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조선의 토지제도 변화 - 수조권의 소멸, 녹봉의 전면실시.

시북(허지수) 2013. 5. 14. 20:32

 아~ 왔습니다. 토지제도를 보는 시간.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즐길 수 없기에 피하고만 싶은 토지파트여! 그래도 천천히 조선의 토지제도 변화를 살펴봅시다. 쉽다고 계속 생각하면서, 접근한다면 그나마 조금 쉽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서론부터 바람잡는 중;;;) 어쨌든 고려 말 50만결의 경지 면적이, 조선 시대로 와서 15세기 중반에는 160만결까지 커질만큼, 조선은 농업을 중시하던 사회였지요. 중농억상의 조선이었습니다.

 

 조선의 성리학적 경제관의 특징부터 살펴봅시다. 키워드는 "검약" 입니다. 다른 말로, 절약이며 절제 입니다. 사치스럽지 않아야 한다는 거지요. 고려시대가 보여주는 화려함과는 상당히 지향하는 바가 다릅니다. 결과물로 예를 들자면, 고려 청자는 럭셔리하고 샤방샤방하고 척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데, 조선의 백자는 담백하고 소박한 멋으로 승부를 합니다. "멋에 대한 기준"도 다르다는 거지요. 지배층이 지향하고 있는 사회의 틀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화도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조선이 지배층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던 비결 중 하나는 바로 학문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검약 정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선은 중농억상, 즉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것을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성리학자 눈에는 상인들이 자꾸 아니꼽게 보이고, 쟤들은 쯧쯧... 이라며 천시하는 문화가 있어서 상업은 조선 전기에 발전 속도가 느렸습니다. 왜 싫어했냐하면? 물건을 팔다보면 아무래도 어느 정도 거품도 들어가고, 이른바 말빨도 들어가게 되는데, 이런 식의 장사 태도가 욕망을 드러내는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학문을 배움으로서, 끊임없이 욕구를 누르고 절제를 해나가야 하는데, 상행위는 돈맛을 알게 되어 인간이 탐욕스럽게 될 수 있다며 경계했던 겁니다.

 

 좋은 측면에서는 상당히 근사한 혹은 정신적인 가치관이며, 나쁜 측면에서는 그렇다고 상업을 천시하다니... 입니다 :) 그러다보니, 성리학자들은 활발한 거래보다는 "자급자족"을 중시하였고, 토지제도 역시 지주전호제를 선호 합니다. 이게 뭐냐하면 양반이 지주고, 농민은 농사를 짓는다 라는 질서와 서열을 중시하는 거지요. 농민들이 농사를 짓고, 그것으로 우리가 먹고 살고, 이런 구조를 이상적인 사회로 여긴겁니다.

 

 본격적으로 고려의 전시과와 조선 전기 과전법을 비교해 봅시다. 일단 공통점은 직역의 대가로 수조권을 지급한다는 거지요. (쉽게 말해 국가를 위해 일하면, 국가로 들어오는 세금을 관리가 대신 걷어갔다는 거지요. 수조권은 이름은 살짝씩 달라도,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제도였습니다) 여하튼 세습이 되지 않았고요, 또한 토지의 소유권을 주는 게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국가를 위해 공무원을 하면, 들어오는 세금 일부를 일한 대가로 줬다는 겁니다. (당시에는 아직 화폐가 발달된 사회가 아닙니다. 아까 봤듯이 중농억상이에요!)

 

 차이점도 있습니다. 고려시대 최종적으로 시행된 전시과는 현직에게만 지급하고, 전국을 대상으로 지급 했다는 것에 비해서, 조선 시대의 과전법은 상당히 다릅니다. 전, 현직 모두에게 지급하였고, 경기도 지역에 한해서만 (수조권) 지급됩니다. 고려시대 전국토를 대상으로 했다가, 나중에 대농장의 폐혜가 발생했었으니, 확실히 진일보한 방식인 것 같기도 한데, 나중에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예측할 수 있다시피, 관료는 늘어가고, 토지는 부족해져 갈테니까요.

 

 조선이니까 과전법을 이제 자세히 살펴봅시다. 도입배경은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을 세우고, 고려 권문세족이 누리던 경제적 기반을 뺏어오기 위해서 도입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당연히 수조권 지급 방식인 전주전객제 였으나~ 시간이 흘러갈수록 점점 시스템이 바뀌어 가면서, 마침내 16세기 부터는 수조권 방식이 완전히 소멸됩니다. 그럼 대신에 뭐를 주는가 하니, 지주전호제가 일반화 되고, 관리가 녹봉을 받게끔 바뀌어 가는거지요. 바꿔 말해, 소유권을 기반으로 토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사적 소유권이 발달되어 나갑니다. 관리들은 차츰 수조권 갖고는 안돼, 내 소유의 토지를 늘려서, 농민들에게 소작시키며 살아야 넉넉하지 라고 가치관이 바뀐거지요. 16세기는 또한 사림들이 집권했기 때문에, 지주전호제를 선호하기도 했습니다. 자급자족의 성리학적 토지관이지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변천과정이 있었으냐 하면, (솔직히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읽기도 버거운데 왜 이렇게 내용이 길어지는걸까요 ㅠ_ㅠ) 과전법은 고려말 공양왕 때부터 시행된 제도로서, 세습 불가의 원칙 을 가집니다. 전-현직 모두에게 지급되었으며, 경기지역에 한해서 수조권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지요. 특히 예외적 혜택으로 수신전과 휼양전이 지급되면서 현실적으로 세습화 가 되기도 합니다. 관리가 죽으면, 부인에게 "수신전"을 지급하면서 경제적으로 지원해주었고, 대신에 정절을 지키라고 권하는 셈입니다. 또한 관리가 죽었는데 아이들이 고아가 되었다면, 휼양전을 지급해서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와우~ 취지야 참 좋았지만, 관리가 죽어도 수조권이 반납이 안 된다는 중대한 문제 가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재정부족, 토지부족 입니다! 예컨대 공무원을 하다가 죽으면 연금이 어떻게 될까요? 현재에도 일종의 수신전 비슷한 개념이 있어서, 살아있는 아내 혹은 남편이 일정 금액의 연금을 대신 탈 수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런 제도가 있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옛날 제도를 너무 어려워하거나 짜증스럽게 접근하기 보다는, 현실과 비교해보는 여유도 필요합니다. 어차피 사람이 만들어 놓은 제도이고, 용어만 살짝 달라졌을 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야기로 돌아와, 이래저래 현실은 적자였습니다. 수조지가 자꾸만 부족해져 가고, 과전은 지급되고 회수가 안 될 때도 있고, 관리는 계속해서 임용된다면, 더 이상 혜택을 모두에게 줄 수 없습니다. 제도에 칼을 대고 개혁을 해야 하는데, 정말 쉽지가 않아요. 쉽게 말해, 지금 양반의 생계 터전을 손보려고 하는 셈인데 반발도 엄청날테고요. 누가 총대를 메고, 개혁할 것인가? 카리스마 작렬의 세조가 이 문제를 풀고자 나섭니다. 세조야 쿠데타로 집권했고, 비상시국이다보니, 강력한 왕권을 내세우며 의외로 토지개혁을 밀어붙일 수가 있던 겁니다. 균형과 안정의 시대에서는 괜히 손대기 버거운 일들을 세조가 시도합니다.

 

 세조는 토지부족 현상을 절감하며, 상당히 파격적으로 직전법을 시행 합니다. 현직 관료에게만 지급하겠다고 선언한 겁니다. 수신전? 훌양전? 그런거 다 없애버립니다. 외운다면 별거 없겠지만, 실제로는 꽤 엄청납니다. 메가톤급 토지개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제 현직에서 물러나면 먹고 살 길이 막힙니다. 공직하다가 죽는다면 가족 생계도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어휴, 세조니까 가능했던 개혁인지도 모릅니다. 이러다보니 관리들도 솔직히 불확실한 국가적 수조권 보다는, 특권 보장을 위해서 점점 사적 토지 소유권에 집착 했겠지요.

 

 명종 시대가 되면, 이제 관리의 수조권 제도가 사라집니다. 대신에, 녹봉의 전면실시로 전환 합니다. 이제 국가는 곡물과 옷감을 주기적으로 주면서, 비유하자면 관리에게 "매년 돈을 챙겨 주는 형태"로 변경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곡식과 옷감이 사실상 돈과 같았습니다) 암기식으로 간단히 정리하자면, 조선의 토지제도 변화는, 과전법 시행하다가, 토지부족, 세조가 직전법 개혁, 이후 명종 때 녹봉의 전면 실시, 따라서 수조권제도 소멸 이라는 흐름을 기억한다면 좋겠습니다. 고대 녹읍부터 출발한 수조권 개념이 1500년 이상 내려오다가 마침내 막을 내린거지요. 사적 소유권이 발달하면서 사회의 모습도 점차 변화해 가는데... 더 길어지기 전에, 다음 문서에서 경제 이야기 계속~

 

 영감 - 오늘의 짧은 영감은, 생각하는 힘을 기르자 입니다. 좋은 방법 중에는 질문 던지기가 있겠지요. "왜?" 라고 질문을 한 번만 더 해보는 연습이, 우리를 사뭇 성장시키기도 합니다. 명종 때가 되면, 임꺽정이라는 유명한 도둑도 등장하지요. 관리들이 얼마나 백성들을 괴롭혔기에, 임꺽정 같은 인물을 백성들이 응원했을까요. 지배층이라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국가의 보장이 약해지자, 더욱 약자들을 쥐어짜느라 심혈(!)을 기울였을테고, 그런 막돼먹은 세상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던 것이 혹여 임꺽정이 아닐까요?

 

 역사가 되풀이 된다면, 지난 날 한국이 기업들을 위주로 성장 정책을 펴나갔다면, 그 흐름이 조금이나마 약해지는 순간, 일부 (라고 믿고 싶은데) 기업들은 더욱 지독한 방법을 동원하든지, 약자를 가혹하게 압박하는 방법을 동원하겠지요. 그렇게 끝까지 자신들만의 이익을 보전해 가는 순간, 우리는 현대판 "을의 반란"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자본의 힘이 막강해져 가더라도, 영원히 세상의 왕노릇 할 수 없다는 것이, 어쩌면 인간을 겸허하게 만드는지도 모릅니다. 특권을 동경하지 않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꿈꾸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항상 응원합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