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업데이트 때, EPL 득점순위를 잠시 언급했는데, 그렇다면 시어러 이야기가 바로 떠오릅니다. 후후. 앨런 시어러, 오늘은 프리미어리그 최다득점기록의 영광을 가지고 있는 에이스 스트라이커 시어러 편입니다. 즐겁고 유익한 글이 되기 위해서 시어러처럼 불굴의 의지로 노력하고 싶습니다. 레전드 시어러 이야기 속으로~
프로필
이름 : Alan Shearer
생년월일 : 1970년 8월 13일
신장/체중 : 183cm / 76kg
포지션 : FW
국적 : 잉글랜드
국가대표 : 63시합 30득점
주요수상 : 프리미어리그 3년연속 득점왕 (95~97) / 유로96 득점왕 (5시합 5득점)
앨런 시어러, 노력에 노력으로 잉글랜드의 전설을 써내려가다.
시어러는 뉴캐슬 출신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뉴캐슬의 팬이었고, 케빈 키건을 동경하던 소년이었습니다. 점점 자라가던 이 소년은 마침내 뉴캐슬에 입단하고 싶어서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당시 뉴캐슬은 어리고 유망한 수비수를 필요로 했고, 공격수는 그다지 필요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시어러는 방향을 돌려서 사우스햄튼의 유소년팀에 입단하게 됩니다. 시어러 입장에서야 대단히 속상했을 수 있겠지만, 그는 어쨌든 포기를 모르는 노력파였습니다. 자, 이제 그의 축구인생이 시작됩니다.
17살 사우스햄튼의 이 어린 공격수 시어러는 드디어 프로데뷔전을 갖습니다. 상대는 아스날. 그리고 놀랍게도 데뷔전부터 해트트릭을 작렬시키는 무서운 활약을 보여줍니다. 리그 최연소 해트트릭 기록이었습니다. 이 강렬한 인상으로 인해서 시어러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점점 사우스햄튼에서 출장기회를 넓혀가던 시어러는 수 년 후에는 주전공격수로 자리잡게 됩니다. 1991-92시즌에는 생애 첫 두 자리수 득점을 기록하게 됩니다. 이 무렵에 비교적 일찍 결혼도 하게 됩니다. 또한 1992년 2월 국가대표로 데뷔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사실 시어러의 화려한 시절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지만, 그렇게 유명하지 않던 무명(?)시절에는 어려움도 상당했습니다. 주급 40파운드(약 8만원)를 받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이 당시 한참 뜨겁게 연애를 했었는데, 데이트 할 때면 일하고 있던 여자친구(아내)가 언제나 데이트비용을 냈다고 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물심양면으로 시어러를 위했던 아내분은 정말로 복받은겁니다. 시어러는 이제 프리미어리그 최다골을 자랑하는 명공격수가 되니까 말입니다. 여하튼 지금도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시어러 입니다 (웃음)
1992년 드디어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하게 됩니다. 유망한 잉글랜드 국가대표 시어러를 영입하기 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것은 맨유였습니다. 그런데 시어러는 이 오퍼를 거절하고, 당시 오랜세월 2부리그에 있다가 간신히 1부에 승격한 블랙번 팀에 입단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정말 바보같은 짓이라고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하지만, 시어러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잠재우며 블랙번에서 전설을 씁니다. 첫 해 21시합 출장 16득점을 하더니...
1993-94시즌, 40시합에 출장한 앨런 시어러는 무려 31골을 몰아넣습니다. 블랙번은 2위. 로망이 따로 없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드디어... 불가능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94-95시즌 42시합에 출장한 시어러는 엄청난 페이스로 34골을 작렬시킵니다. 그리고 블랙번은 득점왕을 차지한 시어러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기적처럼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이루어냅니다. 그동안 20년 넘게 2부리그~3부리그를 왔다갔다 하던 블랙번이었습니다. 그런 블랙번을 프리미어리그 우승으로 이끄는데 막대한 공헌을 했던 앨런 시어러는 일약 대스타로 떠오릅니다. 그의 활약은 계속됩니다. 95-96시즌에도 31골을 넣습니다. 3년 연속 30골 이상을 넣는 발군의 활약을 펼치며 연속으로 득점왕 수상, 그가 바로 앨런 시어러 였습니다.
리그에서만 잘 찼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1996년 유로에서 시어러는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거의 매경기 골을 넣었으며, 5득점으로 득점왕까지 차지했습니다. (잉글랜드는 독일과 4강전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쉽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득점왕 시어러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빅스타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시어러를 데려오려고 유벤투스 등 여러 명문팀들이 오퍼를 보냅니다. 맨유는 아예 집까지 사놓았다고 합니다. 와달라고 와달라고 노래를 부르던 명문팀들의 오퍼를 뿌리치고, 그가 선택한 것은 어린 시절의 꿈이었습니다.
바로 어린 시절부터 팬이었던 고향 뉴캐슬 유나이티드 였습니다. 게다가 감독이 동경하던 케빈 키건이었으니, 시어러는 뉴캐슬에 뼈를 묻기로 작정하고 뉴캐슬에 이적하게 됩니다. 케빈 키건 감독과 앨런 시어러... 뉴캐슬은 좋은 페이스를 유지했으나, 맨유에게 밀리면서 2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득점왕은? 역시 이번에도 시어러였습니다. 25골을 넣은 시어러는 3년 연속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에 빛납니다.
잉글랜드의 자랑이었던 시어러는 어떤 스타일의 공격수 였을까요. 시어러는 포지셔닝, 즉 공간과 위치를 살리는 플레이가 기가 막혔던 공격수로 평가받습니다.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해서, 근성 있는 플레이를 펼쳤습니다. 화려한 발재간을 자랑하던 테크니션은 아니었지요. 골을 넣기 위해서 열심히 움직이는 그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습니다. 큰 키는 아니었지만 공중전에도 강했습니다. 즉 요약하자면 득점 감각이 훌륭했고, 강력한 슈팅과 헤딩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잉글랜드 센터포워드의 이상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신사적인 성품으로 카드를 거의 받지 않았고, 카드 대신에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
1997년 부터, 시어러는 이제 부상과 싸워나가야만 했습니다. 부상 속에서도, 또 때로는 수술까지 했었지만, 시어러는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으로 어려운 시기들을 극복하면서, 스트라이커로 뛰고자 끝없이 노력해 나갔습니다. 1997-98시즌에는 무릎 부상으로 인해서, 리그에서 두 골 밖에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재기를 위해서 노력하고 노력하는 노력파입니다. 부상에서 복귀하면서 시어러는 1998년 월드컵에 주장을 맡아 잉글랜드를 이끌면서 참가합니다. 잉글랜드는 아르헨티나와 16강에서 만나, 시어러와 오웬의 골로 2-1 로 앞서다가 접전을 펼친 끝에 2-2 무승부. 결국 승부차기에서 혈전 끝에 패하면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국가대표로는 2000년 유로를 끝으로 이른 나이에 은퇴하게 됩니다. 많은 잉글랜드 축구팬들이 아쉬워했고, 복귀해 달라는 소리도 수 없이 나왔지만, 시어러는 이후 뉴캐슬 팀에만 전념합니다.
시어러는 뉴캐슬의 간판스타로 끝까지 투혼을 발휘하면서 많은 골을 만들어 나갑니다. 부상도, 나이도, 시어러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부상으로 고생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대가 넘어서도 20골 이상을 두 차례나 기록합니다. 2002년에 프리미어리그 200골 돌파를 했고, 은퇴할 때까지 무려 260골을 기록합니다. 지금까지도 프리미어리그에서는 200골 이상 넣은 선수는 시어러와 루니 뿐이지요 (2020년 기준). 260골의 이 어마무시한 대기록은 앞으로도 대단히 깨기 힘들 것입니다. 앨런 시어러는, 불굴의 정신력을 가진 위대한 레전드였습니다.
은퇴 경기가 열리자, 수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티켓 표는 순식간에 팔려나갔고, 5만명이 넘는 만원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2006년 5월 시어러가 은퇴하게 됩니다. 은퇴 경기에서까지 아픈 무릎임에도 불구하고 PK를 넣는 투혼의 모습을 보여주며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시합의 수익금은 전액 의료 자선 단체에 기부합니다. 은퇴까지도 아름다웠던 시어러의 마지막이었습니다.
현재는 BBC에서 축구 평론가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앨런 시어러, 그는 잉글랜드 축구계 역사에 남는 멋진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에게는 챔스우승도, 유로, 월드컵 우승도 없었습니다. 리그 우승도 단 1회가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참 행복했던 축구선수였습니다. 자신이 진정 꿈꾸고 원하던 팀에서 진짜 훌륭한 역사를 써내려갔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았던, 노력파 시어러. 오늘 그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유튜브에서 시어러 영상을 덧붙이고 글을 마칩니다. 애독해 주시는 분들에게 늘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08. 06. 21. 초안작성.
2020. 07. 04. 가독성 보완 및 동영상 업데이트 (축구팬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