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04년4월4일/지도자의 길(청년설교13)/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5. 6. 22:35

- 2004년 창신교회 청년부에 계실 때의, 홍종일 목사님 설교문

일단의 사람들이 다메섹으로 가고 있습니다. 다메섹이 어디냐하면 지금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커스가 바로 성경상의 이 다메섹입니다
그런데 그 무리중에서 앞장선 사람은 참 이상하게 생겼습니다
우선 150이 안되는 키에 머리에는 숱이 거의 없고 코는 메부리코이며 다리는 휘어서 정말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 사내의 말을 듣는걸로 보아서는 이 사내는 이 무리들의 지도자인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 사람은 바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바울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피해 다메섹으로 도망간 기독교도들을 잡아올려고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입니다
이제 다메섹성 가까이 왔습니다. 마침내 6일간의 여행이 끝이 나려 합니다. 목적지에 당도하기 직전입니다. 바울은 이제 성안에 들어가서 유대인들을 동원해서 나사렛 예수라는 이단의 무리를 잡아서 결박할 전의를 다집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빛이 비취면서 바울을 비추며 사울아 사울아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언어습관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땅에서 주님께서는 항상 사람을 부를때 두 번씩을 부르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처럼 베드로야 베드로야, 마르다야 마르다야, 나사로야 나사로야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비추이며 소리가 나는지라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임을 직감하고는 그 자리에 꿇어엎드립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마치 강제적으로 외부적인 힘에 의해 엎드려진것 같지만 실제로 원문상에는 바울이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위하여 꿇어엎드린 것입니다
아마 바울은 이때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나사렛 이단을 박멸하러 다메섹까지 오는걸 보시고 내 열심에 칭찬의 말씀이 계실수도 있겠다

그런데
문제의 음성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합니다
지금 칭찬은 커녕 나를 핍박한다고 야단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언제 주님을 핍박했습니까?
전 주님에 대한 열성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주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아들이라고 신성모독의 죄를 저질러서 죽은 자의 여당들을 잡으러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바울이 묻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자 여러분 바울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결코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위해하거나 박해한 적은 없습니다
그 전에 주님은 이미 하늘로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실제로 바울이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를 핍박한 적은 있지만 주님을 직접적으로 박해하지는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이때의 인상이 바울의 일생동안 너무나 생생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항상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날 소수의 사람들 중에는 굳이 교회를 나가야 될 필요가 있는냐고 이야기 합니다
내가 집에서 아니면 회사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되지 구태여 교회를 나갈 필요가 있느냐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들의 마음속에는 오늘날 교회의 현실에 실망하고 교역자에게 실망하고 사람들에게 상처받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와 뗄 수 없는 사이입니다
왜냐면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지금 바울에게 교회가 바로 나라고 교회와 자기를 동일시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지금 바울에게 성도들이 바로 나라고 성도와 자기를 동일시하고 계십니다

솔직히 바울은 일찍이 스데반의 순교시에 그를 처단하는데 증인으로 가담하였으며 박해받은 많은 성도들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옥에 가두었고 지금도 다메섹으로 피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주님이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리고는 우리말 성경에는 없지만 표준원문에는 이런말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가 떨고 놀라며 가로되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그런데 9:7에 보면 같이 가던 사람들은 빛을 보고 소리만 들었지 사람은 보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오로지 바울만이 빛속에서 주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소리를 들었던 바울의 동행들도 소리만 들었지 그 소리가 무슨말인지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즉 뭐라고 하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게 분명한 음성으로는 전달되지 않아 도데체 무슨 소린지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 그런데 빛속에서는 주님을 보았던 바울이 이제 그 빛이 사라지고 나자 눈이 어두워져서 아무것도 보지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빛속의 주님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이끌리어 다메섹성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금전에만 해도 앞장서 무리를 인도했지만 이제는 그들에게 이끌리게 되었고 전에는 믿는자들을 사로잡고자하던 이가 이제는 오히려 예수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하튼 바울은 이제 실명을 하고는 사흘동안을 보지 못하며 식음을 전폐합니다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뭐했을까요?
11절에 보면 “주께서 가라사대...저가 기도하는 중이라”
그는 식음을 전폐하며 기도하고 있었답니다

바울은 정말 이때 자기생애서 가장 비참하고 황당하며 놀라운 경험을 했을것입니다.
그렇게도 자기가 열심을 내며 핍박하며 박해한것이 사실은 하나님을 위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것임을 알게되었으므로 얼마나 참담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눈까지 보이지 않아서 남의 손에 이끌려 낯선곳에서 기도하고 있다니
참 하나님의 역사는 모르는겁니다

이제껏 자기가 죽이려고 다니던 사람들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
이제껏 자기가 거짓이라고 핏대세우며 다니던 사건을 진실이라고 이야기해야되는...
참 기가막히고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건 단순한 바울의 회심은 아닙니다

오히려 핍박자 바울이 주님을 만난 다음에 어떻게 해서 기독교의 지도자요 사도가 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지도자의 도에 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다메섹 도상에서 빛가운데 나타나신 주님을 만나고 그의 분부를 듣고 소경의 몸이되어 직가라는 곳에 기거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예수님을 만났고 그로부터 사명을 받았다고 주장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아무도 그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믿어주지 않는다면 어쩔겁니까?
사람들은 빛을 보았고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모습이며 예수님의 소리였음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단지 바울 혼자서만 보고 들었는데 과연 누가 바울을 위해서 주님을 만난 놀라운 사건을 증명해 주겠습니까?

별수없이 바울은 그 놀라운 체험을 하고서도 소경이 되어서 남의 손에 이끌리어 한집에서 식음을 전폐하고는 놀람과 당혹에 휩싸여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사도로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은채로.........
솔직히 사도가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아닙니까?
주님은 모두 12명의 제자를 삼으시고는 더 이상 제자를 만들지 않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자기가 주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자기가 사도라고 주장합니다
이 사람의 편지 앞부분에는 항상 ‘사도된 바울은’ 이란 말로 시작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혼자서 내가 성령충만을 받고 너희들을 지도하겠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가 바로 지도자가 되는것은 아닙니다
그가 성령충만한지,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이 소명을 주셨는지가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어떻게 증명이 됩니까?

한편
바울이 기도하고 있는중에 아나니아라는 역시 다메섹에 살던 유대인에게 하나님이 환상중에 나타나셔서는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직가라는 곳에 머물며 기도하고 있는 사울에게 가서 기도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나니아 역시 사울의 악명은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제가 두렵습니다
그가 주의 성도를 핍박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제가 과연 가도 될까요?
하나님은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한사람을 증인으로 세우셔서 사울의 그릇됨을 증명하셨습니다. 물론 사도라는 말은 아직 없습니다
과연 가보니 한 소경이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안수하니 곧 눈에서 비늘같은것이 떨어지고 다시 보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고 바울은 바로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제 그는 핍박하던 자에서 핍박받는 자로 변하게 된 것이며 어제까지 예수 믿는이의 원수에서 형제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바울이 아무리 유명하고 자기가 사도라고 큰소리쳐도 처음부터 그가 그렇게 유명했던것은 아닙니다
지금 아나니아 라고하는 전혀 무명의 성도에게 안수기도받음으로 다시 보게된 한 불쌍한 사람에 불과하고 비로소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은 초신자에 불과합니다.
사울은 아나니아의 소개로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과 며칠을 거하면서 유대교의 회당에서 전도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런 바울의 전도에 이상히 여기거나 황당해 했지 믿지는 않았던것 같습니다
22절에 “증명하여...굴복시키니”
굴복시키니 라는 말은 바울의 말이 유대인들에게 먹혀들어갔다는 의미를 줍니다. 그러나 사실은 다른데 원문에는 당황케하다라는 표현이 사용되어졌습니다
즉 그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명했지만 사람들이 여기에 굴복해서 예수를 믿은것이 아니고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을 당황케하고 불안하게 했다는 말이며 분명한 인식이나 결론을 가지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그 대사도라 일컬어지는 바울이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했지만 , 자기의 해박한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예수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지를 증명했지만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도 않았고 오히려 바울의 변절로 인해 당황할 뿐이었다 이겁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바울이 처음부터 바울은 아니었지요
비록 나중에는 바울의 선교여행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주를 영접하고 교회가 소아시아와 그리스에 세워졌고 그의 목회서신이 성경이 되었지만 처음에 그에게는 어떠한 능력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열정만 있었습니다

9:23 여러날이 지나매
여기서 여러날은 몇일이나 작은 기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3년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23절은 22절에 바로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런 능력도 나타내지 못한데 실망한 바울은 다메섹을 떠나서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가게 됩니다. 그는 그 사막에서 3년간을 기도하며 영적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마 틈틈이 전도도 한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사막의 성자가 된것입니다. 이것이 나바테아의 아레다왕의 분노를 사게되어 다시 사막에서 다메섹으로 돌아옵니다.

어떻습니까?
처음 우리는 단순히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빛가운데 만나고 즉시로 대 사도요 전도자가 된걸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 사도요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 그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의 기도와 다메섹 성도들의 도움과 사막에서의 3년간의 영적체험과 이를 가능케한 기도를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바울이 완성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직도 그는 훈련일정이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큰 그릇은 결코 빨리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간 기도와 영적체험으로 이제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바울은 다메섹으로 다시 돌아와서 더 열심히 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의 실패를 맞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전도가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9:25절에 “그의 제자들이”라는 말이 있는걸로 보아서는 바울에게도 제자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제 성공의 길로 접어든 것일까요?
사막에 가기 전에는 단지 논리로 사람들을 압도하기만 했던 바울은 이제 은혜를 받고 성숙해져서 어느정도의 개종자를 얻게 되기까지 합니다

그러자 기독교가 확장될 걸 우려한 유대인들이 아레다 왕의 신하들과 짜고는 그를 죽이려고 성안을 뒤지고 또 일부는 성문에서 지키게끔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나바테아의 아레다왕의 신하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그는 다메섹의 성문으로 당당히 나가지 못하고 이번에는 밤에 몰래 광주리에 태워져서 성벽을 넘어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나바테아의 왕이 로마령까지 와서 그를 잡으려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바울이 사막에 있을때 은혜를 받고서 아라비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아레다왕의 미움을 사서 다메섹으로 도망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견해로는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이 안에서 그를 죽이려 하고 아레다왕의 신하들은 로마령안으로 들어올 수 없으므로 밖에서 그를 죽이려고 지킨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하튼
두 번에 걸친 바울의 성급한 시도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3년간의 고행과 기도가 그에게 충분하지 못했을까요?
아직도 그에게 훈련과 연단이 더 남아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는 꿈에도 그리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는 신분과 위치가 완전히 바뀌어서.
그러나 바울에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전부터 그를 잘알고 그를 부려먹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은 그를 배신자로 규정하고 그를 죽이려 합니다. 그런가하면 그가 새롭게 개종한 기독교계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의 완전한 개종을 믿지 못하고 그를 두려워하고 경원합니다. 그는 두 진영 어느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이방인처럼 겉돌고 있습니다.

26절에“제자들을 사귀려고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물론 여기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도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성도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때 바나바가 바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것과 주를 담대히 증거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하고서야 비로소 사도들과 성도들이 바울을 믿음의 형제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과 교제하며 자유롭게 예루살렘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바울은 그곳에서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을 합니다
원래 그리스사람들이 논쟁을 좋아합니다. 그러니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헬라파 유대인들이나 바울 역시 변론을 좋아한 것은 당연합니다
바울은 말쟁이기 때문에 말로 바울을 이기기가 힘들었던 헬라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벌써 두 번째로 바울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왜냐면 논리로는 그를 이길 수 없었으므로 아예 죽여서 그를 침묵하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전 이 기사를 볼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직도 바울은 멀었다
은혜가 아니고 논리를 가지고 기독교를 증거하려 하니까 반발이 커진다
글쎄 솔직히 기독교의 논리는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이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이 있다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집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직접 하나님을 느끼지 않는다면 결코 그 놀라운 신비로운 사실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바울은 형제들의 도움을 얻어 예루살렘성을 탈출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가이사랴로 갔다가 자기의 고향 다소로 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30절에 ‘형제들이 알고’란 표현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바울과 교제한 사람들을 성경에서는 제자들 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 형제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성도들과 더 친근해 졌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아직 바울에게 확실한 능력이 나타나지는 않고 있지만 그래도 바울은 기독교 공동체에 점점 더 깊이 속하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다소에서 적어도 7,8년 정도를 아무도 찾지 않는 가운데서 혼자서 기도하며 말씀을 연구하고 영적체험을 하며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위한 준비기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바나바가 다소로 가서 바울을 찾아서 그를 안디옥 교회의 부목사로 세울때까지 그는 은인자중하며 하나님이 자기를 쓰실때까지 기다리며 실력을 쌓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소명을 받은 다음 적어도 10년 이상의 준비기간을 거친것입니다.
그것도 자기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처음에 아나니아가 나중에는 바나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구나가 알고 있는 대사도요
교회를 비유대인사회로 퍼지게 만든 가장 큰 공훈자인 바울이 바울될때까지 연단과 훈련의 기간 10년을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내가 지금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가지고 있는데도 내가 놀라운 체험을 하고 그의 소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아무런 직책이 주어지지 않음에 대해서 안타까워 하는 이들이 있습니까?
나의 영적능력과 경건에 대해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습니까?
나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줄 아나니아가 없음과 나를 소개해줄 바나바가 없음을 안타까워 하는 이들이 있습니까?

초조하게 생각하지 말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도 말고
그의 때가차기까지 인내하며 기다립시다
그는 우리를 3년 때로는 10년을 기다리게도 하시며 아무런 징조도 없다가도
그의 때가차기만 하면 하루아침에도 그의 놀라운 일들을 이루십니다

- 홍종일 목사 (現 정관영암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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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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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개인적인 이야기이며, 아래부터는 시북군의 이야기 입니다.)

대기만성. 큰 그릇은, 로마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로또나 복권 같은 것이 위험한 것은 대가 없이 갑작스럽게 많은 것들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그것을 소중하게 다룰 줄 모르고, 오히려 역설적으로 복권당첨자가 더 불행해진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루 하루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일까요?

YES입니다. 말콤 글래드웰의 책으로 유명해졌지만,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1만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인기밴드 비틀즈의 실력은 함부르크에서 이름없이 매일 매일 밴드 활동을 꾸준히 오랜 시간 했기 때문에, 탄탄한 내공이 뒷받침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글쎄요. 저는 이런 점들이 상당히 좋습니다. 성경책의 인물들의 이야기,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나, 바울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극히 인간적입니다. 이른바 하루아침에 인생이 바뀐다는 식의 신데렐라, 왕자님 판타지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다만, 주변 환경은 인간(개인)이 직접적으로 관여하기는 어려우므로, 그 점에 있어서는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동역자나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오늘을 충실히 보내는 것이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며, 열심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열정적으로 사는 것. 이것보다 더 멋진 인생이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오늘 이야기를 마칩니다. / 2012. 05.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