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문서에서 경제 공부를 하기 앞서, 교육과 언론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고 갈께요. 제3공화국 60년대에도 사실 교육열이 대단했습니다. 요즘에는 입시설명회 등을 하면 만원이에요. 부모님들이 오셔서 이건 뭐, 함께 입시를 준비하는거죠. 우리나라 부모님들 대단하죠. 의자는 물론이고 계단까지 꽉 차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입ㄴ니다. 이러한 교육열이 예전부터 있었다는 것. 교육열이 높으면, 그 반작용으로 학생들의 스트레스도 그만큼 높아집니다. 일부 학생들은 탈선을 한다거나, 학업에 반발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60년대에는 중학교 무시험이 있었어요. 원래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를 갈 때 시험을 봐야 했는데, 생각해보면 얼마나 불쌍합니까, 초등학생들은 마음껏 뛰어놀아야 하는데, 좋은 중학교를 가려고 어린 시기 부터 경쟁하고 시험을 본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중학교 무시험 정책이 도입되었지요. 가만히 보면 알겠지만, 우리는 초중고 학습량이 너무 많아서 문제점들이 있었어요.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예전부터 정책들이 바뀌어왔는데, 조금씩 시간이 지날수록 본래의 개혁의 취지가 슬슬 잊혀져가고, 옛날의 잘못이 반복되고 그러한 경향이 있긴 합니다. 하하. 기본적인 원칙은 학생들에게 과도한 공부부담, 스트레스를 주지 말자는 것!

 

 또 60년대에 국민교육헌장 이라는 게 있었어요. 나는 민족중흥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중략)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교육이 굉장히 국가적인 모습들 입니다. 이 당시에는 국가를 위해 한 목숨 바친다는 표현이 당연시 되었음을 느낄 수 있겠죠. 물론 오늘날은 국가주의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할 수 있죠? 정말? 진짜? 그러면 개인은? 이런 식으로요. 여하튼, 60년대 당시에는 교육도 국가에 대한 충성적인 의미가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대적 상황의 반영이라 볼 수 있겠죠. 이 시기 중요했던 것은 경제성장이고, 나라의 발전이었으니까요.

 

 한편! 학생들 중에서는 따지고보면 중, 고등학생들도 당연히 스트레스가 심했어요! 그래서 이 무렵, 고등학교 평준화도 도입됩니다. 문제가 있으니까 고등학교 평준화 하는거죠. 예컨대 오늘날은 또 평준화가 깨질 듯 말 듯 하고 있죠? 각종 특목고를 비롯해서 중학교 때부터 입시전을 치르고 있죠? 가령, 이런 모습들은 역사가 반복되면서 또 평준화 되는건 아닐까, 그런 재밌는 상상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교육적인 문제들은 예전부터 비슷하게 있었다는 거죠. 아, 그리고, 전두환 정부 때 있었던 교육사건 전에 배웠죠. 과외, 학원금지와 같은 정책들 시행했다는 겁니다.

 

 이번에는 언론을 볼께요. 이승만 정부시기에는 경향신문의 폐간, 언론탄압 같은 모습들이 있었고요. 제4공화국 70년대 유신시대에는 언론통폐합이 됩니다. (*박정희 정부에만 유독 있는건 아니고, 전두환 정부 시기에도 있었습니다.) 언론탄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프레스카드제를 들 수 있습니다. 기자들 출입하는데 카드를 주는거에요. 그래서 허락을 맡은 기자들만 기사를 쓸 수 있던 시절이었어요. 왜 이런 식으로 기자를 통제했을까요, 왜냐하면 유신이라는 비상식적인 상황에서, 언론인들을 길들이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저항하기 위해서 언론자유 수호운동이 전개됩니다. 대표적으로, 백지광고 사태 같은 게 있었습니다. 자, 다음으로는, 전두환 정부에서 언론통폐합이 있었고, 이 때 특기할 키워드로는 보도지침이 있습니다. 기사를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고 알려주는 거지요. 독재라는 시대, 공통적인 특징이 뭔가요. 바로 언론을 사로잡고 탄압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언론이 자기 입맛대로 통제되고 있다는 것, 이게 바로 독재에요.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싣지 못한다면, 건강하지 못한 사회라는 겁니다.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볼 수 있는거죠. 그래서 언론인들이 싸우는거에요. 자신의 신념, 비판정신이 무뎌지지 않도록 싸우는 그런 모습이 있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언론, 언론인은 꼿꼿하고,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재갈을 물리려는 권력, 단체, 조직에 대해서 떳떳하게 "이거 아니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언론인이 많아야 겠지요.

 

 음, 예를 들어 봅시다. 물 위를 떠나니는 백조를 보세요. 아름다움이 너무 끝내주죠, 자, 그렇지만 우아한 자태를 가진 그 백조의 수면 밑을 봐야죠. 물 위에서 우아하게 떠다니기 위해서, 물 밑은 정말 수없이 발길질을 하면서 정신이 하나도 없을만큼 노력하는 태도죠. 언론인도 마찬가지로 너무 멋있죠. 그러나 언론인은 아무나 되는게 아니에요.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아니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용기, 선비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 때, 일제에 맞서서 끝까지 자신의 붓과 연필을 굽히지 않았던 신채호, 역사학자이자, 언론인 아닙니까, 그 정도의 지조와 정신이 있는 꼿꼿한 선비를 가진 사람만이 언론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 시대의 양심이 되겠다고 싸워왔던 언론인들 정말 존경스러운 겁니다.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도, 끝까지 싸워온 사람들 참 멋있습니다.

 

 자, 경제파트를 이제 살펴볼께요. 제 3공화국 박정희 정부 때, 가장 큰 치적은 경제발전을 들 수 있겠죠.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독재를 보였지만, 경제 면에선는 엄청난 성장을 이뤄낸 것. 절대빈곤으로부터의 해방. 반만년 역사 중에 절대 빈곤 시기를 벗어나 본적이 있었던가요. 196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에 가난이라는 단어를 저 멀리 치우게끔 만들었다는 거죠. 그러면 이 시대의 구체적인 모습을 봅니다.

 

 먼저 60년대부터 살펴봐야겠죠. 장면 정부에서 만들었던 경제개발계획 청사진을 실행하는거죠.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진행됩니다. 제 4공화국, 70년대에는 제3,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있습니다. 각각의 특징이 좀 있습니다. 살펴봅시다. 1,2차 시기에는 경공업 중심이었어요. 대규모의 공장들을 세울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벼운 공장에서 출발합니다. 옷과 신발을 만들었던 겁니다. 자, 그러다가 경공업만으로는 힘에 부치차, 고부가가치를 추구하는데요. 3,4차 시기에는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갑니다. 포항제철이라든지, 조선소라든지, 공업단지가 집중적으로 만들어집니다. 수출 100억불 달성 같은 놀라운 업적도 있었습니다. 유신시대 정치가 어두운 면이었다면, 경제면에서는 치적도 있다는 것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경제 성장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경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배경, 두 개의 축이 있습니다. 기억해 두세요. 저임금, 저곡가 입니다. 곡물가격을 싸게, 노동자들의 임금을 싸게 였습니다. 이같은 배경 속에서 정부 주도의 수출 지향을 했고요, 대기업 의존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수출 지향이라는 거죠. 그러면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저임금, 저곡가에 대해 좀 더 살펴볼께요.

 

 저임금이라는 것이 뭐냐하면, 경공업 중심일 때, 가령 운동화와 옷을 만들었어요. 그러면 메이드 인 코리아가 딱하고 찍히겠죠. 그런데 이것이 당시만 해도 솔직히 싸구려 였단 말이에요. 싸지 않으면 팔리지가 않았어요. 지금이야 메이드 인 코리아라면 자랑스럽고 비싸고 가치가 높지만, 당시에는 안 그랬어요. 세계인들이 봤을 때, 60년대 메이드 인 코리아 음~ 비싸지 않은 제품이군, 저임금 제품이군,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한국은 우리제품을 싼 맛에 계속 팔아나가는 거죠.

 

 그리고, 기본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계속 낮출려면, 저곡가가 따라와줘야 했습니다. 쌀값이 올라가면 안 됩니다. 쌀은 주식이니까, 이 가격이 오르면 노동자들의 임금도 함께 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임금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 쌀값까지 낮추고 있다라는 것. 다시 말하지만, 저임금, 저곡가, 이 두 개의 축에 의해서, 수출을 지향하는 경제 성장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2차 경제개발 계획을 시행하려면, 돈이 필요했습니다. 해외에서 자본을 가져와야 했습니다. 먼저 해외에 인력 수출을 합니다. 예를 들면 서독에 간호사, 광부 같은 사람들이 갑니다. 왜 갔느냐 하면, 돈을 빌려와야 하는데, 우리나라 너무 가난한 거에요. 공짜가 어딨어요, 외국에서 그냥 돈을 빌려줍니까? 담보가 있어야 할꺼 아니에요. 혹시라도 돈을 못 갚게 되는 상황을 대비해서 국내에서 담보를 찾아보는데, 담보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을만큼 가난한 코리아 였어요. 전쟁 이후에 비참하고 가난한 나라였단 말이에요. 그러다보니까 서독에 간 간호사, 광부들이 받아야 할 임금 있죠. 그 임금을 담보로 잡아서 돈을 빌리는 거에요. 그 임금을 담보로 잡고 차관을 빌려주는 형태였습니다. 해외 인력은 이런 역할까지 하다니, 참 대단한 분들이에요.

 

 서독에 가서 일하셨던 분들이, 처음부터 대단하고 좋은 대접을 받았던 것이 결코 아니었어요. 예컨대 간호사들은 당시 사람들이 기피하던 시신 닦는 일부터 했다고들 하죠. 광부들은 천미터가 되는 엄청 뜨거운 곳까지 내려가서 열심히 일하는 겁니다. 위험하기도 하고 덥기도 하고 공기도 안 좋은 곳에 들어가는 거에요. 그래서 열심히 일하가지고 번 돈으로, 우리나라에 보내고, 또 담보로 인정받아서 우리나라 차관도 빌려오고 그런 모습들, 감동적이죠.

 

 그 때, 대통령이 직접 서독에 갔습니다. 대통령 연설을 들으려고 간호사, 광부들이 모여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자, 대통령이 읽으려고 했던 연설문을 차마 읽지도 못하고 딱 하고 덮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만큼은, 이렇게 해외에 팔려나가듯이 나와서 일하는 것만큼은 하지 말자 라고 위로를 건네죠. 연설회장이 울음바다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경제성장의 달콤한 열매들이 그냥 만들어 진게 결코 아니에요.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해외에 나가서 자신의 노동력을 담보로 잡아서 가져왔던 돈으로 경제개발 해서, 우리는 그 과실들을 먹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겠습니다.

 

 해외자본을 가져오기 위해 또 있죠. 한일 수교가 있습니다. 굴욕적인 수교라고 하면서 6.3 시위가 있었다는 것도 배운 적 있죠. 돈이 계속 부족했기 대문에, 베트남 파병을 하는 모습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외채도 이제 많이 들어왔어요. 한편, 경제는 꾸준히 성장을 하지만, 무역수지는 적자였고, 70년대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역수지 적자는 계~속 이어지는데, 전두환 정부 3저호황 전까지 이어집니다. 어 선생님 왜 무역수지가 적자에요? 라고 묻는데... 경제성장을 하려면 계속해서 돈을 외국에서 가져와야만 했습니다. 계속 돈을 가져오고, 또 가져오고 하면서, 그 돈으로 투자해 나가는거에요. 이렇게 경제성장의 파이를 키워나갔던 겁니다.

 

 끝으로, 어린 여공들이 청계전에 와서 미싱 돌려가면서 일하는 모습들도 있었죠. 이 시대를 살았던 우리 아버지, 어머니 세대의 모습들은 그 분들이 고스란히 역사 속으로 딱 들어갔을 때, 집단으로서 바라본다면, 아 정말 가슴이 찡합니다.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허리 띠 졸라매고 사셨던 분들이거든요. 이런 분들에게 어쩌면 우리는 참 험하게 대하고 있는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너무 가난했던 한국 경제의 모습들을 계속 살펴보고 있네요. 계속 길어지니, 이쯤에서 잠시 쉬고, 다음 문서에서 어어 가겠습니다. 계속...

 

 오늘의 영감 - 일반론과는 다른 생각 하나를 반사합니다. 김정운 전 교수님의 생각입니다. "교수나, 선생, 공무원처럼 정년이 긴 직업이 좋은 건 절대 아니다. 오래 살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정년 하고 나면 바로 죽었다. 그러나 요즘은 보통 90세까지 산다. 50대에 회사를 일찍 그만두면 또 다른 일을 새로 시작해 볼 수 있다. 아직 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년이 긴 직업은 다르다. 예순을 훌쩍 넘겨 은퇴하면 새로운 시도를 해볼 여지가 없다. 힘도 없고 용기도 없다. 정년이 길다고 자랑할 일만은 아니라는 거다."

 

 저는 우리가 계속해서 시도하고, 도전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사십이든, 오십이든, 우리가 현실에 안주해 버린다면, 우리는 딱 거기까지만 해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주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불안하게 산다는 것, 그런 떨림도 삶의 한 부분이라고 받아들이는 용기가 있기 바랍니다. 그래서 순간 순간을, 내가 꿈꾸는 일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좋겠습니다. 예컨대 시험에 한 번 떨어졌다? 목표가 굳세다면, 또 도전하면 되는 겁니다.

 

 제게 큰 울림을 주었던 시를 또한 반사합니다. 잘난 머리로 살지 않기를, 노력하며 성실한 발로 살기를.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남기고, 내면에서 멋진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된다면 저는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일찍이 좋은 선생은 그 자체로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좋은 선생님들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러분, 힘내세요. 역사는 최태성 선생님! 하하.

 "사랑은 발바닥이다 / 나는 발바닥 사랑만을 믿는다 / 머리는 너무 빨리 돌아가고 / 생각은 너무 쉽게 뒤바뀌고 / 마음은 날씨보다 변덕스러우니 / - 박노해"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by 시북 2016.06.19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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