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활의 노래(사무엘하1:17-)(극동방송 설교 원고)/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5. 12. 19. 15:07

 

활의 노래 (사무엘하1:17-)


사람들은 보통 남의 뒷담화를 하기 좋아합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좋게 시작하다가도 은근히 남을 꼬집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다가 마침내는 부정적인 단점들을 이야기합니다. 이건 친구들 사이에서도 결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남의 얘기들은 마치 오징어를 씹는 것 같아서 씹으면 씹을수록 더 고소하고 맛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씹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남에 대한 열등감이 있어서 일까요? 아니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외의 모든 이들에 대해서 경쟁심과 질투를 느끼는 것일까요? 무엇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의 슬픈 자화상이고 한계입니다. 그러나 때로 이런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야 말로 대인배입니다. 소인배가 아닌 대인배.

 

다윗은 아말렉소년으로부터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명 활의 노래라는 죽은 두사람을 애도하는 시를 지어 부르게 합니다. 이 노래는 처음에 유다족속으로부터 온 이스라엘로 퍼져서 마침내는 야살의 책에 기록이 되기까지 퍼지게 됩니다.
이 노래는 두사람의 죽음을 애도하고 두사람의 용기와 미덕을 칭송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실상 사울에게 큰 원한을 갖고있을 자기 집안과 유다지파에게 이 노래를 먼저 가르칩니다. 유다지파는 사울에게서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사울의 후반기는 거의 대부분이 다윗을 잡아 죽이려는 몸부림이었고 이 와중에 다윗의 집안과 유다지파는 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자기 집안과 유다지파가 먼저 이 노래를 부르게 한 겁니다. 그것은 이 노래를 유다지파에게 가르침으로서 작고한 사울왕과 요나단에게 경의를 표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아마 다윗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사울의 집안이나 베냐민지파가 다윗의 집안이나 유다지파를 미워하는 마음이 좀 덜하게 될 것입니다.

 

야살의 책은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들의 행적이나 의미있는 일들을 기록한 책으로 이스라엘 역사와 더불어 계속적으로 기록되어가는 책입니다. 여호수아10:13절에도 야살의 책이 언급되어 있음으로 보아 이 책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활의 노래가 기록되었답니다.

 

아마 다윗이 왕이 되고 난 다음 이 활의 노래를 야살의 책에 특별히 기록할것을 명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왜 이 시의 제목이 활의 노래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22절에 ‘요나단의 활’이란 문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우리가 알다시피 중국의 관중과 포숙처럼 매우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관포지교의 그 관중과 포숙말입니다. 그래서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너무나 아름다운 우정의 표본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심지어 요나단은 자기에게 응당 돌아와야 될 왕좌마저 다윗에게 양보할 만큼 다윗을 친구로서 사랑한 사람입니다.

 

물론 요나단과 다윗은 친구이기도하면서 또 처남과 매부지간입니다. 왕의 자리는 부모형제도 몰라본다고 하는 자린데 왕의 자리까지 양보한다면 보통 우정이 아닙니다. 정말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굉장한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를 추모해야합니다.
이 활의 노래에도 요나단에 대한 애도와 추모의 마음이 절절이 흘러 넘칩니다.

 

그런데 사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의 장인이었다가 자기의 아내를 강제로 다른이에게 주어버린 자이며 자기를 죽이는 일을 모든 일에 우선한 자기의 가장 강력한 원수였습니다. 원래 모든 원수 중에서 사랑의 원수가 제일 가는 원수라고 하쟎아요. 그런데 다윗은 바로 그 사울조차 애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애도뿐만 아니라 그의 용맹과 미덕을 기리고 단한마디도 사울의 나쁜 점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요? 정말로 굉장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그가 나에게 원수이거나 큰 피해를 준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그를 향해 악독을 드러냅니다. 그렇지 않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일지라도 상대방의 허물을 보고 , 은근히 비유적으로 그를 야유하고 비꼼으로써 쾌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남을 비꼬고 폄하함으로서 만족을 느끼는 족속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이 자기에게 그렇게 몹쓸 짓을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이 시에서 단 한마디도 사울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표출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친해도 마음에 맺힌게 있을 수 있을 터인데 다윗은 그렇게나 사울에게 핍박을 당하고도 그런 서운한 감정이나 사울의 평판을 떨어뜨릴 목적의 어떤 나쁜 단점도 기록하거나 유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울은 이 시에서 민족의 영웅으로 묘사되어 있고 그를 잃은 것이 이 민족에게 더할 수 없는 불행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다윗의 인격이 보통은 넘는 것 같습니다.
실로 신정왕국의 새로운 국왕이 될 만한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는 이시를 찬찬히 분석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의 내용 중에서 두가지만 살펴본다면 19,25,27절에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어귀‘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란 말은 이 애가의 후렴입니다.
마치 우리 찬송가의 후렴과 같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절에 ‘싸우는 병기가 망하였도다’ 란 말에서 ‘싸우는 병기’는 사울과 요나단을 상징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너무나 용맹스럽게 싸웠기 때문에 마치 그들 자신이 병기였다는 말입니다. 칼이나 창같은. 이건 사실 왕과 태자로 국가의 수호를 책임진 사람에게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망하였다’는 말은 전사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이 시는 시답게 수많은 상징과 은유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에 분노하며 애타하다가 그들의 영웅적인 행동을 미화하며 송축합니다. 이런 식의 시가 많이있어서 시 자체는 별로 이상할게 없습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영웅화되고 칭찬받고 미화되는 그 대상이 실은 살아생전에 자기의 가장 큰 원수였던 자입니다.

 

이 시만을 본다면 다윗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가장 잘 지키는 자입니다. 다윗에게 원수도 이런 원수가 없습니다. 다윗뿐만 아니라 다윗의 형제들도 이스라엘에서 살 수 없어서 블레셋으로 어디로 도망다닌, 정말 말로 할 수 없을 만큼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그 원수를 사랑한 겁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끊임없이 다윗이 사울을 애도하며 칭송하는 애도시를 지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사울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4장20절부터 사울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그런즉 너는 내 아비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맹세하라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살아 생전의 맹세를 지키기 위하여 그는 활의 노래를 유다지파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그리고 활의 노래는 유다지파를 넘어서 전 이스라엘에 퍼지게 된 겁니다.
이 노래로 인하여 우리는 무엇을 기억합니까?
사울의 용맹, 사울의 고매한 인품, 사울의 영웅적인 행위
천만에요

우리는 오히려 원수조차 사랑한 다윗의 고매한 인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사울과 요나단을 기리기위해 지은 활의 노래를 보면서 우리는 오히려 디윗의 대인다운 풍모를 기립니다.

 

나에게 조금 싫은이가 있습니까?
좋은 말 한마디를 더 해보십시오
나를 미워하며 욕하는 이가 있습니까?
오히려 칭찬해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감히 상상하는 이상의 좋은 결과를 보게 될 것이며, 그 말이 결국은 돌고 돌아 나에게 선으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말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하는 험담은 결국 돌고 돌아서 우리를 겨누는 비수가 될 것이며 우리가 남에게 하는 덕담은 결국 돌고 돌아 나의 성가를 높여 주고 나의 우군을 하나 더 늘리게 될 겁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 사회가 사랑과 관용으로 나아가게 만들 겁니다.

 

오늘날 같은 남을 미워하며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시대에 한번쯤 활의 노래를 지어 원수를 기리며 칭송한 다윗의 신앙을 상고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성도들에게만 요구되어지는 일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요구되어 지는 일입니다. 하물며 성도된 우리들이야 당연히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남을 칭찬하십시오. 그의 실수와 부족함 속에서도 긍정적인 면을 찾아서 이야기 하십시오. 그러한 행동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거대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오늘 활의 노래에서처럼 사울과 요나단을 기리는 노래를 펴서 원수를 사랑한 다윗의 집안에게 베냐민지파는 언제까지나 든든한 우군이었습니다. 나중에 세월이 흘러서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뉠 때 열 개의 지파는 북쪽으로 독립했지만 베냐민 지파만은 유다지파와 더불어 다윗왕가에 충성하는 세력으로 남았습니다.

 

.

 

명심하십시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가고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들을까봐 전전긍긍하지 말고 그냥 칭찬하십시오. 계속해서 칭찬하고 용기를 주십시오. 긍정적이고 희망찬 말로 상대를 격려하며 높이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그러한 멋진 삶의 지혜를 이 활의 노래에서 배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부산 극동방송 라디오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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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가급적) 시간을 아껴야 하므로 정직하게 써본다면 이렇습니다. 옛 중국 고사가 떠오릅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아주 멋진 악기 연주자가 있었는데, 친구가 죽자 너무 슬퍼서, 그 뒤로는 악기를 다시는 켜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떤 영화가 생각납니다. 너무나 아끼는 자식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병으로 죽게 되자, 오래도록... 웃음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럼에도 희망을 담고 싶습니다. 그래서 영화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보겠습니다.

 

영화 제목은 제 블로그 검색에 있습니다. 프랑스 영화,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I've Loved You So Long, 2008) 입니다. http://srw.kr/1189 (◀ 왼쪽컨트롤Ctrl키+마우스클릭) 번글, 2년 전 글인데, 과거 리뷰입니다. 거기서 딱 한 줄만 발췌해 온다면 이렇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 입니다. 좋습니다. 그 다음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까?

 

어렴풋이 기억나는 게 있습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산다... 던가요.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람은 서로 기대어서 산다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는 서로 도와가며, 또 기쁠 때에는 함께 즐거워 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더 건강해 지는 게 아닐까요? 요즘 저는 나들이나 산행을 한 번씩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에게서 배울 때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좋은 길(산책길)을 혼자 왔느냐, 여자친구는 없냐 라고, 농담을 던지시는 어른 분들을 만나서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모릅니다. 사실은 그 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쩐지, "청년아, 늦지 않았다. 힘내거라." 라고 격려로 들리기도 합니다.

 

즐겁게 인생을 기뻐하면서, 낮은 등산길이라도 열심히 오르는 어른들. 금정산 금샘 사진을 보여주면서, 저기는 찾기 어렵다며 허허허 농담을 던지는 어른들. 우리 젊은 세대는 어쩌면, 너무나 오만한 자리에 앉아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스마트폰으로 머리만 빨라졌고, 정작 사랑은 발바닥이라는 말을 잊은 세대인지도 모릅니다. 꾹꾹 손으로 필사해 놓은 박노해 시인의 시를 반사하고 오늘 덧붙임을 마칩니다.

 

사랑은 발바닥이다.

나는 '발바닥 사랑'만을 믿는다.

머리는 너무 빨리 돌아가고,

생각은 너무 쉽게 뒤바뀌고,

마음은 날씨보다 변덕스러우니.

 

2015. 12. 19. 리뷰어 시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