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4년3월9일/너희가 시험을 당하거든(야고보1:2-8)/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3. 10. 20:06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3월 9일 주일 예배

너희가 시험을 당하거든 (야고보1:2-8)

오늘부터 앞으로 얼마간 우리는 야고보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야고보서는 신약성경의 대세인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믿음 위주의 삶에서 무려 행위를 강조하는 테러를 일으킨 성경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 성경을 이류 복음이라고 평하기도 했지만 야고보서는 결코 그런 시시한 말씀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가치 없는 본문이 아닙니다. 본문의 저자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로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알렉 모티어라는 사람은 이 성경을 편지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글로 작성된 설교로 보고 있습니다. 일관된 상황을 쭉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주제 저 주제로 막 왔다 갔다하는 기술방법 때문입니다.
당시 초대 교회에서는 사도들의 목회 서신을 읽음으로 설교를 대신하는 관습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그 도시 내의 다른 교회에서 읽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곳에서 읽고 ... 야고보서가 이렇게 돌려가며 읽었던 설교문이었을 것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야고보서의 제일 첫 번째 주제는 놀랍게도 “너희가 시험을 당하거든 기쁘게 여기라”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는 일은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이란 단어가 풍겨주는 것은 시험을 시련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힘이 들고 우리로 하여금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심지어 좌절하게 하는.

그래요, 우리 인생에서 수많은 시련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알고 있고 또 안타깝기는 하지만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의 ‘너희’가 세상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성도들인 우리를 말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시련이 닥치는 것일까요?”
“아니 하나님의 보호가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왜 시험이 오는 것이지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에 회의를 품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도저히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좌절하여 낙망한 채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분의 놀라운 역사로 나를 붙잡아 주지 않는 현실을 욕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시험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믿는 성도에게도.

1.시험을 당하면 기뻐하라
본문에서 야고보는 놀랍게도 바로 그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 제발 이 시험에서 저를 구해주세요’라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뭔가 좀 이상합니다. 궤변 같습니다. 기뻐할 일이 있어야 기뻐하지.
안 그래도 힘든 세상살이 좀 편하게 살려고 예수 믿는데 이 무슨 황당한 말입니까?

먼저 ‘온전히’라는 말을 원문의 뜻대로 다시 번역한다면 ‘전적으로’ 의 뜻이 더 적합합니다.
시험을 당하게 되면 전적으로 기쁨으로 여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수식어를 보세요. 그냥 ‘시험’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시험입니다.

여기서 여러 가지는 원문에는 ‘형형 색색의’라는 말로 되어있습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시험의 종류가 다양하고 많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네 삶에서 시험은 예기치 않게 닥칠 수 있고 다향한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뜻하지 않은 시험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쓰인 ‘만나다’란 말이 압권입니다. 이걸 원문을 참고해서 다시 번역하면 ‘~에 에워싸이도록 빠지다’란 말이거나 ‘~에 빠져 에워싸이다’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일부러 시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시험이 닥쳐와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처럼 포위된 함정에 빠져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험이 한두번이 아니라 되풀이 해서 반복적으로 닥쳐온다는 의미입니다.
정말 너무 합니다. 이러면 정말 우리는 어찌 살라고 하시는지!

2.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그런데 야고보는 이러한 시험이 닥쳤을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절에 나와 있네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먼저 야고보는 ‘시험’을 ‘믿음의 시련’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시련이란 말은 금,은을 뜨거운 불 속에 넣고 녹여 그 진위를 시험하듯이 믿음을 입증하거나 시험하는 연단을 의미합니다. 뜨거운 용광로의 불속에서 모든  불순물을 다 털어버리고 정금처럼 나오는 제련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너희가 앎이라’는 말에서 시험이 인내를 만드는 것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요 우리는 피상적으로 알고 있기는 합니다. 이 세상에서 시험이 없을 수가 없고 우리 믿는 이에게도 시련이 오고 그러한 시험을 이겨내면 보다 더 좋은 것이 올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이라는 말이 걸립니다. 믿음의 시련이 ‘성공을 만들어 내는 줄’이라거나 ‘엄청난 축복을 받을 줄’ 이라는 말이 왔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껏 그 어려운 시험을 이겨내고 나면 겨우 인내를 만든답니다. 우리의 기대에 전혀 못미칩니다. 기껏 시험을 이겼는데 그것이 인내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면 그깟 인내 안하고 말지...도대체 뭡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힘들게 하시고 보상은 쥐꼬리 만큼 주시면서 그것도 보상이랍시고 온전히 기뻐하라고 하실까요?
우리 속담에 ‘고진감래’라고 있지요. ‘고통이 다하면 기쁨이 찾아 온다’고 이정도 되어야 우리가 인내할 맛이 납니다. 그런데 겨우 인내를 배운답니다. 겨우 인내를 만든답니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전혀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예수쟁이들이 시간이 남아 돌고 물질이 남아돌고 할 일이 없어서 예배하고 헌금하며 남을 돕고 선한 일에 힘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에 복주시는, 아니 복 주실 하나님을 바라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너무 어이가 없습니다.

3.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자, 그런데 본문의 인내란 정확히 무엇을 말할까요? 단순히 오래참음? 견딤?
본문의 인내는 ‘~의 아래에’ 와 ‘머물다’란 말의 합성어입니다. ~의 아래에 머물다?
가령 어려운 상황아래 놓여 있어도 현실을 부정하고 뛰쳐나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어려운 상황이 끝나고 변하여 기쁨이 올 때까지....

그래서 ‘확고부동’이나 ‘불변, 항구성’ 이란 의미를 가집니다. 큰 시련과 환난 속에서도 자기의 믿음을 변함없이 지켜나간다는 말입니다.
어려운 상황 아래에 처해져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세를 견지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그때를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깟 예수 니나 믿어라’ 이렇게 외치고 저주하며 주어진 상황에서 뛰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 인내가 단순히 참고 견디는 것만을 말한다면 정말 우리의 수고가 헛될 것입니다.
성경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다행입니다. 단순히 시험이 인내를 만들기만 하고 끝난다면 정말 허탈할 터인데 뒤에 계속해서 뭔가가 나옵니다. 시험이 인내를 만들고 인내하게 되면 이것이 우리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만든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시험을 당했을 때 그냥 무턱대고 시험이 끝날 때까지 가만 있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면 ‘이루라’는 말은 원래 ‘무언가를 힘써 하는 행위’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온전히 이루라’는 말은 어떤 구체적인 효과가 나타나도록 힘을 기울여 능력을 발휘하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니까 결과가 나오기까지 인내하라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인내하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네 인생은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저 산을 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4절의 ‘온전하고 구비하여’ 란 말은 서로 비슷한 뜻을 가집니다. ‘온전하고’ 란 말은 ‘인격의 완전한 성숙’을 나타내고 ‘구비하여’란 말은 ‘온전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두 단어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 지요.

그래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그런 정도의 완전한 성숙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이것 다 번역하고 해석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뭔가 좀 아쉽습니다. 우리는 지금 인격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 믿는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뭐든지 풍족해서 더 이상의 돈과 명예와 권력이 필요가 없고 그냥 성숙한 인격으로 성인으로 살기위해서 예수 믿는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우리네 삶은 너무 힘들고 불확실하며 우리의 현실은 보잘 것이 없습니다.
‘집에 돈이 쌓여 있어서 더 이상 물질적인 보상은 필요 없어’의 상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이 높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명예와 권력은 지겨워’의 상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수많은 시험을 기쁨으로 이기고 난 보상이 기껏 성숙한 인격이라면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 하고 우리네 인간하고는 죽고 안 죽고의 차이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가지는 가치관의 차이가 너무 큽니다. 아예 다른 세상에서 사는 것 같지요?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하고 건강이 필요하고 합격이 필요하고 명예가 필요하고 권력이 필요하고 직장이 필요한 이에게 ‘너 이번 시험을 기쁨으로 끝까지 잘 이기면 성숙한 인격자가 될거야, 그러니 얼마나 좋아’
하하, 여러분. 정말 이 풍진 세상에서 성숙한 인격자가 될 수 있어서 좋습니까?

우리네 이 험한 고난으로부터의 구원이나 안락한 삶이 아니라,
남들에게 보란 듯이 살 필요는 없어도 그래도 일용할 양식과 건강 그리고 구성원들간의 사랑도 아닌 단순히 ‘성숙한 인격’이 보상이란 말입니까?

너무 실망하지 말고 그렇다고 흥분하지도 말고 다시 한번 본문을 잘 살펴봅시다. 그리고 생각해 봅시다.
야고보가 너무 포시럽게(?) 자라서 이런 철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네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고 저런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는 인생의 가장 처참한 비극을 맛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웃기게도 그 불행을 통하여 회심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수만명의 기독교인의 지도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분의 삶 역시 우리네 삶처럼 극적입니다. 한편의 드라마 같지요. 그런데 그가 그런 이야기를 한 이유가 있습니다.

4.지혜를 구하라
5절부터의 내용이 뭔가 우리에게 그 해답을 주는 것 같습니다.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에게 구하라 그러면 그가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야고보는 이어지는 5절부터 시험에 처한 성도들에게 , 어려운 삶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할 때,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을 때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구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려움을 헤쳐 나갈 지혜를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는 우리가 잘아는 ‘소피아’입니다. ‘자연과 인생의 비밀을 파악하는 능력,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소피아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경건하고 올바른 삶을 살기위한 영적 지각력’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네 힘으로, 우리네 지혜로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을 때는 그 답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에게 지혜를 구하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야고보만의 독자적인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를 구하는 이에게 후히 주시며 꾸짖지 아니하시는데 ‘후히’라는 말은 양이 많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무조건’ 또는 ‘기꺼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정욕을 위하여 간구하지 않고 시험을 이길 지혜를 위해서 기도하면 무조건적으로 지혜를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실 때 하나님이 전면에 등장하여 눈에 띄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배후에서 은밀하게 주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일단 지금 우리네 삶이 어렵다면 이 어려움을 헤쳐나갈 방책을 알게 해달라고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반드시 얻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일을 잠시 멈춰두고 하나님과 은밀한 시간을 가지십시오. 은밀한 중에 살피시는 주께서 반드시 그 해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구한다고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 안에서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조금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야고보는 본문에서 ‘의심’을 ‘분별하여 알다, ~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다, 반대하다, 싸우다, 자기 자신과 모순되다, 주저하다’란 뜻으로도 사용되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렇습니다. 입으로는 이 어려움을 해결할 지혜를 주세요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실 리가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게 바로 의심이고 ‘어차피 들어 주지도 않을꺼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하며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이 바로 의심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도들만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그동안 너무 많은 기도에 응답되지 않은 경우를 봐왔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기도 합니다.
우리네가 처한 현실이 헤쳐나오기가 너무 불가능하기 때문에 도저히 안될거야라고 생각하며 주저하고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부족하다고 해서 신의 관점에서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나의 생각으로 성령의 능력을 제한하는 모순에 빠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유하고 아무리 힘있는 사람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을 그가 신이기 때문에 , 우리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나의 하나님 아버지이기 때문에 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험이 닥치고 어렵지만 하나님이 그 시험에서 이기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면 그 시험은 반드시 이겨낼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오히려 우리를 더 제련하여 더 고귀하며 더 순수하고 더 높은 수준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흠잡을데 없는 인격자가 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과 시험에서 구원받음과 영원히 사는 복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처지를 비관하며 낙망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답은 하나님에게 있고 그 답을 알기위해서는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간구하면 됩니다.

덧붙이자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구비된 인격자가 나 자신의 정욕만을 위해서 구할리도 없겠지만 그렇게 구하는 것은 백날 천날 확고하게 믿고 구해도 절대로 들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먼저 구하고 기도하시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당연히 주실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일꾼을 만들기 위하여 우리를 더 높은 성숙의 자리에 나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시험을 당하면 기뻐하고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시험을 헤쳐 나갈 길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앞에 참 그리스도인으로 우뚝 서기위한 하나님의 모델로 서게 될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을 보려면 저 사람을 보라” 그러기위해 흠없는 성숙된 성도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되면 필요한 양식과 건강과 사랑과 명예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과 고난의 현실을 이기기위해 기뻐하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3월 9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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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예전에 책에서 이런 소절을 읽은 적이 있어서, 메모해 둔 게 있습니다. "고통은 인간을 생각하게 하고, 생각은 인간을 지혜롭게 만든다. 그리고 지혜는 인생을 견딜 만하게 해준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고, 생각하는 습관, 행동하는 모습 역시 잘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언젠가 홍 목사님은 새롭게 설교문을 작성했는데, 10여년 전에 썼었던 설교문과 꼼꼼하게 비교해보니까, 형식 및 논리전개과 매우 흡사해서 놀랬다고 했습니다. 또한, 회개하라는 말의 언어적 의미에는, 생각을 돌이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사람은 고통스러울 때가 되어야, 기도나 간구를 하게 되며, 어제와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어제와 다른 생각들, 어제와 다른 간절함들이 모이고 쌓여나가면서, 인간은 인생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는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고통스러움이 있어야, 사람의 의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관점은, 한편으로는 중세 시대의 풍경인 "고의로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가하던" 수도자의 이상한 풍경도 떠오릅니다. 저는 영화 속에서 몇 번 정도 그 장면을 보면서, 꼭 저렇게까지 살아야 하는가? 싶었습니다. 나중에야 의미를 해석해 주는 사람들에 의해서 조금은 이해를 할 수 있었는데, 중세의 수도자들은 "신의 침묵, 신의 부재" 속에서 도무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고통을 스스로 만들어 냈다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어느 소설가의 고백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고통에 신음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편안한가" 라고 일갈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바꿔 말한다면, 고통스러운 순간 속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아무 생각도 바꾸지 않고, 따라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게 아닐까요.

그래서 야고보서의 말씀은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고통스러울 때, 적극적으로 구하며, 미래를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지금 당장 생각을 바꾸어 기뻐하고, 오늘 당장 행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행동하고 앞으로 나가고, 변함없는 믿음으로 주께 구하라. 그가 분명히 채울 것이다. 저는 이 설교가 그래서 정말이지 좋았습니다. / 201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