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 한 장, 넘기기가 어려운 책을 앞에 두고서, 매번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왜 이토록 힘이 드는걸까. 행복한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걸까. 인생이 흡사 망가진 기계 부품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삐걱대면서, 힘겹게 하루가 간신히 돌아가는 기분이 들 때가 있지요. 우리는 오늘날 평범한 사회적 수준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조차 힘겨운 일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행복론의 종언이라고 저자가 말하는 시대 입니다.
건강하고, 직장이 있으며, 경제적 안정을 누리며, 노후를 보장했고, 인생의 반려자가 있고,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 화목하게 지내는 것. 이 평범함이, 특별한 호사로 둔갑해 버린 사회. 이 문턱조차 접근하기가 어려워져서, 실제로 하나 둘,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시대. 오늘날의 쓰라린 현주소 입니다. 물론, 저마다 행복의 기준을 정해서 즐겁게 살아간다면 좋겠지요. 그런데 진정한 불행은 자신만의 기준은 잃어버리고, 누군가 정해놓은 기준을 좇아서 다들 괴롭게 살아간다는 것이 진짜 불행이기도 합니다. 자, 그러면 답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 고민에 대한 출발입니다.
저자 : 강상중 / 출판사 : 사계절
출간 : 2012년 11월 05일 / 가격 : 11,500원 / 페이지 : 204쪽
이 책은 날카로운 통찰이 가득합니다. 책 초반부, 인용한 베버가 말한 대목을 음미해 봅시다. "영리 활동은 종교적, 윤리적 의미가 없어지고 이제 순수한 경쟁의 감정과 결부되는 경향이 있으며, 그 결과 스포츠의 성격을 띠는 일조차 드물지 않다." 스포츠의 성격이 무엇일까요. 축구나 야구를 즐겨보는 분들이라면, 선수의 가치를 몸값으로 평가하는 것에 익숙할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류모 투수의 몸값이 얼마고, 또 박모 선수의 주급이 얼마고 하는 식이지요. 스포츠는 파고 들어가면, 재능을 가격으로 환산하는 것을 당연시 하고 있습니다. 재능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냐고요? 경기장에 들어올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영리 활동이 이렇게 된다는게 무슨 뜻일까요? 기업에서도 필요한 사람을 몸값을 지불해서 사고 트레이드 하고, 가치가 떨어지는 사람은 "퇴출" 시켜버리는 것입니다. 젊고, 유능할 수록 가치는 높아지므로, 노장이 되면, 언제 내 책상이 치워질지 염려해야 하고, 다른 자리를 저녁마다 모색해 봐야 합니다. 그나마 스포츠 스타들에 비해서 우리가 벌 수 있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아서, 일자리라도 잃게 되면, 막막하다는 것. 우리는 참을 인자를 가슴에 박으며 힘겨운 하루를 지내고 있습니다.
기업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와 윤리가 사라져 갈수록, 그리하여 일류들만의 세상에 되어버린다면... 아니, 이미 이런 세상이지요. 스펙 경쟁은 다른 말로도 쓸 수 있을테니까요. 몸값 높이기 경쟁입니다. 그래서 어디에서도 잘 뛸 수 있도록, 갈고 닦는 것이지요. 유능한 사람들의 치열한 경쟁 사회란, 결코 장점만 있다는 게 아니라는 것. 곱씹어 봐야 할 것입니다. 일부만의 천국, 다수의 지옥이 된다면, 행복한 사회가 아니라 병든 사회라고 써야 정확할 테니까요.
책 중반부의 강한 통찰은 찰스 테일러가 언급한 "직접 접근형 사회의 도래"라는 대목입니다. 일찍부터 동호회 활동을 오랜기간 해왔던 저는, 어느 순간, 아마 2000년대 중반 무렵인 걸로 기억하는데, 가까운 지인분들께 재밌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카페나 모임류는 소수의 대규모 빼고는 모두 망해버릴껄, 이제는 개인의 생활이 더 중요해졌어." 그리고, 2013년이 된 지금을 살펴보면 이 이야기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다니던 사이트 대부분이 문을 닫거나, 축소되었고, 일부 사이트만 초대형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다시 말해, 중간 매개공간이 사라져 버렸다는 의미 입니다. 정보도 직접 구하고, 가장 빠른 루트를 통해서 얻게 됩니다. 가족이나 작은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이 사라져 갑니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스스로 판단하고, 짊어지면서, 기댈 곳 없이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공공영역이 사라져 간다는 대목에 이르게 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분명 경제적 숫자 같은 것들은 나아지고, 발전하고, 있을지 몰라도, 정작 중요한 우리의 삶은 더 피곤해지고, 우울해지고, 어려워졌다는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인상적인 대안이 여기서 더욱 의미있게 들려옵니다. 강상중 교수님의 제안은 "거듭나기"의 필요성입니다. 두 번 태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바로 직전까지 경험했던 인물들은, 이 두 번 태어나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른 시야로, 다른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을 저는 "각성", "깨어남", 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깨어나는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언론에 의해서, 자본에 의해서, 누군가가 정해놓은 선에 의해서, 휘둘리지 않고, 각자의 삶을 진중하게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장경제에 대한 가혹한 표현도 가슴에 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 우리의 시장은 만성적으로 실업을 만들어 냄으로써 작동하고 있다는 해석은 어떻게 들릴지 궁금합니다. 실업자가 만성적으로 있다면, 그래서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이 늘 있다면, 인건비를 극한까지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사회가 붕괴하지 않을 정도까지, 인간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워 놓고서, 자본은 부의 극대화를 노골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제발 같이 좀 먹고 삽시다. 라는 말이 오늘날은 어쩐지 절규로까지 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여전히 실업 같은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젊은 사람들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끄러지면서, 죽음으로 향하는 경우도 적잖게 있습니다. 일자리가 없는게 어떻게 해서 개인의 탓일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요. 그리고, 우리 모두가 고민하고 개선할 방법을 찾아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둘 중 하나가 되고 맙니다. 사회가 붕괴되거나, 둘로 쪼개지거나 말입니다.
이런 시대이기 때문이었을까요.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강상중 교수님은 마지막에 따뜻한 시선을 보냅니다. 미래가 칙칙하더라도, 녹초가 될 때까지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고, 그저... 그저... 마음이 명령하는 것을 담담하게 쌓아 나가고, 특별히 적극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지금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당신답다는 것입니다.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것, 이것이 인간 존재에 대한 진실된 정의가 아닐까요. "너 따위가, 나 따위가" 식의 말에 수 없이 상처받은 인생이라도, 괴로워 견딜 수 없는 날들이 오더라도,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소중한 마음을 잃지 말고, 자기 추방과 비난 대신에, 스스로를 덤덤하게 인정하고 끌어안는 태도를 선택해서 살아간다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 2013. 02.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