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6월10일/예수님의 전도방법(마태복음4:18-22)/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6. 13. 21:00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6월 10일 주일 예배

예수님의 전도방법 (마태복음4:18-22)

예수님에게는 유명한 12제자가 있습니다. 복음서의 중간쯤에는 예수님의 제자는 70명이 넘어 갑니다. 70명의 제자로 전도대를 조직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는 제자들이 무려 500명 이상이나 있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여신 광야 교회에는 한때 교인들이 무려 2만명이 넘었습니다. 지금이야 2만명이 별거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데 사실 그 당시에 2만명의 교인들을 가진 교회라면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예수님은 전도에 타고 나신 분입니까? 아니면 신적 권능으로 사람들을 몰고 다니셨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없이 사람들이 필요할 때는 마구마구 불러 모으실 수 있으셨나요?

제가 개척교회를 하는 입장에서 예수님의 전도방법은 상당히 놀랍고도 신기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요즘 말로 ‘사기 캐릭’입니다.

마태복음4::18-22을 보면 정말 환상적인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1.전도가 아니라 최면인가?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

이정도면 거의 전도가 아니라 마법입니다. 왜 매혹마법 있잖아요.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예수님의 눈에 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길 가다가 마음에 드는 사람을 보고는 “나를 따라오라”하니까 아무 저항도 없이 바로 주님을 따랐답니다. 그것도 고기를 잡고 있다가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답니다. 또 더 가다가 두사람을 보고는 “부르시니”그들이 곧 따랐답니다. 이번에는 그물정도가 아니라 배와 아버지까지 버려두고 따랐답니다.

여러분 믿어 지십니까? 아무리 성경이지만 좀 심한 것 같습니까? 아니면 그래도 하나님의 아들이자 역시 신인데 그정도는 충분히 되겠지라고 생각이 드십니까?
어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성경구절을 앞뒤를 전부 잘라버리고 그럴듯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이 장면이 아주 자세하게 그리고 다르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거짓말이라고 제가 얘기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냥 생략과 과장 그리고 상징이 섞여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다른 부분을 살펴보면 마태복음의 이 부분을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런 전도방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효율적이며 성경적인 전도방법의 지혜를 볼 수 있습니다. 실로 주님은 전도에 모범을 보이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병행기사는 누가복음 5장에 나와 있습니다. 아주 자세하게 나와있어서 이 본문을 보면 우리는 마태복음의 상황이 바로 이해가 됩니다.

 

2.고향에서의 실패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전도사역은 엄청나게 쉽게 이루어 진 것 같습니다. 이 글이 사실은 복음서의 제일 처음인 마태복음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왕왕 착각합니다. 주님은 그냥 아무나 보고 “나를 따르라”하니까 바로 사람들이 따랐구나!

여러분, 설마 그렇게 믿는 것은 아니겠지요.

예수님이 처음부터 이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시간적으로 좀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고향에서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저도 솔직히 부산에서 개척을 시작했지만........

주님은 30년의 세월동안 일반인으로 지내셨습니다. 외경은 몰라도 성경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전 기사는 몇 개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나는 건 그냥 12세 때 성전에서 사고 친 거 한 개 정도.

사막에서 40일 동안 먼저 금식기도로 몸과 마음을 닦았습니다.  다음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그리고 요단강가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때 성령님이 비둘기처럼 임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형식적인 면이나 실질적인 면에서 나름대로 공생애를 위한 준비 과정을 모두 마치신 것입니다. 보통 유대에서는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 광야에 들어가서 기도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산에서 도를 닦듯이.

성령을 받으신 주님은 이제 자신만만해서 유대광야에서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 오셨습니다. 글쎄요 영적인 금의 환향이라고 할까요. 사실 갈릴리는 유대에 비하면 영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완전히 시골이지요.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하고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귀향은 굉장한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미국유학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고 온 것과 비슷합니다.

사실 유대사람들은 갈릴리를 약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갈릴리사람들도 스스로를 유대의 아래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4:14에 보면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한 것과 하늘로부터 소리가 난 것을 본 사람들이 아마 예수님의 소문을 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충만히 받으신 예수님의 갈릴리 귀향은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소문이 사방에 퍼졌네요. 그러자 회당에서는 예수님을 초청해서 말씀을 들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사람들에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말씀을 듣고는 그를 칭송했답니다. 설교방법도 특이하잖아요.

이 정도면 예수님의 종교계 데뷔는 성공적인 편입니다. 제사장의 아들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닌 목수의 아들이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으니 게다가 그 말씀이 사람들의 칭송을 받게 되니 예수님의 성공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사렛의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강해하다가 그만 말썽이 생겼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아버지와 가족들을 잘 압니다. 그래서 겨우 목수 주제에 뭐 잘난게 있으랴고 생각한 듯 합니다. 결정적으로 사람들은 그런 별볼일 없는 출신의 예수가 스스로를 메시야로 주장하는데서 그에게 분노하게 됩니다.

중간 과정은 생략하고 예수님은 결국 설교하다가 쫓겨나게 됩니다. 쫓겨나는 걸로 끝난게 아닙니다. 나사렛 동네 뒤편의 낭떠러지까지 끌려 갑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려서 죽이려고 한 듯합니다. 그동네는 사람을 돌로 쳐죽이지 않고 낭떠러지를 이용해서 밀어서 떨어뜨려 죽이는 풍습이 있는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방법인지 모르지만 기적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은 그러한 불행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으로 거주지를 옮기신 것입니다. 이사라기 보다 무작정 피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집을 마련하지는 않으셨거든요.

어떻습니까? 천하의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살해당할 위기를 겪기도 하셨고 회당에서 설교하다가 쫓겨나기도 합니다. 솔직히 아무나 회당에서 말씀을 전한 것은 아닙니다. 회당장이 지명하는 것이지요. 저명한 사람들을 주로 초청했답니다. 예수님의 명성이 갈릴리에 퍼졌기 때문에 예수님을 초청해서 그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와는 달리 고향에서 예수님은 전혀 환영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마터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을 뻔 했습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피한 주님은 바로 가버나움으로 도피를 합니다. 음, 도망?

처음부터 성공가도를 달린 것이 전혀 아닙니다. 천하의 주님도 처음부터 실패를 경험했는데 그러므로 우리 평범한 인간들은 처음에 전도가 안된다고,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최소한 우리는 죽을 고비를 겪은 것은 아니쟎아요.

뿐만 아닙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님이 귀신이 들렸다고 생각하고는 예수님을 잡아서 집으로 데려가려고 시도하기까지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가족들조차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버지 요셉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요셉만은 아들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때 이미 요셉은 죽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이만하면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던 예수님의 성공신화가 좀 다르게 보입니다. 천하의 하나님도 세상에 오셔서 그런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니 전도가 안된다고 너무 걱정하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3.성공한 목회자였지만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을 당했지만 갈릴리의 다른 곳에서는 여전히 인기를 끌었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은 갈릴리의 회당에서 인기 강사였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독특한 가르침, 성경해석은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주로 이렇쟎아요. “공중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꽃을 보라” 게다가 생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비유들...때로는 너무 어렵게 강해하고 비유도 예화도 없어서 사람들이 말씀이 어렵다고 다 떠나가는 일도 있기는 했지만 예수님의 화술, 설교는 대인기였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사역을 인기있게하는 것은 치병과 같은 이적들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기도함으로 낫는 것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에게로 구름떼같이 몰려 듭니다. 뭐니 뭐니해도 병낫는게 최고입니다. 기도해서 이적이 일어나는대야 어쩔겁니까? 그래서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죠.

요즘이야 병원과 약이 발달했기 때문에 병은 병원에서 치료하는게 당연하지만 2000년 전의 시골에 무슨 의사가 있고 약이 있습니까? 게다가 당시의 의술은 얼마나 조잡했겠습니까? 게다가 무지 비싸잖아요. 치료도 안되고 돈은 돈대로 다 날리고...이게 병자들의 실상입니다. 그런 곳에서 대 치료사가 나타나니까 그 인기가 어떻겠습니까? 귀신이 쫓겨가고, 간질환자가 낫고, 나환자가 낫고, 중풍병자가 일어서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소경이 보게되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의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가5:44,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들려고 전도했는데 어디서 했는고하니 회당에서 했답니다. 요즘말로 하면 다른 교회에서 전도했다는 거지요. 교인빼돌리기?

하하, 예수님은 유대교의 부패와 독선을 공격하고 새로운 종교를 창시할 생각을 가지신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예수를 같이 믿는 종교인 기독교를 만드는 것이지요. 이 일은 예수님 생전에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줄기차게 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하고 싸운 겁니다. 교리논쟁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예수님이 저들과 싸운 이유는 단순한 교리논쟁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위함이었고 하나님의 뜻이 올바르게 이 세상에 퍼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얻는 인기에 만족하시고 안주한 것이 아니라 요즘말로 하면 개척을 시작한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예수를 스승으로 따르는 학파, 종교단체, 제자단을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유명한 스승들과 이를 따르는 자들은 유대의 전통이었습니다. 당시 이미 유명한 힐렐이니 가말리엘이니 하는 랍비들의 학파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신진인 예수님이 도전장을 내민 것입니다. 기존 체제를 부인하고 새로운 이론을 설파하는 것이지요.

독특한 설교법과 기도의 이적, 이 두가지가 예수님의 강력한 목회무기입니다.

 

4.예수님의 첫 번 제자

이제 비로소 본문의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게 마태복음의 기술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1:35-51에 보시면 예수님의 첫 번 제자는 요한과 안드레입니다. 그런데 요한과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자기의 제자 두명을 예수님에게 보낸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교회 개척을 위해서 두명의 성도를 파송한 것이지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남남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세례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은 친척관계입니다. 성경의 용어로는 친족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 중에 요한은 예수님의 이종사촌입니다. 요한의 어머니가 바로 예수님의 이모거든요.

어떻습니까? 정말 웃깁니까? 우리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반전입니다. 예수님은 처음 제자를 만들 때 ‘맨땅에 헤딩’한게 아닙니다. 잘나가던 친척 형으로부터 개척을 위한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게다가 처음 예수님의 제자 네명 중에 두명이 바로 자기의 사촌동생들입니다. 황당하지요. 그러나 그렇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친형제와 어머니조차도 예수를 믿지 않을 때 사촌들이 그를 믿게 된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어쨌든 한명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따른 것입니다.

자, 지금부터 우리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본론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는 18절에 “해변에 다니시다가...보시니”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 사전 지식없이 이 구절을 보면 예수님이 그냥 갈릴리 바닷가를 거닐다가 시몬과 안드레가 고기잡이 하는 것을 우연히 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병행기사를 살펴보면 마태복음의 내용이 틀린 것을 하나도 없지만 배경이 좀 생략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친척형인 세례 요한이 자기의 제자인 요한과 안드레를 예수님에게 보내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사람이 예수님과 하루 동안 거하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예수님의 비전에 이 두사람이 공감했다는 정도.

예수님의 비전에 공감한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의 형제에게 예수님을 전도합니다.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은 야고보에게 각각 전도합니다. 네 사람 다 예수님의 열두제자에 속하고 특별히 이중에 세 사람을 예수님은 더 사랑하셨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의 이종사촌입니다.

그런데 시몬 베드로가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사연이 좀 더 복잡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하는 형제 안드레의 소개에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헬라어로는 누가 형인지 동생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단지 ‘형제’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니까 시몬 베드로가 생각하는 메시야하고 다릅니다. 베드로는 무력으로 로마를 이기는 그런 메시야를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평화와 사랑, 희생, 그리고 땅의 나라가 아니라 하늘의 나라만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나라.

그래서 베드로는 실망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걸 중단하고 더 이상 예수님의 교회에 나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5:9에 보면 예수님은 시몬의 집에 심방을 가신 것입니다. 막상 가보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고 있습니다. 시몬은 장모와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뭐, 집이 두채라고 하는 이도 있고. 시몬이야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니 미안해서 고쳐달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미안해서 못하는 거지요.

함께 있던 사람들이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줄 것을 간청합니다. 당연히 능력의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런 이적을 체험했지만 베드로가 그 자리에서 주님께 항복하고 그를 따른게 아닙니다.

여기서 보면 제자들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단지 “사람들이” 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시간이 흐릅니다. 이번에 예수님은 시몬이 일하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시몬을 전도하기 위해 엄청나게 공을 들이신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시몬이 예수님과 연관되지 않은 , 그러면서 처음으로 전도된 유일한 제자이거든요. 누가5:1에 보면 무리가 몰려와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보다 더 효율적으로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호숫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는 배 두척을 보시고 그 중에서 시몬의 배에 오르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시고”란 말은 오늘 본문에도 있습니다. 그냥 봤다는 말이 아니라 이전부터 주목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 이사람 참 영이 맑고 깨끗하네!”뭐 그런 식으로.

그래서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이런 말이 이 단어의 원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시몬이 일하는 것을 오래전부터 보아왔고 언젠가는 시몬의 작업장을 방문해서 그를 다시금 전도해야 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침 그 기회가 온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미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가려고 그물을 씻는 생면부지의 사람의 배에 무턱대고 오른다면 누가 순순히 배를 빌려주고 게다가 부드럽게 노까지 저어 주겠습니까? 말이 안됩니다. 이 사람들은 밤새워서 작업하고 지금 피곤해서 집으로 가서 자야 됩니다. 게다가 밤새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해서 지금 짜증이 엄청나게 난 상태입니다. 그런 사람이 처음보는 사람에게 설교하라고 배를 빌려주고 배에 앉아서 노까지 저어 준다고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배가 베드로뿐만 아니라 이미 예수의 제자가 된 안드레도 일하고 있는 곳이거든요. 그래서 예수의 승선을 막지 않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강제로 듣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나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합니다. 이때 이적이 나타납니다. 비로소 그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전에 예수님이 그의 집에 가셔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열병으로 죽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도.... 그런데 고기잡는 어부가 고기를 많이 잡게되자 비로소 베드로가 항복합니다. 돈의 힘입니까? 베드로가 어부기 때문에 고기잡이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이 베드로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해주신 것입니까?

 

5.전도는 가까운데 부터

이때 마침 시몬의 배하고 같이 있던 배가 바로 예수님의 이모부의 배인 세배대의 배입니다. 이 배 역시 베드로에게 잡힌 고기를 같이 나누어 실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 역시 기적에 참예한 것입니다.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이 찢어져서 오늘 본문에 ‘그물을 깁고’ 있었던 겁니다.

갈릴리 호숫가에 있다가 베드로가 와서 도와달라하니까 바다로 들어가서 베드로에게 잡힌 고기를 나누어 실었습니다. 그래도 너무 많아서 배 두척이 물에 잠길만큼 되었다 합니다. 그러니까 이종사촌들이 두말없이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 기적의 현장에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가난한 갈릴리의 어부가 유명한, 그리고 위대한 랍비의 제자가 되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모부도 ok한겁니다. 어차피 시골에서 어부로 늙어 죽기 보다는 유명한 랍비를 따라 가는데 출세가 더 빠를 것 같아서지요.

바로 그 장면을 좀 더 극적으로 묘사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정확하지요. “보시고” 그리고 “좀 더 가다가” “버려두고” 맞잖아요. 먼저 시몬 베드로가 고백을 했고 이어서 자기의 사촌들도 예수님을 따르기로 다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친형제와 어머니도 예수를 믿지 않았는데 어떻게 사촌들, 이종사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말입니다. 이미 예수의 이종 사촌인 요한은 세례 요한을 따르던 제자였습니다. 그에게는 그런 종교적 성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에 비해 예수의 형제들은 그냥 생업에 종사하는 생활인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성향도 없었고 오히려 그런걸 무서워 합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목수는 제법 벌이가 괜찮아서 중산층의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먹고 살만한 거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기적이나 기행을 보고 “귀신들렸다”면서 잡으러 온거잖아요.

많은 것이 생략되었고 극적으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예수님이 초기에 네명의 제자를 만드는 과정을 나타낸 본문은 전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배경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본문이 맞다 틀렸다가 아닙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성공으로 가게 되었는가 입니다. 어떻게 전도할 수 있었는가 입니다.

형제가 전도해도 안됩니다. 아들이 전도해도 안됩니다. 예수의 가족들은 예수의 생전에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기위해서는 부모형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 바로 그가 기적을 체험해야 합니다.

장모의 열병이 낫는 것을 보았지만 전도가 안됩니다. 직접 자기가 체험해야 됩니다.

전도를 처음 받은 그들은 주님과 밤을 새우며 주님의 이상과 꿈을 듣고 공감합니다. 비전의 공유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목사와 성도가 비전을 공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서로 서로의 꿈이 일치해야, 적어도 공감할 수 있어야 그 공동체가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 비전의 공유에는 영적인 체험, 적어도 ‘하나님이 여기에 함께 역사하시는 구나!’ 하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형인지 동생인지 찾아가서 전도할 수 있는 겁니다. 사촌들에게도 전도가 되고 동네 친구들도 전도가 되는 겁니다.

천신만고 끝에 전도된 베드로는 한 동네 친구인 빌립을 전도했고, 빌립역시 같은 동네 친구인 나다나엘(바돌로매?)을 전도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고향친구들입니다. 그러니까 제자의 폭발적인 증가를 위해서는 베드로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이때 전도의 방식을 보면 제자가 제자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전도합니까? 친구에게 가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러니 너도 가서 한번 봐라” 이겁니다. 시몬이 빌립에게 가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너도 가서 한번 봐라. 그래서 빌립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보고 이야기 해 보니까 보통 분이 아니예요. 제자가 됩니다. 그리고는 친구 나다나엘에게 가서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으니”

그래요, “정말 이시대에 찾아 보기 어려운 목회자를 만났다. 우리 함께 가서 새로운 꿈을 꾸는데 함께 하지 않을래” 이렇게 전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운명공동체입니다. 다같이 잘되거나 다같이 안되는 운명공동체. 그런데 요즘 교회는 전혀 운명공동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서로 잘났다고 싸우는 곳입니다. 그래서는 공동체가 커질 수가 없습니다.

함께 꿈을 꾸고 그 꿈에 참여하는 거, 잘되도 같이 잘되고 못되면 같이 못될 수 밖에 없는 그런 운명 공동체,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야 형제의 기쁨을 사심없이 기뻐할 수 있고 형제의 불행을 내일처럼 슬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만드신 성공신화는 그 운명공동체에서 출발합니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3대 사역은“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쳤다 ”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3대 사역입니다. 기존의 제자들을 말씀으로 잘 가르치고 이들이 나가서 전도하게 잘 양육합니다. 그리고 이 인도되어 온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을 고친 것입니다. 물론 이때 마음의 질병을 치료하는 위로와 회개와 거듭남의 역사도 함께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큰 그림을 보면 예수님은 유대광야에서 기도하고 성령을 받고는 갈릴리에서 주로 사역하다가 가끔씩 주위의 땅으로 지경을 넓힙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사역의 방향을 틉니다. 완악한 유대교의 본산인 예루살렘으로, 유대로 복음을 전파하시다가 결국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입니다.

 

처음 한명이 어렵습니다. 그것이 네명이 되고 여섯명이 되고 그리고 난 다음부터 예수님이 유명해 진 모양입니다. 단번에 예수님의 제자는 열두명이 되고, 그리고는 70명이 되고 500명이 됩니다. 마침내 2만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됩니다.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한 ‘세계교구’ 교회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딱 3년반 만입니다.

요즘은 솔직히 전도가 잘 안됩니다. 왜냐면 한국 사람들이 이미 예수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무지무지 싫어하게 되었거든요. 교리도 싫고 행동은 더 싫고. 이래서야 전도가 될 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 교인들의 수평이동입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대형교회는 더 커집니다. 이왕이면 시설 좋고 유명한 사람의 말씀도 듣고. 아무래도 유명하고 큰 교회가 사교에도 좋고.......

그러나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마음이 병들었고 애통하며 억울해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디에도 정붙이지 못해서 외로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힘들고 약해서 삶이 힘든 이들도 있습니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어서 사랑 받으려고 마음을 여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가난이 삶을 피폐하게 하거나 질병이 삶을 피폐하게 합니다. 그래서 쉼을 얻기위해 안식을 얻기위해 마음을 여는 이도 있습니다. 그 틈새로 복음이 전파될 수 있습니다. 돈냄새나 풍기는 대형교회보다 사람냄새 풍기는 소형교회를 좋아하는 이도 있기는 있을 것입니다. 아직 돈냄새에 익숙하지 않아서 겠지요. 그러므로 만남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냄새를 좋아하는 지 알려고 하면 우선 보아야 합니다.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려면 관찰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 역시 다니시면서 평소부터 눈여겨 보아두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을 전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신적 권능을 지녔고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이시지만 교회를 만들어 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실패와 창피와 살해의 위협을 받고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길가다가 우연히 만난 이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한마디 했다고 해서 그들이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랐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큰 오산입니다. 성경의 그 표현을 문맥 그대로 받아 들인다면 너무 순진한 겁니다.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너무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지요.

우리 주님은 사실 12명의 제자단을 만들어 내기에도 힘겨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자꾸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직접 경험해 봤거든요.

세상으로 도망친 제자를 다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집으로, 직장으로 심방을 가신 주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결국 이적 한방에 허물어 지는 베드로!

그 베드로가 거꾸러지자 베드로가 빌립을,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하는 일이 술술 풀려갑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그의 12사도 중에서 절반을 채우신 것입니다.

잘 나가는 랍비의 삶을 버리고 스스로 교회를 개척한 주님은 그렇게나 힘들게 제자들을 만들었기에 한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의 아들이면서 그 자체가 하나님이신 분도 때를 잘못만나서 고생 하셨잖아요. 그러므로 있는 사람 한명 한명에게 최선을 다하십시다. 이땅에서는 지금 사실 관계전도 외에는 큰 효과를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야 예수가 어떻니, 교회가 어떻니 하고 가르치고 전할 수 있지만 지금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서 너무 잘 압니다. 오히려 너무 부정적으로 알아서 탈이지요.

이때는 세상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란 것부터 보여주어야 합니다. 언론에 온통 부정적인 모습으로만 비쳐진 기독교인의 삶을 새롭게 인식시켜야 합니다. 개별적으로 만나보니까 예수쟁이들도 좋은 사람이 많더라! 이게 우리의 첫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활동이 너무 보수적이라고요? 그래서 공격적으로 예수천당 불신지옥 써가지고 띠를 두르고 초인종을 막 누르면서 전도해야 한다고요? 여러분, 제발 그런 행동만은 삼가 주세요. 그건 교회를 죽이는 행동이고 예수를 천하의 조롱거리로 만드는 행동입니다. 요즘은 다단계도 그런 짓은 안합니다.

다음으로는 교회가 사람들에게 좋은 곳, 유익한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도 의도가 보이게 해서는 곤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이런 일들이 도처에서 그리고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일어난다면 어느 순간엔가 사람들은 교회의 순수성을 알아주게 될 것입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세상에 자기를 내던지다 보면 , 그러한 빛과 소금들이 쌓이게 되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사실상 이까지 오면 전도는 진짜 쉽습니다. 왜냐면 다른 많은 이들이 저런 공동체에 나도 가입하면 좋겠다고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그리스도인 다운 행동을 하는 것이 저는 전도라고 생각합니다. “아무개 보니까 예수 믿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더라” 이런 식이 되면 그 다음부터는 전도가 오히려 기독교인의 부끄러움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이 조롱거리가 되어서는 안되잖아요.

또 그리스도인은 항상 당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주와 동행한다는 모습을 어떻게 보일 수 있지요?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될 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은 성령님의 시대입니다. 그분이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역사하십니다. 성령님이 처음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뭡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것이지요. 물론 이 세상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완전함을 추구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십계명도 지키고 새계명도 지키고 무엇보다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대명령도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예수믿게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는 이 세상에서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완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은 전도자가 되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고 그리스도를 알고 , 우리를 보고 그리스도가 진실로 우리 인간을 사랑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그가 진실로 이 땅에 하나님이 나라를 건설하려 한 시도가 하나님의 통치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그러한 것이라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하는 요새일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요새는 물질이 아닙니다. 거대한 성곽과 웅장한 건물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면 아무리 높아도 그보다 더 높이 날 수 있는 비행기도 우주선도 위성도 있잖아요.

성곽이 아무리 두껍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미사일도 있고 각종 파괴적인 탄두들이 있잖아요. 아무리 두꺼운 성곽도 미사일 한방에 무너집니다. 이제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요새는 영적으로 무장된 곳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무장된 사람들의 집합으로 이루어 집니다.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세상의 법칙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우 힘듭니다.

우리는 바른 삶을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사도 증명해야 합니다. 도덕성과 영성을 겸비해야 하며 동시에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요. 그러나 그게 정도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한걸음씩 한걸음씩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나아갑시다. 예수님의 전도방법을 생각하면서 “그분도 겪으셨던 일인데 뭐” 하면서 확고한 믿음으로 주님의 약속을 믿고 나갑시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은 주님이 책임을 지실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면 됩니다.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생활한다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지름길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전도방법을 생각하면서 낙망하지 말고 끈기있게 나아갑시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6월 10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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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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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솔직히 말하자면, 어린 시절부터 왜 어부들은 배를 던지고 예수님을 무작정 따라 나섰는지 의아할 때가 많았습니다. 심하게 표현하면, 직장과 가족을 내팽겨 치고 종교활동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은 이른바 "기독교 환자" 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목사님의 이번 설교는 매우 특별합니다. 가장 일상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성경을 판타지소설로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감히 요약하자면 - 신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팽개치고서, 묻지마 식으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이 아니다 - 입니다. 왜 이것이 아닌가? 그것은 사람과 사람과의 단절을 만들기 때문이니까요.

영화 쉰들러리스트에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조금이나마 더 팔고, 희생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돕고, 살렸으면... 하는 쉰들러의 회심장면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 짓는 장면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까? 눈물 짓게 합니까? 아니면, 우리는 천국갈 티켓이 있으니, 너희는 욕이나 하다가 죽어라? 이것은 위험한 발상이며, 심지어 교만하기까지 합니다.

성경은 "한 사람의 가치, 잃어버린 단 하나의 양"에 대한 매우 비합리적인 접근을 취합니다. 99와 1이 있다면, 99가 클 터인데도, 오히려 1에 비중을 맞추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단 한 사람, 그 생명의 귀중함, 이것을 깊이 묵상해 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단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과거 야학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말썽쟁이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생을 달리하시고, 돌아가신 대표 선생님께서 이 한 학생을 위해서, 그야말로 올인하고, 어떻게든 붙잡아 공부를 시켰습니다. 결국 그 학생은 그 관심에 힘입어서 졸업도 하고, 훗날 상당히 괜찮은 4년제 대학까지도 마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교육은 이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이니까요. 수준에 맞게 수업반이나 학교를 나누고, 못하는 아이들은 일찍이 포기해 버리기도 합니다. 부족한 소견이지만, 이러한 효율성 위주의 교육법은 계층을 나누고, 분열을 만들수 있기에, 서로를 적대시하게 될 가능성이 있어서 우려가 됩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신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도와주는 그 선한 마음은 반드시 타인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낙심하지 않고, 선하고 바르게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거에 썼던 리뷰에서 발췌하자면 "쓸데 없는 일은 하지 말고, 올바른 길을 그저 묵묵히 가라" 정도가 되겠지요. 목소리가 클 필요도 없고, 자랑을 할 필요도 없고, 기독교인 답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가짐을 매일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분명 조금씩 변화는 일어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반성해야 하는 것은, 그동안 품위 있는 그럴싸한 기독교인으로 보이기 위해서 몇 겹씩이나 위선과 가식으로 색칠을 하기에 바빴고, 이미 그 색칠의 껍질 속 실체를 알아버린 사람들은 니들도 똑같네 라면서, 그 위선을 맘껏 조롱하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모두가 불완전한 사람입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누군가는 계속해서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가면서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고, 그것이 우리의 발걸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조심스레 가져봅니다. 선한 뜻을 향해서 애를 쓰는 모습 보다 아름다운 것을 저는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 2012. 06.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