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성령의 선물을 받으라(사도행전2:37-42)/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11. 2. 23:30

성령의 선물을 받으라 (사도행전2:37-42)

 

요즘 국내외적으로 속시원한 소식보다 속 답답한 소식만 들려옵니다. 별로 특별한 일은 아니지요. 왜냐면 우리가 철이 들고 세상을 느끼기 시작해서부터 속 시원한 일들이 몇 번 있었는지...
그래서 우리는 항상 슈퍼맨을 꿈꿉니다. 알라딘의 마술램프를 꿈꿉니다. 소박하게는 도깨비 방망이를 꿈꿉니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를 꿈꿉니다. 동화같습니까? 나이 많은 우리들에게는 그런 생각이나 상상이 어울리지 않습니까? 어서 꿈을 깨고 현실로 돌아오라고요?

 

그러나 우리가 그런 꿈을 이루는 놀라운 방법이 있습니다. 마술램프도 필요 없고 도깨비 방망이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슈퍼맨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충만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기만 하면 세상이 능히 감당할 수 없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인간의 두뇌로 설정한 한계가 전혀 들어 맞지 않는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하는 놀라운 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도 교회에게도 성령의 임재가 필요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임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하루하루 근심하며 걱정하며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치이고 좌절하여 낙담하며 한숨만 쉬게 될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세상의 법칙은 그리스도인들이 헤쳐 나가기가 너무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과 경쟁하면 우리는 경쟁력이 없어서 뒤처지고 낙오하게 됩니다. 왜냐면 그들 세상은 자기들의 법칙으로 사람들을 경쟁시키기 때문입니다.

 

술도 잘마셔야 되고 노래도 잘해야 되고 비위도 잘맞춰야 됩니다.

뇌물을 주면 받을 줄도 알고 또 적당하게 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게다가 룸살롱에서 접대도 잘해야 하고 또 접대도 잘 받아야 합니다.
뿐입니까 적당히 불의에 눈감고 이것이 진리라고 해도 이익이 되지 않으면 모른척하고 인간보다 물질이 우선이며 정의보다 효율이 더 우선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법칙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감내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주일날 교회와서 예배드리고 하는 시간에 믿지 않는 친구들은 공부합니다.
옛날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그때는 중간고사니 기말고사니 하는게 없었습니다. 대신 매주 월요일 마다 두시간씩 시험을 칩니다. 국어, 영어, 수학 하고 다른 과목 한과목씩. 이런씩으로 하니까 주일날 교회 가는 저는 엄청나게 불리한 겁니다. 그 시간에 도서관에 가서 공부한 친구에 비해서 공부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걸 어떻게 극복합니까? 주일 오전예배, 오후 예배 이렇게 두 번을 갔다 왔다까지 합치면 거의 7시간 정도가 됩니다.

 

게다가 교회 갈려고 준비하는 시간까지 하면 머리가 세상 사람보다 두배 더 좋지 않은 다음에야 교회 안가고 공부하는 학생들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 공부도 잘하는 친구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고 노력도 엄청하는 그야말로 슈퍼맨같은 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가는 평소에 공부하면 되지 않냐고요? 당시 고등학생들은 아침에 눈뜨면 학교에가서 열한시가 넘어서 집에 오는데 평소에 공부하는 시간이 거의 비슷합니다. 그래서 주말에 공부량이 차이가 납니다. 주말공부가 그 학생의 시험성적을 좌우하는 구조에서 빼도 박도 못하는 거지요.

 

이런 식으로 따지고 보면 그리스도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받습니다. 우리가 자초했던 아니던 우리가 싸울 룰은 그리스도인에게 상당히 불리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자기를 진심으로 신뢰하며 자기를 섬기는 자녀들을 그냥 두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그리스도인들 중에 성공한 사람도 분명히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으로 볼 때 성공한 그리스도인이 많지만 과연 그들이 그리스도의 법으로 성공했는지를 살펴보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세상과 똑 같은 방법으로 성공했다면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성공이 아닙니다. 사탄의 방법으로 세상의 방법으로 싸워서 이긴 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나라를 저버린 행동입니다.

세상과 똑 같이 속이고 세상과 똑 같이 남을 짓밟고 세상과 똑 같이 음모를 꾸며서 성공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눈에 성공이 아니라 대재앙이요 큰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대 반전이지요.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믿음만을 가지고 세상의 한구석에 조용히 엎드려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야 합니까? 그럴 수는 없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데체 우리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까?

 

제가 항상 강조하듯이 오늘날 이 땅의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땅의 교회는 성령님을 제외한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거대한 건물, 최신의 설비, 수많은 교인들, 넘치는 헌금, 많이 배운 목사들, 그리고 각종 최신의 프로그램들.

 

이 모든 것이 교회를 제대로 세우기위해서 필요한가는 놔두고 교회에 꼭 필요한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기도한다고, 오시 옵소서 한다고 해서 반드시 임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풍진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성도로 제자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1.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전에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두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 역시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더러운 곳에는 오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거룩한 성령님은 죄악이 있는 곳에는 본질적으로 거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악을 그냥 돌출해서 부숴버리고 싶어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가진 채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그분 안에 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말끔히 씻어야 합니다.


여기서 회개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눈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친다고 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회개했다고 여기면 곤란합니다. 회개는 뉘우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길을 완전히 돌이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게다가 어떤 개인에게 씻을 수 없는 손해를 주었다면 회개할 자는 마땅히 그 사람의 손해를 보충해 주거나 피해를 입은자에게 용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생활하는 자의 모든 언행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이 지상에서 대표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이름에 욕이 되지 않게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맺힌게 있으면 저 하늘에서도 맻히게 될 것이므로 이 땅에서 가능할 때 풀어 버리는게 좋습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고조선시대, 부여시대에 한번 잘못을 하면 열두 배를 배상했다고 합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적질을 한 것의 네 배를 갚았다고 합니다. 삭개오는 자기가 토색질한 것의 네 배를 갚겠다고 주님에게 약속했지 않습니까?

 

여하튼 자기가 지은 죄를 보상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피해자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는 다른 이에게 선행을 베풀어서 자기가 지은 죄를 조금이라도 사해보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아마 그런 회개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으로 세상이 몰라보게 좋아 질 것이고 이 땅에서 저절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굳건하게 서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다 받았다고요? 그래요, 우리는 다 받았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영적인 의미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형식적인 세례가 아니라 우리의 이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을 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도라는 타이틀로 세상에서 당당하게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사탄이 우리를 보고 ‘아 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구나!’하고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며 그리스도의 나라 백성이 됨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세상의 지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를 위해서 살아야 비로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성령을 받으라
자, 그럼 이 두가지만 하면 자동적으로 성령의 선물을 받습니까?
천만에요. 천만에요.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고로 자동적으로 성령을 우리가 받을 수가 없습니다. 받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제가 말씀 드린 두가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안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적어도 이 두가지를 하고 나서 우리는 성령의 선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원문에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리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즉 앞의 두 개하고 성령을 받는거 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이지요. 단지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성령도 받으라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의 본문에는 어떻게 해야 성령을 받을 수 있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는 하나님이시므로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는다는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분이므로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정해진 공식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유추해 볼 수는 있습니다.

 

뭡니까?
성경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사랑하며 교제하고
이웃과 나누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교인들의 삶이었지만 그들, 즉 성령받은 이들의 삶이기도 했기에 우리는 성령을 받은 사람이 이렇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걸 거꾸로 실천하면 성령을 받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특히 저는 제가 성도들에게 가장 잘 권하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뭐 거창한 것은 아니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의 보호와 인도를 기도하고
하루의 틈틈이 기도하며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게 스스로 돌아 봅니다.
마음에 거리끼는 일은 하지 않고
중요한 일에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합니다.
그리고 자리에 눕기 전에 오늘 하루를 지켜주심에 감사하고 내일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런 식의 삶을 산다면 어느 순간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목사인고로 약간 다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시로 내가 부족함을 느끼거나 갈급함을 느낄 때 산에 올라서 밤을 새는 것입니다. 여러명이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산에 올라 매트를 깔고 그위에 침낭을 펴고 기도하고 자는 것입니다.
춥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하고

 

이런 식의 산기도가 회를 거듭하여 이루어지면서 어느 순간엔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건 저의 경우고 함부로 권하기는 어렵습니다.

참고로 예전 성경에서는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되어 있었는데 이번 성경에서는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은 결코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한 걸로 보입니다. 그러나 원뜻은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입니다.

 

3.구원을 받으라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네 번째로 요구합니다. 구원을 받으라
그러나 구원은 받고 싶다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주시는 분이 구원해 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셔야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럼 구원은 어떻게 받지요?
‘이제부터 너희는 구원받았다’는 인증서가 발급되어야 구원을 얻습니까?
아니면 교회 앞에서 그리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너희는 구원받았다는 선포라도 해야 합니까?

 

그런거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나오지 않지만 성경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고 말합니다. 본문에서도 이 말을 듣고 삼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요, 예수를 나의 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예수만 믿는다고 구원을 얻는다면 너무 말이 안되는 것 같지요? 믿지 않는 식자들은 이 점을 가지고 기독교를 비판하던데 우리 여기서 찬찬히 한번 따져봅시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오늘날 한국의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게 교회에 매주 출석하고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집사와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삶에서 예수의 법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그의 모든 삶을 규율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니 최소한 그러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며 그렇게 살지 못함을 걱정하고 아버지의 뜻에 맞는 삶을 살기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여기 본문에 나온 예수를 믿는다는 말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백성 됨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곧 하나님의 나라를 규율하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삶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법은 세상의 법보다 더 자비롭고 은혜로워서 융통성도 발휘되지만 어떤 면에서는 형식적인 면을 넘어서 동기와 생각까지도 규율하는 보다 더 철저한 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 같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솔직히 오늘날 우리에게 구원이 별로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구원은 죽은 이에게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 그리고 당분간 죽을 생각도 없으니까 구원이 필요 없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로마시대 초기 교회에서는 세례받기 전에 지은 죄는 세례를 받음으로 사함 받지만 세례 받고 난 다음에 지은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이상한 믿음이 유행해서 많은 유력한 이들이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으려고 했다는 웃지 못할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말보다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말이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구원’자체보다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는’ 상황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쓰인 ‘패역한 세대’는 원래 도덕적이기 보다는 물질적인 개념입니다. 즉 목수가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을 만큼 비뚤어지고 모가 나 집어던져 버려야 할 정도로 쓸모없는 나무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성경은 당시의 세대를 ‘전혀 쓰지도 못해서 던져버려야 할 나무’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뚤어진 나무를 제대로 펴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이거 섣불리 펴려다간 부러집니다. 이런 나무는 결국 불쏘시개로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불에 살리워 진다는 말입니다. 그런 세대에서 구별되이 나오는 것을 바로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나무를 버리지 않고 뭔가 필요한 것에 사용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도 그와 같습니다.
장차 멸망할,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왜곡되고 뒤틀린 가치관을 가진, 그래서 도저히 정상적인 사회로 뜯어 고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그래도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이 세상을 위하여 뭔가 보람되고 좋은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용이 가능한 재목들을 가려내어서 이들을 불쏘시개의 운명에서 건져내어 새롭게 사용하는 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도 이와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굽고 비틀어진 나무를 부러뜨리지 않고 다시 펼 수는 없습니다. 그건 우리의 능력 밖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쓸모없어서 불쏘시개로 아궁이에 던져질 운명에 처한 나무들 가운데서 그래도 뭔가 새롭게 사용할 수 있고
장작이외에도 나무 본연의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쓸만한 나무를 골라 내어서 한 개의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굽고 쓸모없는 나무를 펴고 곧게 하고 쓸모 있게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실 것입니다.

 

불타는 아궁이로 들어갈 운명에서 건져내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멸망에서 죽음에서 구해내는 것이므로 구원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어때요? 적절한 비유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불타는 아궁이에 던져질 운명임을 알고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그 운명에서 벗어날 방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지옥 불에 던져져서 긴긴 세월을 고통 받을 운명에서 천국으로 올리워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 정도면 구원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요?

 

우리는 사실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휘어진 나무를 바로 잡으려고 무리하게 힘을 주다가는 휘어진 나무를 곧게 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러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스펙을 보고 한번 실패한 이에게는 가혹합니다. 더구나 그가 재활의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는 가차 없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비틀고 휘어짐을 펴고 곧게 하실 수도 있고
이미 세상적으로는 사형 판결이 난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보람되고 가치 있는 재목으로 사용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나무 외부에서 힘을 가해서 펴는 것이 아니라 나무 내부에 생기를 주셔서 스스로 나무가 펴지고 반듯해 지도록 하실 수가 있습니다. 구원은 그런 것이지요. 쓸모없는 죄인들을 새롭게 만들어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사용하시고 하나님나라 안에서 행복과 평안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 바로 구원인 것이지요.

 

과연 베드로의 말이 끝나자 이를 듣고 있던 삼천명의 사람들이 그날 세례를 받고 주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 하나님의 유월절과 오순절을 기념하러 온 사람들이므로 이들은 전혀 생소한 신앙을 받아 들인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를 자기들의 주로 삼은 것입니다.

 

제가 성장지상주의자는 아니지만 저도 이렇게 한번 설교에 삼천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는 놀라운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습니다.
하하, 꿈입니까?
그래서 그런 역사를 눈으로 보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4.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쓰니라
이렇게 베드로의 한번 설교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서 주의 제자가 된 이들은 서로 모여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에 힘썼답니다.
이 모습을 가만히 보면 초대교회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며
떡을 떼고
기도에 힘쓰고
어떻습니까?

 

위의 모습에서 오늘날 우리가 놓친 것은 없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지엽적인 것에 매달려서 보다 근본적인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다음번 설교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보다 자세하게 알아 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생략하겠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러이러해서 아무것도 못해
그러면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이지요.
나는 너무 바빠서 제대로 시간을 내어서 뭔가를 하기가 어려워
그러면 해야 할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러 멀리 갈 필요도 없고
옷을 갖추고 장소를 꾸밀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산위에서 혼자서 밤을 새며 기도하는 것을 즐겨하는데 시간이 없고 체력이 안되고 혹시라도 무섭다면 산위에 홀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있는 장소에서 눈을 감고 그게 안되면 눈을 뜬채로 기도해도 됩니다.
그냥 눈을 감고 아니 불가능하면 눈을 뜬채로 아버지께 마음을 집중하고
그에게 나의 소원을 아뢰고 나의 감사를 아뢰며 나의 잘못을 아뢰고 아버지에게 다 털어놓으세요.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 불확실한 세상을 살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너무 교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두렵습니다. 우리는 미약하고 보잘 것 없습니다. 세상은 저렇게나 거대하고 강력한데 내가 가진 힘은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적고 약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천지의 대 주재이신 내 아버지에게 아뢸 수 있습니다.

 

항상 기도를 앞세우고
기도하는 시간을 빼먹지 마십시오.
기도는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하나님의 백성된 특권입니다. 그는 전능하신 분이므로 우리의 모든 소원,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아뢰는 것까지도 듣고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그가 나와 함께 하시면 그가 나의 길을 안전하게 지키실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후회가 늘고 하고 싶은 것은 점점 많아 지지요?
기도하십시오.

 

솔직하게 내 마음을 아버지에게 차근차근 풀어 놓으세요?
사랑이 많으신 내 아버지께서 들어 주실 것입니다.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불가능한 일을 생각하십니까?
해답을 찾지 못해서 갑갑하십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세요. 전혀 오로지 기도에 힘쓰세요.

 

오직 기도하세요. 주의 성령이 임하시면 만능이라고 했지요?
기도만이 그런 유를 낼 수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기도합시다. 간절한 마음으로 내 아버지께 기도합시다. 체면치례의 기도나 가식된 기도나 욕망에 이끌린 기도가 아니라 그냥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뢰는 것처럼 기도합시다.
내 아버지께서 결코 그냥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위해 귀 기울이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11월 2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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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의 소원까지도 다 털어놓고 나서, 그저 열심히 살아갈 수 있다면 나머지는 주의 뜻대로 좋은 일들로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언제나 문제는 내가 먼저 앞서가고 기도하지 않고서 달려가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짧게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