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느헤미야의 기도(느헤미야1:4-1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10. 5. 21:11

느헤미야의 기도 (느헤미야1:4-11)

 

우리는 지금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지금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나라의 정치가 어지럽고 공무원들은 부패했으며 법의 적용은 자의적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치꾼의 수준은 딱 국민의 수준입니다. 누구를 욕할 필요 없이 그런 수준의 사람을 뽑은 국민의 잘못입니다.

 

기존 언론은 이미 썩어서 더 이상 사회를 감시하는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소수의 인터넷 언론이 나와서 그런 역할을 하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미약하기만 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썩음에 대해서 선지자적 사명을 가지고 쓴소리를 해야 할 목사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몇몇 대형교회의 목사들 중에는 황당한 일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거리가 되게 하고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나라의 썩고 어두운 부분에 대해서 쓴소리를 하는 것은 이 나라가 망하기를 바라서가 아니고 이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이 나라가 하나님의 자비로 존속되기를 바라서입니다. 제가 이런 목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교회의 순결과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질까 두려워서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와  교회에 안에 있는 우리들이 모두 평안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이 정치나 나라에 관심을 가지기가 어렵기는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기 어려운데 쓸데없는 데 신경을 쓰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국가라는 배가 가라앉으면 그 안에 탄 우리들이 모두 침몰하게 될 것이니 어찌 나라를 위해서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순박한 신자들이 믿고 따라야 하는 교회의 목사들이 제대로 된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느헤미야의 구국의 기도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오늘 우리에게 정말 적합한 기도입니다.

 

느헤미야는 지금으로부터 약 2400여년 전의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3차 포로귀환기의 지도자입니다. 정확히는 페르샤에서 임명한 유대총독으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위해 노력한 사람입니다.
그가 유대의 총독이었다고 해서 매국노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이나 유다는 페르샤에 멸망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을 멸망시킨 나라들을 페르샤가 멸망시켰을 따름입니다. 페르샤의 고레스왕은 조서를 반포해서 유대인들을 포로에서 해방시키고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했었는데 이렇게 1차와 2차에 걸쳐 고국으로 돌아간 유대인들이 폐허위에서 성을 쌓고 뭔가 자기네들의 신앙공동체를 재건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페르샤의 정치적인 지배를 받고 있는 상태로 즉 독립국은 아닙니다. 속방도 아니고 그냥 유대인이 유대인의 옛터에 세우는 작은 지방 정도?

 

느헤미야는 페르샤 왕의 술맡은 관원이었는데 모국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왕에게 간청하여 유대로 간 사람입니다. 게다가 그는 내시였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세상의 중요한 낙이 끊어진 사람입니다.

 

1.궁전에서 고국의 소식을 듣다
본문의 기도가 나온 배경을 먼저 살펴보면 그가 페르샤의 아닥사스다 왕 20년에 수산궁에 있을 때 유대로부터 몇 사람이 와서 유대와 예루살렘의 형편에 대해서 소식을 전합니다. 그런데 뭐라고 하는고 하니 유대사람들이 지금 고토에서 큰 환란과 능욕을 받고 있으며 예루살렘성이 훼파되고 성문들이 타버렸답니다.

 

성이 왜 필요한지를 보면 성은 도적들이나 외적의 침입, 짐승의 해로부터 거주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성안에 살면 통치자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그래도 성벽이 주는 이점이 너무 크기 때문에 성 밖에서 거주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도 나도 성안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성벽이 훼파되고 성문조차 타버렸다면 이것은 유대인들이 지금 외적의 침입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본토의 유대인들은 지금 외적들의 침략과 약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왕궁의 고위관직을 사퇴하고 유대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고 먼저 기도하기를 시작합니다.

 

2.울고 금식하며 기도하다
1)하늘의 하나님
느헤미야의 기도를 살펴보면 그는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사실 느헤미야가 부른 하나님에 대한 이 호칭이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의 기도가 어떠할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하여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온 세상에 대한 통치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고대인들의 관념으로 가장 위대한 신의 보좌이며 온 세상의 위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지요.
뿐만 아니라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이란 말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해 달라고 하는 바램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부분은 이 뒤에 나오는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란 표현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단순히 자기의 백성을 사랑하고 긍휼을 베푸시며 언제까지나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일 뿐만 아니라 크고 두려우신 분이십니다. 죄악에 대해서 추상같은 심판과 세상의 공의를 지키기 위하여 채찍을 드시면 아무도 그분의 진노에서 피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요즘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 아니라 단순히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이 두렵다는 말은 원문상으로는 ‘두려워하다’‘전율하다’는 뜻 뿐만 아니라 ‘존경하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분의 진노가 무섭기는 해도 결국 그 진노는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엄중한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서 내리는 정당한 심판자의 분노이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으로 표현한 데에는 지금 자기들이 포로의 몸으로 이곳저곳에 흩어져있고 또 고토에 있는 동족들이 환난에 처해있는 이 모든 현실이 하나님을 거역했던 죄악 때문임을 시인한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으로 표현한 데에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싸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환란을 겪고 있음은 과거의 죄악때문 이지만 지금 우리는 다시 아버지 앞에 돌아왔고 아버지의 법을 제대로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지금 우리를 핍박하는 대적들은 하나님의 법을 제대로 지키고 있지 않으니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보시고 저들에게 심판의 채찍을 드셔서 우리로 하여금 곤궁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라는 기원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2)종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기도하오며
느헤미야는 그 위대하고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에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좀 웃기는 일입니다. 그는 지금은 페르샤의 왕궁에서 왕의 술맡은 관원으로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비서실장이거나 수석비서관입니다. 특히 술맡은 관원은 왕이 마시는 술과 음료에 독을 타서 암살하려는 시도가 빈번했던 과거에 왕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에게 맡긴 자리입니다.

 

전제 군주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왕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오랜시간을 함께할 수 있다는 자체가 바로 권력의 실세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내시입니다. 비록 권세는 높지만 삶의 소망가운데 중요한 것이 끊어진 사람이지요.

 

그는 과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적이 없을까요?
성경을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아도 느헤미야의 이름은  본서에 기록된 이외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가 유대의 왕족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미한 가운데서 자수성가한 그런 사람으로 보입니다. 다니엘은 유대의 귀족일걸로 추측되지만 느헤미야는 결코 고귀한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고국에 원망의 마음이 많을 겁니다. ‘내가 약소민족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런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어, 나라가 도대체 나에게 해준게 뭐야?‘ 보통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 합니다.
비록 왕의 궁전에서 왕의 총애를 받으며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가 아주 소중한 것을 포기했기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나게 큰 희생일 수 있습니다. 왜 원망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아내도 없지, 자녀도 없지 그에게 마음 붙일 데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처지라면 고국을 걱정하기보다 오히려 이런 처지에 대한 보상심리로 동족에 대해서 더 악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고국을 더 업신여기며 원망하고 괴롭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고국의 어려움을 마치 자기의 집이 어려움에 처한 것처럼 울고 슬퍼하며 금심하며 기도합니다.
느헤미야가 이상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느헤미야를 희한하게 보는 우리가 더 이상한 사람입니까?

 

3)나와 나의 아비집이 범죄하여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나의 아비집이 범죄하여”
이 말은 느헤미야의 가문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느헤미야는 자기의 선조들, 즉 이스라엘의 모든 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조들을 나와 동일시합니다. 그래서 실상은 직역하면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지금 페르샤에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훼파에 전혀 책임이 없습니다. 성이 훼파된 것이 그 백성들의 죄  때문인 것 같은데 그래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는 ‘우리의 죄’라고 자기와 이스라엘 사람들을 동일시합니다.

 

따지고 보면 먼 고국의 소식에 그토록 애타하며 자기의 죄를 통회 자복하고 울며 금식하며 주야로 중보기도 하는 것은 조금은 이상하고 또 과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기와 동족을 분리하지 않고 ‘우리’라고 동일시합니다. 민족에 대한 철저한 연대의식이 있기 때문에 이런 식의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이지만 세계사적으로는 정말로 보잘 것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오늘날에야 ‘유대인의 교육방식을 배우자’느니 ‘그들이 정말 지독한 민족’이라느니 하지 그 옛날 느헤미야 시대에는 그런 말도 없었던 시절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된 해방노예들이 세운 나라이고 사막가운데에 있는데 영토는 작고 인구는 적어서 걸핏하면 이웃나라의 침략을 받았고 그도 모자라 그 작은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서 서로 으르렁 거리다가 결국은 이웃 강대국의 노예가 되어서 포도로 잡혀가서 이곳저곳에 흩어져 기거하다가 이제 포로에서 놓여나서 극소수의 사람들이 나라를 세우려고 하지만 번번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입니다. 한마디로 형편없는 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도 그는 자기 민족을 비하하지 않고 무한한 애정과 자기와 민족을 동일한 운명공동체로 생각하고 있다는게 놀랍지 않습니까?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역시 ‘약소국의 비애’니 ‘한번도 남을 침략해 본적이 없다’느니 하면서 스스로를 비하합니다. 요즘도 이런 말 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역시 조선✕은 안돼’ ‘조선✕은 맞아야 돼’와 같은 말들 말입니다. 믿는이들이 이런말을 하면 이건 다 하나님에게 하는 기도가 됩니다. 정말 조심합시다. 이건 옛날 왜인들이 우리를 스스로 하찮게 여기게 하려고 세뇌시킨 말들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느헤미야 당시의 이스라엘에 비하여 어마어마한 강대국입니다. 더구나 우리국토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몇몇 외국에 비해서 웅장한 맛은 덜해도 아기자기한게  아름답습니다. 금정구에서 정관으로 버스를 타고 오면서 차창 밖의 경치를 보노라면 정말 아름답다는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신록예찬이라고 봄의 신록이 햇빛을 투과한 모습은 가슴뛰도록 아름답습니다. 바다와 산이 조화를 이루고 물과 나무가 도처에 흔한 말 그대로 금수강산입니다.

 

더구나 나라가 분단된 상태에서도 세계에서 손꼽는 강대국입니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세계에서 손을 꼽을 정도입니다. 그런대도 스스로 우리를 비하하고 나와 동족을 구별해서 ‘저들의 죄’와 ‘저들의 잘못’에 대해서만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지나치게 비하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요,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려고 하면 그 공동체에 대한 무한 애정을 가지고 공동체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며 공동체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공동체와 나를 분리해서는 결코 공동체를 위해서 일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이나 유다에서 포로로 잡혀온 사람이 아니라 외국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포로민의 몇 대째의 후손일 따름인데도 그래도 고국의 일에 이렇게나 슬퍼하네요.

 

그럼 저들은 어떤 범죄를 저질렀습니까?
느헤미야는 말하기를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말 성경은 아무리 7절을 살펴봐도 주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문을 직역하면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라는 말을 ‘우리가 당신을 거역하여 매우 패역하게 행하였습니다’가 됩니다.
‘우리가 당신을 거역하여 매우 패역하게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가나안에서 나라를 만들게 하면서 너희가 나에게 범죄하고 나와의 언약을 파기하면 너희를 열국 중에 흩으리라고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범죄했고 이제는 포로의 신세가 되어서 이나라 저나라에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느헤미야는 겸비한 자세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나라가 멸망하여 그 백성들이 흩어지고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이 파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악이 만연하여 더 이상 나라를 존속시킬 수 없다고 판단될 만큼 나라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백성들이 그 나라를 저주하는데 어떻게 그 나라가 존속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이 나라의 전체적인 도덕수준이 발바닥인 이유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우리의 주위를 밝히고 깨끗하게 하지 못해서이므로 오늘의 우리도 역시 느헤미야처럼 ‘우리가 범죄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860만의 신교도와 540만의 구교도를 합치면 남한 인구의 30%가까이나 됩니다. 보통은 다른 강력한 종교가 없는 상태에서 인구의 1/4이 어떤 종교를 믿는다면 그 종교는 국교나 마찬가지랍니다.
이미 1/4 이상의 국민들이 기독교를 믿고 있는데 하나님의 법 아래 있는데 이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게 하지 못한다면 그건 우리네 잘못입니다.

 

한가정을 네명으로 보았을 때 한가정에 적어도 한사람이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법아래 있다면 다른 세명의 가족들이 적어도 나쁘게 사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라고까지 제가 요구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다른 가족들이 세상에 악을 행하는 것은 막을 정도의 영향력은 발휘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만일 그러지 못하다면 우리네의 삶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잘못해서 저런 일이 벌어지니 주님 저들을 벌 하시 옵고 우리를 살려주시옵소서!’가 아니라 ‘우리가 범죄 하였사오니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족 중에 누가 범죄하였다면 그때도 ‘그’와 ‘나’를 구별하여 생각할겁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나라를 다시 회복하고 나라가 바로 설 수 있습니까?

 

9절에 답이 있습니다.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지 않아서 나와의 언약을 파괴했기 때문에 망했어. 그러니 이제는 거꾸로 내 계명을 다시 지키고 그래서 나와의 언약을 지키면 너희의 현재 상태가 어떻든지 간에 다시 나라를 회복할 수 있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느헤미야 당시에 유대인들이 중근동에 흩어져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불행한 근세사의 영향으로 민족이 뿔뿔이 흩어져 있습니다.
만주에 사는 조선족, 중앙아시아와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 일본에 사는 재일 교포들, 그리고 하와이로 건너간 동포들은 모두 우리의 불행한 역사로 비롯된 것입니다.

 

제가 설교문을 준비하는 오늘 아침에도 요양 병원에 불이 나서 21명이 죽고 여러명이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이 나오고, 이틀 전에는 버스터미널에 불이 나서 7명이 죽었다고 하고, 가장 비극적인 세월호의 침몰을 포함해서,
연초에 부산외대생들이 죽은 일로부터 시작해서 계속해서 죽었다는 소식만 들리니 사람들이 굉장히 불안해 하고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게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의 경고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경고라고해도 불안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무리 우리의 현 상태가 형편없어도 우리가 죄에서 돌이키고 스스로 합심하여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공의를 세운다면 다시금 이 나라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며 흩어진 민족을 하나로 모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 역사에 보면 나라가 망하기 전에 여러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 그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 옛날의 역사에서 사람들이 자연 재해나 징조를 보고 불안해 할 때 스스로 돌이켜서 하나님의 앞으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의를 실천했다면 전혀 다른 상황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 말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일을 기억하십니까?
나라의 멸망을 선고받은 앗수르의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 선지자의 선포에 왕에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자 하나님은 앗수르의 멸망을 유보하셨고 오히려 앗수르가 더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셨다는 것을.

 

당시 앗수르인들은 이웃나라의 침략으로 시달렸고 역병이 퍼져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으며 심지어 일식이 일어나서 사람들은 ‘이제 이 나라가 망하려나보다’라고 불안해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분명 멸망의 경고였지만 그들이 회개하자 화가 변하여 복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런 불행한 일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더 늦기 전에 돌이키라는 뜻이지 우리의 멸망이 예정되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이 가장 적기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 서있는 위치에서 하나님의 법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퍼지게 하도록 노력하면 될 일입니다.

 

이 기회에 나라를 전면적으로 개혁하여 부패하고 썩은 시스템을 고치고 공직자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책임지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돌보고 사람들은 감사와 미안함을 알고, 서로 서로 돕고 선을 행하기로 한다면 우리나라는 오히려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대통령이나 정치가나 사령관이나 재벌이 아니어서 우리의 행동이 영향을 별로 미치지 못할 것 같아도 우리의 삶에 대한 자세가 하늘 아버지 앞에서는 오히려 더 중요함을 기억하십시오.
에스더가 어떻게 왕후가 되었는지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 땅의 영적인 역사의 주인공은 우리입니다. 모든 보이는 현상의 뒤에는 영적인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행동을 보시고 이 나라에 화와 복을 선택적으로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충분히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흘러 넘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이 땅에서 부정과 부패를 몰아 낼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전래된 가장 단시일 내에 부흥한 나라이며 지금도 가장 왕성하게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이 몰려있는 이 나라가 그 영광스런 역사에 걸맞게 기독교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며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 또 지키게 서로 권면한다면 지금의 이 사태는 우리의 멸망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다시 돌아오라 내가 너희를 복주리라’는 주님의  기쁜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안해 하지 말고 우리 모두 ‘나’와 ‘너’가 아니라 ‘우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민족의 아픔을 위해서 기도하고 항상 ‘하나님 앞에서’의 의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10월 5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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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그동안 밀렸었던 설교문들을 올립니다. 5-6개 정도가 있다보니, 시차가 약간 있을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기도 편을 올리면서 이른바 유체이탈화법을 쓰지 않는게 중요하다 싶었습니다. 너와 내가 다르다. 일이 일어난 것이 너의 잘못이다 라는 생각은 정말이지 공동체를 이끌 수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의 잘못이며, 함께 고쳐나가야 한다 라고 생각해 봅니다. 한 사람의 느헤미아가 아닌, 모두의 기도소리가 모이게 되어야 세상이 정말로 변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