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스타열전

전설의 골키퍼 레프 야신

시북(허지수) 2008. 3. 7.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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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 Yashin : From uefa.com


 흑거미 야신. 축구 사상 최고의 골키퍼로 자주 평가되는 그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야신은 현재까지도 골키퍼로 유일하게 유럽최우수선수상(발롱도르)을 수상했으며, 월드컵 최우수골키퍼에게 주는 야신상의 이름도 이 야신 선수를 기념하여 제정된 상입니다. 자 그럼 그의 이야기로 출발.

 프로필

 이름 : Lev Ivanovich Yashin (영문), Лев Иванович Яшин (러시아어)
 생년월일 : 1929년 10월 22일 (1990년 3월 20일 작고)
 신장/체중 : 184cm / 82kg
 포지션 : GK
 국적 : 소련
 국가대표 : 78시합
 수상 : 1963년 발롱도르 수상 / 1956년 올림픽 금메달, 1960년 유럽선수권 우승

 흑거미 레프 야신의 이야기

 야신은 데뷔부터 은퇴까지 줄곧 한 팀에서만 활동하였습니다. 바로 디나모 모스크바 팀입니다. 326시합에 출장했으며, 야신이 활동하는 동안 디나모 모스크바는 리그 우승을 5회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국가대표로는 특히 유명하며 활약도 인상적인게 많았습니다. 올림픽 우승도 했으며, 유럽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흔히 유로로 부르는 이 유럽선수권의 1회 대회가 1960년 프랑스대회입니다. 당시에는 이름도 유럽네이션스 컵이었지요. 이 때 우승팀이 바로 소련입니다. (올해 우승팀은 누가 될 지 흥미롭습니다만...)

 이 소련팀에서도 유명했던 선수가 바로 야신이었습니다. 야신은 긴 팔을 가지고 있었고, 검은 유니폼을 입고, 검은 글러브를 끼고 출장했는데 이 인상적인 모습 덕분에 [흑거미]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골키퍼는 골문을 지키는 것이 전부였던 시대였습니다. 그것만이 골키퍼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야신은 좀 생각이 달랐습니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적극적으로 뛰쳐나오기도 했고, 가끔은 페널티에리어 바깥까지 나와서 수비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동시대에는 볼 수 없던 스타일이었지요. 그래서 더욱 흑거미라는 별명이 잘 어울리는 듯 합니다. 통계로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150번 이상의 PK를 막아냈다고 합니다. PK 선방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던 골키퍼였습니다.

 야신은 1949년 디나모 모스크바에 입단합니다. 이제 갓 스무살이 된 풋내기였지요. 당시 디나모 모스크바에는 애칭 타이거로 불리던 코미치라는 이름의 쟁쟁한 주전 골키퍼가 있었습니다. 백업 골키퍼 신세였던 야신은 축구장에서 제대로 뛸 수 없었기에, 디나모 모스크바 아이스하키팀의 골키퍼를 겸해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회는 찾아오는 법이지요. 1953년 그 쟁쟁한 호랑이 코미치 선수가 부상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야신은 코미치의 뒤를 이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당당히 디나모 모스크바 축구팀의 주전 골키퍼 자리를 꿰찹니다. 이듬해 1954년 소련 국가대표팀에도 선출되지요. 1956년에는 올림픽이 열렸는데 소련 대표로 참석해서 금메달을 목에 겁니다. 1960년 제1회 유럽네이션스컵(현재의 유로)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는 소련. 이 때의 소련은 국가대표로도 강팀이었고, 야신은 이제 세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자, 1962년 월드컵이 되었습니다. 소련도 나름의 기대를 받으면서 출장하게 되었습니다. 야신, 과연 어땠을까요? 전설의 선수니까 정말 전설적인 활약을 펼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야기는 좀 충격적입니다. 물론 소련은 잘하긴 했습니다. 조별리그 1위로 8강전에 진출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조별예선, 콜롬비아 전에서 10분 사이에 3점이나 실점하지를 않나, 야신은 좀 불안불안했습니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맙니다. 8강전 칠레와의 경기에서 평범한 롱슛을 두 개나 놓치면서 소련은 1-2 로 칠레에 패하고 맙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월드컵 최고골키퍼상이 야신상이라 해놓고 이게 무슨 추태란 말입니까. 여하튼 이 때는 확실히 야신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소련에 돌아오니 분위기는 어땠을까요? 패배의 책임을 지라는 화살이 야신에게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비난은 정말 격렬했습니다. 아마도 "야신 네 녀석이 소련 축구를 망쳤다" 등의 발언이었겠지요. 56년 올림픽 우승, 60년 유로 우승의 강팀 소련이 이렇게 허무하게 져버린 게 소련 사람들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야신도 책임을 통감하고,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진지하게 축구선수 은퇴까지 생각했다고 합니다. 공공의 적으로 몰리니 오죽했겠습니까.

 하지만. 야신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비록 욕먹는 못난 골키퍼지만, 반드시 제대로 우뚝 서겠다는 결심을 굳게 했나봅니다. 월드컵의 열기가 끝나고, 1964년의 소련 리그에서는 27시합 동안 불과 6실점 하는 발군의 활약을 보여줍니다. 이 해 디나모 모스크바는 리그우승을 따냅니다.

 한편 잉글랜드에서 FA창설100주년을 기념해서 잉글랜드팀 VS 세계선발팀의 경기가 열립니다. 그래도 세계에 명성이 어느정도 있던 골키퍼였던 야신은 세계선발팀에 뽑혀서 경기를 참가하게 됩니다. 전반전만 야신은 출장했습니다. 잉글랜드는 홈인데다가 물만난 물고기처럼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습니다. 명가의 자존심이라고 할까나 뭐 그런것이지요. 야신은 이 무렵부터는 절정의 기량을 보여줍니다. 막아내고, 또 막아내고... 전반전은 결국 잉글랜드가 골을 넣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때의 야신의 모습은 굉장히 강렬했습니다. 뭐 저런 선수가 다 있나 라는 찬사가 이어졌지요.

 1962년만 해도 야신은 욕먹는 골키퍼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거기서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시 한 번 맞서는 길을 선택했지요. 그리고 1963년이 끝나갈 무렵, 소련에서 제대로 부활한 야신은 골키퍼로서는 처음으로 유럽최우수선수상에 당당히 선정됩니다. 지금까지도 골키퍼로는 야신만이 이 상을 수상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1966년 월드컵에 참가한 야신과 소련팀. 이탈리아, 칠레, 북한과 한 조였습니다. 소련은 강했습니다. 조별리그를 전승으로 통과합니다. 한편 북한도 비록 소련에게는 졌으나, 거함 이탈리아를 침몰시키며 8강에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에우제비오의 포르투갈에게 아쉽게 패하며 8강에서 끝났지만요) 여하튼 소련은 8강에서 헝가리도 누르면서 4강전까지 진출합니다. 하지만 소련도 아쉽게 강호 서독에게 1-2로 패하면서 4강에서 우승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야신은 선전했으나, 이미 30대 중반을 넘긴 나이였고 조금씩 기량이 떨어져 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야신은 이 때 총 6경기 중, 4경기에 출장하였습니다. 1970년 월드컵에서는 40살의 나이로 후보골키퍼로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1971년 5월 27일 야신의 은퇴시합이 열렸습니다. 디나모 모스크바 VS 세계선발팀 이었습니다. 관중은 무려 10만명. 세계 선발팀에는 에우제비오, 바비찰튼, 게르트뮐러 등의 당대 대스타들이 참석했고, 관중들은 시대의 영웅의 은퇴경기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은퇴할 때의 야신은 그만큼 사랑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야신을 보기 위해서 철의 장막을 넘어서 모스크바로 향했습니다. 당시 모스크바에는 4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왔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수 많은 스타들이 모인 이 경기의 수익금은 전액 체르노빌의 아이들에게 기부되었다고 합니다. 축구가 좋은 일을 하는 한 예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왜 야신을 기억하고, 야신상까지 만들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그만큼 훌륭한 축구선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공격수들은 일반적으로 이름을 남기기 쉽습니다. 골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기 때문이지요. 유럽최우수선수상만 해도 거의 다 공격적 포지션의 선수들입니다. 야신이 뛰어난 것은 이러한 쟁쟁한 공격수들을 제치고 골키퍼로는 유일하게 유럽최우수선수상에 선정되었다는 것이고, 실패와 비난에도 주저앉지 않고 빛이 잘 나지 않는 골키퍼라는 특수한 포지션에서 최선을 다해서 선수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야신은 데뷔전부터 실수를 하면서 골을 내주고 욕을 먹던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데뷔전의 교훈을 자신의 거울로 삼아서 늘 돌아보면서 다시 왔던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레프 야신, "결코 공을 내 뒤로 못가게 하겠다"는 강한 의지와 노력만을 무기로 삼아서, 그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흑거미 야신, 그는 이렇게 실패 속에서 출발했고, 수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설의 명골키퍼가 된 선수입니다. 그는 실패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패를 통해서 더욱 강해지는 법을 배웠을 뿐입니다. 그렇게 동물적인 감각을 키워갔고, 결국 수 많은 눈부신 선방을 해내면서 세계에 이름을 날렸습니다.

 야신은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될 이름입니다. 그리고 야신의 이름을 알고, 또 기억한다면, 우리 역시 그처럼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한다면 당신의 기회는 찾아올 것이고, 당신이 주전이 되는 그 날은 찾아올 것이니까요. 문제는 오히려 얼마나 강하게 마음을 먹고 꿈과 목표를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 것에 달린 게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 야신을 좋아하는 필자가 생각하는 한 가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하루도 힘내시길.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