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스타열전

월드컵 최다출장 레전드 마테우스

시북(허지수) 2008. 8. 27.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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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thar Matthäus : From Wiki (E)


 독일의 레전드 하면 역시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마테우스 입니다. 독일 국가대표 최다인 150 시합 출장, 월드컵 최다인 25 시합 출장, 게다가 개인으로서 큰 상까지 여러 번 받았던 그야말로 독일이 배출한 전설이지요. 마테우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프로필

 이름 : Lothar Herbert Matthäus (주로 로타어 마테우스, 로타 마테우스, 로타르 마테우스 등으로 표기)
 생년월일 : 1961년 3월 21일
 신장/체중 : 173cm / 70kg
 포지션 : MF / DF
 국적 : 독일
 국가대표 : 150시합 23득점 (독일대표팀 최다출장기록)
 주요수상 : 1990년 유럽최우수선수상, 1991년 제1회 FIFA최우수선수상

 독일의 투장! 철인 마테우스 이야기.

 1980년대와 1990년대 독일의 대표적인 스타선수였던 마테우스. 그는 천재적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상을 향해서 꾸준히 노력했고, 월드컵 최다출장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보유한 전설이 되었습니다. 마테우스의 위대함은 슬럼프도 없이 항상 일선에서 활약을 펼쳐나가며 전설을 하나 둘 이루어 나갔다는 것입니다. 철인이라는 별명이 붙는 것도 그의 꾸준함을 높이 사는 찬사입니다.

 마테우스의 특징을 살펴보자면, 우선 튼튼한 몸과 함께 엄청난 체력을 들 수 있습니다. 활발하게 경기장을 누비면서, 정확한 패스와 강력한 슛, 그리고 흐름을 읽는 안목으로 팀에 큰 도움이 되는 선수였습니다. 게다가 수비력도 안정되어 있습니다. 혹자는 마테우스를 두고 비록 판타스틱한 모습은 없을지도 모르나, 축구에 필요한 능력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고 높은 평가를 보내기도 합니다. 원래 기본이 탄탄하고 충실한 선수는 팀에게 큰 기둥이 되어주는 법입니다. 마테우스가 전성기 시절 7년씩이나 독일대표팀의 캡틴을 맡았던 것도 같은 이치겠지요.

 마테우스는 9살 때부터 유소년팀에 몸담으며, 공을 가까이 하면서 성장해 나갑니다. 그렇게 1979년 당시 명문팀이었던 보루시아MG에서 본격적으로 프로선수로서 커리어를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환상적이거나 놀라운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의 재능은 상당했습니다. 어느덧 주전자리를 꿰차면서 실력을 쌓아갔고, 이듬해에는 10대 였음에도 국가대표로 발탁됩니다. 1980년 서독은 당시 유로에서 우승을 차지하는데, 마테우스도 이 때의 우승멤버에 포함됩니다. 시작부터 멋진 커리어를 하나 손에 넣게 되는 마테우스입니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도 참가해서, 두 시합 정도 경기장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 마테우스는 점차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베켄바우어 2세라는 평가도 받습니다. 80년대 중반 마테우스는 소속팀을 바이에른 뮌헨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여기서도 맹활약을 펼쳐나갔고 뮌헨은 분데스리가 3연패를 차지하는 등 좋은 시기를 보냅니다. 마테우스는 안팎으로 큰 공헌을 해나갔습니다. 80년대 뮌헨에서 4시즌을 뛰었는데, 4시즌 모두 두 자리수 득점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1987년에는 바이에른 뮌헨이 챔피언스리그 결승까지 올라갔으나, 아쉽게 패하며 준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86년 월드컵에서, 이제 마테우스는 서독 대표팀의 중심적인 선수로 자리잡았습니다. 전 경기에 출장했던 마테우스였고, 16강전에서는 결승골을 터뜨리는 등 활약을 펼쳐나갑니다. 8강전에서는 개최국 멕시코와 만났는데, 승부차기 끝에 서독이 승리! 마테우스는 승부차기 키커로도 나와서 깔끔하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서독은 결승전까지 진출했고, 마지막 승부로 마라도나가 이끌던 아르헨티나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마라도나를 막고자 나섰던 선수가 바로 마테우스였습니다. 마라도나를 마크했던 것은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만, 결국 이것은 절반의 성공이 되고 맙니다. 서독이 패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마라도나가 결승전에서 골을 넣을 수는 없었지만, 아르헨티나는 역시 강했고 접전 끝에 서독은 2-3 으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마테우스는 이제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월드컵과 챔피언스리그 등 큰 무대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게다가 87년부터는 서독대표팀의 주장을 맡고 있었고, 또한 소속팀에서도 발군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1988-89시즌 마테우스는 드디어 클럽팀의 활동무대를 옮기게 됩니다. 마테우스는 새롭게 세리에 A 의 인터밀란에 몸을 담습니다. 인터밀란에서도 그의 활약은 계속됩니다. 이탈리아에서의 첫 시즌부터, 세리에 우승을 차지합니다. 1990-91시즌에는 무려 19골을 넣기도 했으며, UEFA컵 우승도 차지합니다. 명문팀에서도 기복없이 이렇게 꾸준히 활약을 펼쳤다는 것이 마테우스의 큰 장점이었습니다.

 이 때가 바야흐로 마테우스의 절정기였습니다. 탁월한 안정감, 뛰어난 수비능력에다가 훌륭한 패스 감각, 득점력, 리더십까지! 뭐, 공수에 흠잡을 데 없이 뛰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시절 빠질 수 없는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바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이야기 입니다. 10번 마테우스가 이끌던 서독은 과연? 그럼 개봉박두!

 서독은 첫 경기 유고전부터, 마테우스의 선제골로 상큼하게 출발하더니 클린스만-마테우스-루디펠러가 이어서 골 퍼레이드를 펼치며 4-1 대승을 거둡니다. 아랍에미리트에게도 5-1 대승, 일찌감치 16강행을 확정짓는 서독이었습니다. 16강에서 강호 네덜란드를 잡았고, 8강에서는 마테우스의 결승PK로 체코를 잡습니다. 4강전은 잉글랜드와의 접전. 승부차기까지 간 끝에, 승자는 서독이었습니다. 이번에도 결승전까지 오르는 서독입니다!
 
 1990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는 공교롭게도 또 다시 아르헨티나 였습니다. 서독은 4년전에 결승전에서 당했던 패배를 이번에는 그대로 복수하며 당당히 우승을 차지합니다. 서독의 사상 세 번째 월드컵 우승이었습니다. 베켄바우어 감독이 지휘하던 이 당시 서독은 완성도 높은 조직적이고 안정적인 축구로, 주도권을 제압하면서 단 한 번도 상대팀에게 선제골을 허용하지 않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물론 재미없는 축구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말입니다. 허허.

 마테우스는 월드컵 우승에 큰 공헌을 하며, 그 실력을 세계에 인정받습니다. 소속팀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펼쳐나갔던 마테우스였고, 결국 1990년에 큰 상을 받게 됩니다. 유럽최우수선수상인 발롱도르를 수상한 것입니다! 독일 최우수선수에도 선정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듬해 1991년에는 첫 번째 FIFA최우수선수상까지 수상하면서, 명성을 널리 알립니다. 꾸준함을 무기로 정상에 섰던 마테우스, 사람들은 그를 두고 독일의 투장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레전드로서 활약을 남겼던 마테우스였습니다. 그런데 마테우스의 이야기는 아직도 계속됩니다. 이제 서른이 넘어가던 마테우스는 유로92를 앞두고 아킬레스건에 부상을 당하고 맙니다. 선수 생명의 위기였지요. 그럼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마테우스가 선택한 것은 또 다른 모습으로서 경기장에서 뛰는 것이었습니다. 주포지션을 수비수로 변경합니다. 부상의 영향도 있었는지 확실히 나이가 들어갈수록 전성기보다는 비록 스피드나 운동량은 떨어졌지만, 마테우스는 이제 폭넓은 경험을 살려서 훌륭한 수비수 마테우스로 우뚝 서 그만의 독특한 플레이를 펼쳐나갑니다. 스위퍼라고 부르기도 하고, 종종 리베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혹자는 마테우스 스타일! 이라는 고유적 표현까지 쓰기도 합니다 (웃음) 아, 그리고 이 무렵 다시 독일으로 돌아와서 바이에른 뮌헨에 재차 몸담게 됩니다.

 그렇게 1994년 월드컵이 되었습니다. 마테우스는 이제 통일된 독일팀을 이끌고 또 월드컵에 참가하게 됩니다. 벌써 4번째의 월드컵이군요. 이번에도 독일은 토너먼트까지 진출하면서 축구강국의 위용을 보여주었지만, 8강에서 불가리아를 만나서 1-2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불가리아의 스토이치코프는 독일을 침몰시킨 일등공신이었고, 이 해 발롱도르까지 휩쓰는 등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즉, 발롱도르를 수상한 스토이치코프와 마테우스의 대결에서는 두 선수 다 골을 넣으며 이름값을 톡톡히 했으나, 떠오르던 태풍 불가리아가 노쇠우려가 들리던 거함 독일을 침몰시켜버린 셈이었습니다. 여하튼 마테우스는 이 경기까지 월드컵 21시합 출장을 자랑했습니다. 월드컵 출장경기수 공동 1위였습니다.

 이후, 확실히 이제 마테우스는 나이가 많았습니다. 3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고, 시대는 바뀌어 가고 있었습니다. 차세대 스타공격수인 클린스만이 독일의 캡틴완장을 차게 되었고, 또한 유로96에서 마테우스는 클린스만과 의견충돌로 한 바탕 싸우기도 했습니다. 마테우스는 유로 96에 불참하며, 국가대표에서도 물러납니다. 아직까지도 마테우스와 클린스만은 사이가 엄청나게 안 좋다고 합니다. 이제 노쇠한 마테우스는 더 이상의 대표팀 활약은 무리일 것 처럼 보였는데...

 마테우스 회춘모드! 1996-97시즌부터 소속팀 뮌헨에서 3년 연속으로 25시합이상 소화하는 노장의 저력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바이에른 뮌헨도 리그 우승, 컵대회 우승등을 차지하면서 분데스리가의 강자로 군림하였습니다. 게다가 우연찮게도, 1998년 월드컵을 앞두고 독일대표팀의 스타선수이자 명리베로인 마티아스 잠머가 부상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여서 그 자리에 대신 부름을 받았던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마테우스 였습니다! 37살의 마테우스는, 98년 월드컵에서도 4시합에 출장하였고, 이것은 세기의 기록이 되었습니다. 마테우스, 월드컵 통산 25시합 출장을 달성하며, 신기록을 세웁니다. 앞으로도 정말 깨지기 힘든 놀라운 기록임에 틀림없습니다. 독일은 수케르, 보반 등이 이끌던 크로아티아에게 참패하면서 이번에도 8강에서 탈락의 아픔을 맛보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한편 마테우스는 이제까지 철인같은 긴 커리어를 통해서, 수 많은 영광의 트로피를 손에 넣었지만, 유독 챔피언스리그 타이틀만은 인연이 닿지 못했습니다. 1999년에 바이에른 뮌헨은 챔피언스리그 결승전까지 진출했고, 경기가 끝나기 바로 직전까지 앞서고 있었습니다. 마테우스도 이제 트로피 그랜드슬램이 닿을 듯 했습니다. 하지만, 불과 5분도 채 안 남기고서 맨유에게 장렬하게 역전패 당하면서, 챔스리그 우승트로피는 맨유 트레블이라는 영광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후반에 교체되어서, 벤치에 앉아 그 장면을 정말이지 넋이 나간듯이 멍하게 바라보던 마테우스의 모습... 정말이지 많은 사람들이 잊지 못하는 명장면 중 하나일 것입니다. 철인이자, 완벽해 보이던 마테우스에게 단 하나 없던 것, 바로 챔피언스리그 우승트로피였습니다. 마테우스는 그럼에도 1999년의 뛰어난 활약을 인정받으며, 38살의 나이로 독일 최우수선수에 선정됩니다. 정말 대단했던 투혼이었습니다.

 현역 마지막에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선수생활을 했고, 2001년 길었던 영광의 선수생활을 은퇴합니다. 국가대표로 150시합 출장, 분데스리가와 세리에A 에서 리그통산 579시합출장 158득점이라는 눈부신 기록을 남겼습니다. 은퇴 후에는 곧바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지도자 생활은 아직까지도 순탄치 못합니다. 수년간 여러 팀들을 맡았으며, 그다지 좋은 소식이 없었습니다. 최근에는 이스라엘의 클럽팀을 맡게 되었는데, 한 번 지켜봐야겠지요. 이제 마테우스의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마치며, 마테우스의 영상을 덧붙입니다. 그러고보면, 프리츠 발터의 월드컵 첫 우승, 베켄바우어의 두 번째 우승, 마테우스의 세 번째 우승까지! 이제 독일의 네 번째 월드컵 우승은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게 될까요. 언제나 특유의 저력을 보여주는 독일축구는 앞으로도 강호로 자리매김해 나갈 것 같습니다. 애독해 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