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4년5월18일/딤나로 가는 길(사사기14:5-)/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5. 29. 17:37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5월 18일 주일 예배

딤나로 가는 길 (사사기14:5-)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삼손의 여성편력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지난 주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에 대해서 강조했다면, 오늘은 부부간의 올바른 사랑에 대해서 말씀 드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삼손은 아버지와 함께  블레렛인 신부집에 줄 예물을 가지고 지금 신부집이 있는 딤나로 가고 있습니다.
소라는 산위에 있고 딤나는 약간 아래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내려갔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딤나의 포도원에 접어 들었을 때 놀랍게도 어린 사자가 삼손을 보고 으르렁거립니다.

이때 놀랍게도 성령이 삼손에게 임하시자 삼손은 그 사자를 마치 염소 새끼를 찢음같이 찢어버립니다. 아무런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찢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딤나에 도착해서 그 여자와 말하며 기뻐합니다. 원문은 “그녀는 삼손의 눈에 옳았다”가 됩니다. 삼손은 이 여자에게 이미 맛이 가버렸기 때문에 외모뿐만 아니라 모든 행동도 다 좋게 보인 것입니다. 현모양처가 될거로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정혼을 하고 세월이 적어도 2,3개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삼손은 그 여자를 취하려고 다시 딤나로 가게 됩니다. 이제는 정식으로 결혼을 하기 위해 내려간 것 같습니다.
나실인으로 자라서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삼손은 이제 하나님의 율법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자기의 눈에 좋은 대로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려 합니다.

당시 블레셋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이스라엘인들을 블레셋사람이 좋아했겠습니까? 일반적이라면 아마 택도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신력의 소유자였기에 그 여자도 그 여자의 집안에서도 삼손을 용납한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진 위대한 능력은 하나님을 거역하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온 능력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전에 사자를 죽인 곳을 지나면서 보니 자기가 찢어 죽인 사자의 시체가 다 썩어서 뼈만 앙상하고 그 곳에 벌집이 있고 벌떼가 있었습니다. 삼손은 그 꿀을 먹고 또 자기의 부모에게 사자의 시체에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고 꿀을 긁어서 가져다가 먹게 합니다.

사실 벌은 더러운 곳에서는 집을 짓지 않으므로 깨끗한 꿀이라서 상관없다라고 생각하고 넘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나실인의 경우 부정한 것에 접촉해서는 안되는 규율이 있습니다. 삼손은 그 계율을 어긴 것이고 또 어긴 사실을 부모가 알까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쩌면 거짓말을 하고 그 꿀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원문 상으로는 ‘그리고 그는 그의 손바닥으로 꿀을 긁어냈다’

물론 이때도 나실인이 아닌 사람이라도 더러운 것을 만지게 되면 정결례를 행하도록 되어있는 계율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정결례를 어긴 자에게 주어지는 저주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상당히 무거운 범죄에 해당됩니다.

자기도 어기고 그 사실을 감추기위해 자기의 부모도 계율을 어기게 하는 즉 요즘 말로 공범을 만든 겁니다.
꿀을 먹어 보니 너무 맛있고 좋아서 부모님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가져다 드렸다! 그런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삼손에게 하나님의 율법은 어떠한 구속력도 없습니다. 삼손은 성령의 감동을 입은 천하장사이지만 스스로는 자기가 잘나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자기 멋대로 산 사람이며 육신의 쾌락과 정욕만을 좇는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나실인이지만 속은 이방인과 똑 같습니다.

10절을 보면 삼손은 이스라엘 식으로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 블레셋 식으로 결혼식을 합니다. 당연히 이 결혼식에는 삼손의 아버지도 참여합니다. 평범한 아버지는 천하장사인 아들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삼손이 떼를 쓰는 대로 끌려갈 뿐입니다.

게다가 이 잔치에서 삼손은 포도주를 마시면서 또 다시 하나님의 계율을 어깁니다. 본 절의 ‘잔치’라는 말은 ‘마시다’는 말에서 나왔기 때문이며 이때의 음료는 당연히 포도주를 말합니다. 이것 역시 삼손이 태어나기 전에 천사가 절대 어겨서는 안되는 계율로 준 것입니다. 물론 성경도 이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삼손에게는 자기 눈이 최고의 기준이고 자기의 혀가 최고의 판단이지 하나님의 법은 안중에도 없었을 것입니다.
과연 이 결혼이 행복한 결말을 맺을 수 있을까요?
신부 측은 삼손을 보고 매우 마음에 들어한 것 같습니다. 힘이 센 천하장사를 보면 보통 엄청난 근육과 멋진 몸을 자랑합니다. 여자도 남자도 그 외면에 혹해서 이루어진 결혼입니다. 여하튼 신부의 집에서는 삼손이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그 동네의 블레셋 사람 삼십명을 데려와서 동무로 삼아 삼손과 함께 하게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과 폭넓은 사귐을 가지도록 배려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분위기에 휩쓸렸는지 삼손은 잔치에 흥을 더하기위해 내기를 제안합니다. 내기는 수수께끼 풀기!
그런데 웃기는 것이 이 수수께끼는 삼손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므로 결코 누구도 그것을 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삼손은 7일의 기간을 주고 내기의 상품을 푸짐하게 겁니다. 베옷 삼십 벌과 (갈아 입을)겉옷 삼십벌.

요즘 이라도 이런 경품은 매우 부담이 되는 것이지만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는 물건입니다. 여리고성을 점령했을 당시 시날산 외투 한 벌을 감춘 아간에 관한 기사를 아시지요? 바로 그 외투가 겉옷입니다. 그것도 평상복이 아닌 ‘갈아입는’ 예복을 말합니다. 영역본에서는 ‘잔치 예복’이라고 번역했고 특별한 행사에 입는 값비싼 옷입니다. 당연히 일반적인 겉옷보다 더 비싸겠지요?

솔직히 삼손이 낸 수수께끼는 어쩌면 반칙일 수 있습니다. 삼손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했기에 일반적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 삼십명의 사람들이 도저히 풀 수가 없습니다. 마침내 7일째 이제 잔치의 마지막 날이 되었고 도저히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를 협박합니다.
좀 희한한 사람들이지요. 옛날 사람들은 엄청 잔인합니다.

웃자고 한 일을 가지고 이제는 죽자고 달려든다고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 주지 않으면 ‘너와 네 아비집을 불사르리라’면서 협박합니다. 아무도 못 풀 문제를 내어서 자기들의 재물을 빼앗으려고 한다는 거지요. 마치 이제 막 새살림을 시작하는 신랑신부가 재산을 만들려고 이웃을 초빙해서 엉터리 수수께끼를 내어서 재물을 불리려고 한다는 겁니다.

한 사람당 베옷 한 벌과 고급 겉옷 한 벌씩을 내지 않으려고 7일간이나 흥겹게 먹고 마시게 해 준 집안 식구들을 불태워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고대인들이 비록 현대보다는 더 호전적이고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제정신들이 아닙니다.

애초에 그런 정신병자들을 동무하라고 데리고 온 그신부측 사람들도 황당하고 내기에 참여한 삼십인은 더 황당합니다.
‘머리 검은 짐승은 키우는게 아니라’는 옛말처럼 이 잔치에 참여한 삼십명의 청년들은 7일동안 실컷 얻어 먹고 즐기고는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합니다.

영역 성경에 보면 제 7일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제 4일째에 그런 협박을 한 것으로 나옵니다. 7일간의 잔치를 했다고 보면 이 잔인한 인간들은 신부와 그 집안을 불태워 죽이겠다고 협박하고서도 잔치를 즐긴 것 같습니다. 이미 이것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이방인이라서가 아니라 딤나의 사람들은 지극히 쾌락적이고 잔인한 지옥에서 온 악마인 것 같습니다.

여하튼 이 협박을 받고 신부는 매일같이 삼손을 조릅니다. 수수께끼의 답을 알게 해 달라고. 16절에 보면 “삼손의 아내가 그의 앞에서 울며 가로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라고 말하면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 주기를 간청합니다. 삼손이 그렇게나 천사같이 여긴 미의 여신은 이제 삼손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강짜를 부립니다.

처음 삼손은 부모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을 당신에게만 말할 수 없다며 거절했지만 결국 견디지 못하고 제7일째에 그 답을 아내에게 가르쳐 주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좋다고 그 답을 블레셋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삼손은 내기에서 보기 좋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사실 아내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댄 핑계는 왜곡된 것입니다. 삼손이 부모에게 그 꿀에 관한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계율을 어기고 모르는 사이에 그 부모로 하여금 부정하게 한 사실을 알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법을 어긴 나실인이란 비난을 받지 않으려고 하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지 그 수수께끼의 비밀이 소중해서도 신비로워서도 아닙니다.

여하튼 삼손은 어리석고 또 막돼먹은 사람입니다. 전혀 생각이라고는 없는 사람으로 그때 그때 임기응변으로 넘어가는 철부지 아이입니다.
게다가 그 아내는 더 형편없는 여자입니다. 그렇게나 힘이 센 남편을 못믿고는 자기네를 불태워죽이겠다는 협박을 받고도 그 답을 알려고 했을뿐 삼손에게 걱정거리를 내놓고 의논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니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를정도입니다. 정말이지 이상한 부부입니다.

마지막날 수수께끼의 답을 블레셋인들이 말하자 삼손은 이것이 자기 아내가 블레셋인들에게 가르쳐준 것임을 알게 되고는 또 말합니다.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아니하였더면...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자기의 아내를 남의 조종에 움직이는 밭가는 소에 비유합니다. 특히 ‘밭갈다’란 말은 많은 경우 악한 행위를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들릴라의 꾐에 빠져서 자기 힘의 비밀을 토설할 때와 너무 똑 같습니다. 그때도 역시 들릴라는 삼손의 비밀을 알기 위해 동족의 협박을 받고는 울며 불며 그 답을 알려고 수를 쓰는데, 역사는 되풀이 되고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망한다는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더 황당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삼손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다시금 삼손에게 괴력을 부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나실인의 규정과 천사가 전해준 명령을 어긴 삼손, 죄를 지은 삼손에게 여전히 성령이 임하십니다.
내기의 경품이 겉옷 삼십 벌과 베옷 삼십 벌이기 때문에 삼손은 이제 내기에 져서 주어야 할 옷을 구해야 합니다.

그는 옷을 구하기 위해 아스글론으로 내려갑니다. 이 아스글론은 블레셋의 다섯 도시국가 중의 하나로 매우 발달한 도시입니다. 이러한 경품을 돈을 주고 사려면 엄청난 돈이 들기 때문에 삼손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바로 이 도시로 내려가서 삼십명을 쳐죽이고 그들의 겉옷을 빼앗아서 이를 딤나의 청년들에게 주고는 화가 나서 고향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화려한 겉옷을 입은 사람들을 찾아 다니면서 쳐죽이고 그 옷을 뺏었을까요?

그런데 아스글론 사람들 역시 전쟁에서 적들에게서 이 겉옷을 빼앗아서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빼앗은 겉옷 때문에 맞아 죽고 겉옷도 빼앗깁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이렇게 임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입니까?
누구나 멋진 겉옷을 입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마 삼손은 멋진 예복을 입고 있는 사람을 골라 쳐죽였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옷을 딤나에 가서 줘버리고는 삼손은 아내의 얼굴도 보기 싫어서 고향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황당합니다. 그런데 그 뒷이야기는 더 황당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막장 스토리가 되어 버립니다. 삼손의 장인은 삼손이 아내를 버렸다고 생각하고 삼손의 동무되었던 자에게 아내를 줍니다. 아직 정식으로 파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딸을 주는 장인, 더구나 그 사람은 수수께끼의 답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여자와 그 집안을 불태워버리겠다고 협박한 사람입니다.
완전히 막장 스토리입니다.

그렇게 좋아서 정신을 못차리고 이방인을 아내로 맞으려고 난리를 치던 삼손은 그 일로 말미암아 아내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굉장히 신중하지 못한 감정적이며 즉흥적인 사람입니다. 좋게 말해서 기분파고 나쁘게 말하면 제멋대로입니다.
더구나 내기를 지킨답시고 다른 도시게 가서 삼십명의 사람을 쳐죽이고 옷을 빼앗아 줌으로 약속을 지킵니다.

그런 약속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목숨이 중요합니까?
죽어야 할 사람들이 죽었다고요? 왜요? 블레셋 사람이라서?
그렇다면 그 블레셋 사람이 좋아서 아버지를 졸라서 결혼한 삼손은 뭡니까?
자기의 아내를 협박하고 위협한 배은망덕한 종자를 동무로 삼은 삼손은 또 뭐란 말입니까?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되었던 그 동무에게 준 바 되었더라”
이거 유부녀가 이래도 됩니까?
화가 풀리고 나중에 삼손은 다시 아내를 보기위해 염소새끼를 예물로 삼아 아내를 찾아 갑니다. 그런데 아내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갔고 장인은 황당해 하는 삼손에게 아내의 동생, 즉 처제가 더 아름다우니까 처제를 주겠다고 합니다.

삼손이나 장인이나 아내나 삼손의 친구나 굉장한 패륜아들입니다. 완전히 막장 스토리를 제대로 찍고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분노한 삼손은 블레셋사람들의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불살라 버립니다. 여기에 노한 블레셋 사람들은 이 일의 원인을 제공한 삼손의 장인과 아내 집안을 불살라 버립니다.
결혼식날 블레셋 사람들이 아내를 협박할 때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져 버렸습니다. 전혀 뜻하지 않은 계기로.
말은 생각해 보고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말에도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쳐들어 가고 삼손을 체포해 갔다가 삼손이 블레셋 인들을 쳐죽이고 하는 복잡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 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딤나의 여인을 보고 결혼하려 한 삼손의 행동으로 얼마나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지를 보게 됩니다.

삼손은 자기의 일탈이 두민족에게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겠지요? 그래도 하나님은 그 정신없는 패륜아 삼손을 사용하여 착실하게 블레셋을 징계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욕망을 조종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전혀 의도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런것들을 이용하여서도 자신의 큰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블레셋사람이 좋아서 엎어지던 삼손은 바로 그 일로 블레셋과 개인적인 원한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힘만 믿고 설치는 삼손은 점점 더 큰 사고를 칩니다. 결국은 그도, 그의 집안도, 단지파도, 이스라엘도 피해를 봅니다.
청춘 남녀가 서로 보고 좋아서 눈이 맞아서 사랑을 하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렇게 하기를 원하셔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그들을 짝지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로미오와 줄리엣의 경우처럼 원수의 집안끼리 사랑하는 것도 얼마든지 나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 남녀를 통하여 원수들이 화해하고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비록 적국의 사람이지만 그게 뭐 어떻습니까? 국경을 초월한 사랑은 굉장히 낭만적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여자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외모를 마음에 들어 했을 뿐입니다.

아내의 행동도 이해하기 어렵지요? 남편을 속이려하기 보다는 남편에게 자기가 협박받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남편과 상의해야 될 터인데도 그 여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자기를 협박한 사람에게 시집을 가다니요? 그냥 협박도 아니지요. 태워 죽인다는 끔찍한 협박입니다.
더구나 유부녀의 몸으로. 황당합니다. 그 여자와 장인의 이해하지 못할 행동으로 그들은 그렇게나 피하려고 했던 화형을 당한 것입니다. 물론 그 원인이 아내인지 남편인지는 여기서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이렇게 삼손은 처음부터 여자로 말미암아 큰 곤욕을 치릅니다만 삼손은 그가 죽을 때까지 여자에 대한 껄떡거림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도 희한하게 다 블레셋 여인들입니다. 아마 이스라엘 여자들은 블레셋 여자들에 비해 촌스러원서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요.

그 마음보다 외모만 사랑한 삼손은 그 여자가 누가 되던지 아름답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듯 합니다. 여자 때문에 그 난리를 겪고도 또 여자에 미쳐서 곤란을 겪습니다. 그리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여자 때문에 두 눈을 뽑히고 돌무더기에 깔려 죽습니다. 자살이지요.
저는 젊은이들에게 몇가지만 당부하고자 합니다.
결혼은 신중하십시오.

아내나 남편은 일생을 함께할 반려자고 배필이지 결코 욕망의 대상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식으로 접근한다면 오늘 우리나라처럼 짐승 세상이 되어 버릴겁니다. 우리나라가 왜 짐승 세상인지는 말하기 민망해서 생략합니다.
두 번째로는 같은 신앙 안에서 짝을 찾으십시오. 신념이나 종교를 받아 들이는 마음은 가장 늦게야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는 사랑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상대방의 종교도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결코 한결같지 않습니다. 사랑이 식고 이런 일들은 가정의 큰 불행을 가져오게 됩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규율을 받아 들이는 것은 엄청나게 큰 일입니다. 이미 20,30년의 세월동안 형성된 가치관이 변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으로 모든걸 극복할 수 있어!’라고 하기 전에 신중하게 기도하고 결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자칫 잘못하면 비극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일단 결혼했다면 그때부터는 배우자의 잘못을 포용하고 일이 잘되는 방향으로 노력하십시오. 배우자의 잘못부터 찾고 무조건 피해망상에 시달려서 모든게 너의 잘못이라고 달려들면 그때는 뻔합니다. 우리집과 너네집을 비교하고 잘잘못을 따지기 시작하면 파탄은 금방입니다.

사탄은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고 서로 미워하며 증오하도록 합니다. 그것의 가장 나중이 바로 가족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옛날에는 온갖 투쟁과 미움으로 가득찬 세상 속에서도 가정은 우리가 최후까지 기댈 수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가족은 무조건적으로 나를 사랑했고 내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족도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그 배우자를 첫 번째 용의자로 생각하고 수사를 시작합니다. 이런 세상은 지옥입니다. 왜냐면 가족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기본적인 운명공동체요 사랑해야 하는 첫 번째 대상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고 네 이웃을 사랑한다고요? 그거 거짓말입니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요? 그것 역시 거짓말입니다. 가족을 우리에게 주신이가 바로 하나님 이시고요 그 하나님이 사랑하라 명한 네 이웃의 가정 처음이 바로 내 가족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우리는 한 철없는 힘만 센 꼬맹이의 행동 때문에 얼마나 큰 비극이 일어났는지를 보았습니다. 물론 이 일은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한 독립운동에 보탬이 되었을 것입니다만 글쎄요, 정작 당사자는 그걸 민족을 위한 대의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기의 정욕대로 기분내키는 대로 행하다가 점점 사태가 커져서 결국은 민족간의 비극이 초래된 데에 불과합니다.

또한 젊은이의 잘못된 이성관과 즉흥적인 행동이 얼마나 엄중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도 이야기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자에 대해서 잘못을 계속 저지릅니다. 그게 그만큼 마력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의 삶을 살면 그 피해가 말도 못할 만큼 커집니다.
생각 없이 결혼하면 그 종국은 비극입니다. 그것도 멸망에 이르는 비극이 됩니다. 생각을 깊이 하고 연후에야 행동하라느니, 결혼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해라느니 하는 말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모든 일은 먼저 기도로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일에 성령의 인도를 받으십시오. 그래야 후회하지 않습니다. 캄캄한 미로같이 이 세상에서 우리는 너무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후회하고 탄식하며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은 하나님의 인도가 없이 우리 마음대로 성큼 성큼 내딛을 수 있을 만큼 평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눈을 믿기 보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인도와 보호를 먼저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규율은 외면적으로만 순종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왜 이러한 법을 정하셨는지를 생각하고 그 취지를 깊이 생각하고 행하십시오.
나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따르십시오.

그러려고 하면 나는, 우리는 하나님과 항상 함께 동행해야 합니다.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기도하십시오. 혹시 기도를 잊어 버렸다고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호흡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만이 이 험난하고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제대로 인생길을 가게하는 인도와 보호가 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5월 18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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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기독교가 가지는 대표적인 보수성으로서, 결혼관 이나 이혼관이 손꼽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설교 본문에도 언급되었듯이 가급적이면 믿는 사람과 결혼하라는 것, 그리고 가급적이면 이혼하지 말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종교적인 사유로 이혼을 최대한 자제하는 것이 어떤 유익이 있는가? 에 대해서 저는 솔직히 말해서, 회의스러운 편이었습니다.

현대에는 이혼가정이 워낙 많기도 하거니와, 심각한 가정 폭력, 혹은 알콜이나 도박 중독, 경제적 파탄 상황이라면, 당장 생활 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이혼도 선택가능한 대안이라고 저는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나마 이 본문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은, 이혼이라는 것이 좀 더 자극적인 내 욕망에 충실하기 위해서 아내나 남편을 버리지말라는 취지로 읽힐 때가 있어서 약간은 납득이 됩니다.

실제 사례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중년의 부부는 성격이 정말이지 맞지 않아서, 자주 싸우고, 사사건건 시비가 계속 되어서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으나, 그래도 종교적 이유로 이혼을 최대한 보류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노력하는 힘든 과정을 거쳤다고 합니다. 오래도록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끝에, 마침내 부부는 서로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고, 성격의 차이를 "조금은"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그 때부터 마음이 편안해지고, 타인의 삶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사례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타인을 통해서 "인내하고, 양보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삼손의 결핍이라고 한다면, 인내심이 없어서 쉽게 눈이 먼다는 것, 즉흥적이라는 것이 치명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지 않고, 조금 참아주고, 상대방의 의견에 맞춰준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행복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내 하고 싶은대로 사는 것에 있지 않고, 서로 발을 맞추어서 살아갈 때 만족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 저로써는 놀랍기만 하고, 참 신기했습니다. / 201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