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영화

영화 밍크코트 (Jesus Hospital, 2011) 리뷰

시북(허지수) 2013. 2. 21. 12:42

 완성도가 훌륭한 영화 밍크코트. 연극배우로 활약 중이신 여주인공 황정민(현순 역)의 신들린 연기력. 처음부터 거의 끝까지 집요하게 억눌린 분위기를 끌고 가는 연출력까지, 여러모로 밍크코트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영화에 앞서서 이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어떤 시나리오가 현실화 되어서 제작되기 까지,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99년을 앞두고서, 98년에 아마겟돈이나 딥 임팩트 같은 재난영화가 개봉하고, 2012년을 한참 앞두고서는 아예 대놓고 2012 라는 영화가 개봉됩니다. 아마 그 영화 개봉이 2009년도 였던가...

 

 여하튼, 영화 밍크코트는 허구적인 이야기지만, 이런 이야기를 영화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즉 영화의 소재나 도서의 베스트셀러들이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밍크코트는 오늘날 기독교계에 던지는 중요한 문제제기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종교가, 정말로 이웃은 커녕 식구라도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가? 라는 폭탄급 질문이지요 :) 그럼 영화 속으로 떠나봅시다.

 

 

 현순은 먹고 살기가 벅찬 중년의 아줌마 입니다. 게다가 하는 행동을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수준 높은 비호감"을 보여줍니다. 미움 받기 좋은 행동을 골라서 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돌아보는 행동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조금 메스꺼움을 느낄 만큼, 그녀는 억척스럽고, 좀 더 적나라하게 쓰자면, 이기적으로 비춰집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그녀가 왜 그렇게 사는지 조금씩 조금씩 힌트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첫째, 그녀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지만, 월세방 인생을 벗어나기 힘들며, 아픈 어머니의 간병비를 보탤 만큼의 여유돈을 마련할 수 없는 상황이 밝혀집니다. 이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하루 하루가 고달픈 그녀에게 우리는 감히 "이 못난 아줌마야, 대출을 받아서라도 간병비는 좀 내야할꺼 아니야." 라고 쏘아붙일 수 있을까요? 그랬다간, 죽기 직전인 어머니를 살려보려고 비싼 간병비를 대다가, 그녀의 인생이 먼저 고꾸라질지도 모릅니다. 최대한 좋게 말하자면, 현순은 지금 그녀 나름의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둘째, 계층간 이동 가능성을 알 수 있는, 빈곤 탈출율만 봐도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빈곤 탈출율이 점점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가난한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 기회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층간 이동이 어려워지면, 부는 되물림 되고, 영화에서 끔찍하게 묘사되는 가난 역시도 되물림 됩니다. 현순의 딸인 수진이를 보면 당장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엄마가 힘들게 키운 딸은, 가슴 아프게도, 코앞으로 닥친 출산비와 양육비를 당장 걱정해야 할만큼 참으로 가난합니다.

 

 셋째, 가난한 하루하루 앞에서 보통 두 가지 선택을 하게 됩니다. 한가지는 이를 악물면서 독해져 가는 것입니다. 현순의 삶이 그러합니다. 그녀는 어떤 말을 들어도 좀처럼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실컷 떠들어라, 나는 좀 살아야겠다" 라는 것이 우유배달을 하는 현순의 진짜 마음일 것입니다. 남은 한가지는 마음이 한없이 약해져 가는 것입니다. 가난은 자신의 신념까지도 무너뜨리고,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저는 매우 가슴 아픈 경험을 통해서 이 사례를 구체적으로 소개할까 합니다.

 

 제게는 두 명의 소꿉친구가 있습니다. 휴대폰의 전화번호부가 유행할 때, 앞자리 번호를 차지하던 녀석들이지요. 번호 하나 꾹 누르고 있으면, 바로 통화로 연결되는 절친한 녀석들 말이에요. 배고프다고 하면, 망설임 없이 밥한끼 사주는 고마운 친구. 그 중 한 친구가, 이 영화의 내용처럼 이른바 "이단 종교"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 원인을 저는 나름대로 두 가지로 분석합니다. 첫째, 가난이 지속되자 자신이 믿고 있던 신념 체계에 혼선이 시작되었겠지요. 왜 이렇게 열심히 믿었는데 신은 침묵하는가? 라는 시간이 길어지자, 제 친구는 스스로 진리를 찾아본다는 생각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종교에 매달리다가 그렇게 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둘째, 기존 교회에서 친구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의 친구는 "이단 종교"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래서 저와 세계관이 다르게 되었지만) 저는 아직도 이 녀석을 좋아합니다. 가끔 만나서 여전히 밥도 먹습니다.

 

 (저보다 한 백배쯤) 교회에 그토록 적극적이고 헌신적이던 친구가, 지금은 기존 교회에 대해서 앞장서서 답이 없는 곳이라고 날선 비판을 할 때, 저는 조용히 침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제 친구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가난을 해결하기 어려웠던 사회적 기회 불균형의 문제, 기존 기독교가 의외로 사람을 잘 차별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 마지막으로 어려운 순간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친구된 저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반성합니다. 어째서 나라는 인간은,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이토록 가까운 친구의 심각한 고민에 대해서 몰랐단 말인가.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 아가씨는 이런 점이 좋고, 이래서 곤란하다 면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서슴없이 주고 받았었는데... 친구의 고민을 깊이 있게 듣지 못한 저의 잘못도 분명 있습니다.

 

 자, 이제 영화로 돌아와서 가난은 어떻게 해서 신념을 무너뜨렸는가를 살펴봅시다. 독실하게 교회생활을 하던 현순의 남동생은 집사라는 간판까지 있음에도, 교회의 공금을 횡령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더욱 머리를 복잡하게 합니다. 병원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며, 절규하는 그의 눈물 앞에서 할 말 조차 잃게 됩니다. 그래서 현순의 남동생은, 교인임에도 목사님이 오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하며, 가난에 자신의 영혼을 팔았음을 뒤늦게 나마 처절하게 반성합니다.

 

 영화는 후반부로 들어가면 이 모든 비극적 사건들 (위독한 노모, 젊은 수진이 갑자기 쓰러지는 것) 에 대하여, 마치 공금횡령으로 인한 신의 벌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듭니다. 제가 성경은 잘 모르지만 (하하;) 어릴 적 그래도 열심히 보았던 지식을 동원하자면, 성경에서는 공적인 헌금 등을 횡령하는 것에 대해서 신이 가혹한 벌으로 즉각적 죽음을 주었다는 대목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그 신실한 기독교 패밀리 들은 모두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서 신이 노해서 우리를 벌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시선으로 조심스레 옮겨갑니다.

 

 정말 다행히도 영화는 극적으로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됩니다. 영화 마지막으로 가면,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현순은 거의 통곡에 가깝게 자신의 식구들을 미워했음을 고백하고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녀의 남동생 역시 평생 회개하면서 살겠노라고 선언하며 자신의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합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신이 진짜로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가 싫어하는 것은, 거짓말로 적당히 잘못을 덮어두면서, 좋은게 좋은거다 라면서 어물쩍 넘어가고, 그러면서 남을 차별하고, 자신의 이익부터 누리는 그 모든 가식적인 행위일 것입니다. 제가 성경은 잘 모르지만 (또 이러면서 인용하네요. 하하;) 예수님은 가식적인 행동에 대해서,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거의 욕에 가까운 험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밍크코트가 나름대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저는 사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 유별나게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인지 더욱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상징적으로 표현되지만) 할머니는 아픈 손녀를 위해서, 자신의 마지막 생명을 소중히 건네줍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녀를 사랑했노라고 고백합니다. 말하자면, 인간 그 자체로서 사랑한 것이지요. 그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성격이 아니라, 현재 상황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토록 놀라운 것입니다. 가로막을 수 있는 조건을 뛰어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현주소를 좀 더 적나라하게 우리 모두 알 필요가 있습니다. 건축 헌금을 암암리에 강요하는 것 누구입니까? 오늘날 교회가 하고 있는 일들 입니다. 교회의 공금을 지금 종교계는 어디에 쓰고 있습니까? 자신들만의 화려한 건물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들만의 쉼없는 다양한 이벤트를 열기 위해서, 선한 사람들이 소중히 모은 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동네의 어느 목사님은 심지어 퇴직하면서 몇 억을 퇴직금으로 받아갔다는 이야기가 오늘날 기독교의 현주소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으로서, 부끄럽다 못해서, 눈물이 납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부패했는가 속상하고, 또 속상합니다. 더 독하게 쓰자면, 지금 사회가 점점 불공평한 사회로 굳어져 가는 뒷배경에는 이처럼 이기심이 우선하고 있는 일부 교인, 아니 많은 교인들의 책임 역시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인 약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축제를 여는 것을 즐겨하는 오늘날의 기독교는,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영화는 좋게 끝났지만, 우리가 이 병들어 가는 사회에 대해서, 무책임한 태도로 방관하거나, 타인에 대해서 무관심한 태도로 살아간다면, 이 땅의 기독교는 계속해서 돌을 맞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들이대면서 타인을 괴롭히라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가까운 사람들 한테부터, 좀 더 잘하고, 좀 더 정직하며, 좀 더 선하게, 한마디로 제대로 살지 않는다면, 많은 현순씨들의 절망감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네요. 오늘은 제 딴에는 상당히 거친 리뷰가 되었네요. 한번쯤은 이런 이야기가 있는 것도 좋겠지요. 좋은 영화 추천을 잘해주는 L양 덕분에 오늘은 머리가 복잡한 날이 되었네요. 늘 감사합니다 :) / 2013. 02.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