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정말로 좋아했던 영화 터미네이터 2 였습니다. 알몸으로 등장하는 호방한 첫 장면과, 소름돋는 마지막 명장면은 평생 잊혀지지가 않았지요. 20년도 더 지나서, 내용을 다 알고도 다시 본다면 재밌을까 싶었는데, 여전히 놀라울 만큼 재밌고, 긴장감 넘쳐서 깜짝 놀랐네요. 절륜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명작의 힘인가 봅니다. 한편, 단지 터미네이터가 너무 멋있고, T-1000 이 너무 무서웠던 어린 시절의 간단한 이해를 넘어서, 이제는 시간을 넘나들면서 고민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사라의 모습까지도 눈에 들어오더군요. 멸망이 보인다면, 가만 있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새삼 감동적으로 느껴집니다.
서론에 데이터를 덧붙이면, 이 작품은 IMDB TOP100에 들어가는 레전드 영화이고, 제작비만 당시 1억달러를 투입한 블록버스터 입니다.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하며, 수입은 5억 달러 이상을 벌었지요. 과학에 대한 비판적 접근 및 정치적 풍자도 가볍게 들어있는데, 심판의 날로 언급되는 8월 29일은 소련이 핵실험을 처음 성공한 날이라고 합니다.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한다지만, 오히려 인간을 위기로 내몰 수도 있다는 매력적인 세계관도 일품이지요.
이제 본격적인 내용 탐구로 들어가 봅니다. 미래에서 존을 구하기 위해서 투입된 기계 터미네이터! 등장부터 남다른 포스를 발휘해주며, 멋진 선글라스까지 장착하는 여유(!)도 잊지 않습니다. 고도의 기술로 제작되었고, 학습하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인간과 상당히 유사한 점도 있습니다. 따라서 영화가 진행될 수록, 차가운 언어만 사용하는 터미네이터가, 인간 감정을 이해하는 언어를 구사해 나간다는게 아주 흥미롭습니다. 저는 어떤 말을 쓰느냐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터미네이터는 기계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최적의 효율을 추구합니다. 존이 전화를 거는 장면을 떠올려 보면, 공중전화에 투입할 동전이 없다고 판단되자, 곧바로 동전이 있는 곳을 가격해서 부숴버립니다. "무조건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기계에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멋쟁이 꼬마 지도자(!) 존은 이런 방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보다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고, 과정 역시도 소중하게 생각할 것을 요구합니다. 불편하더라도 열쇠를 돌려서 시동을 걸고, 딱딱한 언어보다는, 상황에 맞는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라고 다독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이 가지는 강력한 장점은 "유머"라고 생각합니다. 상황을 풍자하고, 즐겁게 만들 수 있는 유머는, 기계가 감히 닿기 힘든 곳이 아닐까 싶네요.
재밌는 점은, 강인하고 딱딱하고 직설적으로 느껴지는 터미네이터가 오히려 후반으로 진행될수록 인간적인 매력을 선보인다는 점이고요. 악역 T-1000 은 부드럽고 자유롭게 변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잔인하고 비열할 수 있다는 점이, 오랫만에 영화를 다시 보는 저에게 상당한 통찰을 주었습니다. 자유롭게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라는 대목은 다크나이트의 악역 "죠커"를 연상시켜 주었는데요. 조금 차갑게 접근한다면, 변신의 귀재라는 것이 얼마나 남을 이용하고, 조종하는 데 능숙할 수 있는가 싶습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오늘날에도 중요한 것은 터미네이터 처럼, 자신이 원하는 일을 끝까지 완수하는 태도가 아닐까요.
이쯤에서 전설적인 명장면이 떠오릅니다. 터미네이터와 T-1000은 몇 차례 맞붙는데, 보통은 터미네이터가 도망가거나 숨어버리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이유는 너무나 간단해서 마음 아플 정도인데, 터미네이터가 기계적으로 판단해 보건대 이기기가 거의 불가능한 "신형 T-1000" 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T-1000은 몇 번이나 불사신처럼 살아나서, 관객을 충격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하하, 끝까지 책임을 완수하려는 데 있어서 T-1000의 집요함도 대단한 것이네요. 영화 극후반에 드디어 정면으로 싸워보지만, 결국 터미네이터는 팔도 잘려나가고, 엄청나게 얻어맞으면서, 전투불능에 빠져버립니다.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자신의 예측이 정확했던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과연 실패로 규정해야 하는가?
터미네이터의 눈에 다시금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남은 예비 전원을 가동시키는 거지요. 저는 액션 영화의 이런 장면들을 참 좋아합니다. 끝난 것 같지만, 아직은 아니다, 마지막 남은 한 방이 있다! 라는 거지요. 물론 영화는 기계의 부활을 알리는 매력적인 요소로 그려지지만, 사실은 기계만이 아닐 것입니다. 사람 역시도 유사한 "의지"가 있는게 아닐까요. 다시 말해, 인생에서 커다란 도전에 맞서서 엄청난 실패를 겪는다 할지라도, 그 일에 다시 또 맞설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최근 보았던 007 영화에서도 이 점이 저는 너무나 강렬했지요. 한 번 싸워보고 안 되면, 영원히 지배받고 종속받을 위험이 크다지만, 설령 안 되는 상황을 만나더라도, 다음에 다시 한 번 더 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터미네이터2를 보면서 이런 감성이 피어납니다. "한 번만, 온힘을 다해서 한 번만 더 해보자!"
그리고, 바로 이런 의지에 찬 인간이 있으니, "사라"입니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절박한 상황일지라도, T-1000 기계의 명령을 따를 것을 강인하게 거부하고, 끝까지 총알을 한 방씩 꽂아넣습니다. 될 수 있는데까지, 가능한 곳까지는 해보는 겁니다. 그 결과는 역시 실패였습니다. 오히려 T-1000의 유명한(!) 손가락 비웃음을 살 뿐입니다. 그리고, 이 방심의 순간이 괴물의 최후가 되었습니다. 참 시나리오 전개가 기막히고, 극적이라서 신나면서도 유쾌합니다. T-1000, 그 무시무시한 녀석은, 인간보다 우위에 있다는 자만, 기술이 낮은 기계를 부숴버렸다는 쾌감이, 순간적으로 그의 정신을 도취로 오염시켰던게 아닐까요. 그러다가 요즘 말로, 한 방에 훅 가는 겁니다 :)
결론을 생각하며 리뷰를 정리합니다. 우리는 종속을 거부하는 저항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깨달은 축복받은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꿈꾸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헌신하는 "멋진 인간"으로서의 태도가 요구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렇게 멋진 날을 맞이한다면, 이제 이러한 세상에서 너희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라고 격려하며, 아름답게 퇴장할 수 있다면, 이야 이거 정말 좋은 거 아닌가 싶네요. 작가 루쉰은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리라" 라고 말하며 다음 세대와 우리의 역할을 고민했습니다. 지도자의 눈을 가진 사람은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어쩌면, 터미네이터가 임무를 완수한 후, 스스로 사라지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이 세계가 행복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의식, 그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싸우는 의식, 적어도 우리가 기계의 심장 보다는 더 멋지게 살아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 2013. 05.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