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5월13일/루디아의 회심과 빌립보교회(사도행전16:12-15)/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5. 16. 10:38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5월 13일 주일 예배

루디아의 회심과 빌립보교회 (사도행전16:12-15)

우리는 바울이 기독교를 유대교의 일개 분파에서 세계적인 종교로 만드는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가다 보면 교회를 어떻게 개척할지에 대한 방법들이 나와 있습니다. 성경적인 교회 개척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바울은 마침내 유럽의 첫 번째 선교지인 빌립보에 도착했습니다. 실로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것이지요. 애초에 바울은 빌립보로 올 계획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을 돌면서 일차 전도여행때 자기가 뿌렸던 믿음의 씨앗들이 잘 자라는지를 살피려고 했습니다만 성령이 막으시고 그를 이곳 빌립보로 인도한 것입니다.

1.빌립보에 도착한 바울
빌립보는 성경 본문처럼 마게도냐의 첫 성입니다.  마게도냐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알렉산더 대왕이 다스린 나라였고 그가 마게도냐를 기반으로 동서로 정복전쟁을 펼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빌립보 역시 알렉산더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도시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지요.

바울과 그 일행은 빌립보에 도착해서 수일을 유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안식일이 되어 기도할 곳을 찾다가 강가에 앉았던 여인들을 만납니다.
루디아가 회심하고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면서 바울이 루디아의 집에 유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가정교회가 시작되고 이것이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옥타비아누스라는 로마의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줄리어스 시저(율리우스 케사르)의 양아들입니다. 이 사람이 양아버지인 시저를 암살한 부루투스를 격파한 계곡이 바로 이 빌립보 시 옆의 ‘간지테스’계곡입니다. 시저가 원로원에서 사람들에게 칼에 찔려 죽으면서 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부루투스 너도냐?” 고 물어본 시저의 말은 유명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부루투스를 쫓아서 이 계곡까지 와서 최후로 그를 격파하고 이 전쟁에서 이겨서 실질적으로 로마의 첫 번 황제가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해서 빌립보 시에 몇가지 혜택을 줍니다. 먼저 빌립보 시민들의 형벌 면제권을 주었고 특별히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로마의 황제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는 특권까지 부여했습니다. 황제는 이 도시에 전쟁에 함께 참여하고 퇴역한 군인들에게 농장을 하사하면서 이들을 정착시켰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시민들은 비록 그리스땅에 있었지만 자신들을 그리스인이 아니라  로마시민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나중에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바울이 로마시민임을 알고는 죄도 정치 않고 투옥했던 것을 두려워해서 그를 석방했던 것입니다.
여하튼 이 도시에서 바울과 일행은 몇일을 머물렀습니다. 그러다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2.회당을 찾아서
바울은 안식일에 주로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아가서 기도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지역에는 회당이 없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 성인 남성10명이 있어야 세울 수 있었는데 이 도시에는 유대인 남자들이 없었고 유대여자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 여인들이 정기적으로 기도모임을 가지는 기도처가 있었습니다. 유대인 남자가 있었다면 당연히 기도처에 나왔을 터인데 그곳엔 여자만 있었다고 했기 때문에 빌립보에 유대인 남자가 없었다는 사실은 명확합니다. 요즘처럼 주일날 교회에 가도 되고 안가도 되고 한 시절이 아닙니다. 바로 그 기도처 소문을 듣고 바울이 찾아 간 것입니다.

당시 빌립보의 기도처는 빌립보 성곽 밖 강기테스(간지테스) 계곡 안에 있는 강기테스 강가였는데 유대인들은 회당을 세우지 못하면 주로 조용한 야외, 강가나 빈들같은 곳에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을 들었는데 이는 도심을 벗어난 조용한 곳에서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도심을 벗어난 야외에서 모인 것은 이민족들의 질시와 방해를 받지 않고 조용하게 자기네들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입니다.
 
한글 성경을 보면 바울이 안식일날 기도하려고 그냥 조용한 강가를 찾아 나섰다가 우연히 거기 모여 있던 여인들을 만난 걸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우연히 만난 것은 아닙니다. 그 여인들은 안식일날 정해진 기도처인 강가의 빈터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었고 바울 역시 의도적으로 그 기도처를 찾아서 갔던 것입니다. 즉 바울이 찾아 간 곳은 회당의 기능을 대신하는 임시 기도처였다는 말입니다.

3.유대교인에게 복음을 전하다
16절에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에서 거기 앉은 사람들은 여자들이 아니라 바울일행입니다. 즉 바울이 가서 보니까 여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면서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 여인들에게 말하기위해서  앉았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앉아서 가르치시쟎아요. 복음서에 보면 ‘어디 어디에 앉으시니’란 말이 많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성경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자리에 앉은 것도  역시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 입니다. 유대에는 선생이 가르칠 때는 앉아서 가르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말하더니”는 한글성경으로는 “어디 기도할만한 조용한 곳이 있습니까?” 라고 길을 묻기위해서 말했는지 복음을 전했는지 불명확합니다. 그러나 원어성경으로는 뜻이 명확합니다. 그냥 말한 것이 아니고, 질문한 것도 아니며 복음을 말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여인들이 앉아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은 마게도냐가 모계사회이기 때문에 여자들의 야외활동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후에 빌립보교회에도 여성도들이 많아 지게 된 것입니다.

4.단 한사람의 회심
여하튼 이렇게 여자들이 복음을 듣고 있을 때 그 중에 루디아라 하는 여자가 마음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말씀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지신 것입니다. 개심이라고도 할 수 있고 회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만 이 ‘루디아’를 전도함으로써 루디아의 집에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겨우 한명을 전도했지만 성령께서는 역사하셔서 루디아의 온 집이 주를 받아 들이고 빌립보 교회가 서게 하신 것입니다. 실상 한사람의 힘은 그렇게나 큽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한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신 것이지요.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신것이지만 왜 그 많은 여인들 가운데 ‘루디아’ 였을까요?

당시 루디아란 이름은 로마제국에서 매우 흔한 여자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학자들은 이 ‘루디아’라는 여인은 실제 이름이 루디아가 아니라 루디아(리디아Lydia) 출신 여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옛날에 시집온 지역명을 따서 하동댁이니 어실댁이니 하고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때의 루디아라는 여인의 실제 이름이 ‘유오디아와 순두게’ 중의 한명일 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루디아가 바울과 결혼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름이냐 택호냐가 아니라 우연을 가장한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두아디라 성은 고대 왕국 루디아(리디아Lydia)의 한 도시로서 소아시아 국경의 요새입니다. 루디아는 빌립보가 고향이 아니라 바다건너 소아시아의 루디아가 고향입니다. 뭐, 확하고 오는게 없습니까?  그래요. 루디아는 바울이 소아시아 국경에서 국경선을 넘지 못하고 되돌아온, 그래서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유럽으로 온 이야기에 깊은 영혼의 떨림을 느낀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지역에서 고향사람을 만나면 반갑듯이 루디아 역시 소아시아에서 전도하다가 성령의 강권으로 마게도냐 빌립보까지 온 바울과의 만남에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일단 접점을 찾게 되자 루디아의 마음이 열려지기가 더 쉽습니다. 물론 루디아가 회심한 것은 전적으로 주의 은혜입니다. 성경은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때 마음이 열렸습니까? “말을 듣고 있을 때”에 열렸다고 합니다.

사람이 신앙을 가지게 되려고 하면 우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들은 그 말씀을 깨닫고 수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임의로 할 수 있지만 이 말씀이 다른 이들의 가슴에 박히고 그들이 그 말씀을 깨닫고 그리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누가 합니까?
바로 주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을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여깁니다. 그렇게 되지 않고서는 주를 믿게 되는 것이 불가능 하거든요.

풀러신학교의 모토가 “변화하는 시대에 변하지 않는 관점”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내용은 변하지 않지만 복음을 전달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지만 어떻게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달할지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각각 기호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에 개인의 취향을 파악하는 것은 복음전도자의 기본입니다. 바울은 몰랐겠지만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루디아는 아마 놀랐을 것이고 반가웠을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접점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말을 건네고 복음전파로 나가는 것이지요.

루디아라는 여인이 바울의 말에 마음이 열린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지만 그 여인이 마게도냐 사람이 아니라 소아시아의 국경도시 출신이라는 것이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루디아는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큰 부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자주’는 자줏빛 옷감을 말하는 것인데 이 ‘자주’는 두아디라 성의 특산물입니다. 그런데 이 옷감은 주로 황족이나 왕족들이 입는 옷의 재료입니다. 엄청나게 고급스런 옷감입니다. 이런 옷감 장사하는 사람이 가난할 리가 없겠죠. 루디아는 먼 타향에 와서 자주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고향과 관련이 있는 사람 (바울의 고향인 ‘다소’ 역시 ‘두아디라’와 가까운 소아시아의 도시입니다)을 만나서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루디아는 고향에서 빌립보로 완전히 생활거처를 옮긴이가 아니라 고향에서 특산물을 받아서 빌립보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으로 고향과도 주기적으로 연락을 하는 사람입니다.

14절에 “열어”라는 말은 그냥 여는 것이 아니라 ‘확 열어 젖히다’란 말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이 말이 ‘뜻을 풀어’ ‘성경을 풀어 주다’ ‘눈이 밝아져’의 뜻으로 사용되어 지고 있습니다. 이 말을 종합해 보면 바울은 주로 복음을 전할 때 이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기존의 구약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관련구절에 대해서 말씀을 풀이해 주는 방식으로 전한 것 같습니다.

여하튼 루디아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서 마음이 확 열렸습니다. 솔직히 루디아말고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들이 많이 있었는데 바울이 루디아에게만 다른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한자리에  있던 여인들에게 똑같은 성경본문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입니다. 성경을 풀어 준 것이지요. “여기 이 말씀이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다” 이렇게요. 그런데 아무도 그것을 받아 들이지 않고 단 한사람 루디아만 받아 들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서만 퍼지게 됩니다.
루디아 역시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이 좋아서 섬기는 사람이었지만 아직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하지는 않은 사람이었으므로 구약 성경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약성경이 예수님을 예언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성경공부를 하고 나서 그 마음에 감동이 되고 깨달아 지고 믿어져서 예수교로 개종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과정 즉 감동, 깨달음, 수용의 이 단계에서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말로 사람의 마음을 연다는 것은 결코 간단하거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말속에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만이 비로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식으로 본문을 번역하면 ‘성경말씀을 가르치는데 들어 보니까 성경을 확실하게 풀이해서 예수가 하나님이며 우리의 주라는 사실이  믿어 지더라’는 말도 됩니다. 여하튼 루디아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듣고는 그 마음이 열려서 예수를 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5.가정교회의 태동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당시 세례는 예수를 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이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받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디아는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에 우호적인 사람에서 나아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예수교 신자가 된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 특히 지식인들 중에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많은 이들이 유대교의 하나님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이교신전에서는 상당히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부패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리자체도 윤리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교리도 그렇고 제사의식도 상당히 윤리적이라서 그리스 지식인들에게 상당히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유대교에 완벽하게 귀의하지 못한 이유는 유대교가 너무 엄격한 계율과 유대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집”은 가정을 말하는 것이며 혈연적 가족뿐만 아니라 그녀의 집에 있는 모든 고용인들과 종들까지도 다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루디아라는 여인이 이 집안의 가장이었고 자주 장사라는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정에서 온 가족이 다 믿지 않고 혼자 믿거나 몇 명만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항상 “온 가족이 믿더라”고 말합니다. 전도를 할때는 먼데서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까운데서 부터 믿게 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시작은 가족입니다. 믿지 않는 가족을 두고 해외선교를 간다는 것은 글쎄요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다음으로는 친척, 친구, 이웃의 순으로 가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전도패턴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위주로 가까운 순으로 전도를 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전도하기 전에도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면 전도의 결실을 맺게 하시는 이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루디아는 마게도냐 빌립보의 첫 교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첫 교인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장차 세계를 정복하는 거대한 세계종교로의 진군을 시작하는 첫열매가 된 것입니다.
루디아는 자기가 주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으면서 그 집의 모든 가족들과 식솔들을 다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강권하여 자기의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동안 이 집에 머물면서 이집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바로 이 집이 빌립보 교회가 된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가정교회가 된 것입니다.

6.가정교회에 대한 단상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거대한 건물의 교회하고는 전혀 다른 개념이지만 이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일생동안 그를 가장 많이 후원한 교회가 되었고 바울은 후에 빌립보 교회의 지원을 받아서 선교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이 사례비를 받지 않은 것을 압니다.
고린도는 당시 로마의 도시 중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세계사책에 보면 코린트식이라는 미술이나 건축양식이 나오잖아요. 고린도의 부자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문화양식입니다. 그 ‘코린트’가 ‘고린도’입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 부자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은 바울도 빌립보 교회의 후원은 받았습니다.

바울을 헌신적으로 섬긴 ‘에바브로 디도’역시 빌립보 교인 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그정도로 바울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사랑하는 교회였던 것입니다.
혹자는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루디아가 부자였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고. 그러나 가정교회를 꼭 부자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모든 가족이 다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루디아라는 여인은 복음을 받아 들이고는 그 복음을 전했으며 그리고 그 복음을 바로 실천했습니다. 자기의 집에 바울일행을 유하게 했고 그곳에서 매주 집회를 할 수 있도록 자기의 집을 개방한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 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정으로 복음을 받아 들인다면 복음에서 명령하는 것들을 지켜 순종해야 합니다.
사실 바울이 세운 교회는 모두 가정교회입니다. 게다가 신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교회들은 가정교회였습니다. 콘스탄틴 황제가 주후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이교의 신전들 중에서 몇 개를 기독교 예배당으로 사용하도록 한 적이 있습니다. 그전에 기독교회는 가정에서, 들판에서, 심지어는 지하의 무덤에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교회가 건물이 커지고 화려해지며 성직자의 삶이 부유해 지는 순간부터 교회는 썩어가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교회의 세력이 가장 성했던 순간, 교황의 주도하에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수호한다는 성묘기사단이 생기는 그때에 교회는 가장 부패했던 것을 압니다. 로마의 교황이 유럽을 대표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파문하는 그 절대권력의 순간 이미 교회는 쇠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유럽의 도시들을 보면 모든 도시의 중심에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화려한 예배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곳들은 예배를 드리는 곳이 아니라 관광지가 되었고 , 예배당안에서는 기념품을 팔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미 기독교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뭐 천주교 자기들도 위기의식을 느낀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아닙니다. 옛날 제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천주교도는 160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500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때 천만이라고 했던 기독교인들은 지금은 정확하게 860만입니다. 어떤 통계에는 한해 약30만명씩 교인이 줄어간다고 합니다. 그건 좀 심하고 여하튼 기독교회는 정신차려야 합니다.

7.한국교회비판과 대안
지금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회를 비난하고 증오합니다. 사회의 모든 악의 기저에는 교회와 교인이 있다고 생각하듯이 모든 비난을 퍼붓고 있습니다. 어떤 신문은 마치 작정했듯이 하루에 한 개씩 교회와 교인의 비리를 터뜨린 적도 있었습니다.
요즘 한참 유명세를 떨치는 김아무개씨는 국회의원선거에 떨어지고 나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부패한 거대교회와 잡놈처럼 싸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아는만큼 썩었다는 것을 잘알기 때문입니다. 또 그만큼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미워한다는 말입니다. 정치꾼들은 사람들이 지지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이런 때 일수록 우리는 더 행동을 바로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근신해야 합니다. 거대한 건물을 짓고 유지하는데 쓰이는 돈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십시오. 교회건축하려고 모아둔 돈이 있다면 깨어서 이웃들에게 흩어 버리십시오. 십일조의 삼분의 일은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십시오. 심지어 교인 중에 부모형제도 몰라라 하고 헌금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안됩니다. 부모형제를 먼저 돌보십시오. 이것은 우리 주님의 명령입니다.

우리가 바울서신들을 살펴보면 ‘누구누구의 집에 문안한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바로 그 ‘누구 누구의 집’이 교회입니다. 저는 교회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면 좋겠습니다. 거대한 교회건물과 광활한 주차장을 뒤덮는 자가용의 물결, 그리고 그 안에서 울려퍼지는 수십억짜리 파이프오르간의 소리가 아니라 가정에서라도 서로 사랑하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를 다짐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의 입에서 울려나오는 찬송을 듣기를 원합니다. 

미국에는 가정교회 교인들이 약200만명 정도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가정교회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거대 교회가 편의상 나눈 구역을 가정교회라고 부르는 것 말고 정말 가정에서 예배하며 서로 사랑하는, 작지만 건강한 교회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가정교회로 말미암아 이 땅의 교회가 새로워지고 기독교가 새롭게 국민들의 곁으로 다가가서 마침내 기독교가 이 세상을 보다 살기 좋게 만드는 일을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에 공의를 세우며 정의를 수호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불안한 사람들의 삶에 평안을 주고 고단한 삶에 쉼을 주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5월 13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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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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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뜬금없지만, 바둑격언인 사소취대가 생각이 납니다. 사소한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해야 제대로된 바둑이나 명국 바둑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소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당장 눈에 보이는 그럴싸한 것입니다. 저기를 따먹어야지 하면서 기쁨에 취해있다가, 더 중요한 곳을 몽땅 내줘서 패망의 길로 향하는 것이지요. 에이, 누가 그런 바보같은 짓을 하겠는가? 라고 생각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 취해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곤 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사소취대의 결정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들의 이익에 민감하고, 교인들을 돌보느라 정신 없는데... 그러다보니 더욱 중요한 이웃이나 가족, 사회에 대한 의식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종교가 가정을 나몰라라~ 하면서 출발하는 것부터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기독교 라는 큰 아들은 헌금하느라 부모님께 한푼도 안주는데, 종교가 없는 작은 아들은 효자라서 매달 부모님께 돈을 준다면... 부모님은 누굴 더 사랑하겠습니까. 누구 말을 더 듣겠습니까. 사랑의 실천 없는 종교생활, 그럴싸한 자기 합리화에 매몰된 종교생활은 그래서 위험한 것입니다.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의 생활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요즘 집 근처 윤산에 자주 올라가는데 많은 곳의 약수터가 2/4분기에 식수 부적합 판정을 받았더군요. 유독 한 군데는 적합 판정이라 그 곳에 많은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적합 판정을 받은 곳만 수도꼭지가 없었습니다. 그냥 물이 쉴새 없이 나오고 있는 약수터 였지요. 저는 한참동안 거기를 바라봤습니다. 썩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수지를 만들어서 가득 채워놓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 흘러가는 곳, 쉼없이 나누고 오고 가는 곳은 썩지 않는구나를 생각해 봤습니다. 잘 틀어막아서 웅장한 저수지와 세련된 수도꼭지를 만들어서 필요할 때만 생색내기 식으로 이웃을 도울 것입니까? 언제나 이웃과 가족을 생각하면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자신의 것을 한결같이 나눠줄 것입니까?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 2012. 05.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