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제비오. 포르투갈 최고의 선수로 손꼽히는 레전드 공격수. 1966년 월드컵, 포르투갈이 북한을 상대로 0-3 으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무려 4골을 몰아 넣으면서 5-3 역전을 시킨 주인공인 에우제비오. 정말 훌륭한 명선수인 에우제비오의 이야기 입니다.
프로필
이름 : Eusébio da Silva Ferreira
생년월일 : 1942년 1월 25일
신장/체중 : 175cm / 76kg
국적 : 포르투갈 (모잠비크 태생)
국가대표 : 64시합 41득점
수상 : 1965년 유럽최우수선수상 수상 (발롱도르)
흑표범 에우제비오의 이야기
아프리카 남동부에 있는 모잠비크에서 에우제비오는 태어났습니다. 이 때만 해도 모잠비크는 포르투갈령이었습니다. (모잠비크는 1975년에 독립) 에우제비오는 10대시절부터 축구팀에 입단해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서유럽 끝의 포르투갈과 아프리카 동부의 모잠비크는 지리적으로도 굉장히 먼 곳입니다. 어떻게 이 에우제비오 선수는 포르투갈 땅을 밟게 된 것일까요. 아니 글쎄... 글쎄...요 (웃음)
여기에는 마라카난의 거인으로 불리는 호세 카를로스 바우어(José Carlos Bauer)라는 사람과 연관이 있습니다. 1925년생인 바우어는 브라질 국가대표 선수였으며, 축구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이 바우어는 1954년에 브라질국가대표로 헝가리와 월드컵에서 만나 베른의 전투라고 불리는 대혈전을 치렀던 선수이기도 합니다. 은퇴 후에 지도자 생활을 하다가 모잠비크에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어린 에우제비오 선수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인연이라고 할지, 기적이라고 할지... 바우어는 어린 에우제비오의 재능에 너무나 감탄했고, 포르투갈 벤피카팀의 헝가리인 명장인 베라 구트만(Béla Guttmann)에게 소개하게 됩니다. 그의 눈은 정확했습니다.
에우제비오는 벤피카에서 무시무시한 활약을 펼칩니다. 그가 뛰는 15년 동안, 벤피카는 무려 리그 우승을 10차례나 차지합니다. 데뷔전부터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럼 에우제비오의 이야기를 한 번 천천히 살펴볼까요. 벤피카는 사실 에우제비오 이전에도 명문구단이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가 챔피언스리그 5연패를 차지했던 그 이듬해, 1960-61시즌의 챔스 우승팀이 바로 벤피카였으니까요. 이 때의 감독이 바로 베라 구트만 감독이었습니다. 문제는 1961-62시즌 챔피언스리그.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1962년 5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벤피카와 레알마드리드. 당시의 최강팀들이 맞붙었습니다. 헝가리의 레전드 뿌시까시(푸스카스)가 2골을 먼저 넣습니다. 0-2. 그러나 작년 우승팀 벤피카는 당연히 만만한 팀이 아닙니다. 전반전에 바로 두 골을 만회하면서 2-2 동점. 그러자 뿌시까시의 해트트릭을 알리는 골이 터집니다. 2-3. 후반전에 벤피카는 한 골을 넣으면서 또 따라붙습니다 3-3 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우제비오의 활약이 시작됩니다. 3분 사이에 그대로 두 골을 넣어버립니다. 5-3... 레알 마드리드의 패배였습니다. 벤피카의 연속 우승입니다! 역전결승골을 넣은 스무살의 에우제비오, 이 사건으로 에우제비오는 유럽전역에 명성을 날리게 됩니다.
벤피카에서 활동하면서 득점왕을 7번이나 차지했으며, 국가대표로도 매우 훌륭한 활약을 했습니다. 폭발적인 가속력, 매우 힘이 좋으면서도 유연한 신체, 그의 슛은 정말 강렬했습니다. 수 많은 골을 만들어 냈습니다. 큰 폼으로 슛을 날리는 역동적인 모습도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에우제비오가 있는 벤피카는 이후에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무려 3번이나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이름을 날리는 강팀들인 맨유, 인테르밀란, AC밀란에게 각각 패하고 말았지만요. 인기도 좋고, 매우 뛰어난 공격수였던 에우제비오는 1965년에 유럽최우수선수상 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냥 좀 잘 차는 선수가 아니었지요. 진짜 너무 잘 찼던 선수였습니다.
에우제비오의 포르투갈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 첫 출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은 강했습니다. 포르투갈은 전대회인 62월드컵 우승팀 브라질도 3-1로 완파, 강호 헝가리도 3-1로 완파, 불가리아에게 3-0 가볍게 승리. 조별리그 3전 전승으로 9골이나 넣는 압도적 파괴력을 자랑했습니다. 저번 대회 우승팀 브라질은 포르투갈과 헝가리에게 밀려서 그대로 탈락해 버렸습니다. 여기서 잠깐.
한편 다른 조에서는 북한이 이탈리아를 1-0 으로 물리쳤습니다! 아시아 국가로서 월드컵에서 거둔 첫 승리였습니다. 북한은 칠레와 무승부를 기록하며 토너먼트에 진출합니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듯이 여기서 이탈리아는 그대로 탈락했습니다. 또한, 4년전인 62년 월드컵에서 3위를 차지했던 강호 칠레였지만, 조를 잘못 만났는가 봅니다.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칠레도 탈락. 소련과 북한이 토너먼트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당시 북한의 승리를 예상외의 승리, 기적같은 승리라고 평가하지만, 저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편입니다. 북한 축구는 이 당시 세계적 팀과 맞붙을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조별리그 상대였던 이탈리아도, 칠레도, 소련도 당시 기준으로 만만한 팀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칠레전만 해도 페널티킥으로 전반에 한 골을 내주었지만, 후반 43분에 극적으로 동점골을 터뜨립니다. 실력이 없다면 이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북한은 준비된 강호였습니다. 북한은 그렇게 실력으로 1승 1무를 획득해서 8강에 진출하게 된 것입니다.
1966년 7월 23일 영국 리버풀. 첫 출장 했음에도 굉장한 실력을 보여주었던 두 팀이 맞붙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전설로 남아있는 경기. 바로 포르투갈 VS 북한 입니다. 시작하자마자 폭풍같은 속도로 1분만에 북한의 선제골이 터집니다. 올 게 왔습니다. 북한의 파상공세가 시작됩니다. 전반 22분에 골, 전반 25분에 또 골! 0-3 포르투갈의 패색이 짙었습니다. 조별리그를 압도적인 성적으로 통과했던 포르투갈이지만, 북한 축구에 된통 걸려서 혼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상상력을 발휘해 볼 때가 있습니다. 에우제비오만 없었더라면... 에우제비오만...
에우제비오는 64년부터 68년까지 5년연속 리그득점왕을 차지할 정도로 가공할만한 득점력을 가진 선수였습니다. 앞서 밝혔듯이 1965년 유럽최우수선수이기도 하고요. 흑표범 에우제비오 선수가 정말 경이적인 활약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골...골...골...골... 후반 15분 무렵 경기는 뒤집어져 있었습니다. 4-3 에우제비오 혼자서 무려 4골을 넣었습니다. 경기 결과는 5-3 포르투갈의 대역전승 이었습니다. 에우제비오만 없었더라면, 분명 북한이 이겼을 겁니다. 그만큼 에우제비오는 이 당시 너무 잘 찼습니다.
돌풍의 북한을 꺾은 포르투갈은 4강전에서 잉글랜드를 맞이합니다. 무실점으로 4강까지 올라왔던 철통의 수비를 자랑하던 잉글랜드였습니다. 바비 찰튼의 두 골과 철통같은 수비, 안방의 열광적 응원. 끝내 포르투갈은 2-1 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월드컵 첫 출전을 했던 포르투갈은 최종적으로 3위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포르투갈 최고의 성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잉글랜드와 맞붙었더라도 명승부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축구종가안방에서 잉글랜드를 꺾고, 독일마저 꺾고, 우승을 차지했을 가능성도 없지만은 않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투를 빌리자면 "이게 다 에우제비오 때문!")
에우제비오는 1966년 월드컵에서 9골을 넣었고, 득점왕을 차지합니다. 과연 1965년 유럽최고의선수 다운 멋진 활약이었습니다. 실은 에우제비오 선수는 굉장히 사랑을 많이 받은 선수입니다. 인격적으로도 굉장히 훌륭해서 존경도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 면에서 정말 흠잡을 데 없이 뛰어난 선수였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나봅니다. 포르투갈에서는 루이스 피구 같은 뛰어난 스타에 이어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라는 걸출한 스타까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포르투갈의 유명한 축구스타라고 하면 에우제비오를 꼽는 사람은 점점 줄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영원한 레전드로 남을 것입니다. 기막힌 명승부를 만들었던 인물, 포르투갈 최고의 공격수, 에우제비오. 그의 영상을 유튜브에서 준비하며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2008. 04. 15. 초안작성
2020. 05. 07. 가독성 보완 및 동영상 업데이트 - 축구팬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