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영화

샤이닝 (The Shining, 1980) 리뷰

시북(허지수) 2013. 4. 20. 01:18

 저는 사실 공포영화만큼은 잘 보지 못합니다. 심약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잭 니콜슨의 열연과, 스티븐 킹의 원작소설, 현대문명을 비판하는 시선의 스탠리 큐브릭 감독, IMDB 1980년 최고유명작, 세계가 절찬한 영화, 명성 높은 작품 샤이닝이었기에 용기 내어서 공포영화를 보게 되었지요. 심장 떨려서 고생했습니다. 하하. 영화를 보면서 저는 상당히 독특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회비판 영화가 아닌가 생각되었을 정도지요.

 

 가령 남자의 어깨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감이 주어져 있는데다가, 한 번 위험한 계약을 하게 되면 반드시 책임져야 하는 그 엄습하는 압박감, 아무도 도와주지 못한다는 단절감과 고립감, 그리고 그 속에서 서서히 미쳐가는 잭 토렌스의 광기. 정신줄 놓은 개인이 문제인가? 사회적 구조나 환경이 문제인가? 라는 질문으로도 들렸습니다. 안 그래도 긴장감 넘치는 영화였는데, 사회적 비명으로까지 느껴지자 이중적으로 고통스러웠던 짜릿한 경험을 선사해주었습니다. 계약직의 아내와 아들은 행복하기 어렵다, 가난의 미로에서 벗어나가 어렵다는 느낌이 강렬했습니다.

 

 

 잭 토렌스가 외딴 호텔의 관리를 맡게 된 이유는 슬픕니다. 표면적으로는 소설을 집필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이 있지만, 영화 본편에서 절규하듯이 말해주는데, 세차나 공사현장 등의 임금 낮고 고된 일을 하면서 먹고 살기는 싫다는 반항적 성격이 있습니다. 마땅한 대안도 없고, 일자리도 없었기 때문에, 생계를 해결하지 못한 남자는 거의 울면서 겨자먹는 심정으로, 호텔 관리인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굉장히 슬픈 것은, 이 호텔에 있음으로서 기본적 식생활과 주거가 해결되는데도, 불행이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왜일까 싶었는데요...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관계가 두절된 상태에서 사람이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변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바꿔 말하자면, 적절한 관계가 유지될 때 사람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여담으로, 잭 니콜슨이 훗날 열연하게 되는 버킷리스트 같은 영화에서도 노인이 우정을 만났을 때, 얼마나 활기 넘치게 살아갈 수 있는지 생생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영화의 잭 토렌스는 단절된 관계 속에서 소설의 영감 대신에, 오히려 미쳐간다는 것이 상당히 무섭습니다. 토렌스가 발빠르게 처리한 것은 비상 무전을 끊어버리고, 차의 동력을 끊어버립니다. 그는 두려웠던 것입니다. 미쳐가는 나를 두고서, 아내와 아들이 떠나가 버릴까 마음 깊이 걱정하고, 두려웠던 것입니다. 사회에서도 무용한 인간으로 거의 버림받았는데, 가족에게까지 버림받는다면 그는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정작 슬픈 것은 식구들입니다. 잭의 식구도, 또 그 오래전에 발생했던 전직 관리인네 식구도 불행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전직 관리인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딸이 이 쓸쓸하고 삭막한 곳을 싫어했고, 가장 입장에서는 그것을 견디지 못해서 미쳐버렸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은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 미쳐가는가, 그 점에 대한 시선입니다.) 다시 말해, 이 곳의 호텔관리인이 된 이상, 행복하게 살기란 매우 어려웠다는 점입니다. 모든 식구가 이 곳을 마음에 들어하고 좋아해야만 했는데, 정작 사랑하는 딸이 이 곳을 싫어하자, 관리인은 견디질 못합니다. 영화에서는 분명하게 나오지 않았지만, 호텔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이를 어길 경우 가혹한 대우를 받을 것은 뻔하기 때문에, 도중에 이탈하지도 못합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을 잭 토렌스는 계속해서 식구들에게 묻게 됩니다. 마음에 드는지? 어떤지? 아내와 아들이 괜찮다고 하자 비로소 안심하게 되는 모습은 상당히 슬프게 느껴졌습니다. 무기력한 가장이 보여주는 미안함이 묻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토렌스는 점점 광기에 휩싸이게 되었나요. 결정적인 대목이 나오는데, 바로 비난과 의심입니다. 아내와 아들이 드디어 자신을 의심하고, 싸늘한 시선으로 대하기 시작하자, 이 남자는 서서히 괴물로 변해갑니다. 억울한 나머지 홀로 골드룸에 들어가서 술을 청하는 모습은 우리 가장들이 갖고 있는 아주 슬픈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개그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피곤한 일과를 드디어 끝마치고 집에 들어왔더니 오직 키우는 강아지만이 반갑게 맞이해 주더라. 쥐꼬리만한 봉급으로 인해, 차가운 아내와 자식의 시선 앞에서 하소연 할 곳이 없어, 술을 벗하며 삶의 슬픔을 꾸역꾸역 견디더라. 한 편의 시같은 현대사회의 어떤 모습입니다.

 

 잭이 방망이를 휘두르는 아내에게 맞서는 장면은 한편으로는 공포지만, 한편으로는 절규로도 들렸습니다. 당신을 해치지는 않을꺼라면서, 잔혹한 말을 동시에 내뱉는 모습은, 이중적인 모순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당신에게 잘하고 싶었지만, 해줄껀 없고, 차라리 먹여살리는 고통을 없애버리고 싶다는 슬픈 절규. 상대적 빈곤을 계속해서 바라보다가, 마침내 그 마음까지도 황폐해져버린 한 인간의 비참한 내면을 까발리듯이 무섭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 표현적으로는, 쓸데없이 과격한 동작으로 무섭게 하는 기법이 없습니다. 다만 영화 내내 정적인 공포만이 가득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특히 공간을 비추고, 따라가면서, 소리만으로 긴장감을 조성하는 그 느낌은 가슴을 조마조마 하게 만듭니다. 잠깐씩 등장하는 장면들로 인해, 공포를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 역시, 이 영화가 높은 평가를 받는 까닭입니다.

 

 영화의 핵심 메시지는 절망 가득한 원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만 가득 하고, 여유를 잃은 채 놀지 못한다면,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일의 노예로 사는 공포. 아무리 몰두해도 돈이 벌어지지 않는 공포. 여기에 계속 시달리다보면, 사람이 미쳐간다는 것이 무엇보다 무섭고 쓰라린 대목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매우 상징적으로 마무리 됩니다. 여유를 가지고 뛰어놀 수 있었던 아내와 아이는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잭 토렌스는 미로에 갇혀서 결국 어리석은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영원히 쳇바퀴를 돌고 돌다가, 죽음 앞에 서는 잭 토렌스의 최후는 비참하면서도 불행합니다.

 

 지금까지 조금 다른 시선으로 느낀대로 리뷰를 써봤습니다. 만약 잭 토렌스에게 죄가 있다면 "노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죄" 라고 하겠지요. 책임감만 가득하고, 여유를 잃어버린 인간이 된다면, 그런 인생의 미래는 영화 속 주인공과 비슷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상당히 놀라웠습니다. 계층 이동이 불가능해지고, 가혹한 일을 하면서 보상은 낮고, 그렇게 계속해서 계약직으로 살면서, 주인에게 충성만을 강요받는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둘 중에 하나 아닐까요? 노예처럼 점점 바보가 되어가거나, 원망이 쌓여 점점 잔인하게 변해가거나 말이에요. 잭은 후반으로 갈수록 정신줄을 완전히 놓아버리는데, 걱정하면서 찾아온 요리사에게까지, 증오심으로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은 정말 슬펐습니다. 우리가 마치 편견으로 상대적 약자에게 무차별적 만행을 일삼고, 나와 다른 사람이라며 증오하고, 한편으로 너는 잘 산다며 욕설을 퍼붓는 모습과 겹쳐보이기까지 했습니다.

 

 분노가 차오른다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합니다. 행복하게 논다면 상당부분 스트레스가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므로, 놀이 문화가 없는 빡빡한 일상만 계속해서 반복된다면, 이것이 빨간 신호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 버는 것은 아주 중요하지만, 이것이 삶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의 작은 여유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좀 더 나은 삶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빨리 해결이 전부"고, 관계 맺고 노는 문화를 적대적으로만 본다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살아가는데 있어서 "여유"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 지치고 힘들 때는, 꼭 쉬도록 노력하고, 여유를 되찾도록 노력해야 겠습니다. 기계는 쉼없이 움직일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기계처럼 움직이지 못합니다. 억지로 일만 계속 하는 순간 바보가 된다는 경고는 오래도록 제 마음에 남을 듯 합니다. 공포 영화 좋아하신다면, 고전 명작 샤이닝 적극 추천합니다! / 2013. 04.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