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1월13일/어리석은 부자(사무엘상25:2-38)/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1. 16. 00:50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월 13일 주일 예배

어리석은 부자, 나발 (사무엘상25:2-)

요즘 우리나라에서 부자와 가난한자의 대립이 심각합니다. 우리들이 학교에서 배울 때 사회의 경제적인 부가 골고루 분배되어서 그렇게 잘사는 사람도 별로 없고 그렇게 못사는 사람도 별로 없고 조금 잘살거나 조금 못사는 사람들이 중간에 많이 있어야 사회나 나라가 안정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이러한 원칙에 비교적 근접해 있다고 자랑해 왔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의 소득 불균형 문제가 점점 심각해 지더니 이제는 거의 계급간 대립처럼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마침내 심해져서 사회와 나라의 통합을 저해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가난한 자는 부자를 저주하는 그런 수준, 생각만해도 끔찍한 그런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세습되지,  결코 개선되지 않는다고 하는 현상이 더 문제입니다. 요즘 말하는 개천에서 더 이상 용이 나지 않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옛날 신라에서는 왕족과 귀족과 평민과 노비의 계급제가 있었는데 나중에는 진골귀족과 나머지 세력으로 이분화되었답니다. 원래 신라의 왕족은 부모 모두 왕족인 성골과 부모 중 한쪽만 왕족인 진골이 있었고 나머지 6두품이니 5두품이니 4두품이니의 귀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밑으로 백성들이 있었고 노비들이 있었습니다. 왕족들은 수가 적었기 때문에 귀족들은 나름대로 노력해서 비교적 높은 자리에서 자기의 역량을 발휘하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신라 말기에는 성골은 없어지고 진골의 숫자가 점점 많아져서는 이들이 귀족이라고 불리고 요직을 다 차지해버렸습니다. 그러자 6두품들은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게 되어서 불만이 많아졌는데 이러한 불만을 해소 한답시고 6두품의 계급을 이중6두품이니 3중 육두품이니 하는 식으로 계급 안에 계급을 나누어서 승진을 시켰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상사위에 일등상사, 원사, 주임 원사의 식으로 계급을 만드는 거지요. 그러나 결코 장교는 아니게 만드는 뭐 그런 식으로.

신라에서도 육두품이 아무리 올라가도 결코 진골이 되지는 못하게 한겁니다. 이 나라의 결국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계급제의 모순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생겨서 후삼국시대가 되었고 그 중에서 가장 약한 나라가 신라였다고 합니다. 신라는 진골귀족들이 모여 사는 경주를 중심으로 그 일대만 다스렸지 나머지 지역은 다 뺏긴 겁니다. 군대도 없고 그냥 명목상의 왕실과 진골귀족들만 존재하는 이상한 나라가 되어 버린거지요.

포석정에서 경애왕과 진골들이 주색잡기에 빠져 흥청망청대다가 후백제의 군대에 잡혀 굴욕을 당한 역사가 기억납니다. 결국 신라는 이러한 계급제의 모순을 깨지 못했고 신라의 육두품 출신의 인재들은 후고구려나 후백제로 망명해서 자기의 재능을 발휘했고 결국 신라는 자멸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계급제의 모순을 개선하려고 했지만 결국 진골귀족들의 저항에 부딪혀서 어떠한 개혁도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결국은 나라를 들어 고려에 항복하고 만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가 중요한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이 그래서 중요한 거지요.

오늘 아침 뉴스는 더 절망적입니다. 삼포세대가 급증하고 있다는 거지요. 삼포세대는 돈이 없어서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다는 말로서 세가지를 포기했다는 거지요. 가정은 사회의 기본단위입니다. 출산은 민족의 구성원을 충원하는 가장 필수적인 행위입니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이걸 포기하는 삼포세대가 급증하고 있다면 그 결과는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끔찍합니다.

그런데 이 비율이 놀랍게도 젋은이들의 절반정도에 달한다고 합니다. 너무 너무 끔직하고 가슴 떨리는 일입니다. 이건 현재만 있고 민족의 미래는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지금 지상에서 무려 8000만에 달하는 거대한 한 민족이 5000년 만에 사라지는 과정을 보고 있는 겁니다. 과연 이 거대한 흐름을 되돌릴 수 없을까요? 그리고 여기에 우리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마온에 사는 부자인 나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온은 유다지파의 영역으로 다윗이 피신한 바란 광야와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유다지파의 영역인 마온에 살기는 하지만 그 기업은 갈멜에 있습니다. 갈멜은 과거에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자기를 위해 전승기념비를 세운 곳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이 사람의 업이 갈멜에 있다고 말한 것은 이 나발은 비록 유다지파이기는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사울을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 기사가 시작되는 사무엘상25장2절에 보면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가축의 숫자와 직업을 밝힙니다. 양이 삼천마리에 염소가 천마리. 요즘은 이보다 많은 숫자의 가축을 기르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당시에는 이정도의 양떼를 가졌다면 엄청난 거부입니다. 이렇게 양과 염소의 숫자까지 적어 놓고서야 3절에서 비로소 그 사람의 이름이 나발이라고 명시합니다.

그리고 나발이란 이름은 본명이 아닐겁니다. 별명이겠지요. 성경에서 누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 사람의 이름보다 그가 가진 재물에 대해서 먼저 밝힌 것은 그가 재물 외에는 내세울게 없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여하튼 재물외에는 내세울게 없는 나발이 지금 양털을 깎고 있답니다.
근동에서는 양털을 깎는 일이 마치 농부들이 추수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날은 큰 잔치를 열어서 일꾼들과 이웃들과 나그네를 초청해서 먹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나발이고 마온에 살며 갈렙족속이랍니다. 그러니까 유다지파입니다. 다윗하고는 같은 핏줄이라는 말이지요. 이스라엘은 특별히 지파를 많이 따집니다. 참고로 사울은 베냐민 지파입니다.
마온의 큰 부자인 나발이 양털을 깎는 다는 소식을 바란 광야에서 다윗이 듣고는 군사로 있던 열명의 소년들을 갈멜로 보내서 양식을 좀 달라고 청합니다. 같은 동족이며 큰 부자인 나발에게 도움을 요청한 겁니다.

자기는 지금 사울에게 쫓겨서 항상 양식이 부족합니다. 앞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양털깎는 날에는 그동안 수고한 일꾼들과 은혜를 받은 사람들 그리고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다윗도 이러한 관습을 들어서 양식을 청한 겁니다.

나발의 입장에서는 솔직히 안줘도 될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부자지만 한두명도 아니고 600의 군대와 그 가족들이 먹을려면 어느 정도의 양이 필요할까요? 국가도 아닌 것이 그 지역에 사병을 주둔시키고 내가 너희를 보호해줬으니 성의를 표시하라는 건 어떻게 보면 마치 깡패들이 보호비 걷는 것처럼 여겨 질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열명의 소년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소년은 아닙니다. 젊은 병사들을 말하는 겁니다. 설마 양식을 얻으러 보내면서 다 큰 어른들은 다 놔두고 애들을 보냈겠습니까? 무슨 아동학대도 아니고.

먼저 다윗은 소년들을 보내면서 “내 이름으로 문안하고” 일을 시작하라고 합니다.
6절에는 ‘평강’이란 말이 무려 세 번이나 쓰였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3은 충족의 숫자이므로 완전한 평강을 기원한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점층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나발 자신에게, 그리고 나발의 가족에게, 마지막으로 나발에게 속한 모든 재산과 소유물에게 평강을 비는 이런 형식의 인사는 다윗이 진심으로 나발에게 문안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의를 다해서 정중하게 나발에게 다윗의 인사를 전하고 ‘솰롬’을 빌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깡패들이 보호비를 걷는 행위와는 좀 다릅니다.

일단 솰롬을 비는 걸로 시작하는 인사에 다윗은 구체적인 몇가지를 이야기할 것을 주문합니다.
첫 번째는 자기 병사들과 나발의 목자들이 같이 있었지만 나발의 목자들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나발의 가축들을 하나도 잃지 않게 보호해 주었다는 겁니다.

600명의 군대와 그 가족들을 거느리고 도망생활을 하는 반군의 지도자인 다윗 입장에서는 군대를 이용해서 나발을 협박하고 그 재산을 빼앗으려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자기는 없으면 없는 대로 먹기도 하고 굶기도 할 수 있지만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의 입장에서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는 것은 가장 큰 책무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군기를 엄정히 해서 나발의 재산을 손끝도 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외적의 침탈로부터도 나발의 재산을 지켰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나발에게 이야기 하고 경사스런 양털 깎는 날 다윗에게 어느 정도의 양식을 줄 것을 청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보낸 열 명의 소년들을 나발의 종들로, 다윗을 나발의 아들로 자청합니다. 아마 나발이 다윗보다 나이가 많았던 것 같기도 하고... 스스로 다윗이 나발에게 겸손함을 보인 것입니다. 다윗은 비록 도망 중이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제일의 용사로 왕에게 가장 위협적인 반군의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그 군대가 무려 600명이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력을 가지지 못한 나발의 입장에서 다윗은 결코 우습게 여겨서는 안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자기를 나발의 아들로 낮추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발로 하여금 부성애를 나타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기도 합니다.

이 정도면 다윗으로서는 최대한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을 배려한 것입니다. 그런데요 정말 황당하게도 나발은 그러한 소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다윗이 힘이 없어서 스스로를 낮춘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다윗은 쫓기는 신세이므로 칼로 나발을 진멸하고 그 모든 소유를 얼마든지 뺏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나발에게 스스로 자비를 요청했는데 나발이 얼마나 미련하고 교만한지 다윗이 누구냐고 무시합니다. 하하, 나발의 무지함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오히려 헛웃음이 나올 뿐인데도 나발은 자기가 정말 뭔가 된 것처럼 헛소리를 늘어 놓습니다.

다윗이 보낸 병사들이 자기들을 종이라고 낮추어 이야기하고 다윗이 아들로 자처하는걸 참으로 알아 들었는지 아예 다윗을 ‘사울 왕이라는 주인에게서 억지로 도망친 종’이라고 무시합니다.
바보 멍텅구리도 이만한 구제불능의 바보가 없습니다. 지 죽을지도 모르고 설칩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부하고 맙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노발대발한 다윗은 400명의 군대에게 무장을 시키고는 나발을 죽이러 갑니다. 그리고 200명은 근거지를 지키도록 합니다. 과연 나발은 무슨 생각으로 죽으려고 겁도 없이 다윗을 멸시하고 그의 청을 거부했을 까요?

나발은 심히 왜곡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그런데 원문으로 보면 떡과 물과 고기 앞에 ‘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내 떡... 내 물... 내 고기’라는 말입니다. 그걸 왜 나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자에게 주느냐고 소리칩니다. 그리고 다윗이 유랑의 무리라서 어디서 사는지도 불분명하다고 조롱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주거부정’입니다. 노숙자?
하하! 나발의 어리석음은 엄청난 재앙을 가져 옵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는데 나발의 미련함은 도를 넘었습니다.

분노한 다윗의 군대가 ‘얼마간의 양식’이 아니라 나발의 온 집안을 멸하고 모든 소유를 뺏기 위해 오고 있습니다. 나발에게 다윗의 군대를 막을 힘이 있습니까? 전혀요, 다윗의 군대가 가진 힘은 사울만이 대적할 수 있지 다른 이들은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비군은 삼천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일개 목자인 나발이 아무리 부유하다고 해도 다윗의 군대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나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상대방을 모욕하고 온 집안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발은 자기가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모릅니다. 다윗의 군대가 쳐들어 가고 있는데도 그는 자기를 위해서 왕의 잔치 같은 큰 잔치를 베풀고는 대취해 있었답니다.

이쯤되면 어떻게 이런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그런 큰 재산을 가질 수 있었는지 의심이 될 지경입니다.
그런데 나발이 다윗을 모욕한 이 사실을 하인 중의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알립니다. “주인이 그들을 모욕하였나이다” 보세요, 나발의 하인조차도 나발이 다윗의 부하들을 모욕했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주인의 아내에게. 정작 본인은 그런 사실을 모르는 걸까요?

다윗은 지금 분노해 있습니다. 그래서 나발을 치면 그 후폭풍이 얼마나 거셀지를 전혀 생각지 않고 분을 풀기위해 군대를 진군시키고 있습니다. 이때 나발의 하인중 하나가 주모인 아비가일에게 나발이 다윗을 모욕한 사실과 주인에게 악이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마치 종이 “다윗이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만 원문에는 다윗이 나발을 해하려 한다는 말은 없습니다. 다만 “그 악이 준비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다윗이 아니라 제3의 존재에 의해 나발에게 임할 재앙이 준비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나발의 악함 때문에 하나님이 재앙을 줄 걸로 여긴 듯 합니다.

이어서 종은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불량한 사람이란 말은 원뜻은 ‘벨리얄의 아들’이며 비류, 불량배, 쓸모없는 자란 뜻입니다. 얼마나 상황이 악화되었는지가 나옵니다. 종이 주인을 보고 그 여주인에게 불량배, 무가치한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왕의 잔치에서 배를 두드리며 대취하며 즐기고 있는 나발은 자기가 자기의 종에게조차 이러한 평가를 듣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자기는 스스로 왕처럼 뻐기고 있지만 그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신세고 그의 평가는 종들에게조차 막장으로 치닫습니다.
자기의 아내가 종의 이러한 폄하와 비방을 듣고도 벌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이에 동조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여기서 벨리얄은 사탄이란 말이므로 요즘말로 하면 ‘마귀새끼’라는 욕이 되는 겁니다. 나발은 최악의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의 종에게. 그런데도 자기는 다윗과 그 부하들에게 ‘주인에게서 도망친 종’이라고 무시하고 그래놓고도 자기를 위하여는 큰 잔치를 베풀어서 취하고 즐기고 있습니다. 자기와 전 집안이 몰살될 위기가 다가 오고 있는데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련한 바보의 전형입니다.

이 말을 듣고 아비가일은 급히 식물을 취해서 가지고 갔답니다. 18절에 보면 몇가지 음식의 가지와 수량이 나옵니다. 볶은 곡식 두말과 양다섯마리를 위주로 건포도와 무화과 뭉치를 가지고 나귀들에게 실어 갑니다. 그리고 종을 먼저 보내고는 곧 자기도 나귀에 타고는 나발에게는 알리지 않고 다윗을 만나러 갑니다. 아마 지름길로 가서 다윗을 만난 것 같습니다.

본문에 “산 호젓한 곳을 따라 내려가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산을 내려가자 마침 다윗과 그 일행이 마주 내려오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다윗은 지금 분노로 이성을 잃고 있습니다. 그래서 22절에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그의 장담대로 나발의 집안의 모든 남자는 씨를 말려 버릴 작정으로 칼을 가지고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왜 남자만 죽이려고 하겠습니까? 여자들은 노예로 삼고 재산은 차지하기 위해서 남자만 죽이려고 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걸리적저기는 것은 다 죽여버리고 나머지는 빼앗으러 오고 있습니다.

너무 너무 상황이 다급하기 때문에 아비가일은 남편에게 알리지도 않고 급히 음식을 조금 마련해서는 험한 지름길을 통하여 다윗을 만나러 온 겁니다.
그리고는 다윗을 만나자 마자 급히 나귀에서 내려 그 얼굴을 땅에 대고 말하기를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는 남편의 ‘나발’이란 이름이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나발’이란 이름은 바보, 멍청이, 불경건한 자라는 말입니다. 어때요? 설마 부모가 태어난 자식에게 이런 저주스런 이름을 지어 줄리는 없겠지요? 이건 그래요, 별명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마온의 거부는 본명대신에 바보, 불경건한 자라는 욕된 별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마침내 그의 아내 역시 그렇게 말하고 다윗에게 남편은 그런 사람이니까 제발 자기에게 남편의 죄를 돌리고 용서해 달라고 엎드려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친히 복수하는 것, 나발의 집안 남자를 다 죽여서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여호와께서 막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요, 조금만 생각하면 아비가일의 말이 옳습니다. 나발의 집안 남자들을 학살해 버린다면 다윗이 그동안 유지해온 깨끗한 이름도 더럽혀 질 것이고 사울은 이를 두고 다윗을 동족 학살자로 공격할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보호자라는 명분을 쌓아 나가야 하는 판인데 이런 학살자라는 평판은 다윗을 장기적으로 백성들로부터 비난받게 만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순간적으로 너무 격분하여 이러한 모든 불리한 점을 잊을 정도로 복수심에 불타 올라 있다가 아비가일의 현명한 처신으로 정신을 차리고 나발을 죽일 것을 단념하고 돌아 갑니다.

아비가일의 지혜와 하나님의 역사에 감복한 다윗은 아비가일을 크게 칭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돌아 갑니다. 사실 아비가일이 가져온 양식의 양은 정말 얼마 되지 않습니다. 뭐 나열할 때는 있어보였지만 600명의 군대와 그 가족들이 먹기에는 정말 한숨이 나올 정도로 적은 양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처신으로 자신의 손으로 나발을 죽이는 것을 단념한 것입니다.

아비가일이 지혜롭게 처신하여 다윗의 군대를 돌려 보내고 집에 오니까 “그가 왕의 잔치와 같은 잔치를 그의 집에 배설하고 크게 취하여 마음에 기뻐”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이 이렇게도 어리석을 수가 있을까요?
지금 거대한 위기가 닥쳐오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모르고 왕처럼 뻐기며 대취해서 기뻐한다는게 ..... 더구나 그러한 위기를 자초한 것이 자기의 입이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교만하여 왕처럼 뻐기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남편이 취해있는 것을 보고는 그가 술이 깰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음날 아침 술이 깬 남편에게 지난 사건을 이야기 하자 나발은 그 마음이 죽어 버렸답니다. 낙담하였다는 말은 원문에서는 ‘그의 마음이 그의 내부에서 죽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는 몸이 돌과 같이 되었답니다. 십일 후에 나발은 죽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었다고 합니다.

왜 나발의 마음이 낙담이 되었을까요? 성경은 정확히 그 이유를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윗에게 준게 아까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하마터면 내가 죽을 뻔했구나 그리고 이 집안이 멸문을 한뻔 했구나!’ 하는 생각에 겁이 나서 그랬는지 다윗의 군대가 보복할지도 모르기에 충격을 먹어서 그랬는지 그 정확한 이유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마 다윗의 군대에 의해 몰살을 당할뻔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서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나발이 입으로 다윗을 모욕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겨우 조금의 예물로도 다윗을 달랠 수 있었는데 나발은 그러한 처신을 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다윗을 모욕했습니다. 그가 다윗을 모욕할 때 다윗의 군대가 무섭지 않았을까요? 다윗이 분노해서 보복하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까요? 만일 자기가 다윗을 그렇게 모욕하고서도 다윗이 아무런 보복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면 나발은 정말 구제할 수 없는 ‘나발(바보 멍청이)입니다.

다윗의 칼날이 가까이 오는지도 모르고 자기를 위하여 왕의 잔치같은 큰 잔치를 베풀고는 크게 취해서 기뻐하고 있었다면 그는 정말 나발, 바보 멍충이고 쓸모 없는 자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이 사건은 이 시대에도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조그만 재물을 아끼다가 재물을 통째로 날릴 수가 있습니다. 아니 재물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가장 귀중한 목숨까지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집안에 속한 모든 남자의 목숨까지. 그리고는 자기의 모든 재물을 빼앗기는 거지요. 자기를 위해서는 왕의 잔치를 벌이는 자가 남을 위해서는 몇 마리 양과 두말의 곡식을 아낍니다. 그게 자기의 목숨보다 더 소중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이게 개인을 넘어서 사회 전체로 확대된다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무서운 형태의 소요가 발생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소극적으로는 삼포세대가 늘거나 자살이 늘어서 민족이 자연적으로 고사될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정부와 사회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만연되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도 없고 영토도 적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끼리 뭉쳐서 주위의 견제와 질시를 뚫고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크게는 민족이나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더 병들어서 도저히 손을 댈 수 없어지기 전에 우리사회에 대수술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냥 인간 삶의 욕망과 이기심만이 충돌할 뿐입니다. 심지어 교회와 목사들마저 그러한 삶에서, 시각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과연 누가 병든 이 사회를 고칠 수 있을까요?

자기의 몸만을 위하다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거대한 위기를 겪고 그는 이름도 없이 그냥 나발, 바보, 멍청이로 기록되었다가 마침내 몸이 돌처럼 굳어져서 죽고 맙니다. 실컷 양털을 깎고 겨우 하루 잔치로 즐기고는 나머지 모든 재물은 써보지도 못하고 죽어 버린 것입니다. 나발이 죽자 아내는 다윗에게로 가버립니다. 나발은 몇 마리의 양과 몇 말의 곡식을 아끼려다가 자기의 목숨을 잃고 자기의 아내를 잃었습니다. 아마 이 사람의 재산도 다 남에게 넘어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왜 그렇게 다윗에게 못되게 굴었을까요? 그는 정말 미련해서 그리될 줄 몰랐단 말입니까?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기사는 많은 것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복수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그래서 사사로이 우리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금하십니다. 그런데요 대신에 하나님이 복수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선에 갚아 주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악에 우리를 대신해서 갚아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남에게 선대해서 복을 받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섭섭하게 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벌을 주십니다. 어쩌면 우리의 재물을 다 빼앗아서 이 재물을 더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는 다른 이에게 주실지도 모릅니다.

벨리얄의 자식은 다른 말로 ‘비류요 양아치요 쓸모없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하나님이 판단하신다면 그는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나발이라 바보 멍청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다가 자기의 것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돌처럼 굳어서 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치심으로 죽게 된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도 하나님의 위로를 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아무리 부자라도 모두 재물이 아깝습니다. 그런데요 양 삼천과 염소 천마리에서 겨우 다섯 마리의 양과 두말의 곡식만을 예물로 쓴다면 우리에게 올지도 모를 거대한 화를 피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말과 겸비한 자세로 상대방을 높이면 거대한 환난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살고 남의 은혜를 무시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한다면 그는 역사의 선상에서 탈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잘 살필 줄아는 눈을 가져야 하고 항상 영적으로 민감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미 대세는 다윗으로 넘어갔음에도 그는 여전히 사울을 의지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새로운 지도자이면서 나발과는 같은 지파인 유다지파였습니다. 그는 다윗의 군대 때문에 자기의 재산이 손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다윗의 군대가 그를 핍박하지도 않았습니다.
양털을 깎는 크게 즐거운 날, 나그네를 대접하는 관례에 따라 그에게 요청된 자그마한 자비를 베풀 것을 거절했기에 그는 그 많은 것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부자에게 재물을 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대신해서 그것을 잘 분배하도록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청지기적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개인적으로는 그 재물을 빼앗아서 다른 이에게 주시고 다른이를 청지기로 삼으실 것이며 공적으로는 불의한 청지기로 말미암아 사회의 혼란과 고통이 한이 없게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쓸모 없는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요 만인이 행복해 지는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고 다스려지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데 전혀 쓸모없는 마귀의 자식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재물 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라는 바보 멍청이라는 별명하나 남기고 하나님의 징벌로 가게 된다면 얼마나 한심한 일이겠습니까?

우리에게 엄청난 재물이 주어졌습니까? 그런데 은혜를 입은 자에게 그 은혜를 갚아야 할 일이 생겼습니까? 그런데 자기는 은혜를 입었다고도 생각하지도 않고 그래서 주기도 아깝습니까? 그것은 어쩌면 거대한 위험을 자초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보복도 무섭지만 그것보다 하나님의 치심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돈은 모두 종이입니다. 성령께서 한번 바람으로 불어 버리시면 모든게 훨훨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돈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운 집과 가산이 다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하나님의 싸인을 살피고 겸손하게 엎드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비를 입을 것입니다.

만일 사회의 모든 부자들이 그러한 생각을 가진다면 이 사회는 정말 살맛나는 세상으로 바뀔 것이고 서로 서로 사랑하며 협력하여 더 크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리한다면 개인에게 안락한 삶과 행복이 약속되어 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은 미룰 필요가 없습니다. 감사하며 감사하는 풍조는 더 적극적으로 확산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내가 평소에 은혜를 베풀었는데 내가 꼭 필요할 때에 조그만 도움도 주기를 싫어하는 이웃 때문에 속이 상한 분들이 있습니까?
그래도 직접적으로 복수하려고는 하지 마십시오. 내 손에 피를 묻히는 우를 범하지 말고 자기의 사정을 그냥 내 아버지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우리 아버지께서 나를 대신해서 내 손을 더럽히지 않도록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미련한 부자 나발을 보면서 어쩌면 이 땅의 많은 부자들이 이와 같은 미련한 전철을 밟지는 않는가 하고 염려하게 됩니다. 어려운 이들이 언제까지나 어려운채로 있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삼일 굶어서 남의 집 담을 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속담을 생각해 보십시오.

요즘 한참 레미제라블이 인기를 끌고 있지요? 가난을 견디다 견디다 성난 민중이 들고 일어나서 왕과 귀족들에 대항해서 혁명을 일으키지요? 물론 그 영화에서는 혁명은 실패하지만 결국 프랑스의 혁명은 성공하고 왕과 귀족제도는 폐지되고 결국은 공화정이되는 역사적인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프랑스는 몇차례의 혁명과 반혁명이 엎취락 뒷치락 했지만 지금은 보시다시피 왕과 귀족제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혼자만 살려고 가진 것을 놓지 않으려고 아둥바둥하다가 왕도 귀족들도 모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그 격동의 역사가 이 땅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더 곤란한 것은 우리는 혼란을 일으키고 서로 싸우면서도 나라를 보전하고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장할 수 있을만큼 여유있는 프랑스나 유럽같은나라가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싸워 쇠퇴해지고 약해진다면 번개처럼 달려들어 우리의 마지막 숨통을 끊으려는 적들이 사방에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불행을 방지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최소한의 자비와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나만을 위하지 말고 주위를 한번 돌아 봅시다. 계급간 계층간의 투쟁과 대립을 화해시키고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는 것은 정치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영국 옥스포도 대학생들의 기도모임이 영국을 공산주의 혁명으로부터 구해낸 것처럼 오늘 우리 교회의 작은 기도가 이 땅을 혼란과 혼돈으로부터 구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19세기 유럽은 온통 암울한 삶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장에서 일해도 먹고 살기가 어려웠고 법은 엄격하고 잔인했습니다. 왕과 귀족이 없어진 자리는 부르주아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사람들을 빵으로 다스렸습니다. 이들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빵을 위해서 싸웠습니다.

흉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고 지배자의 탐욕 때문에 벌어진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었습니다. 견디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무작정 신대륙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고 그들은 신대륙에 채 도착도 못하고 죽어 갔습니다.

포르투갈에서부터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온 유럽은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사실 영국의 상황도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믿기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영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 가장 좋은 집안의 사람들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겨우 몇 명의 기도모임이 영국을 구하고 새로운 대영제국, 팍스 브리타니카의 세계를 연 것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최고대학을 나온 엘리트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최고 명문가의 자제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들의 교회가 사라져가는 한국이라는 거대한 사회를 구하는 작은 역할을 하기를 원합니다.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이 거대한 5000년된 민족의 멸망의 흐름을 바꾸는 일을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먼 훗날 후세의 사가들이 그때 그들의 기도모임이 이 땅을 구했다고 평가하는 놀라운 역사의 주인공으로 서기를 원합니다.

이 땅의 부자들에게도 호소합니다. 나만을 바라며 가난한 이와 도움이 필요한 이를 무시하고 모욕하다가 우리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거대한 위기를 겪고 내 모든 것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합시다. 내가 움켜쥐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대신해서 세상을 구하라고 주신 청지기적 사명을 잘 감당하라고 맡기신 것에 불과합니다.

한두사람의 힘으로 어렵다고요? 당연하지요. 그러나 그런 한두사람들이 모여서 거대한 흐름이 되는 것입니다. 아주 작게는 상대방에게 ‘감사합니다’란 말을 하는걸 생활화 하는거로부터 시작합시다. 돈들이지 않고도 세상을 보다 밝게 만들 수 있습니다. 크게는 한달에 한번씩이라도 이웃을 돌아 봅시다.

교회들에게 호소합니다. 가진 부동산을 팔아서 세상으로 흩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목사들에게 호소합니다. 많은 연봉과 비싼 자동차와 화려한 집을 포기하십시오. 아직은 우리가 그런 사치를 누릴 만큼 이 땅의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거나 부유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며 그의 자녀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흩어버리십시오. 이렇게 십년 이십년이 지난다면 세상이 우리 교회로 말미암아, 목사들로 말미암아, 성도들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로 말미암아 놀랍게 좋아 지고 밝아질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받지 못했던 상급은 하늘나라가서 받으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은 주님에게 맡기십시오. 땅에 던진 식물을 백배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의 이 작은 위장을 만족시키기위해 왕의 잔치를 배설하고 대취해서 기뻐하면 뭐합니까? 사람들로부터 이름도 불리어지지 않고 바보 멍청이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양아치로 불리며 시시각각 우리를 위협하는 거대한 위험도 모르고 혼자서 즐기다가 몸이 돌같이 굳어서 가면 뭐합니까?

그러므로 버림으로 얻고, 낮아짐으로 높아지는 그리스도의 역설에 동참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존재로 말미암아 2013년이 조금은 더 나아지는 그런 멋진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중심에 우리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월 13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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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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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루쉰은 책을 두고 공기구멍이라고 했습니다. 그 구멍을 통해서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을 했겠지요. 저는 오늘날 교회가 사회의 공기구멍이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생각합니다. 요즘 사회를 생각하면 저는 폐색(閉塞)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조금 풀어쓰자면, 닫혀서 막혀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여기까지는 뭐 그렇다 쳐도, 치명적인 문제는 숨쉴 틈도 없이 막혀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날은 정말 "호흡곤란 사회"가 되어가지 않나 싶습니다.

살아가는게 힘들어도 하소연 할 곳도 없고, 주위의 친구마저 당장 생존 앞에 내몰려 있는 막막한 현실 앞에서, 매일 눈을 떠서 절망부터 하거나, 매일 출근길 앞에서 한숨부터 나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체 무엇일지 저는 고민을 해보곤 합니다. 답은 그렇게 쉽게 찾아지지 않고, 출구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고통과 불안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현실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누구라도 "나발(바보, 멍청이)"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현실을 망각하고, 좋은 세상이다를 외치는 사람들의 종말이 이상하리만큼 자주 나와 있습니다. 욕심의 탑을 쌓다가 자멸하는 이야기 말이지요. 경고는 이 지점 쯤에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애시당초 가진 게 없는 사람은 욕심 부릴 것 조차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당장 먹고 살 것만 생각해도 벅차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자연스럽게 경고는 가진 사람들의 의무 같은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여기서 가진 것이라 함은 단순히 돈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재능이라든지, 실력이라든지, 또는 지혜라든지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입니다. 즉, 이러한 자신의 좋은 점들을 과연 이웃을 위해서는 얼마만큼 쓰고 있는가? 라는 아주 강력한 질문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좋은 것들을 받았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 좋은 것들을 이 사회의 공기구멍을 만드는 데 써보는 것은 어떨까요. 사회를 좀 더 선하게 변화시키는데 써보는 것은 어떨까요.

오늘 나발 설교는 "나는 어차피 상관 없는 일이야. 나는 너를 몰라." 라고 말하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인상적인 이야기 입니다. 저는 아직 젊지만 이런 슬픈 생각을 가끔씩 합니다. 고통 속에서 드디어 다수가 침묵하기 시작할 때, 그리하여 삶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삶을 포기하기 시작할 때, 그리하여 사람과 인생이 하찮게 느껴지기 시작할 때, 마침내 모두가 "어차피 상관 없는 일이야"라고 말하기 시작할 때, 그 때 국가는 비로소 망국으로 접어든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차피 안 될 것 이라는 불가능 이라는 단어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가능성이 라는게 때때로 조금 황당한데, 그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설령 그게 안 될꺼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걸 넘어보겠다고 밀어붙일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세월이 그렇게나 흘러도 "우공이산" 이라는 이야기는 아직도 살아있는거 아니겠어요.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이야기가 성경책에 딱 하고 적혀 있는거 아니겠어요.

믿음을 가지고 선한 실천을 계속해 나가기를, 남을 외면하는 어리석은 부자가 될 바에는, 남을 배려하는 지혜로운 빈자가 되는 용기를 가질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부디 소박하게 기도하며, 오늘 코멘트는 이 쯤에서 마치겠습니다. / 2013. 0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