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사도행전2:42-47)/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11. 9. 00:41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사도행전 2:42-47)

 

우리는 지금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당면한 한국교회의 위기는 교인수의 쇠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순수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즉 교회의 세속화가 보다 장기적으로는 교회의 생존에 더 큰 위협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의 순결과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며 그 운동의 연장선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신앙 열정과 성령의 놀라운 역사, 넘쳐 흐르는 사랑 그리고 교회를 세워야 겠다는 비장함들이 여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도 않고 만만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 운동은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배웠습니다. 세속의 물이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진게 너무 많습니다.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놓기가 어렵습니다.

 

안정적인 목회, 평탄한 신앙생활이 충분히 가능한데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삽질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로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실제로 실천할 생각은 없습니다.

교회가 새로워 져야 한다고요?
그렇지 않으면 이땅의 교회가 설자리가 없다고요?

 

그게 뭐 어때서요? 나에게만 아무 일도 없으면 되지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합니까?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요?
지금 당장 나에게 어떠한 피해도 없기 때문에 나는 먼 산 보듯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지금 당장 나에게 절실한 것 같지 않아도 초대교회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와 우리네 자식들의 영적인 삶에 심각한 적신호가 켜질 것입니다. 영적인 적신호는 곧 육적인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징후는 이미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만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지 않아서 그렇지 어쩌면 한국교회가 개혁해야 할 때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존경심이 사라진 교회, 세상을 지도할 수 없는 교회
스스로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고 한구석에 서서 어물쩍 세상의 악과 죄를 묵인하고 동참하는 교회가 지금 우리네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물질을, 돈을 제일로 삼습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물질의 가치는 절대적인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건 세상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결코 영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교회에서는 물질이 사람보다 더 우선시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 안에서도 물질 제일주의적 가치가 깊숙하게 뿌리를 내렸습니다. 이 뿌리의 실체는 파도 파도 끝이 없기 때문에 보통의 조치로는 결코 뿌리 뽑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교회 개혁의 시도를 포기합니다. ‘조금 더 있다가 하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할 거야
굳이 우리가 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우리가 미적거리고 있는 사이 세상에서 교회의 입지는 점점 좁아 집니다. 하나님마저 우리를 외면하실 수 있습니다. 촛대를 옮기려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맛잃은 소금이 되어 길바닥에 뿌리워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운명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저항이 있고 또 귀찮은 일이 있고 또 힘든 일이 생길지라도 초대교회로 돌아가기 위한 교회 개혁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1.모든게 똑 같이 중요하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가장 원시적인 그리고 가장 순수했던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도 닮기를 바랐던 바로 그 초대 교회의 모습이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뭡니까?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바로 이 네 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가 어느 것 하나 다른 것보다 덜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한글 성경으로 보고서 생각합니다.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고 떡을 떼는 것은 기도하는 것 보다 훨씬 덜 중요하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습니다.
한글판으로는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상으로는 저들이 ‘오로지 힘쓴 것’은 기도만이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는 것이 다 해당됩니다. 오직 한 개만을 힘쓴게 아니라 네 개를 다 힘썼다는 말입니다. 즉 오직 힘쓴 것이 우리 생각처럼 한 가지가 아니라 네 가지라는 말이지요.

 

어떻습니까?
교제하고 떡을 떼는 것이 기도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는 것 역시 기도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나와 있는 네 가지가 결코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2.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성령이 교회에 임하신 제일 첫 번째 증거는 가르치는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가르치는 일에 힘썼고 제자들은 가르침을 받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은 표시는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신비주의를 표방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내 멋대로,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계시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떤이는 이날 예루살렘에서 삼천명의 학생이 있고 12명의 선생이 있는 하나님의 학교가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하기 까지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열심히 가르친 사도들(42절)에게서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답니다(43절). 그러므로 가르치는 것과 성령의 역사는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라고 되어있는 이 본문에서 ‘사도의’ 는 복수로 ‘가르침을 받아’는 단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라고 적어야 합니다. 이 말은 가르치기는 열두명의 사도들이 가르치지만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동일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가르치는 것이 한가지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생각과 철학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 한가지 복음을 가르쳤기에 열두명이 가르쳤지만 똑 같은 내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수많은 그리스도 교파가 있습니다. 교단별로 나뉘고 신학교별로 나뉘고 복잡하게 나뉘어 있습니다.

 

장로교니 감리교니 침례교니 순복음교니 성결교니로 나뉘고 그들 안에서도 합동이니 통합이니 고신이니 합신이니 하며 나눕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파와 신학교별 차이가 복음의 내용에 차이를 가져와서는 안됩니다. 신앙의 태도와 방법같은 것에 차이를 가져올 수는 있어도 복음의 내용에서는 한가지 여야 합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하려면 가르치는 사람들이 성경을 근거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할 때도 성경본문을 텍스터로 삼아 가르쳐야 합니다. 결코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성경의 여기저기서 한구절 씩을 따서 하는 설교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참고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유일무이한 교과서입니다.

 

3.서로 교제하고
여기서 ‘교제한다’는 말은 원문에서는 ‘코이노니아’라고 적혀있습니다. 우리가 신약의 교회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단어가 바로 ‘코이노니아’입니다. 사랑하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코이노니아’는 ‘공동’이라는 뜻의 ‘코이노스에’서 나왔습니다. 즉 교회의 교제는 일대일의 교제라기 보다는 공동체 안에서의 교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그리스교회들에서 모으려고 한 연보를 말하기도 합니다. 가난에 처한 형제를 돕기위해 연보를 모으려고 할 때 바울은 연보라는 말에 ‘코이노니아’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44절과 45절에 이들이 서로 교제한 내용이 나옵니다.
“다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오순절 성령을 받은 초대교인들 사이에서 부유한 이는 자기의 재물을 덜어서 가난한 형제를 구제하고 필요에 의해 서로 나누는 행위들이 분명히 일어 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잘 음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구절이 결코 사유재산의 부정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일부 이단들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교단에 바치고 교단내의 합숙소에서 생활하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속아 자기의 전 재산을 교주에게 바치고 자기들은 합숙소에서 매일 매일 노동을 하고 그 댓가는 교단에 바치고 자기들은 겨우 입에 풀칠하는 정도의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런데 교주는 신도들이 바친 재산 때문에 배터지는 일들이 벌어 집니다. 세계 선교를 한답시고 해외의 초호화 호텔에서 묵으며 외국인들에게 세미나를 한답니다. 그 교주의 아들은 동경 긴자의 술집에서 황금종을 치고 돈을 흥청망청 물 쓰듯이 써댑니다. 사업을 한답시고 교단의 재산에 손대는 이들도 많습니다.

 

게다가 ‘모든 것’이란 말에는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것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즘 보면 재능나누기니 재능기부니 하는 말이 있는데 이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46절에 보면 “집에서 떡을 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집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라는 구절 속에 집도 남기지 말고 다 팔아서 바치라는 말은 없습니다. 오히려 필요없는 재산들 사치품들을 말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집을 여러채 보유한 이들이 한두채를 팔아서 남을 돕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거할 집까지 팔 필요는 없습니다.

 

성령의 지시하심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고조된 분위기에 휩쓸려서 이런 일을 한다면 흥분이 가라앉고 이성을 찾았을 때 가혹한 현실과 마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서로 물건을 통용한 것은 결코 강제적으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모델로 삼아 강제 몰수 강제 분배의 공산주의를 정당화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돈은 정말 귀중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 땅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돈 때문에 예수를 믿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수 믿고 복받으려고
물론 복은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충만히 임하시자 사람들은 비로소 육적인 물질에서 벗어나 영적인 것 정신적인 것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사실 돈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울고 웃고 죽이고 죽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한번 눈을 돌리고 마음을 바꾸면 돈 말고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돈은 우리의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됩니다. 내가 쓰고 남을 돕고 할 정도면 일용할 양식으로 충분합니다. 수십조 수백조의 재산을 전세계에 늘어 놓은 사람들은 글쎄요, 실제로 그 돈을 제대로 사용해 보고 죽을 수 있을까요?

 

주께서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지 이 땅에서 금은보화를 산더미처럼 쌓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먹고 살만하면 되고 다른 것들
목숨, 사랑, 건강, 화목, 명예, 행복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이 후의 기록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령에 충만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재산을 팔아 교회에 헌금하고 이것으로 많은 이들에게 구제하는 일이 칭찬을 받았던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자기들의 밭을 팔아서 헌금하다가 책망을 듣지요. 그때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여기에서 우리는 땅을 팔고, 판 대금을 헌금하는 일이 결코 강제적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책망한 것은 그들이 거짓말을 해서 하나님을 속이려 했기 때문이지 돈의 얼마를 내지 않은 것 때문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도 십일조를 가지고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에게 주라고 하셨지요. 이들은 다 가난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레위인은 하나님이 자기의 업이므로 따로 분깃이 없습니다. 나그네도 마찬가지로 외국에 왔으므로 자기 소유의 땅이 없습니다. 고아와 과부 역시 자기 소유의 땅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십일조에서 1/3을 나누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히 임하시면 성도들은 남을 구제하기를 즐겨하게 됩니다. 왜냐면 남을 구제하는 것은 하늘에 보화를 예금하는 것이 되거든요. 자기가 어려울 때 몇십배로 몇백배로 돌려 받을 수 있는 하늘 보험에 든 것과 같거든요.
우리는 단순히 가난한 형제에게 돈만 주었지만 주께서 우리의 예금을 돌려주실때에는 돈을 넘어서는 목숨과 건강, 사랑, 명예, 행복 같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더 큰 것들을 함께 주실 것이기에 우리는 남을 구제하는 일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한 형제요 자매라고 하면서 형제의 배고픔을 방치하는 것은 진정한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십시일반이라고 열사람이 한 숫가락씩만 덜어서 준다면 한 사람에게 충분한 밥 한그릇이 된다는 좋은 말도 있쟎아요.
여하튼 교제도 역시 기도만큼 중요하고 우리 성도들이 힘써야 할 것입니다.

 

4.떡을 떼며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었습니다. 떡을 뗀다는 표현은 아마도 애찬이나 성찬을 말하는 듯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도저히 이애할 수 없지만 초대교회에서 가난한 형제들이 배를 곯는 일이 많았기에 교회에서 애찬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도 불과 60년전까지도 먹을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모일 때마다 애찬을 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교회가 형제들을 돕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떡을 떼는 것이 애찬과 성찬을 가리킨다는 말은 애찬중에 성찬을 거행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특별히 구별된 성찬이 아니라 애찬가운데서 행해지던 자연스러운 의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 당시의 로마에서는 시장에 파는 고기들도 먼저 신에게 예물로 드렸다가 파는 것이기 때문에 고기살 때 우상의 제물인지 묻지 말고 사먹으라는 구절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오늘날처럼 성찬이 거창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항상 주의 죽으심과 살아 나심을 기념하며 감사함으로 음식을 나누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46절에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약간 모호합니다. 성전에 날마다 모였다는 것과 집에서 떡을 떼었다는 것은 서로 모순처럼 보입니다. 성전에 모이고 또 누군가의 집에 모인다는 것이 이해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초기 교인들은 세상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성전으로 집으로 몰려 다니며 예배만 드렸단 말입니까? 먹고 즐기고 교제하고 기도하고 가르침을 받고..........이것만으로 생활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또 이것을 오해해서 이단들은 매일같이 집회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며 개인 생활을 도외시 합니다. 가정을 돌보지 않고 이단에 빠져서 가정파탄을 불러 오는 일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본문에서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라는 말은 당시에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성전에 올라 기도했는데 그곳에 참여했다는 것이지요. 유대인들에게는 기도시간이 있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성전으로 가는거지요. 지금 이슬람 교도들이 하루에 다섯 번씩 회교사원에 가서 기도하는 것과 비슷한 일입니다.

 

또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은 성전에 가는 대신에 그냥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기도에 참여한 것이지 매일같이 기독교인들이 그곳에서 독자적으로 예배를 만들고 참여한 것이 아닙니다.

 

아마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성전과 기독교의 가정집을 번갈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과도기적인 현상인 것이지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셨다고해서 갑자기 성전에 발걸음을 끊은게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성전 기도회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은 따로 또 누군가의 집에 모여서 기도하며 찬미하여 떡을 떼며 음식을 먹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집에서”란 말은 원문을 직역하면 ‘집에서 집으로’ 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의 집에 계속해서 고정적으로 모였단 말이 아니라 이 집에서도 모여서 떡을 떼고 다음에는 저 집에서도 모여서 떡을 떼었다는 말입니다. 집회 장소를 필요에 따라 이집 저집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세울 때 결코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만 장소는 예배를 돕는 의미가 있습니다. 모임의 편의를 위해서 장소가 필요한 것이지 장소 자체가 초대교회에는 큰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5.기도에 힘썼다.
제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단지 기도에만 힘쓴 것은 아닙니다.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고 떡을 떼는 것에도 힘썼습니다. 여기서 기도에 힘썼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공동으로 하는 기도회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열심히 기도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기도회로 모인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한 것이 되겠지요.

 

그리고 예배가 아니고 기도회라고 한 것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고 다른 날에는 약식으로 기도회를 한 것 이지요. 우리는 이미 세례를 받을 때에 대소집회에 참여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주일 낮 예배, 주일 오후의 찬양예배,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금요 기도회들이 있습니다. 보통은 주일 낮예배를 주일 대예배라고 하고 오후에는 찬양예배나 또는 헌신예배로 드립니다. 그리고 주일이 아닌 날에 드리는 것은 모두 기도회로 통칭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전통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물론 다른 나라에서는 주일예배만 있지 수요 기도회니 새벽기도회니 금요기도회가 있지는 않습니다.

 

예배에 있어 설교가 중요하느냐 기도가 중요하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은 모든 것이 다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네가지 모두를 열심히 힘쓴 것입니다. 원문상으로는 “오로지... 힘쓰니라” 가 꾸며주는 말이 네가지 모두입니다.

 

우리는 초대 교회가 이 네 가지에 힘썼다는 것을 배웠지만 이 네 가지를 따로 따로 보지 말고 하나로 합쳐서 본다면 이 네 가지가 예배의 기본 요소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교제와 떡을 떼는 것 까지가 예배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어때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배에 대한 생각과는 조금 다르지요?

 

6.부흥하는 교회
이렇게 한다면 교회는 부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전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네 가지에 힘쓴 결과 저절로 부흥이 된 것입니다.

 

부흥되기 전에 그들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답니다. 오늘날 온 백성에게 비난을 받는 상태에서는 부흥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각종 인간적인 전도전략과 방법들이 고안되었지만 국민들로부터, 믿지 않는 이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흥을 하려면 먼저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국민들로부터 칭송받도록 우리의 삶을 바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의 부흥을 꾀한다면 바로 이런 식으로 하면 됩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일에 열심을 내고
교제하고 떡을 떼는 일에도 힘쓰고
그리고 기도 열심히 하면 됩니다.

 

이들이 행한 네가지는 크게 보아 예배 행위입니다. 열심히 예배하고 세상으로 흩어진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나혼자 먹고 살기도 어려운 판에 남을 돕는 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잘못되고 잘못되어 화가 날정도로 나라가 사회가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찬미하며 기도하며 기다린다면 우리도 모르게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게 될 것이며 나아가 부흥하게될 것입니다.
부흥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입니다. 여기 보시면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부흥은 하나님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도록 생활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수 있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에게 맡겨 둡시다. 아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성도들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임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잘되면 육적으로도 강건해 지며 하나님을 찬미할 일이 더 많아 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도들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표적과 기사를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신자가 아니라 불신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람’이라고 하는 말은 ‘프쉬케’라고 하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영혼을 뜻하는 말입니다. 참고로 사람은 ‘안드로포스’라고 합니다.

 

이 말속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영적인 두려움을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육체적으로 위협이 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두려워한 것이 아닙니다.
저들끼리 뭉쳐서 막 뭔가를 하는데 기적이 일어나고 저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며 서로 돕고 기뻐하는 모습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영적인 두려움으로 보여진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세상의 법칙을 지키지 않고 살아 가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오늘 뉴스에 서울인가 어디에서 같은 아파트단지 안에 사는 주민들인데 그 중에서 한 개동만 임대아파트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민들이 임대 아파트 동이 어린이들만 어린이 놀이터를 이용하지 못하게 막았다고 합니다. 너무 기가차고 추악합니다. 당연히 이 뉴스에 그 아파트 주민을 비난하는 글이 수천개나 달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의 법칙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면 그 아파트 주민의 경우에 모두가 임대아파트의 어린이들이 놀지 못하게 할 때 혼자서라도 그러한 불합리한 조치에 반대해야합니다. 그게 사실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지키기위해 이웃을 원수로 만드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해서 그들의 추악한 범죄까지 동참하고 두둔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권력있는 기관에 근무하면서 모두가 단체로 뇌물을 받아서 나눌 때 자기 혼자 여기에 동참하지 않으면 당연히 조직에서 왕따를 당하고 어쩌면 누명을 뒤집어 쓰고 쫓겨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뇌물을 받고 진실을 굽히며 공익보다 사익을 앞세우는 일에 동참하거나 묵인해서도 안됩니다.

 

그래서 사악하고 부패한 영들이 깨끗하고 거룩한 영들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자기들과 함께 어둡지 않으니까?
밝은 빛이 비취면 더럽고 때묻은 적나라한 현실이 드러나니까 함께 더럽고 때묻기를 원한다고 해서 같이 더러워져도 안되고 빛이 비취는 것을 막아서도 안됩니다.

 

바로 그러한 일들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영적으로 초대 기독교인들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때요?
오히여 기독교인들, 특히 출세한 기독교인들이 더 악한 짓으로 세상의 욕을 먹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다시 한번 못박는 행위이며 하나님이 이름이 땅에 떨어져서 망령되이 일컫게 만드는 반기독교적인 범죄행위입니다.

 

주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전파의 길을 막는 사악한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실을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만 되면 나머지는 주께서 하십니다.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의 수를 더하게 하실 것입니다. 평소에 바른 삶으로 사람들에게 칭송을 듣고 우리는 네가지에 힘쓰며 하나님을 찬미하기만 하면 됩니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주를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합시다. 형제를 사랑하며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합시다. 기도하며 찬미합시다. 떡을 떼며 교제하고 물질을 나눕시다. 초대교회가 바로 그러한 교회였습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는 성도들의 수를 더하실 것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11월 9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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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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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사도행전 시리즈 말씀으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교제하고 떡을 떼는 행위가 예배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매우 인상적이었네요. 즉 우리가 형제를 잘 돌보아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세속적이지 않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기독교인은 보다 멋있는 모습이지 않을까 늘 생각합니다. 자신의 것들을 잘 지켜나갈 수 있기를, 신앙의 순수성을 잃지 않기를 바라며. 201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