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11월17일/죽으면 죽으리라(에스더4:1-17)/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11. 21. 19:44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1월 17일 주일 예배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4:1-17)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런데 과거의 그 수많은 어려움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했지요?
아니면 그 어려움을 어떻게 피했지요?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찔했던 순간들이 많았지만 용케도 여기까지 왔습니다.
엎어지고 자빠지고 깨지면서도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인생최대의 위기,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이 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한 믿음을 봅니다.
민족의 운명을 홀로 짊어지고 ‘죽으면 죽으리라’고 결심하고 왕앞에 나간 여인을 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말이 쉽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니 무지 무지 어렵습니다. 왜냐면 우리의 죽음은 결코 낭만적이거나 장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은 현실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로 시작합니다. 모르드개는 하만이 유대인들을 몰살시킬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라의 총리대신의 지위에 있던 하만은 이제 자기의 지위를 이용해서 유대인들을 페르샤 제국내에서 말살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미 왕의 조서가 반포되었습니다. 왕의 조서가 일단 반포된 이상 이를 뒤집기는 매우 매우 어렵습니다. 유대인들, 모르드개 자기를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은 이제 죽은 목숨입니다. 더구나 이 일은 모르드개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자기와 하만과의 갈등이 발단이 되어 모든 유대인들이 몰살을 당하게 되었으니 모르드개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애통해 합니다.

어떻게 해야 되지요?
모르드개는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하였답니다.
그러나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 쓰고 성중에서 대성 통곡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모르드개에게는 이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면 꼼짝없이 앉아서 죽음을 기다려야만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르드개의 반응이 본문에 간단하게 나와있지만 이걸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1절에 “ 이 모든 일을 알고”

여기서 이미 유대인을 멸절하려는 왕의 조서가 반포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모든 일을 안다’는 말은 단순히 표면적으로 왕의 조서가 반포된 것을 알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추악한 음모의 전부를 파악했다는 말입니다.

모르드개는 이전에 이미 한번 왕의 목숨을 살려준 적이 있는데 이때도 왕을 암살할 음모를 꾸미던 ‘빅단’과 ‘데레스’의 음모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왕을 구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조서의 뒤에서 벌어진 추악한 음모를 알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표면적인 사건의 이면에 펼쳐진 추악한 음모를 파악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기도한 것입니다.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대성통곡한 행위는 일반적으로 극도의 슬픔과 분노를 나타내는 행위이지만 모르드개의 이 행위는 단지 유대인들이 몰살을 당할 것에 대한 분노나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도로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 기도는 골방에서 드리는 은밀한 기도가 아니라 공분을 불러 일으키기 위하여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했다는 겁니다. 아마 동료 유대인들의 동참과 다른 민족들의 동정 여론을 불러 일으키기 위하여서 일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기도하고 끝?

기도하고 행동하는 거지요. 모르드개는 이때 페르샤의 왕비인 에스더에게 요청합니다. 왕에게 간청해서 유대인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그에게는 왕후로 있는 사촌동생 에스더가 있었습니다. 효과적인 길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에스더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에스더가 선뜻 나서지 않습니다.

동족의 목숨을 살리는 일인데 에스더는 아직 머뭇거립니다. 왕실 법도를 들먹이며 현실적인 어려움을 이야기 합니다. ‘왕이 부르기 전에 먼저 나가면 왕의 진노를 사서 죽을 수도 있다’
“내가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당시 왕에게는 황후를 제외하고도 몇 명의 왕비와 수많은 후궁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이 왕후를 자주 찾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만 에스더의 말은 자기가 지금 왕의 총애를 잃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왕의 총신인 하만과 싸워서 유대인들을 구할 자신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자기가 유대인인 것을 알지 못하던 하만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게 해주어 왕후의 자리에서 내어 쫓기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당시 페르샤는 왕에 대한 암살음모가 빈번했으므로 왕의 허락없이 왕이 거하는 안뜰에 들어가는 것은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일입니다. 경호병들이 침입자를 무조건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예외가 경호병들이 죽이기 전에 왕이 금홀을 내어 밀어서 홀의 끝을 잡는 거랍니다.
살 떨리게 무서운 일입니다.

구태여 동족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던질 필요가 있을까요? 말이 쉽지 약소민족, 포로민의 후예가 대제국의 왕후가  되었다는게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왕후까지 유대인인 것을 안 하만을 더 화나게 하고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나 않을까요?

모르드개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망설이는 에스더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이제는 모르드개가 아니라 에스더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과연 자기의 목숨을 걸고 무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고 왕 앞에 나가야 할지 아니면 왕실 법도를 준수하여 그냥 묵묵히 있어야 할지를 정해야 합니다. 입다물고 있는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에스더의 비밀이 지켜지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에스더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왕의 조서대로 에스더가 왕후의 지위를 잃고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가만있는게 더 이익일 것 같습니다.

내가 나가서 확실히 유대인을 살린다는 보장도 없는데 왕후의 지위와 목숨만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사정없이 에스더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너의 모든 것을 이 일에 걸어라. 너의 목숨도 너의 지위도 이 일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걸어라.

그래요, 내가 출세한 것이 이때를 위함인지 모르는 일이지요.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이 일을 위함인지 모릅니다. 내가 이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때를 위함인지 모릅니다. 이제는 정말 결단해야 할 때입니다. 눈 질끈 감고 나만을 위해 살건지 아니면 함께 살기위해 나서야 할지를.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모르드개의 관직은 왕궁의 수문장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왕궁에 출입하는 자를 감시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고 이러한 임무의 일환으로 국왕 암살 음모를 파헤쳐 큰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모르드개는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이려 합니다.

그는 머리에 재를 무릎쓰고 베옷을 입고 대성통곡하며 왕궁문 앞까지 갑니다. 본문 2절에는 “굵은 베 옷을 입은자는 대궐 문에 들어가지 못함이라”고 이유를 말합니다. 모르드개 역시 베옷을 입었기 때문에 궁중 법도에 의해 대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법이 허용하는 최대한도로 행동한 겁니다.

모르드개가 노린건 단순히 일반인들의 여론을 환기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는 민주주의 국가도 아니고 백성들의 불평이 위정자들을 움직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모르드개가 알리고자 한 사람은 에스더입니다. 자기의 사촌 여동생이면서 나라의 왕후인 에스더야 말로 모르드개가 기다린 사람입니다. 모르드개가 생각할 때는 에스더가 이때 왕후가 된 것은 유대인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에스더가 당연히 그 일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다른 이를 보내서 자기의 일을 하실 것이고 너와 너의 아비집은 멸망할 것이라고 에스더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아니면 해석을 달리해서 ‘너말고 누가 이일을 할 수 있겠느냐? 네가 지금 이일을 하지 않으면 결국 너와 너의 아비집도 멸망할 것이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에스더는 더 이상 여건을 들어 핑계하거나 자신이 없어 머뭇거릴 수 없습니다.

참 이 말이 생각납니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의 일이요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의 일이다” (謀事는 在人이요 成事는 在天이라)
모르드개의 대성통곡하는 행동을 에스더의 시녀와 내시가 보고 에스더에게 가서 이를 전합니다. 에스더는 다만 모르드개를 위하여 찢어버린 옷 대신에 새로운 의복을 보냅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이를 받기를 거부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 아마 에스더는 무엇 때문에 모르드개가 이런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지금 전 유대인들의 목숨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을 몰랐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요 에스더가 만일 유대인들의 참상을 몰랐다면 그녀는 정말 너무 무심한 사람입니다. 3절에 보면 “왕의 조명이 각 도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곡읍하며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고 하고 있는데 유대인들 중에 에스더만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구중궁궐 깊은 곳에 거하기 때문에 소식이 늦어서 그럴까요? 아니면 ‘궁궐에 있으므로 나는 안전하다. 그러므로 그건 내일이 아니고 모르드개의 일도 아니다’라고 생각했을까요?

유대인들의 역사를 보면 이들이 비참한 현실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들은 애굽의 압제에서 부르짖었고 가나안에 살 때에도 여러 민족과 나라의 압제에 처했을 때 역시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고 오히려 교만하며 범죄하고 사람들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모욕했습니다. 약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법을 보란 듯이 짓밟았습니다.
우리는 어때요? 지금 잘나갈 때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그 앞에 겸비하고 주의 법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4절에 나오는 내시와 시녀들은 에스더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전국이 유대인 멸절 조서로 시끄러운 것과 모르드개의 사정을 에스더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자기의 일이 아니면 철저히 무관심합니다. 그게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때에만이 비로소 간섭하고 불평하며 이를 해결할 방도를 생각하지 남이 아무리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나하고 상관이 없다 생각되면 철저히 무시하는 겁니다.

에스더의 시녀와 내시는 유대인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서 에스더에게 모르드개의 사정을 알리지 못한 것이지요. 일전에 왕후가 되기 전에 주위 이민족들의 시기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에스더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감추라고 당부했는데 이게 아직까지 잘 지켜진 모양입니다.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의도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뭔가 매우 불길한 느낌을 가지고 근심합니다. 멀쩡한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고 베옷을 입고 대궐문 앞에서 대성 통곡을 하고 있는지.

베옷을 벋으면 당연히 모르드개는 궁궐안으로 들어 올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가 바로 궁궐문의 수문장이므로 누구도 그를 막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베 옷을 벗고 왕후가 내린 옷을 입기를 거부합니다.
이건 단순히 옷을 거부한게 아니라 왕후와의 대화를 거부한 것과 마찬가집니다.
모르드개는 지금 잔뜩 벼르고 있습니다. ‘나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어야 겠다!’

모르드개가 끝까지 베옷을 벗기를 거부하고 새 옷을 받기를 거부하자 이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내시 하닥에게 모르드개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를 알아 오라고 명합니다.
내시 하닥에게 모르드개는 모든 일을 자세하게 알립니다. 총리 하만은 원래 아말렉족으로 유대인들에게는 민족적인 원수입니다. 그래서 둘 사이가 좋지 않은데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기를 거부한 일이 발단이 되어서 이제 전 유다인들이 몰살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총리대신보다 높은 두 사람 중의 한명인 왕후에게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왕후가 총리대신보다 지위가 높다고 해도 이 일을 해결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이 일에는 왕이 개입되어있고 왕은 워낙 제멋대로의 성격이라 왕후도 왕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먼저번의 왕후가 폐위되어서 새로운 왕후가 된 에스더의 입장에서 왕실 법도를 어기는 일은 자기의 부귀와 영화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보통의 결심으로는 왕의 조서내용을 가지고 다투기가 어려운 겁니다.

모르드개가 왕후의 의복을 거절한거나 에스더가 그렇게나 머뭇거린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워낙 사안이 중대하기 때문이지요.
포로의 후예로 가장 출세한 에스더, 기적적인 방법으로 결코 페르샤의 왕실 법도로는 될 수 없었던 왕후의 자리에 오른 에스더는 자기 일신의 평안함과 목숨을 위해 구태여 십자가를 지기가 꺼려집니다.
모르드개 역시 이럴거로 예상했기 때문에 자기의 단호한 결심을 보이려고 왕후가 내린 의복을 거부한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준비성이 굉장히 철저하네요. 말로 자기의 사정을 알릴뿐만 아니라 확실한 증거를 보이기 위해 왕의 조서 초본을 제시합니다.
게다가 비록 말로 하는 거지만 하만이 제시한 뇌물의 정확한 액수까지 제시함으로 자기의 말에 신빙성을 더합니다. 모르드개는 지금 유대인의 멸절을 막기위해 엄청나게 굳은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조금 심하게 이야기하면 모르드개는 지금 자기의 목숨이 걸려있는 일이라서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에스더는 자기의 목숨이 걸린 일이 아니라서 방관자적 입장에 있습니다. 절박하지가 않은 거지요.
아마 모르드개 한사람 정도 목숨을 살릴려고 노력은 할껍니다. 그나머지는 글쎄요?
우리네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가진 지위, 내가 가진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은 나혼자 잘먹고 잘살라고 주셨을까요? 나혼자 멋져 보이고 목에 힘주라고 그걸 주셨을까요?

우리 주님이 주신 모든 재물은 청지기적 사명을 다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청지기적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면, 아니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기의 사명을 잘 감당할 다른 청지기를 찾으시고 그에게 재물을 맡기실 것입니다.

재물뿐만이 아닙니다.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라고 보내신 자리에 있으면서 잘못을 바로 잡지 않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방관한다면 그건 하나님이 그 자리에 보내신 의미가 없는 일이고 결국 그 자리를 다른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구현할 다른이에게 주시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 자리에 내가 있을 때 잘하는게 중요하고 재물이 내 수중에 있을 때 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님을 표현할 때 히브리원문은 ‘바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돈이나 수표는 종이입니다. 한번 주의 성령이 후 불어 버린다면 종이가 날아가 버릴 겁니다.

내가 가지고 있다고 해서 결코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일을 위해 그 물질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다면 우리에게 더 큰 물질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더 큰일을 하게하실 것입니다.
나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주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주께서 나에게 더 큰 일을 맡기실 것입니다. 더 많이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지요.

베옷을 걸치고 왕궁 문에서 대성통곡하는 모르드개는 이미 자기의 기득권을 내려놓았습니다. 왕궁 수문장의 자리를 내놓은 거지요. 베옷을 입고는 왕궁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는 지금 베옷을 입고 백주 대낮에 대성통곡함으로 왕의 조서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왕후가 내리는 의복도 거부합니다. 그는 지금 모든걸 걸고 자기의 최선을 다해서 유대인 말살 정책을 저지하려 노력합니다.

자 그런데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지금 만나서 이야기하는게 아닙니다. 이 둘은 한명은 왕궁안에서 한명은 왕궁밖에서 자기의 자리에서 그대로 있으면서 내시 하닥을 통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닥이 에스더의 말을 가지고 모르드개에게 전하면 모르드개 역시 하닥에게 자기의 말을 에스더에게 전하도록 합니다.

왜 둘은 만나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결코 나의 주장을 굽히지 않겠다는 표시일까요?
사람에게는 각자의 사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정이 동족전체의 목숨보다 더 중요합니까?
민족의 운명보다 더 중요합니까?

민족의 운명이 너무 추상적입니까? 좋아요, 각자의 사정이 사람의 목숨보다 더 중요합니까? 그것도 악인의 목숨도 아니고 죽어야만 하는 이유도 없는 무고한 이의 목숨보다 개인이 가진 사정, 곤란한 사정이 더 중요합니까?
물론 우리네 우스개 소리로 ‘내 감기가 남의 암보다 더 크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건 내 마음속으로 하는 소리지 결코 발설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욕먹기 딱 알맞은 말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알기 때문이지요.

왕궁 안으로 들어오라는 에스더와 내 주장이 관철될 때까지는 결코 왕궁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모르드개의 주장이 극명하게 대치되고 있습니다.
내시 하닥은 원래 아하수에로 왕의 내시입니다. 그러므로 하닥이 알게 된 사실은 왕에게도 알려질 우려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에스더는 하닥을 매우 신임한 것 같습니다. 하닥은 왕궁안과 밖을 오가며 두사람의 말을 전하며 협상을 중개하고 있습니다.

결국 에스더는 자기의 주장을 굽히고 모르드개를 도와 적극적으로 민족의 운명을 위해서 싸울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결정적인 말이 바로 앞서의 14절 말씀입니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그래요, 에스더는 비로소 자기의 결심을 굳히게 됩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오늘 바로 이 일을 위하여서다. 그러므로 이제 내 목숨을 버리고 왕에게 나아가 동족의 목숨, 모르드개의 목숨을 위하여 간청해야 겠다.
죽으면 죽으리라!
그리고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자기를 위한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수도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이 함께 자기를 위해 금식하고 기도하기를 요청합니다. 그리고는 왕앞에 목숨을 걸고 나가겠답니다.

유대인을 죽이라는 조서는 왕이 반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더가 유대인 인지는 알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가만 있는다면 에스더는 왕후의 자리에서 그냥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만일 지금 왕에게 나아가 유대인의 목숨을 위해서 간청하다가 자신역시 유대인임이 밝혀진다면 어쩌면 유대인의 목숨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도 위험할지 모릅니다.

왕의 조서는 법령의 효력을 지녀서 결코 예외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엄격하게 에스더 역시 유대인 말살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에스더가 유대인인 한.
마침내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의 자세로 왕 앞에 나아갑니다. 에스더가 살 길은 왕이 에스더를 어여삐 여겨 왕홀을 내미는 것 뿐입니다.

과연 왕은 왕홀을 내밀까요?
누가 왕의 눈에 에스더를 어여쁘게 보이게할 수 있을까요?
그래요, 바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지요.
그만이 우리의 목숨을 보장하시며 좌지우지 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 권력자가 할 수 있는 것 같아도 그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거스릴 순 없는 것입니다.

왕이 에스더를 본즉 매우 사랑스러워서 홀을 내어 밀고 에스더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는 소리를 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일의 결말을 잘 압니다. 에스더는 살았고 왕후의 자리를 계속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동족의 목숨을 구했으며 모르드개는 하만을 대신하여 총리대신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실로 화가 변하여 복이 된 것이지요.
저는 이런 식의 동화같은 이야기를 하고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나에게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죽으면 죽으리라의 결단.

나만 편안하고 내배만 부르면 된다는 생각이 아니라 나도 저들도 함께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나서는 거지요.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이때를 위함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만큼이나 먹고 사는 것이 이러한 때를 위함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종이 봉투가 찢어져서 종이 돈이 거리에 흩뿌려진다면
하나님이 한번 바람을 후하고 부시니 재산이 삽시간에 흩어져 버린다면 제대로 그 재산으로 좋은 일 , 주의 일 한번 못해보고 허공중으로 사라져 버린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큰 일을 앞에두고 나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여 동족의 어려움을 외면하면 그 화가 나에게도 미칠 수 있지만 내가 결단하고 나가서 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 하면 생각지도 못했던 기쁜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의 각오로
일사각오의 자세로 나아갔지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왕의 사랑과 부와 명예까지 모자람 없이 얻게 된 것입니다. 모르드개도 총리대신의 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도 목숨과 재물을 더 얻게 되었습니다. 화가 변하여 복이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죽으면 죽으리라의 신앙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에게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 각오의 자세가 있습니까?
나의 안위와 목숨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나자신이 오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걱정거리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자세가, 믿음이 있습니까?

만일 있다면 우리는 나와 이웃과 교회를 구하는 하나님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없다면 만일 그런 일사각오의 자세나 살신성인의 자세가 없다면 조금 더 기도하고 나의 믿음을 굳세게 합시다.
우리가 세상이 놀랄 큰 것을 받으려 한다면 내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이 놀랄 일을 하고자 한다면 내려 놓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에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요구하시는 편에 항상 서 있기를 원하며 그 쪽을 선택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사회를 구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1월 17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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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높으신 분들이 되면, 그의 능력과 위엄과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의 처지가 안 보일 때가 있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곤란을 겪고 있음에도, 그것이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때로는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밀어붙이기도 합니다. 이른바, 높으신 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례는 하도 많아서, 가깝게 보면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만행에서 볼 수 있으며... (무더운 여름에, 전교생을 모아서, 혼자 신나게 훈화말씀을 하신다거나... 나쁘게는 사익에 보탬이 되도록 암암리에 학교운영권에 개입한다거나...)

이런 우스개는 비단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닌터라, 교회에서도 교인들이 대부분 알고 있는 문제가 있어도, 정작 목사님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특징들이 있습니다. 집단에서 아주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 노력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느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철학적으로는, 타인이 옆에서 피를 흘리고 고통을 외쳐도, 얼마나 아픈지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고통을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 다만 추정할 뿐이지요. 그래서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성공적인 길만을 걸어온 최고지도자들이, 어떻게 힘들게 살고 있는 일개 소시민의 힘겨운 하루하루를 이해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은걸까요?

교회 개혁 운동을 펼치는 손봉호 교수님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부를 좋아하기 보다는, 부를 멀리하고, 스스로 겸허한 삶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어쩌면 바꿔 말해 죽으면 죽으리라 같은 에스더의 결단이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부가 가져다주는 편안하고 안락함을 거부하고, 그 부를 보다 더 의미 있는 일에 투입해보자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조차도 이런 말 하기가 마냥 쉽지가 않습니다. "돈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라는 것은 거의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모두가 돈을 좋아한다는 전제는 분명해 보입니다.

백여년 전인가요, 독립 운동에 투신했던 이회영네 집안이 있었습니다. 수백억 돈이 보장되는 안락한 친일적 삶 대신에, 고생을 자처하며 독립 운동에 헌신했고, 6형제 중에 5명이 타국에서 가난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저는 이들을 기억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결단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호화롭고 거대한 건물을 자랑하며 명예와 권력이 함께 보장되는 안락한 친자본적, 친권력적 인생이 과연 답인걸까요? 이제는 성공했다며, 궁전 같은 곳에서 거한다면, 우리는 이웃의 고통을 보지 못하는 위험이 커집니다. 더 나쁘게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구되는 것은 청지기적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운이 좋아서, 때로는 많은 돈을 관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의 사익이 아니라, 사회적 공공을 위해서 사용되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혹자는 그래서 돌아오는 게 무엇이냐고 반문할 테지요. 이나모리 회장의 발언이 생각납니다. "타인의 즐거움과 감사를 받는 뿌듯함, 이것이야말로 돈으로도 살 수 없고 세상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대가 아닐까" 물론, 교인은 조금은 다르겠지요.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뿌듯함, 내가 주께 선대하였으므로, 주도 나를 돌보소서 라고 말할 수 있는 당당함" 바로, 그렇게 살아가는 게 청지기적 삶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 봤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그렇게 가장 중요한 일에 다가서는 삶을 살아가기를 조용히 기도합니다. 그 한 명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21세기는 "분노한 트윗 하나가 브랜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21세기는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 한 명이, 다수를 일으킬 수 있는" 세상입니다. 덧없는 일과, 덧없는 욕망대신에, 올바른 일과 올바른 열정을 갖출 수 있기를 그 지혜로움을 또한 기도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나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한데 모이고 노력함으로서, 더 큰 변화로 나아가기 마련이며, 거대한 특권세력이 저절로 정화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 같은 기개를 가져볼만 하지 않을까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이 정말 유명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내 집과 내 평안부터 구하지는 않았던지, 저는 어쩐지 반성부터 되었습니다. / 2013. 1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