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전에 대해서 따라다니는 평가는 지극히 좋습니다. 정확한 시기와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선 소설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 받는 대작! 순수한 연애와 평등 사상이 들어가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볼 때, 춘향전이 그토록 사랑받았던 이유도 역으로 알 수 있습니다. 순수하지 못했고, 불평등한 삶에 찌들어 있었기에, 로맨틱한 낭만소설로서 춘향전은 긴 사랑을 받아온 셈입니다. 오늘날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재벌과 가난한 사람의 결혼도 마찬가지로 사랑받는 로맨스 스토리 입니다. 일어나기 힘든 일이, 아주 멋지게 표현되고 있으면, 사람들은 열광하게 된다랄까요.
그.런.데. 김대우 감독은 이 춘향전을 색다르게 바라보는 기막힌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방자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셈입니다. 시선을 다르게 하면, 내용도 완전히 딴판입니다. 방자의 입장에서 이몽룡이 주인님이니 당연히 짜증날테고, 춘향은 감히 함부로 넘보기 어려운 아리따운 여인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 새로운 상상에서 출발한 영화는, 상당히 완성도 높은 색감으로 보기 좋게 잘 만들었습니다. 장르는 드라마로 표기되고 있지만, 제게는 코믹하면서도, 환상 가득함도 느껴지는, 기발하고 과감한 전개가 참 좋았던 작품입니다.
우선 류승범이 싱크로율 좋게 열연한, 이중적인 이몽룡을 봅시다. 처음부터 끝까지 몽룡은 계산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춘향이를 꼬실 때부터, 이른바 "고급기술"을 선보이면서, 춘향이를 직접 업어주지 않고, 방자에게 일을 떠넘기는 화려함을 보여줍니다. 더욱 웃긴 것은, 이 때문에 춘향이와 방자가 서로 가까운 사이가 되어간다는 점인데, 이런 모순이 시작부터 매우 유쾌했습니다. 이처럼, 양반들만 쓰는 기술 등의 풍자가 가득합니다.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방자는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지만, 생활의 기술 측면에서는, 다재다능한 달인입니다. 힘이 좋은 것은 물론이고, 수영도 잘 하고, 고기도 잘 굽습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몸짱 요리사인데다가, 순수한 측면까지 보입니다. 춘향이가 어쩐지 눈이 가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이런 소소한 묘사들이 참 좋습니다. 상당히 현실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방자는 마노인에게 유혹기술까지도 배웁니다. 자, 우리 방자 누가 막을 것인가! 하하.
거침없는 방자의 일직선 돌격은 마침내 춘향의 방까지 무단침입하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 후, 무서워서 몸을 떨고 있는 방자의 순수함까지. 이리하여, 두 사람은 몰래 합방해서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지요. 여기까지만 해도 권력관계에서의 갑은 단연 춘향 입니다. 그녀의 말 한 마디에 방자는 언제라도 내쫓길 수 있는 판이지요. 다행히 방자가 마음에 들었던지 춘향은 별말 없이 약정을 맺고, 손도장을 받아냅니다. 약정이라 함은, 재밌게도(?) 춘향과 몽룡의 관계가 발전하도록, 방자가 힘을 쏟을 것을 강요받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춘향 역시도 신분상승을 꿈꾸는 여성이고, 방자는 어떤 의미에서 이용당하는 셈이기도 합니다. 아~ 노비로 태어나 슬픈 방자여! 주인님과 춘향의 사랑을 도와야 하는 불쌍한 처지가 된 방자가, 왜 술을 계속 먹는지 대사 한마디 없어도 참 잘 와닿습니다. 술 없이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은 깊어가고, 방자! 이대로 물러설 것인가! 그런데 영화는 중반부터 정신차리고 공부에 힘을 쏟는 몽룡 때문에 다시 알 수 없는 소용돌이로 빨려들어 갑니다. 공부하러 한양에 가는 몽룡. 그리고 남겨진 방자. 사랑에 눈먼 방자는 이제 춘향 없이는 못 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춘향이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함께 만나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방자 인생 최고의 순간이 펼쳐집니다. 월매 없는 삶, 몽룡 없는 삶, 누군가가 없는 삶이 생각보다 훨씬 즐겁다는 것이 상당히 훌륭한 모순 아니겠어요.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저 지긋지긋한 상사만 없어도, 회사 다닐 맛이 10배는 더 생길거 같다고 상상할 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춘기 소녀소년들은 부모님 잔소리만 없어도 3배는 더 행복할 것이라 여길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감시나 압박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참으로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을 보내고 있는 셈입니다. 두 사람이 참 즐거워 보인다는 영화 속 대사가 참 어울리던 장면들이지요.
그러나 변화는 찾아오기 마련! 아니나 다를까, 몽룡이 글쎄, 어사가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지금으로 친다면, 공부한다고 고시원 들어간 이 사람이 국가고시에 붙어서 이제 검사가 될 판이니, 마을로서도 커다란 잔치고, 춘향으로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겠어요. 방자와 만나는 춘향의 삶은 즐거울 순 있어도, 가난에서 해방되기가 어렵습니다. 신분사회에서는, 도망치지 않는 이상 한 번 방자는 영원한 방자랄까요. (사서표현에 따르면 방자는 이름보다는, 관가의 심부름꾼을 지칭하는 의미라고 합니다. 즉 그는 심부름꾼만 반복할 인생으로 살다가 끝날 가능성이 높았을테고, 영리한 춘향은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춘향은 여전히 좀 더 잘 살고 싶었던 셈입니다. 낭만이 배부른 삶과 일치하지는 않으니까요.)
가장 열받은 것은 이번에도 방자 입니다. 방자는 거칠게 이몽룡에게 다가가서, 제발 좀 우리를 냅두라고 거의 협박처럼 이야기 합니다. 아, 권력자에게 너무 당당히 대들었던 것이 실수였을까요! 여하튼, 저는 방자의 순수함과 거침없는 매력에 상당히 끌리게 됩니다. 자, 얼른 영화로 돌아가서, 머리가 잘 돌아가는 계산의 달인 몽룡은, 철저한 준비와 계획을 통해서, 변사또를 K.O.시키고, 춘향이와 맺어지게 됩니다. 방자전의 주인공인 방자 입장으로서는 전혀 반갑지 않은 결말이지요. 노비로 태어나고, 무식했던 것이, 죄입니까! 라고 절규할 듯한 방자의 괴로움은 상당히 가슴 아픕니다.
한편, 약점 잡혀 사는 몽룡 역시도 마음이 별로 편하지 않습니다. 행복한 결혼이 전혀 아닙니다. 춘향이의 강압 때문에, 방자를 데리고 살아야 하고, 한편으로는 춘향의 말을 거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으니, 그래도 말이 몇마리 달린(!) 어사인데, 자신의 꼴이 영 아닙니다. 결국 몽룡은 잘난 자신의 삶을 이대로 뭉갤 수 없어서, 미친 짓까지 벌입니다. 약간은 복잡해 보이면서도 각자의 심리묘사가 잘 들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방자와 춘향은 슬프게 이어지면서 비극적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나름의 개인적 해석을 덧붙이자면, 결국 신분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결혼에 골인한다는 것은, 그토록 위험부담이 크기도 합니다. 또한, 한 쪽이 망가져가면서 이루어지기 쉬운, 그야말로 슬픈 관계가 될 수 있다는 암시로도 보였습니다. 그러고보니, "너 그럴꺼면 집에서 나가" 라는 말은 드라마의 단골대사였지요.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기를 원하는 사회적 압박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사랑은 국경도, 배경도, 종교도 다 뛰어넘을 수 있다고 낭만을 가지지만, 결국 비슷한 사람 만나는게 살기 편할 것이라는 압박도 그만큼 받고 있습니다. 제 결론은 조금 상상력 보태서 쓸렵니다. "에이 뭐, 그래도 좋은 사람 만나서 알콩달콩 사는게 제일 낫지." 제일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방자가 어쩐지 쓸쓸해 보여서, 다소 슬픈 여운을 남겼던, 즐거운 영화 방자전 입니다. / 2013. 03.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