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168

근세문화사 3 - 조선의 불교와 민간신앙

제목은 일단 불교와 민간신앙이지만, 워낙 성리학 관련으로 분량이 많다보니, 지난 이야기에서 못다한 후일담까지 살펴보도록 할께요. 16세기에 마침내, 절대로 성리학! 을 주류로 삼고 있는 사림파들이 집권을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학파별로 계보가 나눠지게 됩니다. 계보로는 서경덕 - 조식 - 이황 계통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는 "동인당" 이 있고요. 이이와 성혼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는 "서인당"이 있습니다. 이른바 동서로 분당이 된거지요. 한편 이후에 또 분화가 일어나는데요, 서경덕과 조식의 영향을 받아 북인 / 이황쪽의 영향으로 남인 / 이이쪽은 노론 / 성혼쪽은 소론, 이렇게 각각 연결되어 나갑니다. 큰 흐름을 기억해 둔다면, 사림은 분화되었고, 성리학자들은 세부적으로 상당히 ..

근세문화사 2 - 성리학의 발달, 리와 기의 이야기

성리학과 리와 기의 이야기! 고백하건데, 아주 깔끔 담백 명확하게 정리할 자신은 별로 없습니다. 하하. 다만, 흐름과 느낌을 파악한다는 측면으로, 부담 없이 접근 해보면 좋겠습니다. 성리학은 송나라 주자에 의해서 집대성 되었던 학문인데요. 기본적으로는 "무엇이 정통인가"를 파고들어가는 학문입니다. 배경까지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주자가 살던 당시 송나라에는,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이민족과 기존의 한족간에 대립적인 구도가 그려졌는데요. 이 때 - 이민족의 침입에도, 결연히 맞서야할 "이유와 명분"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순간에 성리학적 배경은, "우리(한족)가 정통이고, 우리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렇듯 난국을 풀어 헤쳐나가고, 무엇이 정통인가, 라는 느낌이 있지..

근세문화사 1.5 - 교육기관, 그리고 성리학의 잔향

제목에 1.5를 붙인 것은, 이번 문서는 사실 별로 내용이 많지 않은 터라, 금방 정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5세기와는 상당히 다른 16세기 문화가 있는데, 대표적 특징은 무엇일까요? 사림이 집권했기 때문에, 사대적인 분위기가 흘러나온다는게 가장 인상적입니다. 16세기 역사서에는 사대적 성격이 있는 동국사략이 있으며, 유명한 이율곡이 썼던 기자실기가 있습니다. 기자가 누구냐 하면, 중국사람이거든요.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하니, 사림의 성리학자들은 우리나라 정통성의 출발을 (중국)기자로 보는 측면이 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상당히 당황스러울 수 있는데, 일단 집권한 사림파가 "중국을 중시하는 성리학 세계관"을 갖고 있었음을 이해해 놓고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 중국인 "기자"로 인해 고조선이 중..

근세문화사 1 - 열녀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닐까?

기나긴(?) 조선 전기 이야기도 벌써 문화사까지 넘어왔습니다. 쉬엄쉬엄 정리하는 편인데도, 금방이네요. 문화를 살펴보기 전에 우선 15세기와 16세기의 분위기가 다소 다르다는 점을 배경으로 파악해 두면 좋습니다. 이미 정치 파트에서 한 번 살펴봤었지만, 15세기는 관학파가 주도세력입니다. 특징을 도식화하면, 중앙집권 추구, 사장 (→시와 문학) 중시, 타사상에 관대한 편, 기술 중시 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즉 관학파는 자주적이고, 실용적이며 민족적인 기풍의 문화가 전개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16세기는 4전5기 끝에 사림이 주도세력이 되잖아요. 이들은 향촌자치를 추구하며, 경학 (→유교 경전) 중시, 타사상 배척, 기술 천시 라고 요약됩니다. 따라서 사림파는 사대적인 경향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고요. 잠..

조선 향촌 사회의 모습들 - 사람이 중요하다!

지난 문서에 이어서 사법기관을 정리합니다. 사실 행정기관과 같으므로,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중앙에 사헌부에서 사법업무를 보았고요, 대역죄인을 처리하는 의금부도 사법적인 일들을 하지요. 수도업무를 보는 한성부에서도 사법처리를 담당했습니다. 다소 특이한 것은 노비 문제를 담당하는 장예원이 있었다는 점. 조선 초기에는 특히 노비 소송이 많았다고 합니다. 지방의 경우는 관찰사와 수령이 사법 처리를 담당합니다. 수령은 하는 일이 굉장히 많았지요. 수령7사라고 해서 임무들을 살펴보면, 농업을 장려했고, 조세 균등을 추구했으며, 교육도 해야 했고, 인구 관리도 합니다. 수령들은 사법권, 행정권, 심지어 군사권까지 갖고 있었으므로, 역할이 막중했다고 볼 수 있고요. 재밌다고 해야할지, 특이하다고 해야할지, 소송 ..

조선의 사회제도와 법률제도 탐구

사회제도에서 비중이 큰 것은 농민입니다. 농민은 국가의 "근본"이라고 불리니까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인구가 가장 많고요, 무엇보다 농민은 국가에 조세, 공납, 역을 제공하기 때문에, 사실상 국가 재정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농민들은 사족(양반이나 선비)에게 지대를 내기도 합니다. 즉 지배층의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는 농민들이었습니다. 생각해 볼 것은 "민본주의"라는 조선사회의 구호입니다. 이건 민주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가령 오늘날은 민주주의로 운영되는데, 헌법 1조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능동적인 개념이지요. 그런데 성리학의 민본주의라는 것은, 백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다루며, 이들을 국가가 책임지고 보살핀다는 개념에 가깝습니다. 예컨대 양반이 부모라면, 농민들은 돌봐줘야할 자..

조선의 신분제 - 양천제와 반상제

조선은 아직까지는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15세기에 규정된 양천제, 이것이 경국대전(법전)에 명문화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법적으로는, 사람들을 양인과 천민으로 신분을 나누었습니다. 양인의 권리는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고요. 다시 말해, 법적으로는 농민의 아들도 얼마든지 일단은 "출세의 길이 있기는 있었다"는 겁니다. 권리가 있으면 의무도 따르겠죠. 의무는 조세, 공납, 역이 있고요. 생각해 볼 것은, 왜 일반 농민들이 과거시험을 칠 수 있었는가 하니, 법적으로는 권리가 보장받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천민의 경우, 권리 자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의무도 없긴 한데, 실제로 천민의 삶이란, 국가와 주인에게 그야말로 시달리면서 살아야 했지요. 여기까지가 양천제의 기본개념니다. 법적으로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

조선 경제 생활의 이모저모

조선 전기 경제 파트의 마지막 문서이네요. 초심을 잃지 말고, 가볍고 경쾌한 정리로 출발합니다. 논농사는 주로 직파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 그냥 간단합니다. 직접 땅파고, 볍씨를 뿌리는 농사법이지요. 단점은 벼와 잡초를 구분하기 어려워서 수확량이 약간 줄어들 수 있습니다. 당시에도 이앙법이라고 해서, 난이도 높은 농사가 있긴 있었습니다. 고려 말기부터 이어진 혁신적인 농사 기술인데, 일부 남부 지방에서 시행되었지만, 별로 장려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앙법은 수확량도 많고, 잡초 뽑는 고생도 덜하지만, 5~6월에 옮겨심는 시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가뭄이 들어버리면 한 해 농사를 완전히 망쳐버리기 때문에, 상대적 안정도가 떨어집니다. 약간 도박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차마 이앙법을..

16세기 조선 경제의 붕괴, 부패가 낳은 비극.

처음에 한국사 정리를 계획했을 때, 약 두어달 정도의 기간을 잡아, 50개의 문서로, 읽기 쉽게 노트정리를 옮겨 놓으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이 커지고, 재밌기도 했기에, 지금은 좀 더 가봐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말하자면, 이제 절반 정도의 이야기라는 거지요.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지점이 슬프고, 비극적이라서 많은 생각들이 복잡하게 떠오릅니다. 이번 문서에서는 조선 전기의 경제 상황을 살펴볼텐데,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되는 16세기 말, 이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던가를 경제적인 측면에서 고찰해 볼까 합니다. 교과서적인 표현으로 쓰자면, (근세의 경제) 조선 전기의 조세 - 공납 - 역, 그리고 환곡까지 보는 문서입니다. 조세는 지난 문서에서 많이 살펴보았기 때문에, 복습 개념에 가..

수조 방식 고찰 - 기득권이 잘 사는 이유는 토지때문?

개인적 여담으로 오늘 문서를 시작하자면, 예전에 스포츠매장 담당자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게 사장님 내외분은 참 열심히 일을 했고, 간신히 먹고 살 만큼의 수익을 내고 있었습니다. 하하, 저도 별반 다를게 없었고요. 그런데 건물주 아주머니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달라졌습니다. 첫 달에는 고맙게도(?) 가게에서 수십만원치 옷과 신발을 구입하더니, 몇 년도 채 안 되어서 자동차가 외제차로 바뀝니다. 이 건물에는 한의원도 있었고, 임대료가 상당히 높았습니다. 그러고보니, 작년 서울 명동의 임대료는 세계 9위를 자랑했었지요. 도심지의 임대료는 장난 아닙니다 :) 저는 이런 뼈있는 농담(?)을 종종 들었습니다. 자기 건물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진짜 복받은거지 뭐. 자기 건물은 고사하고, 내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