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0월 13일 주일 예배
항상 기뻐하라 (빌립보서4:4)
우리 인생이 일생을 살면서 기쁜일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주의 구원받은 성도라고 하더라도 일생에 기쁨만 있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비오는 날도 있고 때로는 폭우도 만납니다. 그런데 약간의 보슬비나 이슬비가 내릴 때는 튼튼한 우산을 가지고 있다가 정작 폭우가 쏟아질 때는 우산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는 아주 빈약한 우산이라도 하나 있다면 큰 도움이 될겁니다. 그러나 하필이면 평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고물 우산도 하나 없습니다. 우산의 살대가 부러지고 우산 자루가 휘어서 금방이라도 우산의 기능을 못할 것 같은, 멋도 없고 오히려 들고 다니기 창피한 우산이라도 있기만 하다면 좋을 터인데 그런 우산도 없습니다.
게다가 가까운 곳에 비를 피할 곳도 없습니다.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려고 해도 야속하게도 그런 처마도 없습니다. 어떤 도움의 손길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솔직히 이런 경우를 충분히 가정할 수 있습니다. 그건 우리네 삶이 결코 순탄한 길만 계속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자녀라 해도 항상 기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야 기뻐하고 싶지요, 그러나 세상은 우리를 가만 두지 않습니다.
마치 나무는 가만 있으려 하는데 바람이 가지를 흔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세 번이나 계속해서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2:18과 3:1에 이어서 이제 본문에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너무 중요한 말이기 때문에 바울은 계속해서 거듭 거듭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주로 말미암아 장차 나타날 영광을 생각하면서 기뻐하라는 권면이며 또한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가운데서 기뻐하라는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우리의 현실이 어렵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주님이 결코 나를 이대로 두시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기 때문에 나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내가 결코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에도 나는 우리 주님의 역사를 믿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고 , 염려하지 않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기뻐하라고 말했다면 우리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 권고는 결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것이 못됩니다.
왜냐면 바울은 지금 결코 기뻐할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나는 염려하고 울고 기도할터이니 너희들은 결코 나처럼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은 지금 로마의 감옥에 있으면서도 사랑하는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죄없이 감옥게 갇힌 이가 기뻐하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보다 훨씬 사정이 좋습니다. 당연히 기뻐해야 합니다.
바울의 권면은 이어집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관용은 문자적으로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자신의 우위성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부드러움, 인내, 타당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넓은 마음으로 남을 품는 것’이란 말이고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아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관용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음에도 구원받았는데도 다른 이에게는 엄격한 규칙을 요구한다는 것이 모순이지요. 게다가 우리가 관용을 베풀어야되는 이유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주께서 다시 오시면 이런 것 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남을 용서한다면 주님 역시 나를 용서하실 것이야’
우리네 삶에서 돈 만원에 발발 떨었는데 수조원도 넘는 돈이 들어온다면 우리가 더 이상 돈 만원에 발발 떨지 않겠지요?
내가 그렇게 큰 은혜를 받았는데 기뻐서라도 남에게 조그마한 아량은 베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용해야 하고 이러한 우리의 관용, 성도의 관용을 모든 이들이 알 수 있도록 널리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선행을 널리 알리라는 말은 아니고 누구나 인식할 수 있도록 성도라면 관용을 베풀라는 말입니다.
“아, 그사람이 예수쟁이라서 그렇게 착하구나!” 이렇게 되도록 관용을 베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용을 베풂에 있어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모든 이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말합니다. 먼저 교회의 직분자들이 그리고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먼저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관용을 베풀어야 하느냐면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재림이 임박했고 주의 재림 때는 그가 공의로 판단하실 것이고 우리 인생의 감추인 죄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먼저 우리가 남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아버지의 아량을, 관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는 왜 이렇냐’면서 조급해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님을 원망하고 앙앙불락하지 말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내가 남에게 관용을 베풀면 우리 주께서도 나에게 관용을 베푸실 뿐만 아니라 그 관용에 대한 상급도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용해야 합니다.
바울의 권면은 계속 이어집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염려’란 말은 ‘문젯거리로 인식하고 근심하다’란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체의 논리적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서 그 상황을 우리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직 닥치지도 않은 장래의 일을 가지고 미리부터 염려한다는 것도 웃긴 일입니다.
오늘의 고난이 부족해서 장래의 일까지 지금 가져와서 염려합니까?
이거 정말 황당한 사람입니다. 이런 걱정을 기우라고 하지요.
안그래도 복잡하고 걱정되는 일이 많은데 장래의 상상이라도 기쁘고 즐겁게 하지 못하고 가장 안되는 쪽으로 장래의 일을 가져와서 염려한다고 뭐가 해결됩니까? 전혀요, 오히려 스트레스로 암이나 안걸리면 다행입니다. 우리의 생명고혈을 말리는 염려가 뭐가 좋아서 미리부터 사서 걱정입니까?
우리가 염려한다는 것은 사실상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과 똑 같습니다. ‘그도 어떻게 하실 수 없어!
나아가서 그는 존재하지 않아! 그래서 내가 기도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그러니 내가 어떻게든 해야 되는데‘ 이런 마음이기 때문에 내가 염려하는 것입니다.
장래일은 장래에 생각하면 되고 우리는 현재의 삶에 기뻐하며 주와 더불어 동행하는데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뭔가 엄청난 것을 요구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분은 단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만 요구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도 그가 나에게 건강을 주셨고
그가 나에게 물질을 주셨고 그가 나에게 시간을 주셨고 그러므로 그에게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땅에 떨어트리는, 주의 이름이 남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에게 조건없이, 자격없는 우리에게 댓가 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기 때문이지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서 살까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 아니 우리의 생각을 훨씬 넘어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우리앞에 놓여있습니다. 다만 아직 때가 차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제 뭔가를 해야 합니다. 뭐 해야 하느냐면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냥 아뢰면 안됩니다. 짜거나 원망하며 불평하며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함으로’아뢰는 것입니다. 누구에게요? 바로 우리의 하나님에게 아뢰는 것입니다.
그 아뢰는 수단이 뭐지요?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어려운 일을 해결하려면 기도하세요.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세요. 감사함으로 아뢰세요. 그러면 해결됩니다. 왜냐면 그가 바로 나의 주요 나의 아버지요 천지의 주재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아룁니까? 뭐든지, 모든 일을 다 아뢰는 것입니다. ‘이건 내가 하고 저건 아버지가 하고. 이건 아뢰지 않고 우리끼리 해도 충분하고’가 아닙니다.
아니면 ‘이건 아무리 기도해도 안될 거야’ 이렇게 우리가 미리 정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 해서도 안됩니다. 모든 일을 다 아뢰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아뢸 때
‘그것도, 이것도 안들어 주고, 도대체 당신은 뭐하는 분입니까?’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이렇게 원망하며 불평하면서 아뢰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함으로’ 아뢰는 것입니다.
본문의 기도와 간구는 비슷한 말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기도’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이며 ‘간구’는 ‘하나님께 필요한 것을 요청하며 구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아뢰야 하는 이유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뭡니까?
6절에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별내용이 없는 것 같지요?
그러나 이걸 헬라어원문으로 직역하면 ‘너희의 구할 것들이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지게 하라’라는 말입니다. 그래도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지요?
다시 자세히 보면 간구할 때 우리의 감사가 그 간구를 하나님께 아뢰게 하는 수단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아버지께 아뢰어지게 하려면, 상달되게 하려면, 하늘보좌에 울리게 하려면 감사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불평하며, 원망하며 정욕으로 구하면 우리의 기도가 안타깝게도 하늘보좌에 상달되지 않는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십시오. 주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이렇게나 중요하기 때문에 바울은 거듭 거듭 빌립보 교인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해라.
그리고 아뢰라는 말에는 지속적으로 아뢰라는 뜻이 있습니다. 한두번 아뢰고 마는 것이 아니고 생각날 때만 아뢰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감사함으로 아뢰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하는 기도와 간구’는 그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 한다는게 됩니다. 그러니까 초점이 하나님에게 맞춰진다는 거지요.
왜냐면 그는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나를 이 풍진가운데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며 끝끝내 나를 외면하는 분이 아니시라고 내가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분을 나의 아버지로 나의 주로 모실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래서 내가 기도할 때 감사함으로 아뢰는 것입니다.
나에게 항상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심을 내가 믿기 때문에 , 나는 도저히 모르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므로 나에게 이게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에 이걸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나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이미 아버지의 품에 있어서 세상이 나를 침노하지 못할 것이기에 더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로 세상과 비교하고, 몰려오는 파도는 보이는데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의 등뒤에 계신’ 내 주님을 내가 믿지 않는다면 나는 주어진 현실에 좌절하고 불평하며 원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러지 않는 것은 그가 나를 사랑하심을 내가 믿기 때문입니다.
내 주는 나를 이 어려움에서 들어서 나에게 영광의 관을 씌우시며 영광으로 옷 입히실 것을 내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주는 내가 항상 울고 불고 하는 것을 좋아 하시지 않습니다. 그건 아버지를 불신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기도밖에 할게 없어서 기도하는거나 마찬가집니다.
물론 기도밖에 할 게 없다고 해도 기도의 권능에 대해서 믿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습관적으로 기도하거나 아니면 옛 습관대로 그냥 하늘에 대고 자기의 푸념을 하는 식으로 기도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나의 주로 나의 아버지로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결코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바로 나의 등뒤에 , 바로 내 곁에 계시기 때문에 고래고래 고함을 지를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이런 어려운 때 나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는 능력있는 아버지가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이 너무 기쁘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겁니다.
회개의 눈물 좋습니다. 이제 회개했다면 주안에서 기뻐하십시오. 내가 아버지와 다시 연합됨을 기뻐하십시오.
자, 이제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글쎄 상당히 거창한 보상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러한 보상은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 보상이 너무 적어서 실망되십니까?
우리 생각에는 감사함으로 끊임없이 아뢰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시면 좋겠는데 이게 뭡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응답을 통해서 바울은 그 어떤 응답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강’이 가장 귀한 응답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강’이 제일 좋은 응답이라고요?
당시의 사람들이나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시대의 한국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보상인데요. 여하튼 찬찬히 그 표현을 살펴봅시다.
먼저 본문의 ‘지각’은 ‘냉정하고 침착하며 편견 없이 생각하며 판단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지각이 그 누구보다 더 뛰어나답니다. 그런 하나님의 평강은 일반적인 평강하고 다를까요?
평강은 평강인데 하나님의 평강이라.
그런데 이 평강이 그냥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킨답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말은 ‘망을 보다, 감시하다’란 뜻이 있는 군사용어입니다. 즉 우리가 감사함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아버지께 아뢰면 그가 우리들의 생각을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모든 걱정과 두려움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도록 지킨다는 것입니다. 즉 어떠한 어려움을 당해도 결코 염려하거나 불안에 떨지 않도록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감각이 죽어서 걱정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그 염려와 걱정거리를 다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내게 그러한 평강을 주시는 분이 바로 모든 사람들보다 지각이 뛰어 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훨씬 더 나에게 좋은 것, 내가 생각한 해결법보다 더 좋은 해결책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뭐든지 나의 기도를 들어 주는 것보다 더 좋은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나는 식견이 얕아서 이러이러한 응답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인간의 지식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방법으로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겨우 이정도를 원했는데 내 아버지는 지각이 너무 뛰어 나시기 때문에 결국 내가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당장 내 눈앞에 나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한 듯이 보여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나는 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셔서 반드시 나를 행복하게 해 주실 것을 내가 굳게 믿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평강으로 내 마음을 지키시는 것이 조금은 가치 있어 지는 듯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평강은 ‘에이레네라고 합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평정, 하나님 자신이 지니고 있는 평안,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 자체의 특징이 되는 평강으로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신뢰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까 평강이 보통 응답이 아닌 것 같습니다. 뭔가 더 가치 있어 보입니다. 자그마치 신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 평강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입니다. 인간이 처한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고요한 평정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합니다. 그건 내가 영안을 뜨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자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감옥에 있어도 나의 삶이 위태로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따위 물리적인 세상의 파도로는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어. 그 파도가 감히 닿지 못하는 곳에 나를 안전하게 품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내가 지금 느끼고 있거든! 바로 이게 바울이 말하는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나를 지킨다.’
이런 평강이 있기 때문에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기뻐하며 기도하면 평강을 보상으로 받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선물을 받는 주요한 방법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고 하지요? 여기서 ‘생각’은 지각, 정신의 산물로 인간 감정이나 의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카르디아’인데 이 말은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판단 또는 그로 인한 생각’을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지킨다는 말은 우리가 어떠한 경우에도 당황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가장 지혜로운 판단을 할 수 있게 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어때요? 이만하면 굉장하지요?
그거 몰라서, 그거 물어 볼려고 사람들은 죄많고 아둔한 인생들은 점장이와 무당을 찾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항상 감사한다면 그리고 아뢴다면 우리 하나님의 그 평강이 우리에게 임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가장 상황에 적절한 판단을 내리도록 해준다는 말도 됩니다.
이만하면 정말 굉장한 것이지요.
이정도면 세상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겁낼 것이 없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사기 캐릭터’입니다. 보통 인간들이 사기라고 할만큼 대단한 복과 능력을 부여 받는 것입니다.
이제 왜 바울이 모든 기도하는 것을 다 들어 준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지킨다고 했는지 아시겠지요?
그래요,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이 땅에 살면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세상의 어려움과 장애보다 더 신뢰하며 믿는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기뻐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거듭거듭 감사하고 기뻐하십시오.
항상 주안에서 기뻐함으로 우리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0월 13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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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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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상당히 흥미로웠던 내용인터라, 저는 과감히 요약 질문을 했었습니다. 기쁘게 사는 것 → 하나님께 구하면 → 최적의 판단이 된다 라고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와 반대로 접근하는 것도 생각해 봄직 합니다. 우중충하게 살다가, 하나님께 불평하고, 나쁜 판단과 결정을 해버린다면, 이와 같은 인생은 참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찬송가에도 있지요.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중략.
고백하자면, 저는 매일이 신나고, 눈 뜨는 게 즐거운, 그런 삶을 살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산다는 건 결코 좋은 일만 있는게 아닌터라, 일어나기가 피곤하고, 웃을 일이 별로 없는데다가, 사소한 일에 짜증부터 내는, 최악의 코스로 가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하고, 감사함으로 구한다는 것은, 아주 적극적인 삶의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 기억을 되짚어보니, 인생의 진기한 힌트가 하나 있습니다. 힐링계 책에서 마음 변화의 비결로 추천하던 방법이었는데요. 정말 별 거 없이, 매일 잠들기 전에 감사한 일을 찾아서 5개만, 아니면 3개만이라도 적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만 해보면, 삶이 긍정적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오래 전 일이었는데, 저는 실험정신을 가지고! 블로그에 비공개로 글을 써서, 매일 같이 실제로 적어내려갔던 적이 있습니다.
한 달 쯤 시도하고 보니, 정말 사소한 일로도 기뻐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컨대 오늘 저녁은 맛있는 음식을 잘 먹었다! 같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도 감사하고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커피의 풍미 앞에서도 감탄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은 뭐 재미있는 일 없나 하며 두리번 거리는 관점이 바뀌어, 즐거운 일은 다양하게 정말 많이 있구나 라고 놀라워 하게 되는 겁니다. 하루를 좀 더 즐겁게 맞이하게 되었고요.
일반적으로, 내가 무슨 일을 할 때 기쁜가? 를 고민하다보면, 자신의 적성을 발견한다거나,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 살면서, 기쁘게 살아간다면,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면, 우리가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내릴 리가 없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사는게 어렵지? 이렇게만 하면 잘 될꺼야 라고 유혹하는 손길을 당당히 걷어찰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을 기쁘게 사는 인생이란, 그 어떤 유혹도 넘어뜨리지 못하는 멋진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삶을 위해서, 즐겁게 노력하기를 다만 소망할 뿐입니다. / 2013. 10. 시북.