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었던 영화를 늦게나마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단아한 미모의 배우 한효주와 소간지로 통하는 훈남 소지섭이 등장하는 영화! 이것만으로도 일단 관심이 가지 않으십니까? 아, 팬이라서 관심이 가는거 아니냐고요? 네, 맞습니다 (...) 여하튼, 오직 그대만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니, 어딘지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영화 이야기를 개인적 일화와 함께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때는 바야흐로 작년 봄, 화창한 날씨 속에서, 제 경우 원인은 과로로 추정되는데, 포도막염이라는 병에 걸렸었습니다. 하마트면 한쪽 눈을 실명할 뻔 했지요. 지금은 무사히 나았지만, 한 때는 점점 시력이 떨어져가는 공포 앞에서, 거의 패닉 상태였습니다. 모든 것이 중단되었지요. TV와 모니터 OFF는 물론이고, 축구도 영화도 게임도 만화도 OFF. 그러다보니 너무 심심해서 라디오를 틀어놓기까지 했습니다. 보이다가 보이지 않는 경험은 무서웠지요. 그런데 병원에서 거의 완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 날 밤은 특별했습니다. 저는... (아래에서 계속)
(서론이 길군요;) ...저는 다시 시력이 돌아오자, 너무 기쁜 나머지, 새벽 5시, 6시가 되도록 잠이 오지가 않았습니다. 심지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두 번 태어나는 기쁨으로 표현하면 좋겠지요, 즐겁고 감사한 나머지 눈물이 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고보면 참 인간이란 간사하지요. 평소 잘 보일 때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그런 곤란한 상황을 맞이한 후에야, 비로소 눈의 소중함을 알아차리니까요. 그래서인지,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남자임에도 자꾸만 한효주에게 감정이입이 될 때가 많았습니다 :)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언제나 빗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도는 초반부. 게다가 화면은 일관되게 어둡습니다. 이것은 주인공인 철민(소지섭분)과 정화(한효주분)의 현재 상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화는 스스로가 빗소리가 좋고, 어두운 것이 편하다고 표현은 하지만, 삶의 현실은 매일 생계 앞에서 싸워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고단한 일상인 것입니다. 철민도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면,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아예 뒤를 쳐다보기가 힘든 지경입니다. 그렇게 무거운 인생을 사는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이야기는 시작되지요.
인상적인 정화의 이야기 부터 살펴보자면, 앞이 보이지 않으면, 다른 것이 발달해 나간다고 합니다. 정화는 냄새에 더 민감하고, 음악을 사랑합니다. 영화는 비록 대본에 의한 것이지만, 이것은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가령, 나는 가능성이다 라는 책에 나오는 패트릭 헨리 휴즈 같은 사람은 앞이 보이지 않음에도, 음악을 사랑하고, 피아노를 칠 수 있습니다. 트럼펫도 붑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무엇이 부족한 만큼, 다른 어떤 부분은 뛰어날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딘가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너무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있는 것을 보세요. 라는 것이지요.
영화 "오직 그대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역시 적나라함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어도, 사실상 정화는 현실 앞에서 이를 악물고 버텨내야 합니다. 살기 위해서 일을 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그 절박함은 보는 이들을 눈물 짓게 만듭니다. 열심히 노력해도 구원의 빛은 커녕, 오히려 못된 상사 앞에서 시달리는 모습은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그런 슬픔까지도 몰려옵니다. 복권 가게 앞에서 줄을 서고 있는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이 떠오르는 대목이지요.
재밌게도 영화가 처음으로 밝아지기 시작하는 대목은, 정화가 밥벌이를 그만두는 장면부터 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먹고 사는 문제가 쉽게 해결될리는 없습니다. 누군가가 또 밥벌이를 위해서 나서야 하니까요. 건강한 정신으로 살아가려는 남자 철민이 멋지게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철민은 그가 할 수 있는 일 앞에 다시 마주 섭니다. 얻어터지더라도, 소중한 일상을 만들어 가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철민이 "삶의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겠지요.
철민이 정화를 위해서 집을 근사하게 꾸미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대목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내 인생이, 내 과거가, 아무리 캄캄하고 어둡더라도, 나는 이제부터 다시 살아가겠다는 강한 의지가 저절로 느껴진다고 할까요. 두 번 태어나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이란 정말로 강인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마주할 수 있지요. 음, 그런데, 하필이면, 이 영화의 비극은 이 지점부터 시작되는 것이겠지요.
오직 그대만 행복할 수 있다면...
사회 시스템 속에서 3천만원이라는 돈을 만들기. 제도권에서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겠지요. 철민는 이미 사회에서 신용할 수 없는 인간으로 낙인찍힌 상황이니까요. 시간이 촉박한 그는 할 수 있는 위험한 기회에 모든 것을 겁니다. 낭만적이라서 어쩐지 멋있게 느껴지는 대목 앞에서, 우리는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사회의 끝자락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아프면 끝입니다. 건강한게 복입니다. 사람을 이용가치로 평가하는데 너무도 능숙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지요. 한 번쯤은 질문을 던져볼만 합니다. 사람은 과연 쓸모가 없어져도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가?
이 질문에는 당연히 YES, 사랑 받을 수 있다 가 오겠지요. 하지만, 오늘날은 점점 사람을 필요에 의해서 평가하는데 능숙해져 갑니다. 필요하지 않는 경우 가차없이 버리는 것이 오늘날의 트렌드. 합리와 효율이 추구한 벼랑 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물건이야 쓸모가 없어진다면 폐기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이러한 접근법이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대만에서 철민이 선택한 것은 낭만이 아니라, 어쩌면 인간으로서 마음껏 인생을 누리면서 살고 싶다는 절박한 몸짓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몸짓이야말로, 충분히 현실적인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이제 리뷰를 정리해야 겠네요. 결말에 관해서는 사람마다 느껴지는 것이 다르겠지만, 충분히 행복한 결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전히 함께 살아가기는 힘이 들겠지만, 이제는 서로에 대해서 "받아들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주 불안감에 노출됩니다. 어쩌면 나는 쓸모가 없을지도 몰라 라는 치명적인 공격이 종종 우리 마음 속을 헤집고 괴물처럼 덮쳐옵니다. 그럴 때 보기 좋은 영화가 아닐까요. 영화는 전반적으로 무겁지만, 충분히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해주는 묘한 청량감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는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어떤 절망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절뚝거리며 걸어가더라도, 사랑하는 인생이란, 눈부시게 아름다울 뿐입니다. 단지, 사랑만이 청량하게 빛나고 있을 뿐입니다. / 2013. 01.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