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감람산에서 기도하시다(누가복음22:39-46)/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8. 16. 02:22

 

감람산에서 기도하시다 (누가복음22:39-46)

 

요즘은 기적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요. 확실히 예전에 빈번하게 들렸던 기적에 관한 이야기들이 요즘은 좀 뜸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기적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민준이에게 일어난 기적은 지금 이 21세기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왜 기적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왜 기적이 덜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신앙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순수하고 열정적인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고 세파에 찌들고 나의 삶에 유불리를 따지는 생활인이기 때문에 기적이 덜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적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초자연적이거나 초인적이거나 초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는 일을 기대한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는 것을 넘어서는 열심과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약간은 편하게 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를 편하게 믿는 겁니다. 옛날에 비해서.
뭐 박해가 없다 이런걸 말씀드릴려는 건 아니고 안락한 환경아래서 예배를 드리고 어쩌면 보고, 그래요 예배드리는 것을 구경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너무 예배가 화려해 지니까 그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기들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저들만의 예배의식을 구경하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목사와 장로와 성가대와 각종 위원들의 행위를 그냥 편하게 앉아서 구경하는 겁니다.

 

넓고 높은 홀에 최신의 음향시설 그리고 냉난방이 갖춰진 곳, 게다가 식당이니 화장실이니 사무실이니 휴게실이니 이런 부대시설들도 멋있게 갖춰져 있습니다. 더 이상 우리네에게 야생의 신앙생활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뭐 수십억짜리 파이프 오르간에 수억짜리 그랜드피아노? 게다가 오케스트라까지 붉은 카펫을 밟고선 비싼 가죽구두의 향연입니다. 여기에 더 이상 맨발의 주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마 지금 맨발로 예배당에 오는 이도 없겠지만 혹여라도 그런이가 있다면 쫓겨나지 않을까요?

 

한마디로 야생적인 기독교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산에서 기도하지도 않고 심지어 기도원도 찾지 않고 겨우 일주일에 한번 또는 격주로 한번씩 예배에 참여해서 가만 앉아서 예배행위를 보고 그리고는 흩어지는 겁니다. 소리높여 기도하는 것도 꺼리고 하나님의 계시와 자비를 바라는 울음도 부끄러워하고 어떤 면에서는 귀찮아 하고. 이런 행동을 자기네의 우아와 교양을 해치는 행동인양 멀리하려고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믿는 이를 보고는 ‘예수 점쟁이’라고 비난하는 이가 목사로 단에 서 있고 간절히 기도하는 이를 보고 맹신에 광신으로 매도하고 이적보다는 논리와 이성을 더 중시하는 오늘의 기독교는 확실히 야생이 아니라 온실 속의 화초와 같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완비된 상태에서만 자라나는 온실 속의 화초는 기독교의 내일을 위태롭게 만듭니다. 자생력이 없어진 기독교는 환경의 변화에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찾아올지도 모르는 환경의 변화를 견디고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온실 속에서 화초가 잘 자라지만 일단 비닐이 찢어지거나 유리창이 깨어져서 바깥의 공기에 노출되면 약간의 불편함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말라 죽어버리는 약하디 약한 상태로 우리 기독교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자기가 마치 중세의 귀족인양 하는 목사들을 보면서 우리는 원시 기독교의 순수한 신앙심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수백억 수천억의 예배당에 사람들이 몰리는 현실 속에서 더 이상 신앙의 순수니 원시 기독교니 하는 말은 시대착오적입니다. 돈이 안되는 신자는 찬밥이 될 수 밖에 없고 많이 버는 만큼 많이 거두려는 납세의 기본의무는 대교회 목사들에 의해서 교묘하게 호도됩니다.

 

몇날을 걸어서 이불과 솥을 이고 지고 와서 교회마당에서 밥을 해먹어가면서 추위에 떨고 더위를 이겨내며 참여하여 은혜 받던 그 시절은 더 이상 없습니다. 소위 배웠다는 목사들은 과학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는 말을 성경적이라는 말보다 더 높이 평가합니다.

 

어쩌면 저들의 마음속에 하나님, 그 옛날 성경에서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들은 오늘날 기적도 이적도 하나님의 능력도 부인합니다. 그냥 무심결에 내뱉는 ‘기도하겠습니다’란 말은 종교적 수식어요 관용어지 더 이상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지도 못합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능력도 안 믿는 사람들이 하는 거짓된 기도를 내 아버지께서 들으실 리도 없겠지만.

 

자, 이쯤하고 초대교회 이전 원시 기독교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이 본문은 우리 주님이 잡히시던 날 밤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의 모습입니다.

 

1.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첫째줄, 39절에 우리는 그냥 넘어가서는 안되는 굉장히 의미심장한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갔답니다. 여기서 습관은 관습이나 규례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에 가서 기도하는 규칙적인 신앙태도를 유지한 것입니다.

 

감람산은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닙니다. 해발 800m가 넘는 산이기는 하지만 예루살렘 자체가 해발 800고지에 있으므로 실제로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는 겨우 약간 높은 언덕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이 감람산을 가려고 하면 일단 성밖으로 나와서 기드론 골짜기를 내려갔다가 올라야 합니다.

 

성에서 약 1.3km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겟세마네라고 지명이 나옵니다. 감람산가운데 한 곳을 겟세마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산이 있으면 이 봉우리 저 봉우리가 따로 이름이 붙여져 있지요? 그렇게 보면 됩니다. 감람산의 겟세마네 봉우리.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감람산이니까 당연히 감람나무가 많겠지요? 그런데 이 감람산은 울창한 숲이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밤에 멀리 돌아서 올라가기는 귀찮은 곳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습관적으로 밤에 감람산으로 가셨답니다. 뭐하러 가셨지요?

 

기도하러. 좋아요. 기도도 하고 또 그곳에서 노숙하는 겁니다. 요즘처럼 텐트가 있어서 그 안에서 이슬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낮 동안 피곤해서 밤에는 좀 안락한 삶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노숙, 산에서 노숙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감람산은 예로부터 기도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이들을 위한 편의시설은 없습니다. 게다가 비록 사막지대기는 하지만 예루살렘은 고산지대입니다. 낮에는 더워도 밤에는 많이 춥습니다. 그래서 그냥 자기에는 상당히 힘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이 우리 주님에게는 습관이고 규칙이었답니다.

 

여러분 어때요? 우리는 습관적으로 밤에 기도하러 산에 갑니까? 전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어떤 분은 기도하러 산에 가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는 이도 있습니다. 혹시라도 귀신에게 덮여 씌이거나 아니면 악령에 사로잡힐 수도 있고 모기도 있고 개, 유기견도 있고 멧돼지에 뱀에 온갖 해충에 진드기에 위험하고 불편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코 습관적으로 밤에 산에 가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나는 일생동안 산에 기도하러 가본 적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이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뭐 충분히 그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목사라면 야생의 산에서 밤에 기도한 경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과 나와 씨름하는 그런 경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낮의 사역을 위해 밤에는 산에서 기도하신 주님을 생각하면 우리가 어떤 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할지는 바로 답이 나옵니다. 우리 주님의 기적이 놀랍지요? 그 기적의 원동력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가 습관적으로 밤에 산에 가서 기도하셨기에 낮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때 제가 성도들을 데리고 밤에 산에 가서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를 체험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저 역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에 성도들과 함께 올라 간 겁니다. 그런데 요즘 그런일이 있을까요?

 

저도 귀국하고 그냥 산에서 기도하는 일들이 많이 줄었습니다. 두 번이나 멧돼지를 만난 다음부터는 산에 가는게 많이 꺼려집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산에서 밤에 주무시는게, 산에서 밤에 기도하시는 게 습관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아무런 불평 없이 주님을 따른 겁니다. 당연히 선생님은 그러신다는 것을 알기에 그냥 따른 겁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 주님은 무엇을 마치고 산에 기도하러 가셨을까요? 유월절 만찬을 마치고 산에 기도하러 가신 겁니다.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가셨다는 겁니다. 주님이 기도하러 가는 자리는 소위 말하는 죽으러 가는 자리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대제사장의 종들과 군병들에게 잡혀 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 만찬을 마치면 좀 쉬기도 하고 그래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기도하러 가신 겁니다. 어차피 감람산에서 노숙할 바에야 만찬장에서 주무실 수도 있을 터인데도 산으로 가시는 겁니다. 왜냐면 이게 주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로는 습관이랍니다. 어쩌면 우리 주님은 자기에게 만찬장소를 제공한 제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감람산으로 가셨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항상 아버지와 남을 배려합니다. 나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항상 가난하고 배고프고 춥지요. 그리고 피곤합니다. 나만 잘살고 나만 잘되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가져도 살아가기가 어려운 세상에서 남을 배려하고 아버지의 뜻을 고려하는 삶은 힘이 들 것임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남을 배려하는 삶은 어쩌면 기독교인, 참 성도에게 숙명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좋으면 좋을수록 교회 안에서조차도 더 힘듭니다. 그러나 그러나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몰라줘도 우리 주님은 우리의 수고를 결코 모른다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절대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우리 주님이 갚아 주실 것입니다.

 

2.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주님은 혼자 기도하시기를 즐겨하십니다. 여기 보면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니”

 

제자들에게도 산기도의 재미를 알려주시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다니시지만 정작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지는 않으십니다. 여차하면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그들을 살펴 주실 거리이기는 하지만 기도하는 소리가 들리지는 않을 그런 정도의 거리를 두고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는 말은 정말 생소합니다. 지금 우리 주님은 잡히시기 직전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다른 기도를 주문하셨어야 할 것 같은데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는 말은 정말 의외입니다.

어떤 유혹을 말하는 거지요?

 

3.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 옵소서
그래요, 우리 주님도 역시 인간의 몸으로 오셨기에 십자가 고난이 그 모욕과 능욕이 견디기 어려울 것임을 알고 될 수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대의명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일이라 해도 그게 왜 하필 저입니까? 다른 사람이 그걸 하면 안됩니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인고로 고통과 모욕에 초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걸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 잔을 옮길 수 있다면 옮겨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놓고는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렇습니다. 기도란게 결국은 이렇게 가야 하는 겁니다. 내가 반드시 해야 될 일이지만 힘이 들어서 도저히 못하겠다고 다른 이에게 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나의 욕망대로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하는 겁니다. 나는 겁이 나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항상 보면 뭐뭐를 주시고 뭐뭐가 되게 해 주시고 이렇게 해 주시고 저렇게 해 주시고 주로 보면 ‘~주시고’로 끝이 납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뭐 주겠다는 기도는 하지도 않습니다. 하기야 주겠다고 생각했다면 주면 되지 주겠다고 미리 미리 주님에게 알려 줄려고 기도까지 하면서 선포할 필요가 없기는 합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다 들어 주겠다. 그런데 내 욕망대로 기도하면 안 들어 주겠다고 하셨지요? 우리가 기도할 때 먼저 아버지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그러면 그 나머지를 더하시리라고 하셨지요? 우리는 이 기도 원칙을 잘 알고 있지만 막상 기도할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떨 때는 너무 너무 급해서 그냥 해주세요 라고 달라고 그렇게 기도합니다.

 

주님이 이렇게 기도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혹시라도 아버지께서 마음을 바꾸셔서 나에게서 그 잔을 면하게 해 주실 수도 있을까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를 구하는 겁니다. 그러나 나는 결국은 아버지의 뜻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밖에 기도를 못하는 이유는 그 잔이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신의 아들도 두려워 떠는 그런 잔이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주님의 기도에서 한 가지를 봅니다. 기도는 체면이고 격식이고를 따지는 자리가 아니라 진솔하게 아버지에게 나의 내면을 드러내고 도움을 요청하는 자리라는 겁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온 메시야라는 체면, 구세주의 체면, 다윗의 후손이요 인류의 구원자라는 체면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진솔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가령 이런 식이지요. “하나님 아버지 저 너무 너무 죽기 싫습니다. 그러니 저를 한번만 살려 주세요. 저 정말 아버지에게 잘하겠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한번만 기회를 주세요.”
솔직히 여기에 무슨 아버지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은 아닌 듯이 보이지요. 그러나 여기에 ‘아버지의 나라와 의’가 있습니다. 기회를 주시면 아버지를 위해서 잘하겠다고 말했쟎아요. 이렇게 말하는 간절함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내 아버지께서 아십니다. 그러면 된 겁니다. 그러면 훌륭한 기도가 된 것이지요.

 

3.천사가 힘을 더하더라
우리 주님이 얼마나 기도에 힘을 쏟으셨는지 심지어 하늘의 천사가 내려와서 기도를 도왔다고 합니다. 물론 이 구절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뉘앙스를 더 정확하게 기록한다면 ‘천사가 나타나서 기도를 도왔다’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돕는 천사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사가 나타난 것에 강조점을 둔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이제부터 벌어질 십자가 사건과 제자들의 배신과 회개는 전적으로 사탄과의 영적인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탄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러 온 이후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삼년간의 공생애 동안 사탄의 세력은 매우 약화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동안 이골 저골을 다니시면서 귀신들린 자들에게 해방을 주셨고 죄에서 놓여나게 하셨으며 병든자를 고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셨고 저들을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 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이 지상에서 승천하시기전에 마지막으로 사탄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사망의 음부까지도 정복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겁니다. 그 시험, 그걸 본문에서는 유혹이라고 불렀고 천사가 나타나서 기도를 도울 정도로 주님은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사실 주님도 인간의 몸으로 그 십자가 고난이 두렵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존귀한 자리에서 죄인의 자리로 내려와 뭇 백성들에게 조롱과 능욕을 당하고 일시적이지만 사탄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그 사건, 그 잔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걸 피하려고 기도한 것은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그러니까 내가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이행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해 달라는 그 기도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큰일을 앞에 두고 내가 그 일을 감당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저를 준비시켜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막연히 큰일을 앞에 두고 두려워만 하거나 피하려고만 하면 사탄의 유혹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4.예수의 간절한 기도
주님은 기도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에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땀이 핏방울같이 되었다는 것이 어떤 상황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땀이 많이 쏟아질 정도로 힘을 다해 기도했다면 빗방울 떨어지듯이 땀이 흘렀다고 표현했을 것 같은데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사실 이 표현을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있어 왔습니다. 어떤 이는 문학적 표현으로 치부하는 가하면 어떤 이는 진실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 표현에 대해서 두 가지의 가정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정말 땀이 피가 되어 흘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피가 땀방울로 흘러나왔다는 겁니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실제로 그럴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엄청나게 긴장했을 때 모세혈관이 파괴되어 피가 나온다는 거지요.

 

두 번째는 땀이 조르륵 흘러 내리는 것이 아니라 너무 너무 열심히 힘쓰고 애썼기 때문에 마치 피가 두둑 떨어지는 것처럼 땀이 그렇게 뚝 뚝 흘렀다는 겁니다. ‘비 오듯이 땀이 쏟아 진다’는 우리네 표현과 비슷해지는 거지요.

 

어떤 해석을 취해도 우리 주님이 너무 너무 열심히 그리고 고뇌에 차서 기도하신 것은 맞습니다.

보통 우리가 기적을 바랄 때는 이런 기도가 기적을 일으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함과 진심을 보시고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5.슬픔을 인하여 잠이 들다
주께서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시고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오셔서 본 것은 제자들이 자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제자들도 보면 굉장합니다. 한쪽에서 선생님이 그렇게나 열심히 애끓는 기도를 하고 있는데도 이들은 잠이 듭니다.

 

너희는 저쪽에서 자라 내가 기도한다 이렇게 하신게 아닙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잠이 들었습니다. 기도로 준비하지 못한 모습을 보면 이들의 미래가 분명해 집니다. 사탄의 시험에서 이겨내지 못하는 거지요. 아마 이들의 이런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좀 슬프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허탈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들이 그냥 쿨쿨 잠이 든건 아닙니다. 본문에서 보면 슬픔으로 인하여 잠이 들었답니다. 뭐 슬플 때는 잠자는 것도 좋기는 합니다. 어차피 안될거 그냥 잠이라도 자야 사람이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무슨 슬픔 때문에 제자들이 잠이 들었을까요?

 

그것은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배신하겠다는 말씀과 제자들이 나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고 하는 예언 때문에 이들이 슬퍼한 것입니다. 이들은 나름대로 자기들이 주님의 사역에 큰 일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네의 비중이 결코 낮지 않다고 여겨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장차 이 나라를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제2의 다윗왕국을 만드셔서 역사상 가장 멋진 임금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왕으로 즉위하면 자기네들은 다 고관대작이 되어서 이 나라를 함께 다스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 때 주께서 하신 말씀은 전혀 다릅니다. 주님은 자기가 왕이 되지도 않고 십자가를 질 것이며 또한 제자들의 배신과 부인에 대해서 너무나 구체적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들은 슬펐던 것입니다.

 

6.어찌하여 자느냐
우리 주님도 이들의 슬픔에 대해서 뭔가 동정을 느끼셨는지 아니면 이들을 연민으로 바라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들에게 책망치 않으시고 이렇게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뒷말을 보충해 볼까요? ‘이제 다 끝났다. 이제는 너희끼리 기도하고 이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할 것이야’

 

아니면 ‘얘들아, 항상 건강하고 믿음을 배신하지 말아라’ 이렇게 하셨을까요?
이 말씀은 주님이 잡하시기 직전에 하신 매우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그야 피곤해서 자는 겁니다. 슬퍼서 몸이 너무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저희도 모르게 잠이 들었습니다. 죄송해요.
그러나 이제 주님은 마지막 순간임을 자각하십니다. 저 쪽에서 가룟 유다가 오고 있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제자들이 시험을 치르게 될 것인데 지금 이 상태로는 시험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시고는 그 사탄의 유혹에 이기기위해서 기도로 무장할 것을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잡히시기 전, 제자들이 사탄의 시험에 빠지기 전 이 귀중한 순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니까 엄청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바로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네가 지금 세상향락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가 아니다.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기도하고 있어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주님이 기도하던 도중에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을 깨우고 기도할 것을 요청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잠이 들었습니다. 왜 그렇게 집요하게 제자들에게 기도할 것을 요청하셨나요? 그것은 기도해야 만이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탄의 시험에 이기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큰일을 맡기 위해 기도로 준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그냥 자고 있습니까?

 

솔직히 매년 여름이면 우리는 만사가 귀찮습니다. 옷을 입으면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이 쏟아 집니다. 기도해서 그런게 아니라 더워서 그렇지요. 그래서 하루 종일 흐리멍텅하게 보내기가 쉽습니다. 정관은 지금 열대야가 아닌데 아마 이번 여름에도 열대야로 잠못 이루는 밤이 많을 겁니다.

제가 지금 과거를 돌이켜보면 옛날에는 이렇게 덥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요즘은 정말 견디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한 여름에 햇빛을 많이 쬐고 땀을 흘려야 한겨울에 감기에도 안 걸리고 건강하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기도해야 나중에 우리가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얼마나 소중한 기회를 놓친 것인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계신 이 상황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주님이 승천하시고 난 다음에 혼자서 세상과 싸워 나갈 때 그 사랑의 주님이 많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주님이 곁에 계셔서 “얘야, 네가 힘든게 뭐지? 나에게 다 털어놔봐라. 내가 들어 주께”라고 할 기회가 점점 지나간다고 생각하면 이 아까운 시간에 기도하고 싶지 않나요?

 

하나님에게 집중해서 기도하고 싶지 않나요?

우리는 뭐든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생각한다면 항상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부터 따져봐야 합니다. 단순한 나의 욕망에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 땀이 피같이 떨어지는 기도, 하나님의 일을 위한 기도를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난 다음 맞는 새벽은 다릅니다.

 

이 세상에 기적이 없다고 불평하지 말고 내 하나님의 역사가 나에게는 왜 이렇게 일어나지 않느냐고 원망하지 말고 간절하고 진실된 기도를 드려보세요. 한 여름 덥고 벌레도 많고 참 좋지 못합니다. 뭐 춥지 않다는 것 하나가 위안이기는 하지만 나머지는 다 좋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겨내고 하나님께 나아가 보십시오.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나를 향한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큰일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기도로 준비하세요.

기도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진심과 간절한 기도는 외면 받지 않습니다. 내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하늘에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나를 지켜보시며 나의 필요를 아시고 나의 간구를 들어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우리 주님이 잡히시기 전 제자들에게 하신 당부입니다. 오늘 우리들을 향한 주님의 당부이기도 합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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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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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생각해보니 저는 유독 두 가지가 힘들었습니다. 첫째는 기도 하는 것. 둘째는 받은 만큼 주는 것 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신앙이 온실 속의 화초가 되어서는 안 되며, 야생의 강인함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요. 저의 삶이란, 편안함의 추구였으며, 말 한 마디에도 쉽게 상처받아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욕심과 시기 질투심은 또 많아서 다른 사람의 성공과 행복에 칭찬할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나이만 훌쩍 먹은 어른아이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일 마치고, 늦은 밤 집에 오니 CBS에서 모세이야기를 드라마로 해주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세와 아론의 대단함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저는 유달리 애굽의 바로가 가지고 있는 완악함에 팍 하고 꽂히더라고요. 그게 마치 제 이야기 같았습니다. 애굽의 지도자 바로는 (많은 하나님의 기적 앞에서도) 절대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다가, 자신의 아들이 병으로 죽게 되자 그 때야 하나님을 인정하며, 히브리인 노예들을 자유롭게 풀어주게 됩니다. 물론, 성경에 쓰인대로 바로는 홍해까지 맹렬히 히브리인들을 뒤쫓아가는 모습이 예고편으로 딱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애굽의 바로한테도 그 정도의 기회를 주었다면, 하물며 사랑하는 주님의 자녀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는 걸까요. 그런데 정작 우리는 하루를 맞이할 때, 조금도 기뻐하지 않고, 조금도 감사하지 않고, 조금도 기도하지 않는 건 아닐까요. 그리하여 습관적으로 영혼이 잠들어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 그만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말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아, 스스로의 삶을 귀중히 여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비록 상처 입은 삶이었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덮어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아파 본 경험이 있다면,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고난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멋진 모습으로 빛날 수 있기를 이 밤에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 2017.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