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옥합이 깨어질 때(전정판,누가복음7:36-50)/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8. 3. 11. 01:39

 

옥합이 깨어질 때(전정판,누가복음7:36-50)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옛날에는 맞는 말이었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이란 정말이지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즘 이런 말을 하면 그건 틀린 말입니다. 사람들 중에서 많은 이들이 꿈이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냥 막 사는 겁니다. 이 땅에 태어났으니 산다는 정도?
자살할 수 없으니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산다는 정도? 여하튼 요즘에는 꿈이 없이 사는 이들도 매우 많습니다. 뭐 당연하게도 사람마다 꿈이 꼭 있어야 한다는 법도 없습니다. 그냥 행복하게 살면 되지 무슨 꿈입니까?

 

그러나 여전히 꿈을 가진 이들도 많습니다. 물론 그 꿈이 남이 볼 때에도 그럴듯하거나 거창하거나에 상관없이 오랫동안 이루고자 하는 꿈을 가진 이는 행복합니다.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여정이 지루함을 모두 날려 줍니다. 다만 그 꿈을 위해서 우리가 노력하는가 또는 그 꿈을 이룰만한 재능이나 여건이 되는가하는 점에서는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즘에는 처녀총각들이 시집장가를 아니 가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런 결혼이 무슨 크게 어려운 특혜인 것처럼 생각해서 자기네들처럼 처지가 안 되는 이들은 결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돈이 많거나 재주가 있거나 미모가 있거나 아니면 정말 운이 좋거나, 하하. 또 다른 어떤 이는 외국인과 결혼하려고 할 만큼 결혼이 하고 싶지만 짝이 없어서 애타게 찾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이는 아예 결혼을 인생의 무덤이라고 생각하고 결혼하지 않으려고 하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다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인간인거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 예수께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쏟아 부은 여인은 한가지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이 뭐냐면 시집을 가는 꿈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하면 그 옥합이 바로 결혼식을 위해서 간직하는 여인의 필수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아마 창녀였을 걸로 여겨집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의 꿈은 결혼하는 겁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도 모든 사람이 결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많은 처녀들의 꿈이 현모양처인 때도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에서 결혼을 꿈꾸지 않는 이는 없습니다. 우리도 결혼하지 않는 노총각 노처녀를 보면 사람들이나 친척들 심지어 부모까지도 결혼을 입에 담습니다. 언제 결혼할거냐?

 

오늘 본문에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은 창녀일걸로 생각됩니다. 여기에 보면 “그 동네에 죄를 지은”이란 말에서 죄가 성적인 죄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나는 여인이 있습니다. 음행하다가 잡혀온 여자에 대한 이야기? 예수께서 죄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신 그 기사가 생각나십니까? 아마 이 여인이 그 여인이었을 걸로 생각됩니다.

 

이 여인이 향유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냥 향유를 발에 붓게 된다면 이는 엄청나게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하는 행동입니다. 먼지구덕이인 발을 씻으려면 물이 상당히 많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물의 양이 부족하게 되면 처음부터 씻으려 하지 않는 것만 더 못하게 됩니다. 왜냐면 먼지나 때에 물이 묻어서 제대로 털 수도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사막지대에서 샌들을 신고 길거리를 걷게 되면 당연하게도 발에 먼지가 덮여서 정말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향유를 붓기 전에 먼저 발을 물로 씻어야 합니다. 그래서 발을 깨끗하게 닦고 나서 향기를 풍기는 향유를 붓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향유를 발에 붓는 행동이 정말 번거롭고 어리석은 행동같을 수 있습니다.

 

아마 이 향유의 처음 용도는 머리에 붓는 것이었을 겁니다. 발이 아니라. 삼백데나리온짜리 형유를 머리에 부었다고 해서 아까워 할 수는 있지만 불쾌해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요 이건 그만큼 귀한 것입니다. 이 향유는 일단 개봉하면 향기가 날아가므로 절반만 붓고 나머지 절반은 다시 밀봉해서 나중에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한번에 다 사용해야 합니다.

 

이 향유는 아주 비싸고 귀한 것으로 평민들은 사용하기가 어렵습니다. 첫날밤 신랑의 머리에 붓는 것으로 처녀들이 간직하는 겁니다. 결혼식을 위해서 일생에 단 한번 부리는 호강이고 사치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다만 아주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에게만 이런 일이 행해졌습니다. 아주 특별한 날에만 아주 의미있는 사람에게만 이런 일이 행해진겁니다. 황제나 왕이나 귀족 정도?

 

그러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발에 향유를 붓는 것은 고귀한 손님에 대한 극진한 환대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먼저 바리새인과 예수님은 사실 사이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바리새인을 표리가 부동하고 가식적인 위선자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솔직히 이들은 당시에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켰고 학식이 깊었으며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이들이었습니다. 남들이 볼 때 그의 언행은 그지없이 고귀해 보입니다. 당연하게 십일조도 잘 하고 율법은 철저하게 지킵니다. 외출 후에 집에 오면 꼭 손을 씻었답니다. 위생적인 면 때문이 아니라 혹시라도 부정한 것에 접촉했을까봐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이들의 율법 준수는 오늘날 우리가 절대로 따라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합니다. 그런데 ‘율법의 완성’을 주장하면서 나타나신 주님이 율법을 어기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또 그걸 나무라는 바리새인들을 위선자라고 꾸짖고 있으니 둘 사이가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바리새인중 하나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한 것입니다. 식사초대. 왜 초대했을까요? 예수님과 교류하기 위해서? 아니면 예수의 허물을 찾기 위해서? 아니면 예수님을 매수하기 위해서? 아니면 사람들에게 내가 예수를 집에 초대할 만큼 관대한 사람이라고 자랑하기 위해서? 아니면 예수에게 빚진게 있어서? 그에게 은혜를 입은걸 갚으려고?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에서처럼 대접이 시원치 않았던 것을 보면 아무래도 예수님을 진심으로 환영해서 초대한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뭔가 바리새인의 고질적인 병폐인 생색내기 용으로 보입니다.

 

여기 보면 44절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45절에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46절에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이런 식이라면 왜 초대했는지 정말 아리송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 바리새인의 이름이 시몬입니다.

 

아마 이 바리새인은 예수의 설교나 가르침에 공감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인기가 높으므로 인기인과 교류함으로 얻는 평판에 신경을 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제자들을 초대한 것이지요. 그런데도 이 사람은 바리새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예수에 대한 적의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약간은 예수를 푸대접합니다. ‘이 정도 식사를 대접했으면 됐지 네가 뭐 더 이상 대접할 사람은 아니다’이런 마음이었는지 모릅니다. 만일 그랬다면 이 사람은 인간성이 형편없는 사람입니다.

 

자, 이렇게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를 하려고 앉으셨을 때에 한 여인이 옥합을 들고 들어옵니다. 이 여인은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입니다. 그러니까 성매매현장에서 잡혀서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것을 예수님덕분에 구함받은 은혜를 입은 여인입니다.

 

돌에 맞아 죽을 뻔 한 것을 구원받은 여인, 창녀와
어느 정도 사회에서 인정받고 있는 그래서 솔직히 아쉬울게 없는 바리새인. 이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 어떻게 했는지 이제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참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마태26장에 나오는 ‘나병환자 시몬’과 이 사람이 같은 사람은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여기 본문에 나오는 향유옥합을 깨어 기름붓는 사건과 마태복음에 나오는 기름부음은 다른 걸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 두사건을 동일한 사건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이 시몬을 나병환자 시몬과 혼동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상당히 비슷하기도 하고 하필이면 바리새인의 이름이 시몬이라서 더 혼동되기 쉽지만 당시 시몬이란 이름은 매우 흔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시몬 베드로도 있지요 게다가 주님의 형제 시몬도 있지요.

 

사람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배은망덕하게 되면 그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은혜를 감사하고 그리고 그걸 또 저쪽에서 감사해하고 보답을 사양하고 서로 섬기고 사양하고 봉사하고 겸비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제자된 표식입니다. 제자의 인성입니다. 뭔가 복잡한 것 같지만 서로 사랑하는 가장 일반적인 표시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고 또 주님의 제자들은 그런 식으로 삽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그래서 나를 주님께 드리고 그걸 또 주님은 기특하게 보시고 더 많은 은혜를 내려 주시고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고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될 자격이 생기는 겁니다.

 

이 두 사람 창녀와 바리새인 중에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것으로 생각되는 이는 일반적으로 바리새인입니다. 흠잡을 데 없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고 또 그렇게 살 것을 남에게 권면하는, 인격이 바로 된 이가 바리새인들이기에 그렇게 생각됩니다. 인생의 막장을 사는 창녀가 아니라. 그러나 이 두 사람을 보면 사람들의 편견이 여지없이 깨어집니다.

 

진실로 예수님에게 은혜를 갚은 사람은 바로 이 여인, 창녀였던 여인입니다. 바리새인을 위선자라고 욕했지만 여기서도 여전히 바라새인은 남의 눈만을 의식하고 진정으로 주님에게 감사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냥 자기의 평판을 위해서 남들 눈에 욕듣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식사 한끼로 감사를 때우려는 모습이 보입니다.

 

당시 주님을 초대해서 식사 한끼를 대접하는 것은 절대로 약소한 대접은 아닙니다. 제자들이 무려 열두명 해서 주님일행은 무려 열세명이고 당시 유대인들에게 먹을 것은 참으로 귀해서 하루 두끼만을 먹었습니다. 혹시 모릅니다. 주님은 열두제자만이 아니라 관계자를 더 데리고 가셨을 수도 있습니다.

 

보통 유대사람의 집 같으면 대접한번 하고 그 달 경제가 휘청거릴 정도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초대하고서 발 씻을 물도 주지 않고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고 입 맞추지도 않았다면 진심으로 주님을 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 나타납니다. 물도 주고 입 맞추고 감람유를 붓고 하는 것은 당시의 보통의 초대에 응한 손님에게 행하는 과하지 않은 풍습입니다. 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주님을 환대하지 않으면서도 주를 식사에 초대했다는 것은 남들의 눈을 의식한 조처입니다. 나는 그래도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는 어떻지요?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어떻게 갚음을 하고 있지요? 그냥 남들 눈을 의식해서 욕먹지 않을 정도로 감사하는 척만 하는 건 아닌지, 아니면 내 마음속에 그 감사가 진심에서 우러나서 내 최선을 다하고도 더 감사하지 못해서 안달할 그 정도인지 잘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감사를 우리 주님이 기쁘게 받으시겠나요?

 

우리 주님의 비유,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 오십 데나리온 빚진자의 비유를 보면 이 여인이 더 많은 빚을 진 걸로 보여집니다. 아마 목숨을 살렸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만일 시몬에게 주님이 큰 은혜를 베풀었다면 시몬의 대접이 달라졌을까요? 잘모르겠습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생각은 이렇게나 다른 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우리 주님에게 은혜를 입었나요? 우리는 과연 주님에게 빚이 있나요?

 

어떻습니까? 우리가 그렇지 않나요? 말로는 머리로는 우리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우리는 절대로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도 지나고 보니 우리가 하나님의 큰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고 지나간 일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빨리 망각합니다. 이건 감사하지만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지, 왜 저건 저렇게 하시나요? 이렇게 따지지 않습니까?  사람이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안다고 우리 주님은 무조건 우리에게 주시기만하고 우리가 주님에게 해야 할 것에는 전혀 관심 자체가 없지 않나요?

 

하나님의 우리를 사랑하시는 은혜, 주님의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그 은혜가 절대로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고 우리에게는 다 빚입니다. 너무 많아서 도저히 갚기가 어려운. 그러나 적어도 갚으려고 시도는 해야 하는 빚입니다. 그냥 은근슬쩍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여인은 주님이 베푸신 그 큰 은혜에 대해 향유를 발에 부어 감사를 표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여인에게 향유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 것이 바로 눈물로 발을 씻었다는 부분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눈물을 흘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첫날밤 신랑에게 줄 눈물병의 눈물을 사용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여인은 시집갈 생각을 포기하고 주님에게 감사를 표했다는 겁니다. 눈물병이 없는 것은 당시의 풍습으로는 아주 큰 결격사유거든요.

 

물론 향유옥합의 가격도 엄청나기는 하지만 그녀의 이제까지의 삶을 모은 눈물병만큼 의미가 있지는 않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은 한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니까 이 향유옥합의 가격이 은 삼백 데나리온이라면 이건 뭐 노동자의 일년치 품삯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눈물병이 가지는 의미는 그 향유보다 훨씬 더 굉장합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흘리는 눈물을 모아서 나의 일생의 삶이 여기있노라고 하는 그 눈물병은 이 여인의 희노애락의 전 삶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첫날밤 신랑에게 주는 징표입니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는 많은 돈이 드는 향유옥합으로 또 정신적으로는 일생을 모은 눈물병으로 행위적으로는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 내고 발에 끊임없이 입맞춤의 겸손으로 주님의 그 무한한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주님이 드신 비유가 있습니다. 오백데나리온 빚진자와 오십데나리온 빚진자. 우리는 향유를 부은 여인은 오백데나리온 빚진자로 바리새인을 오십데나리온 빚진자로 가정할 수가 있습니다. 오백데나리온은 제법 큰 액수이기는 하지만 도저히 갚지 못할 정도의 빚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창녀의 경우에 큰 결격사유이기는 하지만 도저히 새사람이되지 못할 정도의 결격사유는아니라는 말도 됩니다.

 

바리새인은 주님에게 은혜를 입지 않고 빚도 없는 것 같은데 오십 데나리온 빚진자로 나옵니다. 이건 아무리 우리가 스스로 잘난척해도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입지 않았다고 여겨도 주님에게 빚진게 없다고 여겨도 어느정도는 다 주님의 은혜를 입었고 주님에게 빚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잘나도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기가 어렵다는 말도 됩니다.

 

솔직히 공기와 햇빛과 물을 우리가 사용한다면 우리는 다 빚이 있는 겁니다. 치안과 도로와 전기를 생각한다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산다는 건 말이 안되는 것처럼 공기와 햇빛과 물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이 입게 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그것들을 인간들을 위해 만들지 않으셨다면 지금 우리가 살 수 없습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크던 적던 하나님에게 빚진자들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갚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감격하여 주님에게 돌려 드린 그 감사의 행위에 우리 주님은 어떻게 화답하십니까?

먼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 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우리 주님은 지금 사람들 앞에서 이 여인의 죄를 사하시고 또 그 이유를 그녀가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죄사함을 선언하신 겁니다. 이 여인에게 아마 주님의 이 말은 그대로 복음이었을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은 위기에 처했을 그때 목숨을 구해주셨다면 이제 주님은 이 여인의 명예와 평판을 회복시키고 보통사람으로서의 삶을 주신 겁니다. 죄사함도 중요하지만 죄사함을 받았다는 객관적인 공증과 그에 따른 평판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나는 어떠한 은혜도 주님으로부터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말 나는 어떤 은혜도 입은 적이 없고 그래서 주님에게 어떤 빚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냉정하게 우리를 돌아봅시다.

우리 역시 많이 죄지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영 죽을 운명에 처해진 죄수입니다. 그 죄를 사함받고 싶다면 그래서 영생을 얻고 싶다면 우리 주님을 많이 사랑하면 됩니다. 나의 죄를 씻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채찍에 맞고 고문당하고 창에 찔리고 하신 그 은혜에 대해 감사하면 됩니다. 진심으로 감사하면 됩니다.

 

삼백 데나리온짜리 향유옥합이 없어도 됩니다. 감람유라도 부으면 됩니다. 다만 눈물은 있어야 합니다. 눈물병의 눈물이 아니라 그 당시에 감격하여 흘리는 눈물이면 됩니다. 머리카락으로 씻고 발에 입 맞추는 정도는 할 수 있지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우리 주님은 사람들에게 내가 죄사함을 이미 얻었다고 선언하셔서 나의 평판을 회복시키실 것이며 나의 평판을 높게 만드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 주님은 이 여자에게 직접적으로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에게 여인의 죄사함을 밝혔다면 이제 직접 이 여인에게 죄사함을 선언하신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많이 사랑한다면 우리 주님은 네 죄를 내가 사했다고 하실 겁니다. 네가 나를 많이 사랑했으므로 네 죄가 사해졌다는 겁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는 그 말이 여기에 적용되네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하십니다. 내세의 구원과 현세의 평안까지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얻는다고 할 때의 구원이지요. 게다가 영원한 평안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만날 때마다 서로 ‘솰롬’이라고 인사합니다. 그러나 솰롬의 상태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솰롬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자, 그런데 우리가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솰롬, 평안의 순서를 잘 보십시오.
이 평안을 얻기 위해서 이 여인에게 먼저 주신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이 오고 나서야 비로소 평안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구원이 오기 전에 먼저 있어야 할 것이 바로 죄사함입니다. 죄사함이 없은즉 구원이 없고 구원이 없은즉 평안이 없는 겁니다.
그리고 죄사함이 오기 전에 이 여인이 먼저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래요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고 궁극적인 구원과 평안을 주기 위해 우리에게 한가지만을 요구합니다. 사랑입니다. 사랑하기만 하면 우리 주님이 죄를 사하시고 그래서 구원을 주고 절대적인 평안의 상태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랑의 댓가가 이렇게나 많은데도 사랑하지 않으시렵니까?

그냥 사랑하란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크기에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말고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받은 은혜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요? 잘 생각해 보세요. 오늘까지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 안에 있는 겁니다. 십자가에 피 흘리셔서 내가 영생하게 된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평안이란 말 안에는 정신적인 평안, 육체적인 건강, 경제적인 평안까지를 다 포함합니다. 자기의 평안을 방해하는 주위 여건도 평안하게 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궁극적인 평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올 한해 우리 주님을 많이 사랑하고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이 감사를 많이 표현합시다. 내 이웃이 우리의 주님에 대한 감사 때문에 행복해 지도록 합시다. 교회가 사회가 나라가 주님에 대한 나의 감사 때문에 더 좋아 지도록 합시다. 나아지도록 합시다. 그래서 죄사함 받고 구원 얻고 궁극의 평안에 이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8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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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매일 감사한 마음을 가지기. 조금은 더 이웃들에게 친절하기. 내 것만, 내 입장만 생각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기. 가끔 느끼는 것인데, 좋은 삶이라는 것은, 좋은 관계들 속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때가 있습니다. 화목한 가정, 오랜 친구,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 여부 같은 것 말이에요.

 

홍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도 엄청난 복이다. 저는 아주 오래 전이지만 어느 선생님을 만났고, 그 분은 저에게 "사람과의 만남이 충격이 되어야 한다" 라는 가르침을 주곤 했습니다. 아마 이 설교에 나오는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것이 인생 최대의 충격으로 다가왔을 테지요. 그래서 삶의 모든 것을 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한 쪽 발만을 예수님께 담으려고 하는 이기적인, 그리고 비겁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게 편하니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전심으로 예수님을 따르기를 바라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다울 수 있기를. 그리하여 예수님과의 만남이 충격일 수 있기를. 그래서 주님을 더 알아가고, 삶이 실천으로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기를. 저는 응원합니다. / 2018. 03.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