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168

균역법의 도입 및 조세의 전세화

경제 파트를 생각할 때마다, 저는 제발 좀 더 쉽게, 부디 편안하게, 이렇게 가려고 마음을 먹습니다만, 좀처럼 친근하게 느껴지지는 않네요. 일단 제목부터가 "압박"이 느껴지잖아요. 어휴. 여하튼, 오늘은 군역을 살펴보는 시간인데, 분량이 많지 않아서, 훨씬 부담이 적을 겁니다 :) 내용도 아 그래요 재밌다니까요! (억지로 강조중!) 이번 문서도 복습겸 조선 전기의 군역이 어땠는지 생각해 봅시다. 조선 전기에는 200년 동안 전쟁이 없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군역이 점점 요역화 되는 현상이 발생되는데요. 다시 말해, 군대에서 군사훈련 대신에 각종 공사만 하게 됩니다. 성쌓고, 길닦고, 현장가고... 조선 전기의 역은 국가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형태가 되었지요. 군대가 점점 약해져 가는데, 더욱이 ..

조선후기 수취체제의 변화 - 영정법, 대동법

자칫 지루하거나, 어려울 수 있는 경제파트 입니다만, 편안한 마음으로 보시면 됩니다. 의외로 재밌을 수 있어요. 하하. 부담 느끼지 않기를 바라는 취지에서, 가볍게 출발하자는 취지에서, 이른바 "최태성 선생님식 서늘 유머" 날리고 출발합니다. 조선의 전기와 후기를 나누는 기점은 바로 "양란" 입니다. 네, 왜란과 호란이지요. 그래서 최샘은 마트에 가서 양란(계란)코너 지날 때마다, 이 쌓여있는 양란(?)들은 왜란과 호란이라며 애꿎게 계란보고 전쟁을 상상하는 직업병을 앓고(!) 계십니다. 아아.. 직업병, 마음이 아프지만, 어쨌든, 유머는 이쯤하고, 양란을 거치면서 조선에 큰 변화가 불어닥쳤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대표적으로는 임시기구였던 "비변사의 대폭 기능강화"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경제면에서도 변화가..

조선 후기 대외 관계 - 간도 이야기, 독도 이야기.

이번 문서에서는 조선 후기의 대외 관계를 살펴봅시다. 복습을 먼저 해본다면, 조선 전기의 대외 정책은 기본적으로 "사대 교린"으로 갑니다. 일종의 명분론이기도 한데, 큰나라인 명나라를 사대하고, 이웃나라 여진 및 일본과는 교류한다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교린이 뭔가 하니, 강경책과 온건책을 섞어쓰는 걸 말합니다. 그래서 여진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4군6진개척, 사민정책(이사장려), 토관제도를 도입했고요. 반면 온건책도 있었습니다. 무역소를 설치하고, 여진족 사신을 환영하고자 북평관도 운영했고요. 아궁, 복습이니까 이 부분, 더 자세한 건 조선 전기 대외 관계 문서를 참고하세요. 하하. 일본에 대해서는 조선 초반에 강경책이 있었습니다. 세종 때, 쓰시마섬 정벌에 나섰고요. 또한, 온건책으로는 3포를 개항하고 ..

조선후기 정치사 - 탕평 정치, 영조와 정조

17세기 중반,후반 ~ 18세기 초반, 숙종이 다스리던 시절을 "환국 정치" 라고 부릅니다. 정권이 몇 번씩이나 뒤바뀌었음을 말합니다. 게다가 정권이 어느날 딱 바뀌면, 반대파에게는 집앞에 사약그릇이 친절하게(?) 배달되기도 합니니다. 치열한 정치싸움 때문에, 부작용도 심각했던 시절이지요. 처음에 정권을 잡았던 것은 남인 세력이었지만, 빼앗기고, 다시 뺏고, 하다가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쪽은 "서인"이었습니다. [환국 정쟁]을 거치며, 남인은 세력이 거의 몰락 해버렸고, 잘 알려진 장희빈(장옥정)도 남인쪽이었기 때문에 사약을 먹어야만 했지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마련이라서, 장희빈이 정말 독한 여자였을까 라는 것도 의문을 가져볼만 합니다. 승자 서인 세력이 써놓은게 진실은 아닐 수도 있을테니까요. 이..

조선후기 정치사 - 예송논쟁의 이해 2편

지난 문서에서 계속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예송 논쟁이라 함은, 예법과 관련된 논쟁인데요. 서인과 남인의 견해가 달랐습니다. 이전까지는 나름대로 살아남은 두 당이 "공존의 토대"를 유지해 왔다면, 결정적인 두 차례의 예송 논쟁 이후로는,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싸움이 격해져 갔고, 급기야 나중에는 한 쪽이 독식하는 "일당 전제화"로 흘러가는 씁쓸한 모습으로 진행됩니다. 대체 예송 논쟁이 뭐였는가, 자세히 들여다 봅니다. 우선 1차 예송 논쟁부터 천천히 파악할까요. 인조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어요. 첫째는, 소현세자이고, 둘째는, 봉림대군 입니다. 그리고 인조 시기에 조선 최대의 굴욕 중 하나인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게 대패하며 항복선언" 을 하잖아요. 왕자도 청나라로 끌려가고요. 이래저래 비참했습니다. 여..

조선후기 정치사 - 예송논쟁의 이해 1편

조금 도식화 해서 조선 후기를 이해한다면, 16세기 붕당 정치, 17세기 환국 정치, 18세기 탕평 정치, 19세기 세도 정치로 흘러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조선 후기는 왜란과 호란, 즉 양란을 거치면서 성리학적 가치도 흔들리기 시작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이번 문서에서는 치열한 붕당 정치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합니다. 예송논쟁이 무엇이며, 정치적 물타기 기술(?)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면 좋겠구나 싶습니다. 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모습이 펼쳐진다는게 상당히 재밌습니다. 우선 복습겸, 조선 전기부터 거슬러 올라간다면, 훈구와 사림의 싸움이 있었잖아요. 15세기 처음 조선을 장악하던 것이 훈구파 였다면, 이 때 사림은 3사를 장악해 나가며 훈구를 지속적으로 압박해 나갑니다. 열받은 훈구파는..

조선 후기 군사 제도의 변화 - 5군영과 속오군

설명하자면 복잡해지고, 암기하자면 단순해지는, 조선 후기 군대의 변화를 살펴보는 문서입니다. 간단히 핵심부터 정리하면, 전쟁을 거치면서, 중앙군은 5군영 체제로, 지방군은 속오군 체제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중앙군은 이제 급료를 주는 시스템으로 바뀌며, 보다 튼튼한 군대를 추구했고요. 그러면 차분하게 한 번 군사 제도의 변화를 살펴보도록 할까요. 먼저 중앙군의 변화. 기존의 5위에서 → 5군영 체제로 바뀝니다. 뭐가 달라졌는고 하니, 훈련도감이 생기고, 수도 외곽까지도 중앙군이 직접 관리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훨씬 방어하는 지역이 넓어진 셈이지요. 전쟁으로 인해, (임진왜란 때 엄청 깨졌잖아요) 수도의 수비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인식한 후, 중앙군은 좀 더 정예로 갖춰야 겠구나 라고 생각한 것이지..

조선 후기 체제의 변화 - 정치 구조와 비변사

조선 후기로 넘어 왔는데, 너무 급하게 빨리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천천히 하나씩 들여다 보는게 좋겠구나 싶어요. 우선 조선 전기까지를 "근세"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를 "근대 태동기"라고 부르고요. 흔히 서양식으로 나누는 고대 - 중세 - 근대, 딱 세 가지에 비해서, 동양은 몇 과정이 더 있는게 느껴지나요. 어쨌든 근대라는 것부터 개념을 살펴보지요. 근대라고 한다면, 정치는 민주주의, 경제는 자본주의, 사회는 평등사회, 사상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지향합니다. 확실히 구조적으로 한결 좋아진 세상이지요. 어쨌든 조선 후기를 근대 태동기로 부른다는 것은,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이자, 근대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시기다 라고 보는 겁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식민사관..

근세문화사 5 - 조선 전기의 건축과 예술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 달 넘게 보류중이던, 국사 노트 옮기기를 해봅니다. 지난 문서에서 조선 전기의 건축과 예술 파트가 빠져 있다보니, 이 부분까지 마무리를 확실히 해놓을께요. 다음 문서에서 조선 후기로 넘어가도록 하고... 그러므로 오늘 이야기는 조선 전기의 건축과 예술이 되겠습니다. 이번 문서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15세기와 16세기를 구분해서 정리를 해볼텐데요. 두 세기가 특징이 다르다는 것을 염두해 두면 좋겠네요.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표현하자면, 20세기의 미소년일지라도, 21세기는 노화중년이 될 수 있다 뭐 이런 느낌? 하하, 여하튼 시대별로 유행이 다르다는 겁니다. 물론, 지배계층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지요.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유행조차도 조용히 들어다보면, 특정한 패션집단에서 유행을 이끌거나,..

근세문화사 4 - 15세기 조선전기의 과학 기술

어쩐지 한참만에 문서 정리를 하는군요. 오늘도 읽을 책은 쌓여있지만 ㅠㅠ 하하. 우선 미루지 않아야 할 일부터 잊지 않고 실행해야 하니, 한국사 정리를 계속해 나갑니다. 잠시 복습겸, 조선전기 15세기 문화의 특징을 생각해 봅시다. 배경으로 우리가 유념할 것은, 15세기에는 민족적이고, 자주적 성격이 있다 는 점을 파악해두면 이해가 한결 편합니다. 왜냐하면, 조선을 건국했던 혁명파 사대부 세력의 명맥이 이어져 가면서, 당시 주도세력은 관학파가 쥐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들은 비교적 타사상에도 관대했으며, 기술을 중시하며, 부국강병을 추구했습니다. 이 시기 대표적 군주로는 세종 대왕을 꼽을 수 있겠고요. 반면 16세기로 넘어가면, 주도세력이 사림파로 넘어가게 되고, only 성리학 모드로 변경됩니다. 1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