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6월3일/성령이여 오시옵소서(사도행전2:1-4)/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6. 12. 21:28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6월 3일 주일 예배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사도행전2:1-4)

우리는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릅니다. 보혜사란 중재자란 말인데요 이전에 주께서 보혜사이셨고 주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께서 보혜사이십니다. 도대체 우리하고 누구하고를 중재합니까? 우리하고 하나님 아버지하고의 관계를 중재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변호해 줄 변호사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죄로 아버지께로 다가갈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아버지께로 가기 위해서는 중재자, 즉 보혜사가 필요합니다. 바로 그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다른 말로는 오순절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의 말로는 칠칠절이기도 합니다. 칠칠이 49의 다음날이 바로 50일이 잖아요. 그래서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 오순절날 성령께서 임하셨거든요.

원래 오순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첫 열매를 얻은 날을 기념하는 의미를 가진 절기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순절날 성령께서 임하신 것은 우리에게 주께서 주신 첫 열매가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  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일, 즉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첫 번 열매가 바로 성령의 강림이라는 말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성령 설교에 대해서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면 성령님은 엄연히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왈가왈부하는 것이 혹시라도 신성모독이 될까 두렵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을 거스린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셨잖아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상당히 이상한 일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란 존재는 우리 민족에게도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이땅에 사는 우리들이 만일 이백년 전에 태어났다면 우리는 아마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어야 믿을거 아닙니까? 이백여년 전에는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기독교의 교리를 한번 봅시다. 뭐라고 합니까? 기독교에서는 자꾸 우리들보고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라고 합니다. 솔직히 우리가 뒤돌아 봐도 뭐 크게 죄지은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 거짓말 몇 번 한거, 그리고 다툰거...그런 우리를 보고는 냅다 너희는 죄인이니 회개하라고 요구합니다. 그걸 굳이 죄라고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

게다가 신이 사람이 되어가지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답니다. 그리고 죽은지 사흘 만에 또 살아났답니다. 그리고 그 신은 언젠가는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온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으면 천국과 지옥으로 가게 된답니다.

교리도 이상하고, 천국과 지옥은 가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고, 솔직히 가본사람도 없고. 게다가 제사는 지내면 안된다네요. 우리의 죽은 조상의 영혼이 아니라 사탄의 졸개가 귀신이랍니다. 우리 할아버지 조상님들은 이미 저세상에 가셨기 때문에 제삿밥을 먹으러 오지 못하기 때문에 제사가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사 안 지낸다고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보고 또 욕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우리의 관념과는 반대되고 또 말도 안되는 얼토당토 않는 교리를 다 믿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조상대대로 믿어왔고 찾아왔던 신당과 절 대신에 교회당에 갑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상합니다. 우리는 왜 그를 믿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얼토당토 않는 황당무계한 말을 믿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가 그 이상하게 여겨지는 교리를 믿고 , 본적도 없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매일같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하신 일입니다.

사실 기독교에서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기독교는 예전에 없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나 부활도 제대로 퍼지지 않았을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도 몰랐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오늘날 세계 종교가 된 것은 바로 성령이 역사하신 때문입니다.

우리는 경쟁과 효율성을 자랑하는 세상에서 희생과 사랑이라는 전혀 비효율적인 구호를 가지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를 지켜줄 수 있을까요? 돌이켜보면 기독교만큼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핍박을 받은 종교도 드뭅니다. 그들은 단지 우리가 예수믿는 다는 이유만으로 죽이고 학대했습니다. 세상의 법칙으로 도저히 구속할 수 없는게 성도였거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오히려 더 번성해 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 때문인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보호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아직도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일러 체험의 종교라고 합니다. 육체와 보이는 물질만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신비한 경험은 누가 시켜주는 것이지요? 이성과 과학의 시대에 전혀 이성적이지 않고 반과학적인 듯이 보이는 이 신비체험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 체험은 누가 시켜주는 것입니까?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가 없었다면 우리는 벌써 기독교를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성령이여 우리에게도 오시옵소서!

이제부터 우리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살펴 볼 것입니다.

1.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이 말은 ‘완전히 채우다, 가득 채우다’란 말입니다. 즉 성경의 본문은 “오순절이 가득 채워졌을 때”란 말입니다. 이 말은 오순절이 단순히 그 날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완성되는 시점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순절이 오십일째 날이라는 것을 압니다. 유월절 후 오십일인 오순절은 우리에게는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날로부터 오십일인 것입니다. “그 오십일이 찼을 때” 이 말 입니다.

예수님은 말 그대로 오순절의 오십일 전인 유월절 전날 밤에 붙잡히셨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날 수난을 당하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며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즉 오늘 본문의 오순절 날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날이 아니라 예수님의 잡히시던 날로부터의 연속적인 날이라는 말이며 이제 그 대미를 장식할 날이라는 말입니다.

오순절은 단순히 그 날만을 축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이후의 오십일의 최종적인 삶의 결과가 결판나는 날입니다. 바로 그날 성령께서 임하신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사람들은 오순절날 갑자기 성령을 받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예수님의 승천 후에 계속해서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우리 주님은 성령을 보내주시기 위해서 이미 오십일 전부터 그 일을 시작하신 셈입니다. 이제 그 결실을 맺을 날이 찼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오순절일까요? 다른날도 많은데 하필이면 오순절날 성령께서 임하신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의 절기 중에서도 오순절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성전에 참예하는 관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가장 확실하게 효과적인 날을 기하여 임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에 효과적입니까? 교회를 세계에 퍼지게 하는 선교에  효과적이지요. 주님의 마지막 당부가 바로 세상에 내 증인이 되라는 것이잖아요. 그 말씀을 가장 잘 실행할 수 있는 날이 바로 오순절입니다.

2.성령의 강림

“홀연히”

먼저 2절에 보면 성령은 갑자기 임하신 것이 보입니다. 당시 성도들은 주께서 승천하시면서 보내주마고 약속하신 성령을 고대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그들은 언제 성령께서 임하실지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홀연히”임하셨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가 우리가 바란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뭔가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해서 강림하는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나라의 무당은 강신을 위해서 굿을 하거나 어떤 의식을 거행합니다. 중국영화를 보면 도사들이 귀신을 접하기 위해서 강신제를 거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닥에 도형을 그리고 촛불을 피우고 피를 뿌리고...이렇게 사탄을 접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 신을 만나기위해서는 어떤 정해진 의식을 거행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우리가 불러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는 전지전능하시고 전적으로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할 때에 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그분의 임재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므로 항상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성령님은 어떻게 해야 오실까요? 여기 성경 본문에 그 조건이 있네요. 그 첫 번째 조건이 바로 “다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그래요 예수의 제자들이 다같이 한곳에 모였다고 합니다.

“다같이”란 말은 원문으로는 “모든 이가 함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함께”로 사용된 단어의 원뜻은 “한마음을 품고”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이 한마음으로 그곳에서 주께서 보내주실 것이라고 하신 성령의 강림을 고대하며 기도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성령을 고대하는 마음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한마음을 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까?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성령을 고대하게 된 이유입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것은 주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요 이제야 우리가 아는 단어가 나옵니다. 바로 믿음이 오순절 성령강림의 전제조건입니다. 누구는 믿고 누구는 안믿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주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고 난 다음에는 일심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가 아닙니다. ‘일심’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1:14에 보면 이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되어있습니다. 기도라는 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헬라어를 강의할 필요는 없으니까 자세한 건 생략하고 이들이 한 기도는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간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위한 자신들의 헌신과 찬양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이들이 모여서 기도한 것은 자기들의 소원을 아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기도였고 또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성령님을 대망한다면 무조건 오시옵소서, 무엇을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은 자기 마음대로 임하시지 우리의 주문에 구속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잔잔한 음악을 깔고 불을 끄고 울음소리를 내거나 통성으로 떠들썩하게 해야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오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전적으로 마음대로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어떻게 해야 오실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홀연히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3.바람같은 소리

2절부터 4절까지는 성령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이는 표현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는 상징일 뿐입니다. 즉 성령은 ‘바람’도 아니고 ‘바람같은 소리’도 아닙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임재 시에 나타난 현상을 형상화한 표현일 따름입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란 한글 번역이 조금 부정확하니 여기서 원문을 다시 번역해 본다면 “강한 바람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 그러니까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현상은 ‘바람’이 아니라 ‘소리’란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표현을 찾아보면 출애굽기19:16의 “우뢰와 나팔소리” 19:18의 “온 산이 크게 진동하매” 란 표현과 연관되어 집니다. 이것은 청각적으로 성령의 임재하심을 뚜렷이 느낄 수 있다는 말입니다. 

4.저희 앉은 온 집에

“바람같은 소리가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앉은”입니다. 웃기지요? 바람도 불도 아니고 ‘앉은’을 주목하다니!

왜냐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도할 때는 서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앉아있을 때는 가르침을 듣거나 설교를 듣는 때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임하실 때 사람들은 설교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임재는 기도할 때가 아니라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령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혼자서 막 열심히 기도하면 성령을 주실 것 같이 생각합니다. 그런데요, 조금 냉정하게 보면 이것은 자가발전일 경우가 많습니다.

음, 조금 조심스럽기는 한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일반적으로 “성령을 주시옵소서”라고 열심히 기도하면 흥분도 되고 열도 나고 땀도 납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다가 스스로 도취된 것을 두고 혹시라도 성령의 임재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있습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께서는 현명하시니까 아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일단 본문에서는 성령의 임재가 기도할 때가 아니라 말씀을 들을 때에 일어났다는 것은 의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음’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강조해야 할 중요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듣는 것 만으로도 성령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말씀 전파자들의 사명이 그만큼 막중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 본문은 여기서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먼저 모든 이들이 ‘한마음’으로 성령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바라지만 서로 뜻이 다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서로 파벌을 나누어서 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성령님은 임하시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온집에 가득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집의 일부분에만 임한 것이 아니라 온집에 가득했답니다. 같은 장소에 모인 성도가 누구는 성령을 받고 누구는 안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온집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령을 대망할 때 한마음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서로 싸우면서도 자기네가 진리라고, 그래서 비 진리인 상대방을 저주하며 성령께서 자기들에게만 오실 것을 꿈꿉니다. 말 그대로 꿈입니다. 꿈을 깨십시오. 교회가 모두 한마음이 되지 않으면 성령께서는 임하지 않으십니다. 말 그대로 형제를 내 몸같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성령님은 그런 허위와 가식의 무리들에게는 임하지 않으십니다. 왜냐면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죄를 용납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아시지요? 가식은 하나님 앞에서 죄입니다.

5.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우리는 이 구절을 보면서 마치 성령의 불꽃이 넘실거리는 광경을 연상하겠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은 ‘불꽃’이 아니라 ‘혀’입니다.

솔직히 우리의 뇌리에 각인되어있는 성령의 임재는 불꽃입니다. ‘불과 같은 성령이여’라는 말도 있쟎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 구절을 보고는 무심코 불이 갈라지는 모습, 즉 혓바닥처럼 낼름거리는 불꽃을 생각하기 쉽지만 아쉽게도 본문은 주체가 불이 아니라 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확한 원문은 “갈라진 불같은 혀들”입니다. 혀는 언어와 복음전파를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은 지금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말을 제대로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방언이 임했다는 말입니다. ‘갈라진 불같은 혀들’이란 말에서 우리는 바벨탑에서 갈라진 인류의 고대 언어를 연상하게 됩니다. 이제 성령이 임하심으로 갈라졌던 언어가 다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란 말에서 우리는 그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다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이 말을 번역하면 “그들의 각각”이란 말이 되는데 이 말은 그들과 각각이란 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의 통합성과 “각각”의 개별성이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공동체의 일체성과 개별성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6.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따지고 보면 성령님의 임재는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시에 시므온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요한에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의 모양으로 임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구약에서도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오순절 성령의 역사에 이렇게 열광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개별적이거나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며 총체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한두사람만, 또는 특정한 사역에만 성령이 임하신 것이 아니라 그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집단적으로 성령이 임하신 것은 교회를 설립하기위한 특별한 역사이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성령의 충만’이란 말입니다. 성령을 받았다, 안 받았다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을 주의해야 합니다. 충만은 어떤 그릇을 가득채우고도 남아서 흘러 넘치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가 이와 같아야 합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을 받고서 그 결과 모인 사람들은 다 “다른 방언”을 말합니다. 영어성경에는 ‘다른 언어들’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사투리’가 아니라 언어 자체가 다릅니다.

사실 이러한 방언은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예언되었습니다. 주께서 승천하시기전에 제자들에게 믿고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나타날 표적의 하나가 바로 ‘새방언’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 방언은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이란 말과 ‘이제까지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언이란 뜻입니다. 요엘서에 보면 때가 되면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을 물붓듯 부어 주실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때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방언이 곧 현재의 ‘방언’을 말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의 방언은 성령의 은사중의 하나인 ‘방언’과는 다릅니다. 왜냐면 바로 그 다음에 이 방언을 들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지요.

8절에 보면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즉 알아 듣지 못하는 이상한 말을 방언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니라 외국어들(방언: 각 지방의 언어)이라는 말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우리나라 말로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각 나라 사람들에게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 독일어, 불어, 아랍어, 러시아어로 들렸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땅끝까지 이르러 주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외국어가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강역 안에서는 그리스어나 라틴어가 사용되었지만 로마의 바깥, 즉 페르시아(파르티아), 아라비아 등지에서는 여전히 이방언어들이 사용되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이 방언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인 방언 일 수도 있습니다. 13절에는 “또 어떤이들은...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고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나라 말로 들렸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전혀 어떤 소린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 막 나오니까 “술취했다”고 얘기했겠지요. 그렇게 본다면 오순절 성령께서 임하시고 난 다음 일어난 방언사건에서 이 방언은 각국 나라의 언어이기도 하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새방언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성령이 충만해서 제자들은 방언을 말합니다. 이 방언으로 제자들은 일상 회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는 것이지요. 즉 방언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7.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에는 그 옛날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이미 설립되었고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의 계시나 예언이 필요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교만한 소리입니다.

왜냐면 성령님은 절대적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그분의 마음대로 얼마든지 이후에도 그때의 역사를 일으키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겨우 무지한 인간에 불과한데 마치 하나님의 일을 다 아는 것처럼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성령님에 관계된 일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거스리는 자는 사함을 얻되 성령을 거스리는 자는 사함을 얻지 못한다고.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성령님이여 오시옵소서, 그래서 아버지의 놀라운 역사를 지금 여기서도 이루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없다 하는 저들에게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아버지를 나타내시옵소서!

요즘처럼 이기적이고 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지 않고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만이 우리가 이 세상과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간다면 바로 세상에 함몰되어 버릴 것입니다.

세상과 싸운다 뭐다 하는게 아니라 그냥 발 짖밟히고 집어 삼켜져서 표시도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함몰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거든요.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으로 나갈때는 성령의 보호와 인도를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오늘 저의 이런 기도가 여러분들의 기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한 번만 이런 기도를 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런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안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성령님이 오셨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 홀연히 성령이 임하신 것으로 나와있지만 그들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한자리에 모여 오랫동안 일심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나의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자동적으로 내가 구하지도 않은 나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는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실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성령님이여 우리에게 오시옵소서. 이제 임하시옵소서!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6월 3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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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란 무엇일까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헌신, 희생, 사랑, 소망, 믿음...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이야기들이 있겠지요. 그 외에도 열정, 성실, 소명 같은 적극적인 표현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선되어야 할 것은 "일심"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표현이 있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보는 것이다 라는 것. 여러 사람이 모여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을 바라 보는 마음이 될 때, 성령님이 홀연히 함께 하신다는 표현은 매우 깊이 묵상해볼 주제라 생각합니다.

여담으로, 저는 위피트가 있어서 밸런스 트레이닝 같은 운동을 했습니다. 양쪽 발을 나란히 서서 균형을 맞추는 아주 기본적인 것도 잘 안 될 때가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혼이 많은 것도, 두 사람의 마음을 맞추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생각하게 합니다. 과거에도 물론 서로 사람의 마음이 잘 안 맞았을 겁니다. 과거에는 마땅히 대안도 없으니까 그러려니 하면서, 참고 살았지만, 이제는 참지 않고 날 잡아(!) 이혼해 버린다 정도가 과거와 현대의 차이랄까요.

한 마음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듣고, 공부하고, 이러한 경건한 시간을 성령님이 좋아하는 것은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시스템은 너무나 혼란스러운 인풋(입력)이 가득합니다. 바쁘게 쏟아지는 정보와, 메신저와 카카오톡과... 중략. 이런 홍수 속에서 경건한 아웃풋(출력)이 생겨날 가능성은 낮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체험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해야 하는 그런 소박하고 겸허한 모습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해 봅니다. / 2012. 06.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