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가 귀족들을 꾸짖다 (느헤미야5:1-19)
이번 주는 우리 교회에서 광복주일로 지킵니다. 원래는 저번 주일을 광복주일로 지켜야겠지만 사정상 한주를 연기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분명하게도 세계 종교입니다. 우리의 가상 적국인 중국이나 일본에도 분명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더구나 일본이야 기독교세가 미미하지만 중국의 기독교는 우리 선교사들의 손으로 많이 전파되었고 숫자는 무려 1억에 달해서 이 땅의 기독교인보다 많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와 중국이 전쟁을 할 때 누구 편을 들어 주실까요?
하하, 말하기 곤란합니까? 옛날 세계2차 대전때 영국과 독일이 서로 싸울 때 이들나라의 성직자들도 앞다투어 자기네 나라의 승리를 위해서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드렸지요. 하나님은 누구의 편을 들어 주셨나요?
하나님은 솔직히 기독교인이 많이 있는 쪽의 편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사안에 따라 시시비비를 가리실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 옳은 편을 사랑하실 겁니다. 결과론적이지만 나치의 히틀러는 패배하고 영국이 승리했지요.
솔직히 교회 안에서 광복절이라는게 있다는걸 이상하게 여기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세계인의 하나님이신데 굳이 나라와 민족을 나누어야 되나?
예,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는 나라와 민족이 없지만 목사와 성도들에게는 나라와 민족이 있습니다. 더구나 광복절은 우리가 누구를 침략해서 정복한 날이 아니라 왜정35년을 끝내고 해방된 기쁜 날입니다.
솔직히 우리가운데 많은 분들이 광복되던 때에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광복의 기쁨을 제대로 모를 겁니다. 그러나 제가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왜정에서 해방되었을 때 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놓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기뻐했으며 희망에 찼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기뻐했을까요? 우리도 이제는 독립된 나라의 주인으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일본의 차별을 받지 않고 높은 자리에도 올라가고 부자도 되고 강제로 끌려가서 목숨의 위협을 받지도 않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저절로 이루어 지는게 아닙니다. 나라에 충성하라고 해서 없던 충성심이 막 생겨나는게 아닙니다. 애국이라는건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세뇌를 시킨다고 해도 허상이 깨어지면 애국심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약간 덜한데 한때 우리나라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헬조선’이니 ‘지옥불반도’니 하는 말이 유행했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가난하고 친일을 하면 삼대가 부자로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애국심이 저절로 생길 수가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대학을 나오고도 취직이 안되어서 수십대 일은 양반이고 수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취직을 한다고 지금 온 나라가 난립니다. 이래서도 곤란하겠지요?
요즘 트럼프가 북한하고 전쟁을 한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자 북한은 미국이 아니라 괌하고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응수합니다. 이 사람들도 황당한게 왜 미국에 직접 공격하지 않고 애매한 우리를 걸고 넘어 지는지? 그래도 우리들이 너무 평온하고 여유가 있자 외신들은 이례적으로 한국인들이 당황하지 않고 평상시하고 같다고 이상하다고 합니다.
저도 우리나라가 전쟁에 휩쓸린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이제껏 제가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마치 오늘내일 전쟁을 칠 것처럼 떠들어도 정작 전쟁은 일어난 적이 없네요.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럴거면 전쟁이라도 일어나서 나라가 확 뒤집어지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전쟁이 엄청나게 위험하고 두려운 것이기는 하지만 이대로 사는 것도 희망이 없으므로 이판사판이라는 거지요.
예, 저도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라고 해봐야 거대한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끝 그것도 반쪽만 남아 있습니다. 이거라도 있어야 그래도 우리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한 때 만주를 석권했던 우리들은 이제 점점 몰려서 겨우 반도의 남쪽끝 조그만 땅덩이에 갇혀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본 신문에 이런 제목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쩔 수 없이 네덜란드같은 나라로 가야 한다. 경제력이 문화와 사회에 흘러 넘치는 강소국으로 가는 것이 우리나라의 발전 모델이 되어야 한다. 뭐 희망사항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를 보면 경제력은 세계11위고 일인당 국민소득은 3만불을 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행복합니까? 모든 이들이 행복합니까? 우리의 경제력이 골고루 모든 구성원들에게 돌아갑니까? 우리의 황금이 문화와 도덕수준을 높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의 불평등이라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황금만능주의라는 천박한 자본주의에 빠져있습니다. 오천만의 민족이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데 이 좁은 땅덩이 속에 어떤이는 배터지고 어떤이는 쪽방에서 죽지 못해 살고 있습니다. 경쟁이 심화되어서 그런지 이기심도 점점 심해 집니다.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 싸우고 난리도 아닙니다.
내 일상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내일이라는 견지에서 본다면 우리는 지금 매우 불안정하고 위험한 상황입니다. 공동체 의식이 점점 희미해 집니다. 우리의 가정이 깨어지기 시작한 지가 제법 오래되었습니다. 이제 이혼율이 30%를 넘어서 세계2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만 살면 된다는 이기심이 판을 칩니다.
그런데요 이건 절대로 우리가 너무 유별나게 못나서 그런게 아닙니다. 종자가 특별히 악한 종자라서 그런게 아닙니다. 이건 안되는 집안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서 겪게되는 비극, 보편적으로 가지는 인간의 악한 본성이 세기말적인 환경과 결합되어 나타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우리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백성들이 봉기하다
유대, 페르샤의 고레스왕이 풀어줘서 고토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아직 제대로 나라를 세우지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온갖 추악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천신만고 끝에 허물어진 성벽을 쌓아 올리고 성전을 새롭게 건축하고 백성들이 살 집들을 지었습니다. 이제는 좀 살만해질만 합니다.
그런데 정작 나라안에서 외적의 침입이나 기근과 같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동족들에 의해서 이전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생겨납니다. 느헤미야는 비록 홀로 청렴하고 소명의식에 불타있지만 너무 정신없이 바빠서 내부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는지 동족들을 너무 믿었는지 황당한 상황에 직면합니다. 그것은 나라의 초석을 닦느라 정신이 없는 이때에 혼연일체가 되어야 할 이들 사이에 갈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중 일부는 이미 그 지역에 기반을 잡고 있던 이방인들의 기득권세력에 아부하는자가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북쪽 사마리아 총독에게 충성하는 이가 생겼다는 겁니다.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대로 분열된 나라가 서로 다른 나라에 멸망한지 무려 70여년 아직도 북쪽 사마리아 총독과 남쪽 유대총독이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서로 잡아 먹으려고 싸웁니다. 옛날에는 나라와 나라간의 싸움이었다면 지금은 지방과 지방간의 싸움이 되었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이들은 모두 한 임금을 섬깁니다. 페르샤의 왕.
남쪽 유대의 제사장이나 귀족들 중에 심지어 그들과 혼인을 해서 그들과 한집안이 되는 이도 있습니다. 왜냐면 신생 유대보다는 아무래도 사마리아가 세력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외세와 결탁하는 자들은 일반 백성이 아니라 대제사장과 귀족과 민장들 백성의 지도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밖으로는 외세에 아부하고 안으로는 동족을 착취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진 알량한 권세를 이용해서 동족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안 그래도 가난한 동족들을 착취함으로 부를 이룹니다. 마침내 견디지 못한 백성들의 봉기가 시작됩니다.
2.아내와 함께 부르짖어
1절에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여기서 그 때는 느헤미야가 유대의 총독이 된지 12년이 지난 때입니다. 이제 성벽 재건축같은 외적에 대한 방비는 어느 정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나 믿었던 동족내부에서 문제가 터집니다. 극심한 빈부갈등이 마침내 터져나온 겁니다. 외적의 침입으로가 아니라 일부 백성들의 탐욕이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 문제를 그대로 방치하면 어렵게 재건한 유대공동체가 와해될 겁니다.
봉기한 백성들이 주장하는바가 다양합니다. 하지만 모두 비참한 현실에 울분을 토로하는 겁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먹고 살아야 하겠다”
또 어떤이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또 다른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 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정말 비참한 현실입니다. 원래 유대인들 사이에는 종으로 서로 사고 팔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형제’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먹고 사는 현실 앞에서 이런 율법의 규정이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 앞에서 하나님의 법은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봉기를 한 겁니다.
그냥 보통의 봉기가 아닙니다. 잘 보세요. 1절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부르짖어’ 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보통은 여자에 대해서는 잘 기술하지 않습니다. 사람숫자를 셀 때도 여자의 숫자는 세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들의 아내와 함께 부르짖었답니다. 이건 백성들의 고통이 너무 너무 심각해서 생활의 주체인 아내들이 도저히 입을 닫고 있을 지경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역사의 뒤안길에 있었던 아내들 마저 나설 정도면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이라는 구절을 원문을 참조하여 새롭게 해석한다면 ‘그들의 형제들 유다 사람들에 대하여’로 번역할 수 있는데 여기서 대하여 라는 말에는 적의 가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원망하여 라는 말앞에 이미 소위 형제라고 하는 유대동족들에 대해 적의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지금 공동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적의를 받는 대상은 고리대금으로 안그래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동족들을 착취하고 사기치고 여기에 협조하는 권력자들을 말합니다. 원래 율법에는 동족을 사고 팔고 하지도 못하게 하고 있고 고리대금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지만 전혀 지켜지고 있지 않습니다.
앞장서서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하는 자들이 오히려 더 악랄하게 굴고 있습니다.
유대는 지금 사면초가의 상황입니다. 페르샤의 오랜 포로생활에서 이제 겨우 해방되어 고토에 돌아와 보니 성전도 무너지고 성벽도 무너지고 사람도 적습니다. 그런데도 이웃 세력들은 강성하여 자기들을 넘보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대의 포로들 사이에 벌써 기득권자들이 생겨서 사마리아나 암몬의 총독이나 관리들하고 내통하고 서로 사돈을 맺고 성전을 더럽힙니다. 게다가 귀족들과 민장들은 백성을 보호하고 모범을 보이는게 아니라 오히려 동족에게 사기를 치고 압제하고 착취하여 부를 쌓아갑니다. 이거 정말 이대로 두었다가는 새로운 유대의 건설은 꿈으로 끝나고 오히려 백성들은 유대를 미워하게 될 겁니다.
자기들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줄 성벽, 유대인 공동체의 마음의 근간이 될 성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속에 나라를 향한 애국심이 생길 수 없도록 하는 악한 지배층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의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동족에 대한 사랑과 공동책임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언약공동체에서 일방적인 압제나 착취는 절대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유다가 망한 배경에는 이런 통치자들과 악한 귀족들의 횡포, 제 역할을 하지 않는 제사장들의 태만이 들어 있습니다. 이제 공동체의 와해를 방지하기위해 느헤미야는 악당들을 징치하고 공동의 선을 회복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구체적으로 율법은 각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기업을 매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또 하나 동족을 인신매매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팔더라도 희년에는 모두 돌려 주도록 하고 있지요.
이 두가지를 바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 지나친 빈부의 격차를 방지하고 모두 하나님의 자녀요 형제자매로 살 수 있어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언약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외적의 침입을 막는 성벽이 있으면 뭐합니까? 이미 내부적으로 백성들사이에 가진자와 못가진자 사이에 원망과 증오 그리고 적대감이 생겨버렸는데...
자칫하면 밖으로가 아니라 안에서 무너질 판입니다.
저는 우리나라도 지금 심각한 상황이라고 봅니다. 아무쪼록 있을 때 가진 것을 가지고 잘해야 합니다. 더구나 강대한 외적으로 둘러쌓여 있으면서 지금 우리의 처지를 잊고 침몰하는 배안에서 서로 더 먹으려고 싸워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구체적으로는 선한 청지기적 사명을 잘 감당해야 내가 가진 것을 이후로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백성들은 몰려와서 어디에서 곡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아니 그냥 묻는게 아닙니다. 곡식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지 않으면 그냥 굶어 죽을까요? 천만에요. 사흘 굶어 남의 집 담장을 넘지 않는 이가 없다는 속담을 기억해야 합니다. 반대로 우리나라에 좋은 말도 많잖아요. 십시일반이라고.
현재 유다의 형편을 살펴보면 페르샤 안에서의 위치도 매우 미약합니다. 오죽했으면 북쪽 사마리아 총독의 영향력도 제대로 배제하지 못했을까요?
유대가 공동체를 건설하고 예루살렘 성벽도 건설했지만 아직은 남의 나라의 속령으로 백성들이 제대로 자리도 잡지 못해서 전전긍긍합니다. 예루살렘 인근에만 겨우 겨우 백성들이 살아갈 뿐 지방에는 완전히 무방비에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실정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으로 흉년이 들었습니다. 페르샤의 세금은 가혹하고 무겁습니다. 힘없는 백성들이 어찌 살아갈 수 있을까요?게다가 이들을 보호하고 살길을 인도해야 할 지도층은 그들을 상대로 오히려 착취를 일삼습니다.
기근으로 백성들은 제대로 농사를 짓지 못했고 이를 기회로 동족을 착취해서 더 부유해 지려는 유대의 귀족들 민장들이 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정부로부터 이반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애국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유대의 ‘종교나 세속 지도자’들 때문입니다. 뭐 자기들이 스스로 지도자인양 하는 거지 그런 것들은 지도자가 아니라 사기꾼이고 암덩어리입니다.
원래 고리대금이 금지된 유대에서도 이교의 풍습이 전해져서 사람들 특히 부자들은 가난한 동족들에게 고리로 돈을 빌려 주는 사채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규정한 대표적인 타락의 양상입니다. 유대에서는 동족에게 돈을 빌려주면 이자를 받지 않도록 했습니다. 왜냐면 돈을 빌려 주는 행위가 동족의 위기를 도와주는 개념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들은 이것을 자기 치부를 위한 일로 변경시켰고 이것은 하나님의 분노가 있기 전에 백성들의 봉기를 촉발시키고야 말았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포로로 생활했던 페르샤나 그들이 잡혀갔던 앗수르 바벨론 같은 곳에서는 이자가 무려 25%에 달했고 곡식을 빌려 주었을때는 최고 33%까지 치솟았답니다. 한번 돈맛을 알아버린 이들은 동족을 상대해서도 치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즘도 불법적인 일은 대부분 고수익을 보장합니다. 유흥산업은 범죄와 결합하여 고소득을 내는 대표적인 산업입니다. 얼마전에 스포츠도박사이트 운영자가 돈이 너무 많아서 4000억인가를 벌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 세무서에 들킬까봐서 땅에다가 수백억을 숨겼는데 그 돈이 썩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에는 불법과 돈은 매우 쉽게 결합이 됩니다.
미국에서는 마약밀매가 엄청난 이권이 쟎아요. 요즘은 정직한 사람이 부자가 되기는 참으로 어려운 세상인가 봅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하나님의 법안에서 서로 도우며 사는 것이 결국은 나라뿐만 아니라 자기도 행복을 찾는 길입니다. 무질서와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서 거만의 부를 지켜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심지어 목숨도 위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죄가 없으되 보물을 가진 것이 죄라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여하튼 부자들의 착취가 안그래도 힘든 페르샤에의 세금 그리고 흉년하고 겹쳐서 백성들의 삶을 최악으로 내몹니다. 당시 페르샤는 그리스와의 전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각 민족들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했고 이 세금을 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최강의 무력집단인 정부를 상대로 세금을 안내는 방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네 포도원과 밭을 담보로 잡혀서 세금을 냈고 먹고 살려고 자녀를 팔았답니다. 그리고 이들이 하는 말을 보세요. 요즘하고 똑 같습니다.
“우리 육체는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지금 우리를 종으로 팔려고 하는 저들도 우리와 같은 혈통인 한 형제라는 겁니다. 그래요 이들 모두 야곱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지요. 이들은 모두 유다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인 것이고요.
이렇게 한 집안 사람들이 이제는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어 서로 빼앗으려하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측으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서로 적의를 가진 사람들끼리 무슨 한 나라고 한 민족이겠으며 이런 이들로 어떻게 나라를 재건할 수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서로를 형제로 여겼습니다. 게다가 이들간에 형제를 노예로 사고 파는 일은 있어서 안됩니다. 하나님이 엄격히 금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이런 악행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먼 곳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이들이 이제 서로 계급이 나뉘어 형제가 형제를 종으로 사고 파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단순한 종이 아닙니다.
여기 보면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은 형제의 딸을 담보로 데리고 가서는 성욕을 푸는 일이 생겼다는 겁니다. 원래 유대에서는 동족을 담보로 데리고 가도 이방의 노예처럼 다루어서는 안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집안의 하인정도로, 그러니까 계급으로의 노예가 아니라 돈으로 임금을 받고 일을 도와 주는 그런 정도로 취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사람들도 7년이 되면 풀어 줘야 하고 앞으로의 호구거리까지 마련해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자의 경우에는 채무자의 딸을 담보로 데리고 가면 첩으로 삼거나 아니면 아들의 며느리로 삼거나 그것도 아니면 딸처럼 보호하고 있다가 보내 주어야 합니다. 만일 채권자가 담보로 삼은 딸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는 그냥 불우이웃을 돕는다고 생각하고 빚을 대신해서 그냥 풀어주고 도와 줘야 합니다. 이스라엘 내에서는 창녀같은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이런 율법의 규정을 무시하고 돈으로 성욕을 푸는 일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명백하게 금지한 일을 하는 동족들을 그냥 두고서는 하나님의 언약공동체가 설 수 없습니다.
이게 바로 형제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방의 포로로 오래 있었던 유대인들에게서 이방의 악습들이 퍼져나간 겁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이런 반율법적인 일을 보고도 이를 바로잡을 힘이 없답니다. 돈을 주고 딸을 풀어서 데리고 와야 하는데 이미 밭과 포도원이 남에게 넘어갔으므로 더 이상 이들에게는 돈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봉기를 일으킨 겁니다. 물론 창칼로 무장한 봉기가 아닙니다. 몰려와서 느헤미야에게 말로 하는 봉기입니다. 지금의 데모수준입니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그 남자들의 아내들까지 몰려와서 형제라고하는 동족들을 성토합니다. 이걸 빨리 처리하지 못하면 언약공동체를 재건하려는 느헤미야의 12년 수고가 헛된 것이 됩니다.
아마 이런 일은 유대의 총독인 느헤미야도 미처 알지 못했던 일인가 봅니다.
어떻게 해서 알지 못할 수가 있지요? 하나님이 맡기신 공동체를 그가 등한시 할 사람이 아닌데 왜 그랬지요?
솔직히 성경이나 주석을 아무리 찾아도 여기에 대한 설명은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느헤미야가 이런 악행이 저질러졌었는데도 알지 못했다면 이건 명백히 그의 근무태만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만들어 보겠다고 술맡은 관원의 자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유대의 총독으로 왔는데 취임 12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이런 일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면 이건 무능한 것입니다.
이건 느헤미야가 어떤 선의를 가지고 아무리 혼자서 정직하게 살았다해도 변명할 수 없는 과오입니다. 다만 저는 느헤미야가 알지 못했을 정도로 이런 일들이 은밀하게 진행되었고 느헤미야가 계속해서 총독으로 유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페르샤에 갔다 왔다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걸로 봅니다.
8절에 보면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이란 말이 나온걸로 봐서 느헤미야와 그의 심복들은 돈을 마련해서 이방에 아직도 노예의 신세로 있는 동족을 해방시키기위해 속량전을 마련해서 그들을 해방시켜서 데리고 오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느헤미야의 입장에서는 아직도 유대 백성이 너무 적기 때문에 이들을 속량해서 유대로 데리고 와서 언약공동체를 키우는 일에 힘을 쏟은 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내부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버리고 동족을 서로 팔고 사는 일이 벌어졌으며 이방인과 결탁하여 동족을 팔아버리는 일을 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기가찬 일입니까?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봉기에서 나온 이야기를 듣고 크게 노하고 봉기의 원인을 제공한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었답니다. 여기서 ‘귀족’은 재판을 할 수 있는 지도자급을 말하고 ‘민장’은 감독이나 수령, 방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부자들의 불의와 위법을 단속해야 할 중간 관리층이 전부 부패해서 부자들과 짜고 서민들을 착취했기 때문에 느헤미야가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간신배들이 임금의 주위에서 임금의 성총을 흐린다는 옛 조선식 표현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여하튼 이를 듣고 느헤미야는 모든 백성들을 다 불러서 대회를 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먼저 이들을 불러 비공식적으로 꾸짖고 또 온 회중을 불러 모아서 공동체의 구성원이 모두 참여하는 대회를 열어서 공개적으로 죄를 비난하고 판결한 것입니다.
그러나 ‘꾸짖었다’고해서 그냥 말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무슨 교회 부흥회도 아니고 말로서 꾸짖는다고 해서 나라의 일이 해결되기가 어렵습니다. 뭐 말로만 꾸짖어 봐야 별거 없습니다. 직접적인 형벌이 있어야 됩니다.
느헤미야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온 유대 회중을 모아서 대회를 열어서 공개리에 그들의 소행을 꾸짖고 백성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 받는 것을 그치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받은 이자도 돌려주도록 했습니다. 만일 여기서 귀족들과 민장들이 이러한 느헤미야의 판결에 불복했다면 아마 느헤미야가 더 엄격한 대책을 내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귀족과 민장들 모두 느헤미야의 말에 순종하고 돈과 토지와 사람을 도로 돌려 주기로 했기에 언약공동체가 존속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이렇게 엄격하게 법을 집행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는 불법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 앞에서 당당했기 때문에 성실하게 직무에 임했기 때문에 귀족들과 민장들처럼 백성들을 사익을 위해 착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게 가차없이 엄격하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법에 정한 총독의 녹을 받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돈을 모아서 동포를 해방시켜서 데리고 왔고 이웃을 구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그야말로 모범적인 통치자였기 때문에 불법을 저지른 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을 수 있고 당당하게 여호와의 법대로 시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로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이유는 부자와 권력자가 서로 결탁하여 서로서로 봐주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공권력을 가지고 개인의 사익을 보호하는데 앞장선다면 절대 다수의 국민들을 적으로 돌리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나라가 유지되리라고 착각하는 이는 없겠지요?
옛날에 대통령을 지낸 어떤 분이 그랬지요. 돈과 군력을 같이 가지려고 하면 반드시 패가망신한다고. 맞습니다. 권력과 돈이 결합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지고 공동체는 피해를 보며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여기서 ‘꾸짖었다’는 말은 말로 꾸짖었다는 그런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율법, 즉 이스라엘의 법에 의해 이들을 고소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모아서 그 앞에서 이들을 고소해서 법적 판단을 내리도록 한 겁니다. 이사람은 이러이러한 일을 했는데 이것은 율법을 위반한 것이고 그래서 이 사람에게는 이런 형벌을 내린다 이렇게 말한 겁니다.
재판결과 이들이 잘못한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귀족들과 민장들이 별수 있습니까? 당연히 느헤미야가 주장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안 그러면 분노한 백성들에게 맞아 죽고 재산도 다 빼앗기게 생겼는데.
저들이 느헤미야의 말대로 백성들에게서 담보도 잡아서 뺏은 토지와 사람과 기름을 다 돌려주고 이자를 취하지 않겠다고 하자 그는 이것을 더 확실하게 하기위해 제사장을 불러서 그들앞에서 맹세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앞에서 맹세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 더해 느헤미야는 앞으로도 이 말, 대회에서 공포한 말을 제대로 지키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지겠고 또 무일푼이 될 거라고 선언합니다. 말로 선언하고 그친게 아닙니다. 요즘 말로 하면 공갈을 한게 아닙니다. 단순한 협박이나 위협이 아닙니다. 이건 법률적 선언인 것입니다. 앞으로 그렇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결말이 멋있습니다.
13절에 “회중이 다 아멘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
우리 하나님은 재물을 주실 때 선한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가지고 나혼자 잘먹고 잘살려고 생각했다면 정말 큰 오산입니다. 크게 잘못생각한 것입니다. 그 재산을 가지고 이웃을 구제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땅에서 나타내도록 하신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면 하나님은 그에게 주셨던 것을 다 빼앗아서 다른 선한 이웃에게 그것을 맡기실 것이고 새로운 이웃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정부가 그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그 정부를 와해시키고 새로운 정부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하실 것이고 만일 나라가 그 일을 제대로 못한다면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나 이웃나라에게 주권을 맡겨서 그 일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나라들의 흥망성쇠가 있지만 그 속에 변함없이 흐르는 원칙은 하나님의 공의가 제대로 서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 나라에 대해서 너희들은 존재해봐야 아무런 유익이 없고 오히려 사람들을 괴롭힐 뿐이구나! 하고 판단하시면 우리가 아무리 이 나라를 보존하려고 해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생각있는 자들이었다면 이렇게 공개적으로 백성들이 못살겠다고 봉기하고 회중들이 모여서 꾸짖고 느헤미야가 맹세를 시키고 이렇게 하기 전에 그런 일이 없었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적폐청산이니 갑질 근절이니 부동산 투기근절이니 하는 일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나라 인구가 삼천만일 때 참 큰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천만이 넘었고 남북이 합하면 거의 팔천만에 달합니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세상에 우리보다 큰 나라는 무지하게 많습니다.
우리의 건너 편에 있는 중국 인구는 14억을 넘어서고 난 다음부터는 아예 집계가 안됩니다. 얼마전 뉴스에 신생아가 무려 2500만이 늘어났다는데 이거 남한 인구의 반입니다. 그리고 남쪽의 일본도 지금 인구가 1억 2000만이 넘습니다. 1억 3000만에서 조금 줄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네 인구는 정말 적은 편입니다. 문제는 이런 적은 우리들끼리도 서로 합하여 뭉치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광복이 그렇게나 즐겁고 기쁜 이유는 이제 더 이상 차별을 받지 않고 노력한 만큼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적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못잡아 먹어서 엉글거리고 착취하고 무시하고 멸시하며 갑질을 하고 불법과 끼리끼리가 성행하면 그렇지 못한 이들은 어떻게 살겠습니까?
외국인이 아니라 침략자가 아니라 동포가 그러면 더 서럽겠지요? 외적의 침략앞에 서로 사랑하고 단결해도 될까 말까한데 이들은 그 와중에도 알량한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설칩니다. 설치류도 아니고 왜 그러고 사는지?
법이 가난하고 착한 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 세력 있는 자들이 서민을 착취하고 그들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빼앗는 것을 보호하는 데 이용된다면 그런 나라는 우리 하나님이 나라를 만드신 목적에 위배되기 때문에 존재가치가 없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사랑합니다. 솔직히 우리는 황인이예요. 그것도 약간 독특하게 생긴 황인이지요. 그런데 그런데 우리는 사실은 백인을 동경하고 우대합니다. 서양 사람을 우대하는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서 흰 것을 더 좋아합니다. 백옥 같은 피부를 더 숭상하지요. 이게 사실은 백인에 대한 동경 때문에 나온 건지 아니면 단순히 심미안 때문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서양 사람들은 결코 동양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멕시칸들도 자기네들끼리 정말 잘 뭉치고 돕습니다. 이들은 영어에 대해서도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제가 살았던 캘리포니아에서는 백인들. 새롭게 캘리포니아로 취직을 하러 온 백인들이 취직을 위해서 스페인어를 배워야 하는 일이 막 벌어 집니다.
제가 유학시절에 학교 기숙사에서 살았는데 제 옆집의 제임스하고 그 아내가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진짜 많이 받았지요. 이들은 미국중부의 시골출신인데 황인과 흑인을 이웃으로 맞아서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그 딸은 유치원에서 제 딸과 베프예요. 그러니 더 당황했겠지요. 아들과 며느리를 보러온 그 집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예 안색이 창백해집디다. 그리고는 이런데서 어떻게 사느냐고 물었다고 하던데요.
제 옆방에 흑인이 있었는데 그 흑인들도 우리를 깔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흑인을 무시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이 막강한 숫자로 아시안들을 무시하는 거지요.
사실 한중일 삼국 사람들을 백인들은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본인으로 또는 중국인으로 오인 받은 적도 많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잘난 척을 해봐야 백인들 눈에는 다 똑같은 황인들입니다. 심지어 필리핀인들도 미국사회에 먼저 진출했고 영어가 된다는 이유로 은근히 한국사람들을 갋으려고 든답니다.
솔직히 미국 살기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 경찰들은 정말 깡패입니다. 사람들이 경찰을 정말 무서워합니다. 게다가 총 때문에 사고도 자주 일어납니다. 밤되면 밖에 나갈 수 없습니다. 무장 경비원이 지키는 아파트 안에 살아야 합니다. 밤에 밖에 걸어 다니는 것은 ‘나 잡아 잡소’하는 말과 같습니다. 게다가 백인들의 인종차별은 아주 뿌리가 깊습니다.
지금은 유럽도 반 이민 시위가 자주 일어나지요. 그렇게 따지면 갈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우리나라가 제일 살기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나라를 살기 좋은 나라로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 어떤 이들은 우리나라 인구가 너무 많아서 좀 줄여야 경쟁도 줄어들고 취직도 잘 될거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중국인들이 그 힘빠진 나라. 늙은 나라를 그냥 두고 보겠습니까? 먹을 것 많은 이 나라를 우리끼리만 행복하게 살도록 놔두지 않습니다. 바로 침략해서 잡어 먹으려고 덤빌 겁니다. 지금도 이들은 유사시에 한반도의 남북으로 상륙할 군대를 훈련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본, 솔직히 한물 간 거는 맞지만 그래도 아직은 야욕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미국은 결코 우리를 지켜주지 않습니다. 우리를 지킬 사람은 우리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공동체 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법으로 정의가 실현되어야 합니다.
솔직히 지금 미국과 중국 사이에 뭐라고 떠들어 되지만 솔직히 그들 사이에 제2의 카쓰라 태프트 밀약이 없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북한이 멸망하면 남한하고 자동적으로 통일된다는 생각은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미안하지만 북한을 중국이 먹을려고 하고 미국이 중국에 북한을 줄려고 한다는 여러 증거들이 있습니다.
인터넷에도 그들이 그은 국경선에 관한 시안들이 흘러 다닙니다. 미국 보수 헤리티지 재단에서 발표한 선들.
그래서 우리는 누구누구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계층으로 나뉘어서 경제력으로 나뉘어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면 엉뚱한 이들이 우리를 잡아먹습니다. 우리가 자중지란을 일으켜서 저들에게 어부지리를 줄 수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독립운동가가 나와서 젊은이들에게 말합니다. 젊은이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뭐냐는 물음에 ‘교각살우’라고 답합니다. 소의 뿔을 바로 잡으려고 하다가 소를 죽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이 나라의 모순과 잘못을 바로 잡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를 미워해도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한다는 정도로 그치라는 말입니다.
위기상황이 오면 얼씨구나 하고 제2의 친일파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깟 나라 없어져도 그만이지 나만 잘살면 된다는 그런 친일파들이 다시 생겨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 전쟁이 나면 부유층들은 아마 앞 다투어 금을 사들고 외국으로 도망가려고 할 겁니다. 그러면 결국 이 나라는 우리가, 남아 있는 도망도 못가는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거지요. 그러니 우리끼리는 서로 싸우지 말고 서로 화합하고 그렇게 살 일입니다.
우리가 서로 화합하고 살려면 우리 가운데 잘못된 것, 악한 것, 불합리한 것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옛날 우리나라 조선이 왜 망했는지 아십니까?
나라보다 개인과 가문을 더 중시하는 이들이 많아서 망한 겁니다. 뭐 어쩌면 나라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이 당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는 길이 나라에 해를 끼치는 것이 된다면 말이 달라집니다. 남을 해치면서 개인이익을 취하는 것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경멸하시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공권력을 이용해서 사익을 취하는 것이나 부자들이 그 부로 인해서 더 돈을 버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나도 은행에서 수십조원을 빌려주면 얼마든지 재벌이 될 수 있다’고. 뭐 틀린 말은 아닙니다.
지금 재벌들을 보면 겨우 2-3%의 지분을 가지고 상호출자를 통해서 거대 기업집단을 지배하고 재벌이라고 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대기업도 사유재산이 아니라 공익재산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당하게 공기를 가지고 사익을 취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공익을 해치는 겁니다.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는데 이게 사실은 조선을 망하게 한 가장 직접적인 사건입니다. 이게 왜 일어났느냐면 선혜청 당상으로 있던 민비의 친척이 군인들에게 지급해야 할 월급미에 모래를 섞어서 착복했고 이를 항의하는 군인들을 잡아서 곤장을 치고 죽였기 때문에 불만에 찬 군인들, 배고픈 군인들이 견디지 못해 봉기한 겁니다.
월급이 반년 넘어 밀렸다가 세수미가 들어오니까 월급을 우선 한달치만 먼저 지급하기로 해서 받아보니 모래가 반이나 섞여 있어서 이에 불만을 품고 군인들이 들고 일어난 것인데 이의 사후처리에서 전혀 공정하지 못한 판결이 나니까 폭발한 겁니다.
요즘도 보면 언론에 심심하면 사법부의 판단에 불만을 품고 비난하는 기사가 많이 나옵니다. 실제로 이를 비난하는 데모도 있을 정도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나라가 존재함으로 가장 많은 혜택을 보는 이들이 먼저 정의를 되찾아야 합니다. 옛날처럼 누르고 짓밟으면 된다고 착각하면 정말 곤란합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 새워지도록 제가 매주일 기도하지요? 그래서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에게서 ‘이게 나라냐’부터 시작해서 헬조선이니 지옥불반도같은 그런 말이 나오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합니다.
솔직히 나라가 없어지면 자기네들이 어디 가서 고위직에 앉을 것이며 권세를 부리며 떵떵거릴 것이며 어디서 돈을 벌 겁니까? 그러니까 우리말에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나라가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솔직히 제가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곳에 가서 잘 살 수 있을까요? 제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제 후배가 저를 정말 많이 만류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지 말고 미국에서 자기하고 같이 살자. 어쩌면 우리가 미국에 온 게 하나님이 먼저 요셉처럼 길을 예비하심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망하면 한국 사람들이 제2의 공동체를 미국 캘리포니아에 만들어서 민족중흥의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는데 그걸 우리보고 준비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 합디다.
물론 전 지금 여기 와 있는데 처음에는 정말 저도 귀국한 것을 후회했답니다. 그냥 있을걸. 그때 그랬을 껄.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구성원들이 진정으로 충성을 바칠 만한 대상, 구성원들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낄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건 지도자의 선의에도 영향을 받지만 먼저 그 구성원들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을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인간정부의 일은 상호간의 이익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상호이익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모든 유대의 귀족과 민장들이 다 백성들을 착취한다고 해서, 다수가 요구한다고 해서 이것이 관행이니 당연한 일이니 사회가 좋아한다고 넘어가지 않고 혼자라도 나서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공의를 세우려고 하는 이를 기뻐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기위해 느헤미야는 스스로는 십이년동안 총독의 녹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 뭘 먹고 살았을까요? 그 사람은 총독이 되기 전에 이미 페르샤의 고관으로 많은 돈이 있었습니다. 그럼 돈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뭘 어떻게 합니까? 녹을 받아서 살면 되지요.
문제는 녹을 받고 안 받고가 아니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내가 이 자리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를 항상 생각하며 스스로를 돌아보아 근신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그러면 된 거지요.
안팎으로 도전을 받고 있던 당시에 유대인들이 스스로 뭉치지 못했다면 오늘날 유대나라를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부르지요? 지금 가끔가다 무슨 지파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정확하게 이를 증명하지는 못한답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열지파는 앗수르에 멸망당했을 때 이미 나라와 민족이 흩어진거로 봐도 됩니다. 정체성이 없어진 거지요. 뒤에 유대나라의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 정도만 남아서 포로기를 거쳐 이제 신앙공동체,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예루살렘과 인근에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 하는 겁니다.
당연하게도 하나님의 법이 구심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그들이 스스로는 동족을 착취하고 형제를 쥐어짠다면 하나님은 그런 이들에게 나라를 다스릴 권리를 주신 것을 후회하고 빼앗아서 더 신실한 다른 종에게 주실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법을 제일로 삼고 하나님의 법을 실천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면 어쩌면 하나님은 그 나라와 민족이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멸망시키실 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까?
광복절은 지났습니다만 광복절에만 나라를 다시 찾은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감사할 것이 아니라 정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기위해 우리 스스로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할 일은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법으로 이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도록 감시하고 비판하며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 스스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신구교 합쳐서 약 1400만이 넘는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이들의 영향력이 정상적으로 정치와 사회와 기업에 반영되었다면 결코 이 나라가 지금과 같은 상태는 안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가 먼저 회개하고 하나님의 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창하게 뭐라 뭐라 하기 전에 나부터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와 이웃을 위해 기도할 일입니다. 그러한 삶을 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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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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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나라를 위해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말은 젊은 이들에게 조금은 어색하게 들릴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너무나 개인주의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 나, 나, 거기에는 많은 관심을 가지지만, 그것 외에는 소홀할 때가 있습니다. 저만 해도, 좋은 정치에 관한 책 보다는, 개인의 행복에 대한 책들을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내가 버텨나가기 조차 힘들다고 느낄 때, 그런 무력함을 느낄 때, 역시 종종 있습니다.
그럼 어떡하죠.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노력하고,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반성하고, 내가 잘 한 것이 있다면 또 갈고 닦으면 됩니다. 혹시 모르죠, 그러다보면 또 기쁜 일을 맞이하게 될지 말이에요. 하나님의 법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다행히도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규칙을 정해두었어요. 나쁜 마음이 간혹 들 때에는,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도록 노력하면 그만이죠. 좋은 마음이 들 때에는,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 어서 빨리 실행해서, 함께 기뻐하도록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 속에 작은 기쁨이 싹틀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 2017. 0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