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nald Koeman
쿠만은 대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강력한 슈팅을 자랑하는 수비수였습니다. 두 팀에서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경험해 보았던 몇 안 되는 선수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세계적인 리베로 였던 쿠만의 이야기 입니다.
프로필
이름 : Ronald Koeman (쿠만, 쾨만, 코에만 등으로 불립니다. 저는 쿠만으로 표기했습니다.)
생년월일 : 1963년 3월 21일
신장/체중 : 182cm / 81kg
포지션 : DF (초창기엔 MF)
국적 : 네덜란드
국가대표 : 78시합 14득점
공격적 리베로의 전설, 로날드 쿠만 이야기
쿠만의 킥력은 굉장했습니다. 이것을 무기로 삼아서 쿠만은 유럽을 대표하는 리베로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로날드 쿠만은 이탈리아의 전설 프랑코 바레시와 비견되기도 할 만큼 대단한 실력의 선수였습니다. 파워가 넘치는 슈팅, 정확한 중거리 패스, 게다가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는 프리킥 실력까지. 발군의 존재감을 자랑하는 쿠만이었습니다. 쿠만의 킥력이 어느정도 였냐고 하면, 웃지못할 농담으로서 "소를 죽일만한 위력"이라고 평가받았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킥을 자랑했던 쿠만이었기에, 네덜란드 대표팀에서도 또한 소속팀에서도 쿠만이 키커로 나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누군가가,
어떻게 하면 멋지게 프리킥을 잘 찰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이처럼 강력한 슈팅실력을 가질 수 있나요?
라고 묻는다면 쿠만의 예가 훌륭한 정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쿠만이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공을 잘 찼던 것은 당연히 아닐테지요. 쿠만은 대단한 노력파였습니다. 강력한 프리킥의 비결이 바로 피나는 노력에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에 무려 5시간씩이나 프리킥을 끝없이 연습해 나갔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노력이 숨어있었기에, 세계적인 프리키커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실력에 공짜의 자리는 없기 마련입니다. 허허. 쿠만의 신조가 노력하면 불가능은 없다 라고 합니다. 그 정신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이제 커리어를 좀 살펴보지요. 쿠만은 1980년에 본격적인 선수생활을 시작합니다. 이 10대 시절부터, 쿠만은 높은 득점력을 자랑하면서 주전으로 활약합니다. 덕분에 1983년 명문 아약스로 이적하게 됩니다. 쿠만의 실력은 나날이 발전해 나갔습니다. 정확한 볼 컨트롤에, 강력한 슈팅, 높은 존재감을 자랑하던 이 젊은 쿠만은 이 해 곧바로 네덜란드 국가대표로 선정됩니다. 그의 나이 불과 스무살이었지요.
국가대표로서 활약도 대단했습니다. 1980년대 쿠만은 유럽을 대표하는 리베로 중 한 명이자, 네덜란드의 특급 리베로로 명성을 날립니다. 프리킥의 정확성과 파괴력은 세계톱클래스로 인정받았습니다. 수비수임에도 국가대표로 14골이나 넣었습니다. 스페인의 레전드 이에로 처럼 뛰어난 득점력을 자랑하는 수비수로 명성을 날렸지요.
아약스에서 리그우승을 경험했으며, 1986년에는 PSV 아인트호벤으로 이적하게 되었습니다. 20대 중반, 이 무렵부터 쿠만의 실력은 절정을 달렸습니다. 공격적인 리베로로 뛰면서 1시즌에 무려 21골을 넣기도 하는 등 무시무시한 활약을 보여주며 맹활약을 펼쳐나갑니다. 이 시절 아인트호벤은 정말 잘 나갔습니다. 리그우승, 컵대회, 챔피언스리그 까지 모두 우승하는 그야말로 눈부신 시대였지요. 87-88시즌 챔피언스리그(당시 유로피언컵)에서 PSV 아인트호벤은 4강에서 강호 레알 마드리드를 접전 끝에 물리쳤으며, 결승에서 벤피카와 승부차기까지 간 끝에 우승을 차지합니다. 승부차기 첫 키커가 바로 킥의 달인 로날드 쿠만이었습니다. 멋지게 성공! 역시나 대단한 존재감이었습니다.
또한 이 무렵 국가대표로도, 유로88에서 오렌지삼총사와 더불어 네덜란드의 유로우승을 이끌었습니다. 네덜란드의 귀중한 선수이자, 팀의 보물같던 쿠만이었습니다. 1987년과 1988년 두 해 연속으로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 영광을 차지합니다.
눈부신 활약을 널리 인정 받던 명선수 쿠만은, 1989년에 드디어 요한 크루이프 감독이 이끌던 FC바르셀로나로 이적하게 되었습니다. 바르샤에서도 쿠만의 존재감은 여전했습니다. 90년대 초반 FC바르셀로나는 엘 드림팀으로 불리면서 라리가를 4년 연속으로 제패하는 등 황금기를 달렸습니다. 쿠만도 팀의 중심선수로서 맹활약을 펼쳤는데, 6년간 191시합에 출장한 것은 물론이고 무려 67골이라는 가공할 득점력을 자랑했습니다. 초공격적 수비수, 특급 리베로 다운 활약이었습니다. FK, PK 상황에서 쿠만의 킥력은 바르샤의 대단한 무기가 되어주었습니다.
이 황금기의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1991-92시즌 챔피언스리그 일것입니다. 바르샤는 첫 우승, 즉 유럽정상을 위해서 내달렸고 결승전에 진출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대망의 결승전. 팽팽한 0-0 흐름 속에서 시합은 연장전으로 흘렀고, 연장 후반 10분 마침내 FC바르셀로나가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을 얻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쿠만의 대포알 같은 슈팅이 작렬합니다. 그대로 골. 1-0. 바르샤의 사상 첫 유럽제패였습니다. 이 골은 전설의 골로서 바르샤 팬들로부터 종종 회자되기도 합니다.
서로 다른 두 팀에서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따냈던 선수는, 이 당시 한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극소수였습니다. 쿠만은 아인트호벤 시절에서도 승부차기 1번 키커로 성공하며 우승에 공헌을 했고, 바르샤 시절에는 결정적인 결승골을 날리면서 팀의 우승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냈습니다. 이것은 쿠만이 얼마나 팀에 중요한 존재였는지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월드컵에서도 90년과 94년 월드컵에 연속으로 출장했습니다. 국가대표 통산 78시합을 출장했습니다. 1995년에 페예노르트로 이적해서 두 시즌을 보내고 현역에서 은퇴하게 됩니다. 통산 리그 우승 7회, 챔피언스리그 우승 2회, 유로88 우승을 따내는 빛나는 커리어를 보냈습니다. 리그통산 193골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어지간한 공격수라도 200골에 가까운 골을 넣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쿠먼은 멋지게 활약했던 뛰어난 레전드였습니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 생활을 시작합니다. 2001년부터는 옛 친정팀 아약스에서 수 년간 감독생활을 했으며, 2005-06시즌에는 벤피카의 감독을 맡아서 팀을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에 올려놓습니다. 이 시절 쿠만 감독이 이끌던 벤피카는 전년도 우승팀이자 챔스의 강자 리버풀을 제압하는 등 8강까지 올라갔지만, 얄궃게도 FC바르셀로나를 만나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에피소드로 당시 누 캄프에서 큰 박수를 받았다고 합니다. 옛 대스타가 감독으로서 이렇게 잘 해나가고 있음에 바르샤 팬들도 박수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2006-07 시즌에는 PSV 감독으로 부임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등 점점 명성을 쌓아가는 듯 했습니다. 우수 감독 리스트에도 이름이 오르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얼마전이지요. 2007-08시즌 쿠만은 발렌시아 팀의 감독을 맡게 되었습니다. 발렌시아 팀을 맡게된 이유로는 훗날 FC바르셀로나의 감독직을 맡기 위해, 일단 라리가에서 감독커리어를 쌓기 위함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습니다. 그런데 이 선택이 그를 수렁으로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발렌시아의 주력선수들을 대거 물갈이 하는 등 대대적인 개혁에 들어갔지만 역으로 부작용에 빠지고 맙니다. 라리가에서 나름 잘 나가던 발렌시아는 쿠만의 부임 이후 22시합 동안 겨우 4승만을 거두면서 엄청난 부진의 늪에 빠집니다. 발렌시아가 빌바오와의 경기에서 1-5 로 참패까지 당하자 끝내 쿠만 감독은 경질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대실패로 인해서 쿠만 감독은 평판이 크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감독으로서의 실력에 물음표가 따라붙게 되었고, 명선수 치곤 명감독이 흔치 않다는 격언의 대명사로 전락해 버렸다는 냉정한 평가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던 엄청난 비판을 듣기도 했던 쿠만 감독이었기에, 앞으로의 재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담으로 로날드 쿠만의 형인, 에르윈 쿠만 역시 네덜란드 국가대표로 뛴 적이 있었던 축구선수이자, 현역 감독인데 2008년 현재 에르윈 쿠만은 헝가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습니다. 형은 감독으로서 상당히 잘 나가고 있는데, 동생은 레전드로 평가받는 선수임에도 감독으로서는 범장에 그칠 위기에 처해있으니 조금은 미묘하군요. 이제 글을 마칠까 합니다. 유튜브에서 발췌한 쿠만의 대포알 슈팅 모음을 덧붙입니다. 애독해주시는 분들에게 늘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