑히고 죽고 마는 비운의 용사.
4절에 보면 “이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조금 이상한 점을 느낍니다. 그것이 무언고 하니 바로 들릴라라는 이름이 나왔다는 것
여자의 이름이 나온 것이 무엇이 중요하냐고요?
앞에 보면 삼손이 정식으로 결혼한 아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또 가사의 기생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역시 그 여자의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 두여인과 얽힌 많은 일이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삼손은 그 두여자 때문에 죽을뻔하기도 하고 많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그녀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두 여인은 삼손의 생애에서 별로이 중요하지 않았다고 본 것입니다. 이 여인 들릴라에 비해.

웃기지 않습니까? 정식으로 결혼하고 이혼하였으며, 그 때문에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큰 분쟁이 일어났는데도 그 부인의 이름은 여기 나와있는 ‘들릴라’란 이름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본 것입니다. 부인도 아니고 첩도 아니고 오다 가다 만난 이 여인의 이름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들릴라
들릴라는 ‘매달린자. 혹은 약한자, 약하게 하는 자’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매달린자’를 의미한다면 들릴라가 끝까지 삼손에게 울며불며 매달려서 삼손의 약점을 알아내는 자라는 암시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약하게 하는 자’라면 자기의 연약하고 가녀린 여성적인 매력을 이용해 삼손의 약점을 알아내고는 머리털을 잘라내서 삼손을 약하게 하는 자라는 것을 암시하는 그런 이름입니다.
또 들릴라라는 이름을 아람어로 해석한다면 ‘밤의 여인’이란 뜻을 가진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직업을 나타낼 수도 있겠네요. 우리는 들릴라가 본명인지 별명인지 직업명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작은 태양’이라는 뜻의 이름인 삼손하고는 상극입니다. 태양은 밤에는 뜨지 않습니다. 태양빛을 밤의 어둠으로 감싸 버리는 여인. 대부분의 경우에 태양은 밤을 몰아냅니다. 어둠을 이기며 힘차게 떠오르는 아침태양은 만물을 생동케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밤의 여인에게 휩싸여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들릴라’란 이름은 삼손의 비극적 운명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들릴라라는 이름은 그 여자가 삼손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그대로 나타냅니다.

만일 영적인 사람이라면 들릴라 라는 이름을 들을 때 ‘아 이 여인이 장차 나를 어떻게 할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경계할 수 있었을 터인데…
불행히도 삼손의 영은 깨어있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그는 여자를 너무 지나치게 밝혔기 때문입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단번에 실패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실패를 향하여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의 실패에 이르게 하는 습관은 ‘여자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다른 모든 것에 눈멀었던 것입니다.

삼손은 이전에도 여자 때문에 두번이나 죽을뻔했습니다. 뿐입니까, 그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임에도 불구하고 사사의 사명을 망각하고 이스라엘 여인이 아닌 이방여인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사실 블레셋 사람들은 크레테섬에서 건너온 그리스인의 후예들입니다. 게다가 유목민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달리 도시문명을 건설하고 사는 그네들의 여인은 유목민의 사사인 삼손의 눈에는 너무 세련되었고 아름답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시 블레셋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반식민지상태입니다.

삼손은 그러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의 독립과 부족의 수호를 사명으로 하는 사사의 직임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에는 들릴라에게 걸려서 죽게 됩니다. 삼손은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여자를 밝히는 습관에 젖어 있다가 결국은 그 습관 때문에 명을 재촉하게 됩니다.
사랑에 눈이 먼 한 사내가 마침내 진짜로 두 눈을 잃어버리고 눈이 멀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2.음모는 진행되다
들릴라가 삼손의 사랑을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은 급거 들릴라를 찾아옵니다. 삼손이 그정도로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왕들이 들릴라를 찾아 온 것입니다. 물론 삼손은 자기가 그 정도로 중요한 사람, 즉 이스라엘의 독립군 사령관이자 통치자라는 자각은 없었습니다.

당시 블레셋은 다섯개의 도시국가 연맹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방백’이라고 나와있지만 실제로 이들은 모두 각 나라의 왕입니다. 블레셋을 다스리는 이들 다섯명의 왕들은 놀라운 제의를 합니다. 은 5500세겔을 줄 테니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은 5500세겔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대 어른 노예의 몸값이 은 삼십세겔이라는 것을 기억하신다면 엄청난 금액임은 확실합니다.

그러면서 무어라고 이야기 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이기어서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돈을 제의한 다섯 왕들은 노골적으로 들릴라에게 삼손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이야기 합니다.
두말없이 이를 승낙한 들릴라는 이제 삼손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유심히 그를 살핍니다. 이를 보면 들릴라는 삼손을 사랑하지 않았음이 확실합니다. 만일 그녀가 진심으로 삼손을 사랑했다면 돈을 받고 연인을 넘겨주는 일이 있을 수가 없을테니까요.

어찌보면 삼손의 불행은 이방여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여인을 사랑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밤의 여인이란 이름의 들릴라는 어쩌면 창녀일수도 있다고 많은 성경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전문적으로 남자를 홀리도록 되어있는 여인에게 유목민인 이스라엘의 촌놈 사사는 결코 상대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3자인 우리가 보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평소와는 거동이 달리진 들릴라의 행동은 조금만 경각심을 가진다면 충분히 알 수 있었을 터인데도 삼손은 전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 골짜기의 누구도 삼손의 편은 없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삼손이 자기땅에서 사사로서의 직무를 행했다는 기록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주로 여자와 관련해서 사고만 친 걸로 나와있습니다. 그것도 주로 적국인 블레셋땅에서. 그리고 그러한 적지에 들어가서 자기의 파멸을 초래한 것도 삼손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왜냐면 삼손은 멸망에 이르게 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3.푸른 칡 일곱으로
처음에는 들릴라란 여인도 조심을 합니다.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비밀리에 삼손을 살펴봅니다. 삼손이 모르도록.
그러나 아무리 결에서 지켜보아도 삼손의 비밀을 알아낼 수 없자 마침내 들릴라는 삼손에게 울며 매달립니다.
‘당신이 만일 나를 사랑한다면 나에게 그 비밀을 가르켜주세요’ 너무 노골적이지요.

이 정도면 누구라도 , 아니 희대의 바보가 아닌 다음에는 ‘들릴라’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들릴라가 물어 보았다는 것은 여자에 대한 삼손의 맹목적인 사랑이 그를 얼마나 바보스럽게 보이게 만들었는지를 알게 합니다. 들릴라가 볼 때 삼손은 자기에게 미쳐있기 때문에 이정도는 물어도 된다는 믿음을 준 것일까요? 아니면 삼손은 바보기 때문에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를 구슬리듯이 구슬리면 털어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삼손의 이 비밀이 어디 보통 비밀입니까?
블레셋의 여인이 그 비밀을 캐려고 하는 것을 보고서도 삼손은 아무런 의심을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도 말도 안된다는 것을 알 터인 데도 삼손은 사랑에 눈멀었기 때문에 들릴라의 음모를 결코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알아 차리고 모르고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최대 적국의 여인과 사랑을 나눌 생각을 한 자체가 벌써 문제를 일으키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에 눈먼 삼손이라도 하나님이 주신 이 엄청난 비밀을 지켜야겠다는 자각은 어느 정도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거짓말로 들릴라에게 비밀을 고백합니다.
“만일 마르지 아니한 푸른칡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아지리라”
그래서 들릴라는 푸른 칡 일곱으로 삼손을 결박하고 난 다음 블레셋 사람들을 내실에 매복시키고는 짐짓 놀란 투로 삼손을 깨웁니다.

‘푸른’ 이란 단어와 ‘일곱’이라는 단어는 뭔가 매우 신비한 힘을 발휘할 것 같은 착각을 심어줍니다. 그래서 이걸로 삼손을 묶기만 한다면 삼손의 힘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삼손을 묶었지만 삼손의 힘은 전혀 변함이 없었습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불탄 삼실을 끊음 같이’ 하였답니다.

여러분 ! 상대에게 자기의 비밀을 이야기했는데 공교롭게도 얼마 후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비밀을 들은 사람을 의심하게 마련입니다.
더구나 들릴라는 어떤 식인지는 몰라도 자기가 직접 삼손의 의식을 잃게하고는 철저하게 삼손을 묶었습니다. 그것도 자기의 안방에서. 우리가 옆에서 삼손을 바라보면 안타까운게 아니라 그의 바보스러움에 화가 납니다. 하나님은 왜 그런 바보에게 그 놀라운 힘을 주셨는지

이쯤되면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었더라도 제정신을 차리고 들릴라를 의심할만 한데 삼손은 너무 심한 바보인 것 같습니다. 이걸 보고 미쳤다고 합니까? 들릴라에게 미쳐서 아무것도 눈에 들어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들릴라도 진짜 뻔뻔하고 천박한 여인입니다.

자기의 음모가 탄로났다면 도독이 제발 저린다고 움츠려들 만도 한데 이 여인은 자기의 음모가 실패하자 오히려 화를 냅니다.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이 말은 ‘당신이 나를 가볍게 취급하여 모욕을 주었다’라는 말입니다. 정말로 기가 찹니다.
뻔뻔한 배신자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바보와의 만남이 바로 소렉 골짜기 들릴라의 집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입니다.

4.쓰지 아니한 새줄로 나를 결박하라
한번 삼손을 잡을 기회를 놓친 들릴라는 자기의 천박한 무기를 최대한 발휘해서 연일 삼손을 조릅니다.
마침내 견디지 못한 삼손은 말합니다.
“만일 쓰지 아니한 새줄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하여져서”

그러자 들릴라는 역시나 삼손을 새줄로 결박하여버립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삼손의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삼손은 여전히 자기의 결박을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끊어버립니다.
자기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여인 곁에서도 마냥 행복해 하는 미련한 삼손의 결말은 보지 않아도 뻔합니다.
왜냐면 삼손은 자기를 멸망으로 이끄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5.머리털 일곱가닥을 위선에 섞어짜면
두번이나 실패한 들릴라는 아마 삼손을 못살게 들들 볶았을 것입니다. 두번이나 어려움을 겪고도 아직까지 들릴라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면 삼손은 솔직히 구제불능의 바보이거나 사랑에 눈먼 자일 것입니다.
세번째로 삼손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머리털 일곱가닥을 위선에 섞어짜서 그 띠로 나를 결박하면” 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즉 천을 짤 때 베틀에서 가로와 세로로 실을 넣어서 짜는데 그 안에다 자기의 머리카락 일곱가닥을 넣어서 짜라고 말합니다.

이때 삼손은 긴 머리를 일곱갈래로 묶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한갈래에서 한 개씩을 빼서 천을 짜서 그 줄로 나를 묶는다면 내가 힘이 없어질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번에는 좀 어렵지요. 천까지 짜야하고. 돈에 눈먼 들릴라와 사랑에 눈먼 삼손의 조합!
이 말을 듣고 즉시 실천에 옮긴 들릴라는 삼손의 머리카락을 천을 짜는 베틀에 단단히 고정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삼손의 힘은 여전하여 잠이 깨어서는 자기를 묶은 모든 바디와 위선을 순식간에 다 빼어버립니다.

6.머리가 밀리우며 힘이떠나고
세번이나 속은 들릴라는 이제 삼손을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나를 희롱하면서도 나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느냐면서 마구 삼손을 볶습니다. 이걸 공갈협박이라고 합니까? 적반하장이라고 합니까?

우리는 삼손의 기사를 읽으면서 삼손이 욕정에 눈이 멀어서 너무나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화가 납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머저리는 빨리 죽어야 돼’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16절에 보니까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랍니다.
너무나 시달려서 이제 삼손은 괴로워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나 들릴라의 사랑의 포로가 된 삼손, 사랑인지 욕정인지에 눈이 먼 삼손은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고 매달리는 자이며, 약하게 하는 자이며, 어두운 밤의 여인인 들릴라의 정체를 끝끝내 보지 못하고 자기의 비밀을 토로합니다.

마침내 삼손의 비밀을 알아낸 들릴라는 삼손을 잠들게 하고는 그의 머리카락을 밀어버립니다. 그는 자기의 모든 비밀을 토로하고 자기의 머리카락이 밀리는 지도 모른채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깊은 잠에 빠집니다.
마침내 힘이 없어진 삼손은 블레셋인들에게 두눈이 뽑히고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됩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어릴때부터 하도 많이 들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 전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몇가지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삼손이 자기의 비밀을 말한 순서를 한번 살펴봅시다.
처음 들릴라의 간청으로 자기의 비밀을 말할 때 그는 푸른 칡 일곱 가닥을 이야기 합니다.
이는 분명히 삼손의 마음속에 자기의 긴 머리카락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나실인은 그 머리에 칼을 대지 않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깁니다. 그가 비록 자기의 비밀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머리카락을 의식하고 칡으로 바꾸어 말한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삼손은 얼마든지 다른 핑계를 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뭐 독주를 일곱사발을 마시면 이라던지
아니면 부적을 베게밑에 두면 이라던지.
손톱을 깎아버리면 이라던지 얼마든지 다른 표현들을 사용할 수 있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처음부터 긴 가닥의 줄을 이야기 합니다.

두번째는 이 줄의 형태가 구체화됩니다.
‘한번도 사용하지 아니한’ 새줄로 나를 묶으면. 삼손도 그렇고 누구라도 머리카락으로 줄을 만들어서 사람을 묶는데 사용한 사람은 없을겁니다. 뭐, 요즘 나오는 라푼젤이란 만화영화에서는 머리카락으로 사람도 묶기는 합디다만.

세번째는 한 걸음 더 자기의 비밀 쪽으로 접근합니다.
이제 드디어 머리털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머리카락 일곱 가닥을 천을 짜는데 섞어 짜면 자기가 힘을 쓰지 못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차마 전부 다를 털어놓지는 못하지만 입이 근질거렸을 것입니다. 이미 삼손의 마음에는 심리적 저항선인 ‘머리털’이라는 단어에 대한 금지명령이 깨진 상태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네번째는 자기의 비밀을 전부 털어놓고 멸망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삼손이 자기의 비밀을 토하는 과정을 보면 처음의 유혹을 독하게 마음먹고 끊어버리지 못하자 점점 더 치정의 그물에 빠져서 어리석게도 누구나 알 수 있는 것도 보지 못하고 멸망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삼손이 완벽한 바보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지능의 사람이라는 가정하에서 생각해 봅시다. 그는 들릴라가 자꾸 자기의 비밀을 파헤치려고 하고 자기의 신변에 뭔가 위협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들릴라가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들릴라를 단호하게 떠나지 못한 것은 그가 이미 들릴라에게 너무 깊이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머리는 떠나야 된다고 말하지만 몸은 그러한 명령에 따르지 못합니다. 아니 애써 외면하려 합니다. 그냥 자기를 합리화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실패로 이르게 하는 좋지 못한 습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절대로 그러면 안돼” 라고 경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악된 습성에 물든 우리의 육신은 머리 속의 생각을 실천에 잘 옮기지 못합니다.
본인은 알지 못하지만 패망으로 이르는 수순을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밟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또 다른 면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과연 삼손은 머리털이 밀렸기 때문에 힘이 사라진 것일까?
본문을 얼핏보면 머리털이 핵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이는 잘못된 말입니다.
삼손의 힘의 근원은 결코 머리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20절에서 잠에서 깨어서 위급한 순간에 힘을 발휘하려고 몸부림쳐도 힘이 솟아나지 않아 안타까워하는 삼손의 모습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라는 말로 성경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삼손은 17절에서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라고 표현하여 자기 자신도 자기의 힘의 근원이 머리털에 있지 하나님과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왜 머리털이 그렇게나 중요한 도구로 나옵니까?
그것은 머리털을 미는 것이 하나님의 나실인이 지켜야할 중요한 규범이었기때문입니다. 머리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머리털을 밀지 않는 것이 거룩하게 구별되고 헌신된 자세를 견지하기 위한 나실인의 규칙이었던 셈입니다.

사실 삼손은 나실인의 중요 규례 세가지중 이미 두가지를 범한 상태입니다.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는 규칙은 14장에서 자기가 죽인 사자의 몸에 생긴 벌꿀을 취함으로 이미 어겼고 포도주를 먹지 말라는 규칙 역시 어긴 상태였습니다. 이제 그가 나실인으로서 지켜야 할 규약 중에서 단 하나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며 라는 규칙만 어기면 그는 실로 하나님의 나실인 규약 모두를 어긴 그야말로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뿐입니까?
이방인과 통혼하지 못하게 한 , 나실인이 아니고 평범한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도 지켜야하는 규례조차 그는 자기의 정욕을 위해 헌신짝처럼 버린 패륜아였습니다.
육욕에 눈인 먼 삼손은 결국 그 육욕이 주는 악한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육체가 원하는 바대로 하다가 멸망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 즉 최후의 언약까지 파기하는 때를 기다리셔서 삼손에게서 떠나셨던 것입니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삼손이 괴력을 발할 때마다 여호와의 신, 즉 성령께서 임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힘의 근원은 머리털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 즉 성령이 셨던 것입니다.
힘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과의 나실인 규약을 어기면서도 그는 조금치도 마음에 거리끼거나 그 규약을 생각지 않았고 자기의 육체가 원하는 대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손의 실패는 오래 전부터 조금씩 조금씩 진행되어 왔던 셈입니다.

꿀을 먹기 위해 시체를 만지고, 자기를 즐겁게 할 만하다고 함부로 이방 여인을 취하여 결혼잔치를 베풀면서 포도주를 마시고, 그것도 부족해서 마침내 머리카락까지 밀게 된 삼손의 행태를 보면 모두 다 자기의 육욕에 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보다 배고픔과 달콤함, 그리고 욕정을 우선시한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당연한 징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자비가 많으셔서 마지막 규례가 깨어질 때까지 그를 지키셨던 것입니다. 습관이 중독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겠지요. 습관은 보통의 힘으로 제어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중독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물리적이며 외부적인 도움이 없이는 어렵습니다.

삼손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약점들이 있습니다. 실로 이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실패로 이르게 하는 습관들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것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고 영에 속한 자’가 되라고 항상 강조합니다.
우리가 좋은 일, 착한 일을 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악한 습관에 빠지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악 가운데서 잉태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죄성이 들어와서 오늘날도 끊임없이 몸 속 깊은 곳에서 그러한 죄성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실패로 이르게 하는 몇가지의 습관 가운데 한가지라도 끊어버리시기를 바랍니다. 특히나 우리로 하여금 멸망에 이르게 하는 습관들은 놔두면 중독에 이르게 되어 결코 끊어버리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화되지 못한 육신의 찌꺼기는 성령의 불로 태워버리고 조금 더 밝은 쪽으로 나를 옮겨가도록 노력해 봅시다. 물론 우리는 그러한 것을 끊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이런 습관들은 완전하게 성화되지 못한 우리 성도들에게 몇 가지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창하게 몽땅 다 버린다고 생각지 말고 그 중에서 한가지라도 끊어버리리라 결심하고 실천하시는, 그래서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고 영에 속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견인’이라는게 있습니다. 견인이야 우리가 잘 아는 말이지요. 차량 ‘견인’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을 따라 가는 거지요. 그렇게 애써서 옮기다 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에 이전보다 훨씬 하나님 보시기에 멋진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한 나로 말미암아 훨씬 더 살기 좋은 사회가 되어 있는 것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끊임없이 성화되어 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실패로 이르게 하는 습관들을 한가지씩 한가지씩 끊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한걸음씩 한걸음씩 성공을 향하여 가게 하는 습관이 될 것이며 , 마침내는 하나님 앞에서 큰 복을 받는 길을 열어줄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고 실패의 습관들을 버리며 끊어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5월 6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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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담배를 끊는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내일부터 금연하고, 오늘만 피지 뭐... 술을 끊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은 달리고, 다음 주 부터 술 안 마시지 뭐... 다이어트를 하는 멋진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 저녁만 실컷 먹고, 내일 아침부터는 적게 먹지 뭐... 사람은 한 가지 태도를 보고도, 그 다음의 모습을 알려주는 흔적들이 간혹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미루는 습관", "오늘을 회피하고 합리화 하는 습관" 입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결국 오늘의 결단을 미루었기에, 그 댓가를 받게 되는 셈이지요.

경영 구루 켄 블랜차드와 작가 스펜서 존슨이 쓴 1분 경영이라는 책에서는 "1분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사람에 대한 재밌는 통찰이 있지요. 10년 뒤의 그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 사람이 노력하는 그 부분에 대해서만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부분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똑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러한 점에 근거하지 않나 싶습니다.

결론적으로 삼손은 단 1분이라도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거나, 반성하거나, 결단하거나, 그런 "생각하는"시간이 없었다고 생각되어 졌습니다. 그야말로 사랑의 노예 쯤 되겠지요. 그런데 사실 이 설교말씀은 도전적으로 들리기에도 충분합니다.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지금 단 1분이라도 결단하고 노력했는가?" 라는 것입니다. 노력하지 않았다면, 적당히 합리화 하면서 살고 있다면, 그의 모습은 10년이 흘러도 똑같은 모습이 될 수 있지요.

실패자, 막장인생이 되지 말고, 노력해서 성공하는 사람이 되라! 식의 어쩌면 뻔한 교훈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쾌락을 좇아서 한심하게 사는 스스로를 볼 때마다 경계하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좀 더 멋진 스스로를 위해서 체크표까지 만들어가면서, 스스로의 행동을 경계하고 돌아봤다고 합니다. 일전에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라고 썼는데,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삼손도 하루 아침에 몰락하지 않았으며, 또한 역사의 위대한 사람들도 천천히 일상 속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바로 지금을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바로 지금"이며, 미루기만 하는 "그 언젠가" 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결국 "지금 말하고, 지금 행동하는 대로" 영혼이 물들어 가며, 그렇게 한 걸음씩 성장해 가거나, 혹은 몰락해가기 때문입니다. / 2012. 05. 10.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